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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pril 26, 2025

탈북민·찬양사역자·유튜브 강은정 TV 강은정 대표 < 2403 크리스찬타임스

탈북민·찬양사역자·유튜브 강은정 TV 강은정 대표 < 인터뷰 < 기사본문 - 크리스찬타임스

 입력 2024.03.01

탈북민·찬양사역자·유튜브 강은정 TV 강은정 대표

외증조 할아버지의 신앙유산, 저를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강은정 대표는 북한에서 살 때,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굶어서 돌아가시고, 12살에 밥 장사를 하는 등 모진 시련을 겪었다. 선전선동부 대홍단군 선전대 가수로 활동을 하다 2008년 23살에 친구와 탈북하여 중국에서 인신매매로 힘든 생활을 하다 친구와 헤어지고 다행히 지인의 도움을 받아 제3국을 통해 한국 입국에 성공하였다. 지금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찬양사역자로서 그리고 21만명의 팔로우를 가진 유튜브 채널 ‘강은정 TV’의 운영자로 활동 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된 계기와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전도한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는 중국에서 살 때, 불안과 많은 스트레스로 우울증이 심해 매일 울면서 지냈습니다. 제가 팔려 온 남편의 누이 되는 분이 그렇게 힘들면 원하는 걸 다 말하고 마지막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꼭 들어준다고. 왜냐면 제가 두만강을 건널 때 한 인민군이 내 귀에다 대고 너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고 한 말의 기억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 후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어느 날 꿈속에 어머니의 야윈 모습을 보고 정말 가슴 아팠습니다. 빨리 돈을 벌어서 북한으로 보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3가지 기도를 했습니다.

‘한국으로 가게 해주세요.’ ‘이 집에서 도망치게 해주세요.’ 그리고 ‘우리 부모님 굶어 죽지 않고 꼭 만나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고서 3일 만에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한국에 갈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지금 그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다는 느낌이 듭니다. 마침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한국 생활에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열심히 일해서 돈도 벌었습니다. 특히 지옥자 집사님이 저를 교회로 인도해주셔서 2014년도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어 결국 제가 중국에서 기도했던 세 가지 기도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탈북한지 4년 만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 언니, 그리고 오빠를 너무 감사하게도 한국에서 만났습니다. 모두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장 24절에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의 기쁨이 충만하리라.”이 말씀이 내가 하나님을 모를 때 하나님이 저에게 그 말씀을 이루셨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제가 우리 가족을 한국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가장 먼저 제가 해야 할 일은 가족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한국 생활을 하면서 저처럼 복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믿음을 가지겠다고 결심하신지 얼마 안 되셨고, 어머니는 이제 한국에 와서 조금 살만하니까 ‘모야모야’병에 걸려서 거의 힘든 상황이었는데 교회 인원 모두가 함께 눈물로 철야 기도회를 해주셔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수술하지 않고 약물 투여로 하나님이 고쳐주셨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북한의 현 상황과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북한은 단순히 사회주의·공산주의가 국가가 아니고 광신도의 우상 집단입니다. 김일성이 죽었어도 영원히 인민과 함께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민족의 태양이고 조선이 없는 지구는 세상에 없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 집단은 영적으로 개인 우상화에 빠져 있습니다. 북한은 생활총화라고, 김일성 말이 곧 생명 말씀입니다. 교회에서는 회개할 때 “하나님 제가 이런, 이런 죄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 제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 자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처럼, 북한도 똑같습니다. 북한은 생활총화 후에 소수가 모여서 자아비판을 합니다. 그리고 호상 비판을 무조건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17절에 우리의 기도에 대해 예수님께서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라고 비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열심히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라고 지금까지 3만 5천 명의 탈북민을 한국으로 보내셨는데 그들은 12제자처럼 모두 다 어디로 가고 없습니다. 어렵고 간절할 때만 하나님을 부르짖고, 사랑의 손길로 이곳에 오게 해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좋은 차, 좋은 집,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모두 다 흩어져서 지금은 크리스천이 천 명도 안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 용사를 택하여 미디안의 병사들끼리 싸우게 해서 결국 기드온이 승리하게 했습니다. 저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기드온의 300명의 그 역사가 탈북민 중에서 이루어져서 하나님이 언젠간 대한민국의 손에 붙이셔서 승리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공동체 기도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의 공동체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탈북민들은 앞으로 교회에서 남북의 평화통일이 이뤄진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강은정 TV에 출연한 아버지 강일규

북한의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예배 드리나요?

