Thursday, January 16, 2025

[장미 1~3편 몰아보기] 북한 장마당 세대인 그녀가 한국의 경제력을 보며 충격받은 이유!


[장미 1~3편 몰아보기] 북한 장마당 세대인 그녀가 한국의 경제력을 보며 충격받은 이유!

대홍단 왕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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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04 views  Jul 2, 2024
북한 이과대학을 나온 수재 장미였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한국의 경제성장에 당황하며 겪게 되는 여러가지 사연들을 풀스토리로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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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그냥 부석사까지 알고 살아본 본 최근까지 진짜 장미 같은 예 어
2020년에 한국으로 온 장민 씨를
소개합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응단 왕감자 김수아 아 제가 이렇게
영상으로 보다 보니까 많이 까맣게 탔네요네 이번 여행을 좀 하고 와가지고 막 썬팅 한 것처럼 막
까맣게 탔습니다 공감이 넘치는 시청자분들은 아마 다 보실 거예요 이모가 저보다 훨씬 희다는 사실을네
오늘의 게시도 만만치 않습니다 벌써부터 치고 들네요네 우리 여러분들 다 아시죠 우리 장미양네 저희 사던
아가씨 길이기도 합니다 [음악] 가족이죠 그래서 우리 장미향이 어
오빠를 따라서 어머니와 동행하면서 여자 둘이서 압록강을 건너서 한국까지 왔거든요 2019년도 정말 코로나 착
직전에 정말로 우 장미의 이야기들을 오늘 들어보는
시간을 가질 건데요 장미의 소개부터 먼저네 안녕하세요 거침없는 장미입니다
저에 대해서는 익히 아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오늘 또 이렇게 모 채널에
어 사던 아가씨 자격으로 다시 참석을 했습니다 평시에는 그냥 둘이 야자
타임으로 막 들어가는데 오늘은 어쨌거나 우리 가족이 그 또 사도 나가시고 모니까 최소이 예의를
지키면서 오늘 어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 그래서 우리
장씨가 북한에서 이과 대학을 다녔어요 정말 아무나 갈 수 없는 것이죠 그런
이과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한국으로 어디까지를 결심했다 이제 일반적이지
않거든요 그니까 저는 한국의 대한 동경을 늘 갖고 있었죠
드라마라지만 에서 살 때는 그렇기 때문에 그 사회에 대한 동경이 현실보다는 좀 더 한상 쪽이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늘 동경하는 마음을 안고 살았다네 존경하는 마음을 안고 살다가
한국에으니 기회가 있어서 바로 잡았다 지금 그런죠 말씀인 거 같습니다
북한에서 이과 대학을 다녔다가 지금 현재 공부를 좀 하고 있잖아요 그 이과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할 때랑
한국에 와서 어 학원에서 공부를 보면서 뭐가 서로 달랐나 히 저는
대학교 공부할 때 힘들었죠 여기 와서 공부하는 거는 사실 그런 장기적이고
그런 공부는 아니기 때문에 별로 어렵지는 않아요 근데 그때보다
아무래도 머리가 많이 굳어지다 보니까 이해하는 거에 있어서는 당연히 제한적인 부분이 있죠음 그니까 새로
시작함에 있어서 어려움들이 좀 있었다 이런 거네요 그래도 뭐 대학교 다닐
그런 정도는 꿈이겠죠 아니 뭐은 아닌데 막 그렇게 어려운 보를 여태까지 해놓지 않아가지고 여기
한국에 와서는 어려웠던 시간은 없었던 거 같아요 제가 알기로는 여기 조카의
주경이가 남자 친구에게 전화를 했어요 코를 했어요 그래서 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고 막 영어를 써서 보내면서
자기한테 한국으로 왔으면 좋겠다라는 의향을 보였는데 장서방이 어 머뭇머뭇
하더니 너만 거기 가서 잘 살아라 하고 왔어요 그래서 그때까지는 우리 저화도 아 안 오겠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 이모가 비정한 이모가 아 무슨 일로 북한에 있는 남자 친구를 데려오려 그러나 그 벌써 네가 여기
온 동안에 다른 여자 친구도 또 친했을 거야라고 하면서 그냥 서술을 팍팍 쳤죠 그냥 제가 어 그런데 근데
알아요 서술을 쳐야지 두부가 제 맛이 나는 거를 와 역시 오늘의 터고 만만치 않습니다 근데 오느 순간에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는 거 그 주인공이 여기 있습니다 맞아요 제가 새언니한테 연락을 했거든요 오빠가
새언니를 만나러 갈 때 알았어요 근데 저는 안보 인사를 나누고 서로에 대한
리움을 나누는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돌아와 가지고 머뭇 머뭇거리면서
하는 말이 어 주경이가 우리 가족이 올 수 있으면 다 와라 하고 그런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너무 막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리는
거예요 그니까 가고 안 가고를 떠나서 어쨌든 그런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 심장 박동수가 빨라져요 근데 그때는 주경이 아고 장방의
사이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죠 그 음 아 그렇죠 당연히 새언니가 한국을 갔으니까 저희 오빠가 배신을
당한 거죠 새언니한테 어찌면 그래서 장리 씨가 오빠에게 뭐라고 말을 해서 오빠가 그럼 가자 어 그러니까 오빠가
와 가지고 머뭇머뭇 거리면서 하는 말이 다 오라고 한다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막 이상하게 심장이 빨라지고 저도 정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빠가 무슨 말을 했냐 저한테 그런게 궁금했죠 그 얘기를음 저희 또 부엌에서 나눠서 했어요 저희 집이 좀
크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아랫 방에 있었고 저랑 오빠랑 우방에 들어가서
얘기를 나누는데 저희 엄마가 쟤네 둘이서 뭐를 쑥덕 거리지는 생각을
하셔 가지고 우방에 따라 들어오신 거예요 또 저희가 자연스럽게 빠져 가지고 또 세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가
거실로 나왔다가 부엌으로 갔다가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다가 엄마를 따돌리면서 나중에는 그 긴 이야기를
부엌에서 했어요 부엌에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아 되게 미묘한
상황이었어요음 오빠는 당연히 나는 우리 가족 때문에 못 간다 내가 가장인 거를 네가 잘 알지 않느냐
가장이 어떻게 가정을 내팽겨치고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한국으로 갈
수가 있겠냐 이러면서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그러면 다 같이 가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
오라고 새언니도 제안을 했다면서라고 물어봤어요 근데 오빠가 그게 말이 그
어 환자 가는 것도 정말 어떻게 일이 전개될지 모르는 길인데 가족이 가다가
잡히면 우리는 그러면 끝장난다는 거예요 그리고 먹고 살기 힘들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잖아요 근데