북한에서는 크리스천이 예배를 별도로 드리는 것을 제가 직접 본 적은 없습니다. 저는 한국에 들어와서야 탈북민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고, 북한으로 돌아가 예배와 기도를 드리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배가 고파 중국으로 넘어왔던 우리 탈북민들이 조선족 교회에서 한국 선교사님들과 캐나다 등 여러 나라의 선교사님들을 만나면서 하나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북한에서는 절대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한국에 오셔서 교회를 가보시고 기억해 내셨습니다. 우리 외증조 할아버지가 장로이셨다고 합니다. 해방이후, 북한의 교회가 초창기에는 남한보다 활동이 왕성했지만, 지금은 거의 막혀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면, 김일성이 대대적으로 기독교인을 숙청해버렸고 일부는 시골, 광산, 탄광으로 추방해 보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무서워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다보니 ‘복음은 매이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좋은 하나님을 누구한테 제일 먼저 전하고 싶은가요? 가족이잖아요. 가족한테 전하고 싶은데 북한의 집들이 연립 주택처럼 한 세대가 원룸처럼 붙어 있어서 몰래 예배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양강도나 함경북도 이쪽에 추운 지역들은 감자랑 김치를 보관하는 굴이 있어서 그 안에 들어가서 남이 못 듣게끔 주일 예배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소위 ‘지하 교회’라고 칭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기도제목은?

저는 남편과 2살 된 딸이 있습니다. 앞으로 둘째를 준비할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의 선한 도구가 되는 게 제 기도 제목입니다. 저는 유튜브 채널(강은정 TV)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영상이 세 번 정도 올려지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대한민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여행하면서 실제로 체험하고 느낀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많이 시청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유튜브를 시작한건 중국에서 신분없이 숨어사는 팔려간 우리 북한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물질이 많이 필요했거든요. 또한 우리가 복음에 더 시너지를 내기 위해서는 탈북민 신학생을 세워서, 모세 한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켰듯이 북한의 우리 동포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 100만원만 벌게 해주시면 십일조는 당연히 중국으로 보내서 탈북민 선교에 도움을 주겠다고 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을 사용하셔서 21만 명의 팔로우를 가지게 하셨고, 그 기도는 이루어져서 중국에 물질이 쓰여지게 하셨습니다. 중국내 탈북민들이 복음을 듣고 변화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산소망을 가지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러분께서 구독해 주시면 북한선교 영혼 구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강은정 TV를 구독해주셔서 북한선교에 동참해주시고, 분단된 남과북이 복음통일로 하나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의 유튜브를 통해 여러분이 몰랐던 북한에 대해 많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좋아하시는 성경구절과 재미교포 크리스천들에게 신앙의 격려 메시지를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가장 은혜가 되는 성경구절은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자유의 가치와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가 끝까지 지켜서 크리스천으로 생명력을 갖고 나갈 때 다시는 죄악의 굴레들이 우리를 덮치지 못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말씀을 너무 좋아하게 됐습니다. 

제가 2016년도에 찬양공연차 미국 LA에 방문했을 때 우리 재미교포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의 은혜속에 정말 열심히 사시는 것을 보고 큰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 재미교포 크리스천 여러분들께서는 지금 영적인 싸움이 치열한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자유가 없고 굶주리는 저 북한의 동포들을 기억하시면서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기도가 모이고 영적으로 합쳐저 여리고성이 무너졌듯이 함께 이겨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강은정 TV 유튜브 채널>
https://www.youtube.com/channel/UCA4PeNk6WdCypKUTsohmfvw

대담 노승빈 (크리스천타임스 한국후원회 회장, 백석대 교수)·정리 송점종 (크리스천타임스 한국후원회 부회장, 총회신학교 학장)

[통일신문] [1810 인터뷰] 강은정 탈북가수겸 방송인 -2008년 탈북, 아버지 2012년

[통일신문] “탈북민, 남한사회 잘 적응…통일후 북한주민 선진화 이끌 기수되길”



“탈북민, 남한사회 잘 적응…통일후 북한주민 선진화 이끌 기수되길”


[인터뷰] 강은정 탈북가수겸 방송인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10-18


장장 70년 이상 일당통치 구조의 북한체제가 유지되는 비밀 중 하나는 전체 인민에 대한 배급제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2천만 주민에게 당국에서 일일이 식량이며 생황용품 등을 나누어 지급한다. 북한당국은 대외선전에서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된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당과 국가 간부로부터 일반 노동자까지 여러 단계가 있으며 그에 따라 배급되는 물품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노동당과 내각, 행정기관, 권력, 외교, 대외무역, 교통, 상업, 외화벌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먹고 살만하다. 외국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들도 배고픔을 전혀 모르고 산다.