우리는 그 상황이 아니었어요 그렇다 보니까 오빠의 그 걱정이 굉장히 컸죠
오빠는 당연히 안 가는게 맞다고 생각을 했고 그리고 이상적으로 생각을
해 봤던 오빠의 생각이 맞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근데 저희 아들의
날림이 그런 정상적인 사과를 하도록 하지 못하게 했죠 가자 가야 한다
우리는 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한 7개월간 얘기를 나눴던 거 같아요
그리고 오빠가 정말로 갔다가 붙잡히면 어떡할 거냐 그런 극단적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를 그 예시로 생각을 해 봐라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때 내가
했던 말이 그러면 오빠가 먼저 가고 내가 엄마를 데리고 뒤를 따르면 되지
않냐라고 했고 그 부분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나눴던 거 같아요 그다음에는 오빠가 다 계획을
했죠 아 이렇게 가면 좀 더 위험이 덜해지는 그게 어떤
방향이었고 먼저 가다 잡히면 우리가 어쨌든 북한에 집도 있고 돈도 좀
있으니까 오빠를 꺼내오는 방법이고 우리가 가다가 잡히면 오빠가 한국에서
오바하지 않은 방법이었어요 예 완전 치밀하게 작전을
하고 그렇게 하면 그나마 리스크를 좀 덜 수가 있으니까 한 방에 성공을
하지는 못할지라도 좀 마음이 안심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병운
사람들이랑 이게 생각하는게 보셔 저 다른 거 같긴 해요 저희는 떠나면 그냥 죽자 덕약 치고 나오는
것밖에는 알아야지 그러면 안 돼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나눴고 그러면이
사실을 새언니한테 알리자고 우리가 결정을 했어요 근데 그때 새언 가
알려준 전화번호가 있었어요 근데 오빠는 당연히 다시는 전화를 안 할 줄 알고 그 번호를 까먹었던 거예요
아 진 그니까 그 번호를 우리가 새 언니하고 연락을 취할 수 있는 한국 번호가 없었어요 아까 새언니 번호는
알고 있었는데이 새언니한테 전화를 하려면 중국 휴대폰을 갖고 있는 사람의
번호를 알아야 되는데 그 번호를 까먹었던 거예요 아 그러니까 그 중간자리 역할을 해줄 라인이 없구나
그게 없는 거예요 우리는 집이 한국하고 연결할 수 있는 수이 없죠
그래서 일을 어떻하면 좋냐 해가지고 제가 해산으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래서 그때 회산 와서 나
해산으로 들어가서 전화했어요 아 정말 야 청진에서 해산까지 오기 쉽지
않은데 그때 걸머지고 그거는 쉽지 않지는 않았어요 나한테는 진짜
그러니까 저희 같은 경우는 여행 증명서를 발급받는 거에 있어서 되게 쉬웠어요 그니까 사람마다 경우가 좀
다른데 저희 같은 경우는 좀 쉬운 경우였고 평 향 이라든지 이런데 가는 거를 굉장히 힘들어했다는 분들이 사실
많이 있잖아요 근데 저희 경우는 아니었어요 예 마음 먹으면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어 가지고 거기까지
들어가는 거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문제는 그 전화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는게 문제였어요 그지 아 그니까
들어가는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산이라도 간다고 해서 나 중국하고 통화 좀 하게 해 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때 과연 누구한테 찾아가면 내가
전화 통화를 할음 할수 있지라고 그 후보의 이름을 쫙 쏘던 거 같아요 아
나름 예 그니까 이런 상세한 얘기는 제가 임모 채널에서 지금 처음으로
하는 거예요 예 건너뛰면서 얘기를 했거든 그래서 아이 사람은 좀 아닌
거 같아이 사람은 확실치가 않아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마지막 최종 후보가
한 명 있었어요 그래서 그 언니한테 전화를 했죠 언니 놀러 가도 되겠냐
예 그때 말 안 했어요 내가 너한테 중국 전화를 사용하려고 가고자 한다
이런 전화 말을 안 했죠 예 역시 언니 아무 생각 없이 그럼 난
너무 좋지 놀라와 막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해산으로 들어갔어요 근데 갔는데 언니한테 전화가 없는 거예요
예전에 중국 밀스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나는 당연히 전화가 있을 줄 알았는데 언니가 중국 밀스를 그만 뒀더라 그요
그래서 전화번호를 다 폐기한 상황이었고 하지만 그 언니이 손으로
해가지고 다른 전화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
집으로 가서 새언니랑 전화를 했죠 근데 그때 새 언니가 너무 어 너무
좋다라고 했는데 때 문제는 엄마의 건강이 되게 염려스러웠다 봐요 어떻게
올 거냐 이런 얘기도 했고 어머님은 괜찮냐 저희 엄마가 내절 중이 왔었기
때문에 한국까지 오는 거에 문제가 없냐 이런 저런 질문을 했던 거 같아요 저는이 가고자 마음 먹은
사람이니까 다 괜찮다 어 우리는 완전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든 너희 부름에
다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얘기를 했죠 예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으로 돌아와서 오빠랑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고 그때 새
언니가 했던 말이 저희 데리고 오는데 한 사람당 2천 불이 준다고 했어요 그래서 가족이 오는데 6천 불이
든다는 얘기를 6천만 원 한국돈으로 6천만 원 예 그니까 6만 불 정도
네 그래서 그 정도의 구이 든다 그러면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안심하고
그 브로커를 믿고 따라와도 좋다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오빠가 그다음에는 막 공상의 나래를 펴는
거죠 야 가다가 일어나면 우리 한국에 있는 거 아니야 이거는 평양에 놀러가는 것보다 더 쉽네 이러면서
철이 살짝 없는 거죠 여기에 대한 얘기를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저희 오빠랑 저랑 그때 막 들떠 가지고 이런저런 얘기를
않았는데 오빠가 강을 딱 건너면 체 언니가 마중하는 거야 오빠를 오빠
멜코 어을 탈출한 것을 환영합니다 막 이러면서 마중할 줄로 알고 있었어요
남들은 말이에 총알이 빗발치는 속으로 피을 흘림이 건너고 있는데 지금 낭만에 꽃길을 갈 생각을 하고 있
그러니까 아예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오빠가 나한테 그런 얘기를 했어요 오빠가 아무리 늦어도 3일 내에는
너한테 연락을 보내 줄거다 왜냐면 오빠는 건너가는데 메시가 비행기를 타
하 거기 한국까지가 시 해가지고 내가 아무리 늦어도 너한테는 3일 이내에
연락을 보낼 수 있을 거야라는 얘기를 했어요 어 당연히 그게 맞는 거고 뭐
숫자로 계산을 해봐도 맞는 거고 예 그래서 오빠가 떠났는데 아유 우리
엄마는 평양에 놀러 가는 줄 알았 그렇지 엄마가 모르고 응 사돈 어머니 모르게 떠났다 하더라고 예 저희
엄마는 아무 생각 없었어요 오빠가 평양에 놀러 간다니까 친구 결혼 식이라서 간다 그렇게 뻥을 쳤던 거
같은데 아유 정말 감사하는 만약 그때 못만났으면 어머니가 얼마나 일생을
후회 하겠어 또 장사 방도 그러 지금 다 이렇게 그래도 그렇죠 그렇죠 아이고 어는 길에 정말 좀 험란한
시간이 있긴 했지만 다 와서 만날 운명이었나 보죠음 그러게 리 장미양
집에서 오빠가 먼저 떠났고 그리고 어머니를 딱 데리고 출발을 하잖아요 근데 그 재산이며 집이며 그거를