그에 비하여 공장·기업소의 제조, 건설 및 보수, 농·임업, 수산, 약초생산 등 분야에서 일하는 일반 주민들은 항상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에서 주는 식량배급은 1990년대 초반부터 완전 끊기었고 이후 닥친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지금까지 무엇이든 자체로 벌어먹고 사는 북한주민들이다.

도시와 지역의 발전과 현재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북한에서 ‘혁명의 수도’라 불리는 평양은 마치 꿈나라 같이 황홀한데 비해 지방은 30~40년이나 떨어진 낙후된 상황이다. 평양 거주는 차치하고 구경(방문)도 소원인 지방의 사람들이다. 얼마 전 탈북민 가수 강은정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을 소개해준다면…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3남매로 내가 막내다. 법이 없어도 살만큼 고지식했던 부모님은 평범한 농장원이었다. 2004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홍단군 기동예술선전대에 편입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초 김정일의 “감자를 흰 쌀로 바꾸라!”는 교시에 따라 10톤짜리 일제 이스즈자동차 80여대, 25톤짜리 중국제 동방화물차 20여대, 인민군제대군인 1000여 명이 양강도 대홍단군에 들어와 감자농장이 만들어졌다.

▶감자를 흰쌀로 바꾸라? 무슨 소린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주식은 쌀밥이었다. 김정일의 교시 내용은 감자를 많이 생산하여 그것을 수출하여 인민들의 식생활에 필요한 쌀이며 고기 등을 해결한다는 건데 현실은 달랐다. 외화는 중앙에서 일괄 취득하고 관리했으니 말이다. 타 지역 주민들은 ‘대홍단군 사람들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렇지 않다. 수출이 우선이기에 감자도 배불리 못 먹는 현지주민이다.

▶또 다른 풍경이 있다면 말해 달라

양강도 대홍단군은 북한에서 김일성 혁명사적지가 가장 많은 곳이다. 북한당국의 자료에 의하면 김일성이 항일운동의 일부를 백두산 부근에서 하였기에 그렇게 되었다. 북한에서 김일성 혁명사적지는 거룩한 성지나 다름없다.

사적지건설에 전국적 노력지원이 끊이지 않았다. 중앙에서 내 노라는 예술단이 거의 매달 대홍단군으로 와서 경제선동을 하였으며 일부 건설자들은 우리에게 조소를 보내며 ‘노래를 하지 말고 공사장에서 삽질이나 하라’고 했다.


▶예술선전대 생활은 어떠했나?

기동예술선전은 음악 및 방송설비를 차에 싣고 다니며 하는 활동이다. 공연은 건설 및 제조 현장에서 거의 매일 오전, 오후 각각 2시간 정도 한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항상 실제 같은 상황에서 연습을 맹렬히 한다. 1년에 한 번씩 당국에서 주는 선물은 중국제 이불이나 사탕 한 봉지 정도였다. 당시 내가 받은 월급은 1600원 가량이었는데 시장에서 쌀 1.5kg 정도 사면 아무것도 못사는 금액이다.

▶이후 어떤 일을 하였는가?

선전대 활동을 2년간 마치고 이후 대홍단군 발전소건설대에 입대하여 천수발전소 건설 현장에 동원되어 강제적인 노동을 했다.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6시 30분에 식사를 마치고 7시부터 현장 투입되어 일을 하였다.

산과 산을 뚫는 갱도굴착 작업인데 선두 그룹에서 발파로 진로를 개척하면 뒤에서 대원들이 광차를 동원하여 돌과 흙을 운반하는 것이다. 저녁 8시에 일이 끝나면 또 ‘충성의 작업’(야근)을 하니 그야말로 몸은 파김치가 된다.


▶힘들었던 작업은 무엇이었나?

추운 겨울철에 진행하는 갱목생산이다. 북방의 날씨는 살점이 뜯길 정도로 아주 맵짜다. 그래도 당(수령)의 명령이니 작업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그것을 아래로 내려 굴린다. 이후 수십 개의 나무를 인력으로 끌어 언 강을 건너 철길근처까지 갖고 와야 한다. 그것을 또르레(철도에서 인력으로 움직이는 광차)에 실어 돌격대 본부에까지 실어가야 완전한 작업이 끝난다.