어떻게 다 남겨 그냥 두고 왔어요 어떻게 했어 왔는데 그때 굉장히 고민이 많았어요 그 이거를 팔아서 한
푼이라도 우리가 돈으로 바꿀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두고 떠날 것인가
생각이 많았었는데 처분하려면 처분할게 너무 많았어요 일단 뭐 집이 있었고
그리고 사업체가 있잖아요 그리고 우리가 뭐 빈 당에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건물이 있잖아요 근데 임대가
아니라 저희가 건물을 돈을 주고 샀었어요 그래서 북한에 건물도 있었던
거예요 근데 이런 것들을 팔기 시작하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어요
되게 복잡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기 양상 우리가
이거를 다 버리고 한국으로 가기로 결정한 거 아예 그냥 미련없이 두고
떠나기로 했어요 예 그런 식으로 하나두개 미원을 두다 보면 오히려
발걸음이 무어지 나중에는 우리가 왜이기를 가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단
말이에요 저는 한국을 너무 가고 싶었어요 왜냐면 해외 여행을 이렇게 다녀보는게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 해 여행을 한 번도 못 가보다 보니까 그거에 대한 환상이 컸던 거죠
공부할 때 평형에 있으면서 아 나는 해외 이행을 가고 싶다라고 생각을 해봤다고 당연하죠 그러니까 오빠는
공부를 잘해 가지고 저기 베이징에 나갔던 적이 있어요 프로그램 경연
때문에 근데 저 같은 경우는 물론 국내에는 자유롭게 다니지만 해외 여행을 한 번도 못 나가 봤잖아요 데
오빠가 다녀와 가지고 하는 말이 야 베이징이 엄청 발전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막 그 상상력이
나래가 치는 거죠 오빠 이야기를 듣고 예 저는 그런 공상적인 그런 부분도 굉장한
아이거든요 예 그래가지고 내가 뭐 외국에 간다면 뭐 내가 어쩐다 이런 가정법을 잘
써요 예 벌써 거기에가 있고네 마음이 항상가 있는 아이였던 거예요 근데
그럴 수가 없으니 항상 꿈만
꿨었다 그죠네 근데 오빠가 거기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하니까 받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오빠는 안 가겠다고 나는 가고 싶고 나라도 좀 보내 줘 나라도 오빠 안 가겠으
나라도 나라도 좀 가자 근데 세원이 입장에서든 오빠 보고 싶어서 오라는
거지 내가 뭐예요 우리 주경도 대단한 거 같아요 내가 그렇게 말렸어요 정말 한 었고
나는 이모가 말렸다고 하는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거는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적하고 또 우리
세대까지만 해도 여러분 북한의 남전 여비가 엄청 심했어요 그래서 과연 북한에서 익숙한 남자 더구나이 집은
제가 딱 한번 봤는데 너무 잘생기고 정말 상 남자였고 아 저 사람은 누군가의 정말 선에 의해서 저렇게
멋있게 성장한 집이 엄청난 그 부호라고 생각을 해 가지고 아 우리 학은 가당치 않아 그렇게 공주처럼
왕자 처럼 살던 사람이 여기 와서 타격을 받거나 어 경제적으로 이게 만약 안 된다라고 하면은 자괴감이
느끼고 저는 그런 자신감이 없어서 그만두라고 했는데 어 그래도 그걸 기고 이겨내고 데려와서 또 우리 장서
방도 너무 조공을 잘하고 요새는 정말 8년 차 임어 보다도 4년 차 우리
장서방 정말 저를 이렇게 저벅저벅 가리치는 거 보면서 야 정말 대단하고
우리 사던 어머니는 정말 큰 재산을 나오셨다고 어 너무 적당히 칭찬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런 때 칭찬해
보지 제가 칭찬을 해 그래서 처음에 해산에 도착했아요 브로커로 해가지고 해산에
어머니하고 도착하면서 그 같이 그 국경까지 다가올 때도 사실은 정말
탈북 멋지 않게 두근두근하는 순간이 두죠 그니까 그게 저는 여행 증명서를
뗐어요 근데 이게 엄마가 나이가 많다 보니까 엄마의 여행 증명서를 때기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 그리고 엄마까지 여행 증명서를 떼면 일단 오빠는 한국에 간 상황이고 정확하게는 그때
라오스가 거기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국경을 넘었잖아요 그리고 나도
여행 증명서를 뗀 상황이고 엄마까지 떼면 이게 기록이 둘 수도 있단 말이에요 내가 북한의 전산화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말 위험천만한 일인 거예요 그래서 나는
엄마는 여행 증명서 없이 해상까지 들어가자고 생각을 했어요 혼자 들어가는 거는 굉장히 쉬웠는데 여행
중명사 없는 엄마를 데리고 들어가는게 너무너무 어렵더라고요 저희가 가다가 단속을 당했어요 그래서 엄마랑 같이
강제로 그 기차에서 내렸거든요 근데 어쨌든 나는 여행 증명서를 갖고
있으니까 뭔가 조금 개운하지 않는데 승무 안전원이라고 하거든요 승무
안전원 입장에서는 뭔가 개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여행 증명서를 갖고 있으니까 여행 증명서라고 국가가
네가 해상까지 들어가도 좋다라고 공식적으로 황하고 도장을 박아 준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엄마는 여행 증명서가 없고 가족이 같이 동행을
하는 거니까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결정을 한게 어떤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고
그냥 엄마랑 저랑 기차에서 내려라 이렇게 여고를 했던 거예요 근데 제가
그냥 내려오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 그래도 그 위기를 대처했어야 어떤
말만한 남자가 한 명 있었어요 아 예 말많은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집이 배감 있가 응 배군도 배 도예요
배가에 그 사람이 집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뭐 얘기를 하는 와중에
들어보니까 뭐 해산으로 들어가는게 자기한테 일도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얘기들이 오고 갔어요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해서 제가 유심히 보고 있던 잘라 내리라는 말을 듣고 그 사람한테
찾아갔어요 같이 좀 내리자 그 그 사람도 당황스럽지 자기는 집까지 가려면 이제 기차를 타고 고장 더
가야 된단 말이에요 이씨가 당하 근데 내가 단 찾아가 가지고 우리 몰라요
생명 부지에 근데 저 좀 도와주세요 같이 저랑 내려줄 수 없을까요 이렇게
요구를 하니까 되게 놀랐던 거예요 그다음에 나는 딱 얘기를 했죠 뭐 지금 같이 내리면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의 돈을 받게 될거다 돈으로 꺼져야지 뭐 그런 상황에서는 이익의 호소를 해야 된단
말이에요 감정보다는 그 사람이 돈을 죽겠다니까 너무 좋다고 바로 내리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려가지고 얘기를 나눴어요 나는 여행 증명서가 있고 엄마는 여행 증명서가
없는 상황인데 우리 엄마를 회장까지 두려 보내 줄 수 있냐 같이 가면 당연히 좋겠지만 안 되는 경우는 따로
따라 가도 괜찮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 자기 두려 보해 줄 수 있다 어
그래 가지고 그때 50불을려고 했어요 어불도 사실 큰 거예요 큰 돈이지 그때 어불 큰 돈이에요 근데 내가
거기랑 뭘라 했냐면요 내가 그거에 딱 두 배 백구를 주고 거기에 핸드폰까지 주겠다라고 했어요 왜냐면 어차피
그때는 한국 핸드폰을 갖고 들어왔어야 되는데 나는 그냥 구경만 넘으면
핸드폰이 필요 없을 줄 알았어요 그러면 그 핸드폰을 버리는 니 그 사람한테 주는게 더 좋잖아요 그래서
내가 핸드폰까지 주겠다 어차피 심은 못 쓰더라도 단말기는 쓸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근데 제가 이사 13을 썼어요 평양 이사일 3이라고 비싼
핸드폰이었다 하니까이 사람이 완전 풍문을 하고 오버를 하는 거예요 어
당연히 나 드려 모줄 수 있 그람아요 너무나 큰금액을 했었 그리고
나도 그게 위험하다는 거를 알았지만 좀 더 우리 가는 그 길에 어
확실함을 부여하고 싶었던가 봐요 무 간다 무조건 가야 한다 예 어차피
가다가 잡히면 이돈 수도 못 할 거고 나는 좀 더 그렇게 돈을 퍼 주고라도
확실하게 해상까지 들어가고 싶었어요 우리 장미씨 마음 가 이렇습니다 지금
가라 뭐 하나 한다 그러면 얼마나 확실하게 역시 그 성격은 어디 가지
않네요 그래서 그 사람 따라 들어갔죠 그래서 해상까지 갔고 어 오빠하고
서식이 다와서 오빠랑식이 못 브로커 서식이 다 왔죠 그래갖고 그 들어가는
그때 한방이 펑펑 내렸어요 북한이 예 한방이 내렸는데 그때가 몇 월이
그때가 11월 17일 9년 11월 17일 이었어요 눈이 펑펑 내리는데
저는 되게 좋았어요 왜냐하면 축복처럼 느껴졌던 거예요 그 눈이 그니까
의미를 부여하게 타시죠 낭만이 아이콘이 그래서 아 우리가 가는 뒤를
축복해 주는가 보다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눈이 내리면 그 압록강을 건는
때 발자국이 찍혀서 먹 꿨는데요 그거를 해산에 들어가서 알았어요 예 건너려고 하니까 안
된대요 그래 저 왜 안 되냐라고 물어봤더니 발자국이 찍혀서 지금은 건내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와 축복인
줄 알았던 눈이 이렇게 내 발목을 잡을 줄이야 그래서 며칠 먹었겠네 며칠 먹었죠 근데 그때 4일 정도
묵었는데 한 열흘 정도 더 먹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럴 수가
없다 겠죠 왜냐면 가족이다 집을 떠났잖아 그리고네 어 머물러 있으면 안 좋지 예 오래
머무를수록 되게 불안한 거예요 그래서 안 된다 나는 당장 며칠내로이
압록강을 건너야겠다 빨리 대책을 마련해 달라라고 하니까 다른 브로커한
저희를 이관해 졌어요 오 그러면 우리 쪽에서는 못 건내 주겠다고 하니까
다른 쪽으로가 봐라 해가지고 다른 사람이랑 또 연결이 돼 가지고 그 사람한테 갔어요 그 사람은 뭐라고
할까 도강증이라고 하거든요 누군가의 보호를 받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다가 그 무차별적으로 정 건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정말 우리 운명을 이런 불안정
속에 맡긴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처음에서 배타고 좀
안전하게 어느 정도 커버를 해 주는 건데 무작정 가겠다고 하니까이 방법밖에 없어라고 하면서 스스로
알아서 강을 건너야 되는 길을 선택하 했던 우리 장 근데 그 내가 보기에는
북한에서 이렇게 중국쪽으로 바라보면은 그 이렇게 방파제가 되게 높거든요 거기를 어떻게 그래도 어머니하고 같이
넘어올 수음 있었어요 좀 막 그렇게 높지 않았던 거 같은데 그 사람이 안내를 해줬어요 아 그래서 다행히
그래도 높지 않은 것 예 넘지 않은 것으로 넘었고 그리고 거기가 해산해
이게 딱 중심은 아니었는데 그 중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였어요 예
아 그랬구나 그래 갖고 어쨌든 철조망이 해야 되는가 그런 것들이 다
두려워져 있는 그런 것이었어요 그데 다행이네 어떤 사람들 보면은 막 방파제를 넘으라고 그래가지고 몸이
올라가지 않아서 안을 쓰기도 하고 내가 보기에는 그런 사람들은 해산 시내에서 넘은 사람들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막 하수구 같은 그런데 들어가다 보니까 이렇게 쓰레기가 막 걸려 있어서
넘어오지고죠 어지죠 그래도 그래도 어머니 모시고 그나마 다행이네 역시 우는 좋아
그래서 중국에 딱 넘어왔을 때 혹시 뭐 옷을 갈아입으라고 주던가 뭐 맞아요 졌었어요 우리가 딱 넘어왔는데
그래도 그 사람이랑 같이 넘었단 말이에요 그거 좋았어요 그 사람이 한국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었어 가지고
넘자마자 바로 연락을 내서 차가 왔어요이 차가 왔고 사람들이 거기
안에서 엄마랑 나랑 옷을 갈아입으라고 이런 패딩까지 주는 거예요 압록강을
건넜으나 하이가 다 젖어 있을 거 아니에요 체 언니가 그 그 사람들한테
얘기를 할 때 나이 키는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165고 그래서 좀 큰 멋이 왔는데 우리 엄마 키는 얘기를
안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아마 뭐 어림짐작으로 샀던 거 같은데 우리 엄마한테 크잖아요 그 이게 패딩이
작아서 채워지지가 않는 거예요 했어 편안치 않게 왔어요
불편하게 옷을 입고 왔어요 그래서 거기서 어 해산해 떠나서 바로
그다음에 어디로 갔죠 회사에서 떠나서 중국 장백기가 아 장백 예 장백 차를
타고 어쨌든 한번 길게 머물렀던 것이 있는데 그것이 청도 있어요 아
청도까지 바로가 그고 명을고 거기에서 청도에서 일주일
생활했고 거기에서 다시 차를 타고 권명은 당연히
지나겠지 잘 모르겠고 라오스 산을 넘었죠 라우스 산 넘을 때 힘들지
마은 없이 아팠는데 어떻게 그랬 근데 우리가 넘은 산이 어렵지가 않은
코스였던 거예요 걸어서 시간이었어요 아 진짜 예 근데 뭐 어떤 분들이
얘기를 들어보면 시간도 사실 짧은 코스고 막 몇 시간을 걸으셨다
하더라고요 아니 멀게 말할게 없이 우리는 온밤 저녁 8시부터는 새벽 시까지 걸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저
주경이 같은 경우에는 걷지를 못했어요 애가 관절염이 심해 가지고 그래서 다리 하나를 질질 끌면서 정말 많이
울면서 남았어 저희는 조금 쉬운 코스를 예 그래서 국 남민 수용서
고쳐서 한국까지 왔고 여기 와서 사랑하는 아드님과 함께 또 이렇게 행복하 마가 고살
있 북한에 있을 때 장사해 본 적 있어요 나는 장사는 안 해봤고 영상
제작을 했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프로덕션을 운영에는 봤죠 그니까 사업을 했네요 저처럼 꼴목 장사가
아니라 장사나 사업이나 비슷비슷하죠 어쨌든 제가 했던 일도 서비스 업이고
근데 기술 업종이 서비스 업이다 보니까 그래도 조금 한마디로 말해서
코대를 세우고 사업을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너을 해봤어요 노동을
해봤어요 아 아 진짜 어디서 어디서 제가 대학교 다닐 때 평양식 대학생들로
건설 조직하라는 그런 명령서가 하달이 됐어요 그래서 갑자기 공부를 하다가
건설자 끌려 나갔죠 근데 많이 해보지는 않았고 흉내를 낸 정도라고
말할 수 있는데 힘들더라고요 덩이는게 참 힘들어요 맞아 사든 어머니가 눈에 그러셨거든요 아이들 전에 물한방울 안
무치고 정말 금미 오기와 키운 내 새끼들이다음 장은 동을 경험을 안
했을 것 같았는데 대학교는 역시 대학교에서 경험할 수 있었고 그리고
영천 동원이라는 것을 나가요 중학교 때 그래서 제가 농천 동화를 한번
나갔는데 농사일이 너무 힘든 거예요 그냥 고행이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었는데 막 손에 물집이지고 난리가 아닌 거예요 그래서 엄마한테 가서
다시는 나 엉천 덩어 나가기 싫다라고 하니까 그때부터는 아마 더어 엄마가
예 를 빼 주셨고 그때부터는 쭉 일을 안 했어요 순이 말하는 노동이라는
일을 안 했고 대학교 가서는 그냥 물 나르는 정도 그러던 우리 장미 양이 한국에 와서 제일 처음 했던 알바가