▶돌격대 주거 환경과 의류 수준은…

산 속에 지은 돌격대 숙소는 흙집으로 항상 추운 시설이다. 유리창이 없어 비닐로 창문을 했으니 추운 바람이 방안에 들어온다. 세끼 주는 식사배급은 언 감자 삶은 것 2~3개가 전부이고, 소금 넣은 시래기 국이 있으면 고급이다.

돌격대원 옷은 3년에 한 번 지급되는데 그나마도 자가 부담으로 구입한다. 군복 색깔과 비슷한 돌격대 복에 계급장이 모두 붙었는데 이것도 어쩌면 군대 같은 규율을 성립시키고 그 만큼 노동에 대한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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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사회 북한에서 주민들은 기본 평상복(의류)을 배급받는다. 허나 최근에는 공급량이 절대 부족하여 인민복 및 노동복(작업복)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장마당(농민시장)에서 중국산 의류를 구입하고 있다. 일부 부유층은 외화상점 등을 이용하여 옷을 구매하기도 한다. 북한에서 의복은 1960년대 이후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양복과 간편복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초반 이후부터 대학생 등 젊은 층을 중심으로 청바지, 미니스커트 등 서양에서 유행하는 옷도 일부 들어왔다. 학생들의 교복은 3년에 한 번 정도 공급되어 왔으나 1990년대부터 서서히 유상으로 바뀌었다.

북한의 주택공급은 당국에서 일정한 기준에 따라 이뤄진다. 일반 주민들은 주택을 소유할 수 없으며 다만 이용할 수 있다. 물론 간부들도 마찬가지이다. 고급 아파트에서는 살 수 있어도 자기 집이 아니다. 따라서 주민들은 계층과 직위에 따라 규격화되어 있는 각 등급의 가옥이나 아파트 등을 할당받아 사용한다. 주택공급은 보통 한 직장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모범적인 사람들을 우선으로 한다. 주로 아파트와 3~5세대용 하모니카식 주택으로 되어 있다.


입주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층에 따라 그 형태 및 구조가 다르다. 일반 주민들의 경우 방1개, 부엌1개의 2칸 주택이 보통이고 두 가구가 함께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건설현장에서 사고도 많았겠다.

돌격대 시절 언젠가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던 갱도 공사장이 붕괴되는 사고가 났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겨우 찾은 시신은 3구뿐이었다. 전부 매몰되었고 가족 친인척들의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엄중한 상황이지만 국가에서 그 어떤 보상도 없었다. 물론 산업재해 보험이나 보상 같은 것도, 노동안전 교육 등도 없다. 그냥 당에서 내려오는 사망자 몇 명에게 차려지는 포상훈장 몇 개뿐이다.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났을 것 같다.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있은 일이다. 부실공사로 발전소 언제(제방)가 붕괴되었는데 그때 주변 있던 10여 명의 노동자들이 눈 깜짝 할 새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내려갔다. 작업을 중단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대책은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사고 다음 날도 ‘충성의 선서’ 모임을 시작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항일혁명선열들의 투쟁정신으로 살자”며 말이다. 돌격대 여단장, 정치지도원 등 간부들의 선동은 당의 선동이기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사고보다 더 무섭고 힘든 것이 뭔가?

힘겨운 일도 일이지만, 무서운 사고도 사고지만 그 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눈꺼풀이 내려올 정도로 힘든 연장 작업(야간작업)이고 배고픔이다. 또한 2~3일에 한번 씩 있는 사상학습, 정치 강연 그리고 매주 있는 생활총화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서로가 눈을 뜨고 한 주간 꼼꼼히 살핀 생활결함을 대중 앞에서 폭로하는 그야말로 인권침해의 격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북한 동기는 뭔가?

사회생활 5년간 하면서 북한주민들의 밑바닥 체험을 생동하게 하였다. 북한은 오직 김 씨 수령의 영광과 행복만을 위해 2천만 인민이 존재하는 국가이다. 수령 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인민이 자기의 행복과 권리도 없이 산다. 사람 사는 것이 동물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세상에서 더는 살고픈 마음이 없어
2008년 6월 두만강을 건넜다. 내가 태어난 조국이지만 눈물로 작별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 목숨 걸고 그해 12월 대한민국으로 왔다.


▶남한에서 처음 어떤 일을 하였나?