뭐죠 수시집 알바 수시집 알바를 하면서 제일 기억이 남는게 뭐예요 어 되게 어려운 매료를 쓰고 합성어를
많이 사용했던 걸로 기억이나요 그래서 그 어렵게 변 합성어를 오빠한테 와서 사용해 보기도
했었고 오빠 이런 단어 알아 어 그러면 아이 이런 야 지금 생각도
안나요 카슬라 아 카슬라 카스랑 테라 주세요 이런 말이더라 이제는 기억도
안나요 다 까먹었어요 너무 어려운 단어들이 조합이라 기억도 안나요 저도
횟집에 처음에 갔는데 다대기를 달라고 하더라고요 아이 다대기가 뭐지 다대기가 뭐예요 양념 양념을 거기
다대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와 다대기 다대기가 뭐지 하고 그냥 막 설레바리
고 그러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초밥집 알바를 열흘도 못 했어요음 많이 안 했네 그게 너무 힘든 거예요
내가 생각했던 그런 서빙이 아니더라고요 제가 와서 쭉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원래 그렇잖아요 우리가 하나원을 졸업하면 6개월 동안 일을 못 하게끔 해요 그냥 한국사에 대해서
저 더 잘 알라고 근데 제 마음이 그렇지가 않아 가지고 뭔가 하나라도
해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그때 첫집 알바를 했었는데 그때 알았죠 아 일은
나랑은 안 맞는 일이구나 내가 잘해낼 수가 없는 일이구나 사실을 그때
알았었죠 예 히집 다니고 그리고 그 다음에 했던 일이 뭐였죠 그다음에
했던 일이 영상 제작 일이었어요음 그 영상 제작 일은 제가 북한에서 영상 제작기를 했었으니까 그쪽 전공을 살린
거고 그리고 그 이후에 했던 일이 영상 제작하는 조금 동떨어진 일이긴 했는데 어쨌든 마케팅 관련 일이었고
그 영상제작 관련 일을 하면서 북한 사회와 한국 사이에서 추구하는 것은 분명히 달랐을 텐데 그니까 저희가
북한에 있을 때 조직 생활을 많이 안 해 봤어요 그렇다 보니까 조직문화에
대해서 잘 몰라요 아무래도 한국 사회가 조직 생활이 좀 더 빡센 거 같아요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해
보자면 한국은 굉장히 경쟁적으로 발전하는 사회잖아요 북한 같은 경우는
자본주의가 아니고 사회 주의다 보니까 막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요 예 그래서 나도 열심히 일 안
하고 저 사람도 열심히 일 안 하고 다같이 일 안 하는 그런 서인 거죠 그래서 예 시험시험해 이런 말을 많이
해요 이런 것만큼 벌수가 없으니까 없으니까 너무 빡세게 일하지 말고 시험시험해 템포 맞춰서 해 이런
분위기고 한국은 아니죠 나는 열심히 일하는 거 같은데 쟤는 열심히 일 안 하네 그러면 당연히 그 노임의 대해서
생각을 한번 해보고 예 뭐 불만을 표출을 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일할 수 있는 문화는 아니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쉽게 일할 수 있다는게 좀 가벼운 마음으로 이렇게
일할 수는 없었던 거 같아요 저도 정말 공감하는게 여기는 어쨌든 자본주의가 뭐 개인 이기주의가음 하다
보니까 정말 그 자기의 급여가 우리의 능력이네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거라서
다른 사람이 안 되면 내가 올라서는 어찌 보면 그러한 서바이벌 같기도 하고요죠
저도 힘들었어요 저도 한국에 올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국이라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고 죽자 생존인 사이다라
생각을 했어요 근데 와 보니까 그렇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치열하지 않아요
그니까 당연히 이런 복지 같은게 잘되어 있어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아요 어찌
보면 자본주의 저원 점과 사회주의 좋은 점을 이렇게 뒤섞어 놓은 거
같아요 뭐 덴마크 그런 사회 민주주의 라고 하잖아요 거기는 굉장히 세금을
많이 떼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한테 복지로 베푸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차원에서는 당연히 그런 거를 좀 사회주의 적으로 보는 거고 그냥 자기
능력에 맞게 돈을 벌고 그리고 그런 세금도 똑같이 네고 이런 거는 좀 더
자본주의 쪽에 근접되어 아무리 북한에서 한국에 대해서 많이 드라마를
통해서 버고 봤고 이런 우리 장미 씨도 한국에 와서 생활적인 거라던가 음 교통을 있었어 그 어떤 어
시스템에 있어서 되게 어려움을 겪을 것 같은데 대중교통을 처음 이용했을
때 저는 그 배리는 거를 몰랐어요음 그니까 북한 같은 경우는 대중교
통님의 정거장마다 의무적으로 썼거든요 근데 여기는 만일에 내리겠다는 사람이
없고 타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아요 딱 배를 눌러야만 세워 준단 말이에요 근데 저는 그거를
몰랐어요 그래 갖고 지금 다음 정류장이 저희 집인데
기사님 뭐하시는 거예요 저희 집에 세워 주셔야죠 기사님한테 기사님 저
아까 그 정류장에서 섰어야 됐는데라고 말끝을 흐리니까 아니 그러면 아가씨
배를 눌렀어야죠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알았죠 아 그래서 저 빨간 어
벨이 있구나 있었구나 그래서 알았죠 우리 북한 사람들은 그걸 스위치라고
하죠 빨간 스위치가 있었죠 오랜만에 북한하고 한국하고 다른
문화였고 제가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나는 우리는 같은 민족이고 같은
언어를 쓰고 당연히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사회에 대해서
이질감을 느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어요음 우리는 너무 비슷할 거야
드라마를 봤던 뭐 다 이해가 되고 그러니까 해 왔는데 여러 부분에서
차이나는게 몇 개가 있었어요 친구 관계도 그렇고 그냥 내가이 사회에 속
속해 있지 않는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냥 이방인이 느낌인 거예요 되게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다고
했잖아요 되게 북한에서는 제가 공부를 많이 한 케이스예요 뭐 여러 가지
책도 많이 읽었고 부모님이 영향으로 그리고 대학교도 가대 학교 갔으니까
또 열심히 공부를 했겠죠 예 그래서 되게 저 자신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리고 항상 열린 마음이었고 그 그쪽에서 나는 되게 생활로는
만족한 생활을 했던 거 같아요 아까 알바를 했었다고 했잖아요 어 서빙을
하러 가고자 하는데 사장님이 막았어요 장미 씨 가서 그 메뉴를 받지 말라는
거예요 주문을 받지 말래요 그래서 이유 이유를 물어봤더니 혹시 장미
씨가 사트리 쓰면 북한 사람이라는게 친하니까 그런 부분이 염려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아 이거 뭐지음 그니까 사람마다 생각하는게
달라요 근데 난 그분이 우려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당연히 우려할 수 있는 부분이고 북한
사람들이 굉장히 소수였기 때문에 그분은 충분히 우려를 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을 하지만 그분의 입장보다는
당연히 나의 입장이 먼저잖아요 나의 입장으로 봤을 때는 내가 누군가한테
가서 주문도 못 받는 아이가 되어 있거나 그러니까 나의 상태를 그 말이
딱 대변해 줬던 거 같아요 어 상처 해 보구나 어 그래서 아 뭐지 내가
누군가한테 가서 주문도 못 받는 아이가 되어 있네 오느새 그런 생각을 했었고 그리고 우리가 뭐 면접 같은
거를 여러 번 보잖아요 그러면 내가 북한에서 왔습니다 당연히 나의 얘기를
이렇게 듣다 보면 살짝 여기 한국 사람들이랑 말투가 달라요 사용하는
단어도 다르고 문법도 조금 다르겠죠 소에는 생각없이 얘기를 나누다가 어 근데 외국에서 오셨어요라고 항상
질문을 하셨고 나는 그때 당연히 뭐 외국이라고 뽕을 칠 도 있었겠지만
한국에서 왔다고 얘기를 했죠 그러면 들었던 얘기가 혹시 택시를 하나요음
택시 응 그 북한에 택시가 없다고 그렇게 들었어 가지고 자기가 물어봤다
나중에는 그렇게 질문을 해 주셨어요 그 택시라는 말이 외려아서 네가 이런
외려 아니냐라는 질문이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북한이라는 사회가 워낙에 거의
원시적인 사회로 여기에서 비춰지니 그 사회는 아마 택시도 모를
거야라는 선입 기원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또 아 내가 어쩌다 이런
질문을 받는 아이가 되었나 근데 그건 어쩔 수 없는게 많은 탈북민들 속에서 증언을 통해서
지금 사회에서 여러 가지 어 이런 데이터들이 돌아가고 있는데 장미
양처럼 평양에서 공부를 했고 평양을 진짜 제집 하들 듯 다녀다는 이런
사람들은 택시도 알고 정말 이제 무슨 말을 해도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음 있 저희처럼 시골에서 산 사람들은
전혀 택시를 타본 적이 없어요 그냥 먼발치에서 보고 아 저거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만 돈이 있는 사람들만
타는 거보다 나하고는 덩 떨어진 사람들이다 생각했고 이처럼 어 그러한
증언을 통해서 아마 어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부분에서는 좀 우리가 감안해야 되고서 그 만일
내가 네가 상대성 일원을 알아 그리고 요즘 새로 만들어진 브랜드인데 네가
루이비통이라는 걸 알아라고 질문을 했으면 저는 그 얘기에 상처를 안 받았을 것 같아요 당연히 그거는 모를
수도 있는 부분이고 브랜드라는 건 굉장히 많이 생겼다가 소멸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면 저희 자존심을 건질 수는 있었겠죠 근데 네가 가서 주문을 받지
마라 이런 얘기들은 확실히 나한테 타격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 당시에는
그래서 생각을 했죠 와 어쩌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니까 내가 그때 느꼈던 여러 감정들은 주변에서 저는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아무래도 여기 오면 이방인이고 너희 위치는 네가
생각하는 거 이하로 떨어질 거야 어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런 경고들을
가볍게 무시했죠 괜찮아 나는 그쪽 나라에서도 잘 살았고 여기 와서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을 했는데 왕따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런 말들이 익숙치가 않았어요 어쨌든 어 되게 낯설었어요 이모가 이해를
하실지 모르겠네 안타깝습니다 장의기를 들
음복 왔던 여기 와서여 사람들의 그런 헛된
발언으로 해서 정말 소외감을 느꼈고 어 상처를 받았다라고 하니까 아 정말
선배로서 어떻게 위어를 해줘야 될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요데
그렇게 생각을 해야지 안 그러면 뭐 어떡할 건데 그래서 내가 장서방 데려오겠다고 할 때 좀이 이었던거
북한에서 부러운 거 없이 살던 친구가 [음악] 음정이 게는 자 할까 무서웠던 거지
근데 너무나도 잘 이겨내고 또 우리 사 어머니가 또 자식들을 지금도 잘 케어를 해주고 있어서 그나마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한국에 와서 제일 행복했던 거 만약 집 거부한다면 어떤 걸까요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당연히
비행기의 몸을 싫었을 때 제일 행복하지 않았나라고 생각을 하고 여기 와서는 정말 다사한 일들이 있었어요
크고 작은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 행복한 거 같아요 정착기는 너무
정신이 없었고 지금은 좀 많이 행복한 거 같아요 제가 보는 장미에에서의
행복했던 순간은이 친구가 게임을 되게 잘해요 맞죠 게임할 때 나 게임 진짜
재밌게 잘하잖아요 카는 인터넷이 없잖아요 그래가지고 국구
인프라로 컴퓨터 스무대 연결해서 게임을 해요 예 그리고 내가 북한에 있을 때
PC 방을 자주 다녔
대연는 거의 리다 출근을 했던 거 같은데 정말 거기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죠 근데 대부분이 다 남자들이고 여자는 저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조금 북한에서 재미없는 시간들을 그
게임으로 보상 받으면서 보냈던 거 같아요 근데 지금 여기 한국에 왔어이 게임은 여기 와서는 당연히 막
20명씩 거기서는 아는 사람하고만 했다 면 여기는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계 각국에서 들어오는
거죠 그래가지고 뭐 중국 사람도 있고 일본 사람도 있고 영국 사람도 있고 다 있어요
어 어쨌든 재미있게 게임을 하고 있 근데 너무 빠져 있지는 않고 그렇죠
일하면서 간간히 하는데 제가 한 번씩 일 와볼 때마다 컴퓨터 원자는이 친구의 얼굴이 너무 흐뭇하고
만족스럽게 그래서 궁 그 커퓨터 그 게임에서 버니는 레벨이 어느 쯤인가요
그게 뭐 전설 불멸자 뭐 쭉 있어요 근데 어쨌든 그 가운데 레벨이에요 가운데 저희 오빠가 제일 상이 딱 그
아래 레벨이에요 아 진짜 장소 방이 근 게임을 많이 해서 받는 레벨인게
아니라 게임도 많이 하고 그만큼 승률이 높아야지 레벨이 올라가요 근데
저희 오빠는 그 두 가지를 다 했다 어 대지 못하는게 뭐야 

요즘 tvl 통해서 지금 뭐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판에서 지금 삐라를 막 몇만개씩 지금 한국으로 보내고 있 저
깜짝 놀랐어요 그러니까 삐라를 보냈다는 얘기를 유튜브를 통해서 봤어요 봤는데 오물 풍선을 보냈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고 야 정말 국가 망신을 시키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사실 우리가 삶에서 그 정도로 경우가 없지는 않아요 북한 사람들이 근데
어쨌든 북한 정권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이 존재를 가시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이런 외 교가 무슨 도움이 될까 외교도 아니죠 어쨌든
이런 보여주기식이 그 나라에 과연 누구로 돌아올까 생각을 했어요 저희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야 저 생각은 도대체 누가 했는지 그러니까 그
어물을 거기다 쓸어 담으라고 동원된 사람들이며 그 아이디어를 어물을
담아서 진짜 정말 상상이 안 가요 그죠 정말 내가 보기에 저는
북한이라는 사회도 경험을 했고 여기 한국도 경험을 했 잖아요 그래서 사람이 어디까지 어리석어 수 있는지를
알아요 그리고 어디까지 극단적으로 독해질 수 있는지를 알아요음 그러니까
가령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있어 여기 하면 정말 이거는
누가 봐도 거짓말인데 어 이거는 누가 봐도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얘긴데
아는 그 말에 소가 넘어가는 착한 사람이 있는가 반면에 우리 북한에서
봤잖아요 아무것도 아닌 사람한테 권력 하나 주니 니까 자기가 뭐라도 된듯이 악착스럽게 그런 사람들을 봤잖아요
그래서 나는 이게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런 양면성이 생각을 해요 우리는
당연히 선하게 갈 수도 있고 악하게 갈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항상 하거든요 그러니까 북한은 그 악한
적으로 가려고 마음을 먹은 거지 근데 사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고 우리는 다 회기의 성능을 갖고 있어요
너무 악하게 가면 아 이거는 잘못됐어 좀 선한 쪽으로 가야 돼 하고 너무 선한 적으로 갔다가는 아 이거는 너무
바 같아 우리는 조금 독해질 필요가 있어라고 다시 또 원점으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북한이 조금
강수를 두는게 아닌가 저는 그거는 정말 잘못된 생각이라 생각해요 어물
풍선은 차라리 걷기에 풍선을 날려보내대 좀 더 다른 그럴듯한
문구라는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예 그랬으면 점자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지 않았을까 근데 저는 오히려 김정은이 이번에 오무를 내려 버림으로 해서 음 급 근데 원 그
급 낱낱이 보여준 거 같고 북한이 지금 왕따 아아 이을게 없는 국가인
거예요 그 누구도 안 놀아주고 그쪽에서 그렇게 행보를 부려도 북한은
이을게 없는 국가에요 그래서 그런 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가시 하는 거죠 그 착하게 있어 봐요 가난하고
거의 문제가 있는 북한인 놀아주지 않아요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잊혀져 가는 거 예 그러니까 잊혀지지 않기
위한 일종인 무림인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장미은 북한에 있을 때
혹시 뭐 삐라 같은 거 본 적 있어요 나는 삐라를 본 적은 없는데 들었어요
저희 이모가 강원도 부근에서 살았었거든요 근데 그때 삐라가 굉장히
많이 들어왔대요 나한테 하는 얘기가 빵도 같이 들어왔었다는 거예요 근데
사촌동생에 있는데 항상 밖에 나갔다는 그 빵을 줘 가지고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이모가 가 많이 혼냈어요
왜냐면 어쨌든 족대 국가에서 보내는 물건인데 잘못 먹고 죽으면 어떡하냐
빵에 독약이라도 있을까 봐 예 그런 물자에 보약이라도 있을까
봐 원는 혼냈다고 하던데 어쨌든 여런 다양한 간식들을 많이 보내 왔다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리고 삐라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는데 삐라 이이 얼마나 좋은지 어 막 불에 태워도 잘
타지가사 그래서 저는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라라는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엔 종리 아아 아니 정리를 어떻게 하면 안타게 만들 수가 있지라는 생각을 막 했었던 기억이나요
나는 삐라를 본 적은 없어요 뭐 삐라에 어떤 문구가 씌워져 있다 이런 거는 혹시 문구가 씌워져 있는데
김정은이나 김씨 가문을 욕하는 문구라고 말을 했어요 근데 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았어요 북한 사람들도 그런 정도까지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김치를 역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고 너희가 김시 일가에 다 섞는거다 지금 뭐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체적인 삐라의
내용에 대해서는 저한테 이야기를 안 했었어요 장 씨 생각에는 북한 주민들이 그 삐라를 보면서 정치적
식견이 바뀐다고 생각을 해요 나는 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음 라라는게
일종의 선동 사업이 안이에요 그래서 적국에 대해서 잘 모를 때는 그런
것들을 줄려 보내면서 우리나라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다 너희가
생각하는 너희 나라 너무 안 좋은 사회야라고 말을 해 줄 수 있어요 그리고 이런 전쟁 상황에서 상대의
국가에 대해서 잘 모를 때는 이런 삐라가 큰 역할을 한단 말이에요 가령
선택이 기어에 놓여 있어요 a 선택할 것인가 B 선택할 것인가 정말 막 마음이 똑같아요 그럴 때 그냥 우리는
모르겠다 하늘에 맡기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마음이 똑같이
실렸을 때 그때 삐라 한 장을 딱 보면
음 지금 대한민국과 북을 봤을 때 제가 떠나올 때까지 북한 사람들의
민심이 이제 싹 다 바뀌었어요 한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나라인지 충분히 알고 있고 그리고 북한 사회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요 앎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우리 모두가
목소리를 높일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 거죠 예전이라면 목소리를 조금
높힐 수가 있었는데 이게 3대로 내려오면서 체제가 너무 견고해졌고
여기에서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가 우리 가문이 다 죽는 길이니까
사람들이 그런 대의보다는 자신의 안전을 선택한 거예요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단 말이에요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어 너희는 모음이야
너희는 정말 잘못 살고 있는 거야라고 말해 봤자 그 사람들이 누구 약올리나
누구 모르나 그러잖아도 지금 삶이 팍팍하고 어 앞이 없어서
죽겠구만 터치는 소리를 하지 이렇게도 들릴 수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삐라의 효능은 지금 상황에서는 잘
맞아 떨어지지가 않지 않나 근데 여전히 보내시는 분들이 있으니까 또
그분들도 그들만의 생각이 있겠죠 나는 그런 거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솔직히 내
생각은 우리가 피라나 이런 것보다는 오히려 KBS 방송이라 이런 걸
본다고 하니까 오히려 그럴 때 어 탈북민들이 이렇게 잘음 하는 모습들을
좀 더 시간을 늘려서 보여주면서 그거는 벌 수 있는 사람은 벌 수 있는 통로가 되니까 그런 방법으로
접근하는게 어떻겠냐 서로 양쪽에서 이렇게 강대강으로 가니까 솔직히 우리
주민들도 약간 좀 불안해 할 때가 있거든음 그런 다잖아 우리가 볼 때는
우리 대한민국이 치안이 너무 잘돼 있어서 어디다가 정말 핸드폰을 두고 가거나 컴퓨터를 두고 가든 누가 주어
가는 사람이 없을만큼 치한이 잘돼 있는데 외국 사람들은 우리 한국에서 안 살겠다 한다고 분당 국가고 계속
북한이 핵을 싸 올리니까음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몰라서 불안해서 안 살겠다 한다는 거지 이런 거를
생각해볼 때 정견 뭐 이런 거는 뭐 저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 어 정세를
좀 볼 필요는 있다 싶기도 해요 역시 mg 저나 생각이 비슷하네요
이런면에서 가인 거야 우리 장미가 볼 때 북한의 지들 사상적으로 많이
동요하고 있다라고 했는데 실제 그러면 북한의 반 가능성이 있을까 백성들
사이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가 없고 그런 것들이 일어나려면 공부해서 일어나야 돼요 공부를 통해서음 그니까
이게 제일 이상적인 시나리오가 어떻게 흘러가면 좋냐면 그까 사람들이 막
들고 일어났어 우리 이렇게는 절대 못 살겠다 해가지고 막 도끼랑 망치를
들고 그 분단선을 깨러 갔어요 그때 아마 당연히 군부에서는 저 사람들 뭐야 저
사람들 다 죽여라 군대를 풀 수도 있겠죠 근데 군대들이 마음이 바뀌면
바뀌면 바면 엄만데 저희 가족인데 마을 사람들인데
우리가 어떻게 저 사람들을 죽일 수가 있냐 우리 못 죽인다 이렇게 군대가 마음이 바뀌어 가지고 그 사람들이랑
한마음이 되면 그러면 그냥 끝난 거예요 그니까 그 단계까지 가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러시아가 무너졌아요
러시아도 그랬어요 그 반란군 제압하라 군대 보냈어요 근데 군대가 반란군을
제압하지 않고 발이랑 같이 다시 땅 몰고 왔던 거예 군대라는 거는 명령을
딱 따라야 하는 조직이 아아 그래서 좋고 말고가 없죠 당연히 명령을 따라야죠 근데 그 명령을 내리는지가
아니이 상황은 아닌 거야 보기에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고 하더라고요 
저 앞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 가족 그 우리 마을 사람들이라고 우리랑 같은 사람들이
저들을 죽여야 하냐고 누군가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다 마음이 바뀌었대요 그니까 충분히 그 마음이 바뀔만큼 상태가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을인지를 해야 된다는
거죠 군인들도 그래서 군인들이 사상적 동료로 해서 아 그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북한은 10년인 거
알죠 10년 내내 그 사상 교양 사업을 하는 거 알아요 누가 저번에
그러더라고 북한 사회가 지금도 번제할 수 있었던게 17살 어린 나이부터 데리고 가서 27살 30살 되도록
계속 정치사상 주의 되기 때문에 어 반란이 일어난 난다 이런 얘기 하더라고 근데가 제일 중요하죠 그니까
환란이 일어나려면 그렇게 일어나 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미과의 토크는 너무
난이도가 높아서 난 배우는 거 같습니다 아이 친구가
진짜 어디 가서 강연을 하고 한다면 얼마나 수준 높은네 강연을 할지 기대도 됩니다 

북한에서 책을 참 많이 봤잖아요 어떤 책들을 많이 봤어요 저는 자기 개발 책은 안 보고요 연애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근데 다행스럽게도 저희 엄마가 되게 엄격하신 분이에요 그래
가지고 제가 대학교 갔을 때도 연애를 할 기미만 보이면 전화를 하셨거든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전화를 해 주셨는데 제가 첫 연애
서서를 고등학교 때 읽었어요 그게 동백고 아가씨예요 동백꽃 아가씨라는
서소리 서를 읽었거든요 이모가 그 몽때 크리스토 백작 얘기를 했잖아요
그게 아빠 주마가 쓴 책이고 아들 주마가 있어요 아들 주마가 쓴 책이
동백고 나갔어요 동백고 나가라는게 한 귀족 년하고 창하고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에 진짜 신데렐라 아 아니 신데렐라 얘기도 아니야 이거는
마지막에 비극으로 끝나서 신데렐라는 아닌데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책을 보면서 막 훌쩍훌쩍 울고 있으니까 엄마가 공부를 해야
되는 방에서 울음소리가 나니까 무슨 일인지 하고 문을 열고 들어와 봤던 거예요 엎드려 있는데 계속 울어요
그래서 보니까 동백꽃 아가씨를 내가 읽고 있었죠 나는 너무 놀랐던 거예요
알잖아요 우리 엄마가 얼마나 엄격하지 그래 갖고 막 머릿속에서는 언급 변명이 떠올랐어이 어떻게
변명해야지 하고 막 생각하고 있는데 엄마가 아게 좋은 책이지 이러더니 나가시더라 그요 그니까 엄마가 문화
사이였으면 책계 안에서 말 열려 있었던 거야 우리 엄마가 그거에 한해서만 열려 있었어 가지고 제가
실정 경험을 없는데 이런 경험은 바삭해요 

근데 누가 그러더라고 책을 많이 본
사람들은 공산 세계에서의 그런 사랑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현실이 와닿지가
않는다고 그래서 쁜 사랑을 못 한다고 좀 그러긴 하던데 게리가 있으니까
그렇게 연애 서서를 참 많이 읽었어요 저는 그리고 연애 서서를 읽다가
처음으로 그런 유의 서설이 아닌 거를 읽었던게 Seven Habit는 책을 읽고 참
감명을 받았고 그리고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 Bird라는 책을 그때 읽었어요 어
앵무새 죽이기 어 왠지 그거는 앵무새는게 정말 우리한테 노래만 해
주는 착한 세거든요음 근데 사람들이 그 앵무새를 죽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그게
미국에서 흑인들에 대한 이런 막 중어 사상이 만연할 때 그런 인종 차별적인
내용을 다른 책이에요 예 그래서 그때 참 감명이 깊더라구요 
그래서 아
책이라는 거는 이런 식으로 우리한테 여러 가지 생각과 이야기거리를
주는구나 톰 아저씨 집이라고도 있어요 흑인에 대한 책 마음이 되게 아팠어요
그 책이랑 읽으면서 그러면서 생각했어요 그때 그게 몇십년전 몇백년 전 일인데 어머 나 북한에서 살아 얼마나 다행일까 이러면서 세상이 얼마나 바뀌지를
모르고 진짜 그 옛날 때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위안에 빠졌던 때도 있어요 

여기 와서는 와 책이 너무 많은 거예요 거기에서도 책을
남들보다는 많이 읽었죠 남들은 접해보지 못했던 책들을 읽었는데 여기 와서 너무 많아 가지고 어느 책부터 읽으면 좋을지 모르겠 거예요 

그래서 오빠가 추천해 준 책 몇 개랑 여가지
읽었던 책이 사피엔스라 책이에요 아 우리 인류를 칭하는 말이 호모 사피엔스
우리의 조상이 호모 사피엔스인 거예요 옛날에 직 행을 할 수 있는 족을
호모 자를 갖다 붙였어요 아 두발로 예 그래서 우리가 호모사피엔스가 된
거고 인간적인 우리만 있었던 건 아니에요 지금은 우리 밖에는 살아남지 않았는데 뭐 대안 데르 탈린이 또
다른 족도 있었고 쭉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만 살아 남았대요 근데
그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조금 급진적이지 한데 우리가 다 죽였다는 거예요 

그 책을 잠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면서 듣는 대자 감자의 책방
있습니다 
아 좋아요 좋아요 
마지막으로 구독자님들께 인사해주세요 인사요 아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저희 인모 채널을 시청해 주시고 저도 많이 많이
사랑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사실이 영상을 찍기 전에 이모가
저한테 했던 얘기가 있어요 구독자분들이 장미양 뭐 하고 있냐
한번 얼굴을 뵙고 싶다라고 말을 많이 했었다 해가지고 이 어 채널에 출연을
하게 됐는데 
일단 이모랑 함께 이렇게 보내는 좋은 시간을 가졌고 많이 많이
시청해 주시고 구독 좋아요 눌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여러분 다음에는 우리 장미양의 더 큰 손가락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주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음악]
둥글둥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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