가장 먼저 돈이 필요했다. 이유는 고향에 남겨진 부모형제를 데리고 오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하여 서울에서 식당서빙을 하였다. 그 일을 하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가족을 데려 올 수 있었다. 처음 아버지가 무척 당황하면서 거절했는데 그걸 설득시키려 내가 중국까지 갔다. 끈질긴 전화와 설득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돌렸고 2012년도 온 가족이 무사히 한국으로 왔다.

▶현재 프리랜서로 가수 및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데 어떤지 궁금하다.

초기 탈북예술단체에서 활동을 하였다. 허나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더 나아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10년간 각종 공연행사에서 수 백회의 사회(MC)를 보았으며 TV와 라디오에 출연한 회수만 수십여 회째다.

대한민국 여러 분야에서 통일안보 교육을 수 백회 하였다. 교회에서 신앙 간증, 해외공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많은 사회활동과 교육을 하면서 유용한 통일교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

지옥이나 다름없는 북한에서 탈출했다는 것이고 이후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여기 남한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북한에서 고생을 하는 악몽을 꾼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내가 현재 자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형제 모두가 화목하게 남한에서 살고 있으니 이 보다 더 보람된 일은 없는 것 같다. 가족이 가장 큰 사랑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의 남북관계를 보며 차분한 생각이 든다. 통일은 남과 북의 경제적인 통합도 의미하겠지만 갈라졌던 남북의 사람들의 합침도 분명 중요하다고 본다. 남한에 들어 온 3만 탈북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먼저 온 통일이 틀림없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3만 탈북민과 잘 어울려 통일예행 연습을 성공적으로 하였으면 좋겠다. 우리 탈북민들도 힘들겠지만 남한사회에 잘 적응하여 통일이 되면 북한주민들을 선진화로 이끄는데 기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림일 객원기자

2311 강은정 평안도여자 ‘강은정TV' 대표 -림일작가의 통일인터뷰 -

림일작가의 통일인터뷰 - [림일 작가의 통일인터뷰] - 강은정 평안도여자 ‘강은정TV' 대표 -



[림일 작가의 통일인터뷰] - 강은정 평안도여자 ‘강은정TV' 대표 -


탈북여성 최고의 유튜버가 되기까지...



최근 구글(Google)에 의해 폐쇄된 북한체제 선전용 유튜브 채널 2개는 일부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취미활동과 위락시설 등이 등장해 일반 주민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폐쇄사회 북한체제의 겉모습은 ‘조선중앙TV’가 잘 전한다. 그것도 모자라 세계적 개인 홍보방송인 유튜브까지 진출하려는 노동당의 행태가 놀랍다.

지난 10월 24일 북한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일가족 4명이 목선(경운기용 엔진을 달은 길이 7.5m)을 타고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왔다. 뗏목 같은 목선은 아프리카서도 보기 드물다. 김정은 정권이 계속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주민들의 고통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올바른 통일교육 및 정보를 가지려면 미지의 세계인 북한의 겉과 속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조선중앙TV’가 못하는 북한내부 소개는 남한의 ‘탈북민TV’(유튜브)가 한다고 보면 맞다. 최근 20만 명의 유튜브 구독자를 보유한 탈북여성, 강은정 평안도여자 ‘강은정TV’ 대표를 서울시 양천구 모처서 만났다.





- 유튜브 강은정TV를 소개해 달라.

2019년 8월에 시작했다. 당시 탈북여성 유튜버가 3명이었다. 물론 생활유튜브다. 어느 날 출석하는 서울OO교회 모 권사님으로부터 “은정 자매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유튜브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하는 건의를 우연히 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여러 TV, 라디오 방송채널에서 MC로 활약했었다. 손에 든 휴대폰을 켜서 일상의 생활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다소 호기심이 갔다. 출석교회에서 북한선교를 하며 유튜브 수익금으로 중국 내 탈북자녀(고아)들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은 마음에서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다.



- 처음 올린 영상물 내용은.

내가 탈북한 노정을 상세히 설명하며 거쳐서 온 나라를 일일이 직시했다. 해당 나라 국기를 화면에 넣어주고 리얼하게 설명하는 영상물이다. 그리고 하나원에서 처음으로 남한TV를 보면서 했던 걱정이다. 그것은 ‘뉴스를 보니 범죄가 많은데 이런 무서운 남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는 걱정이었다. 구독자들의 반응이 대박이었다. 댓글에 “그런 범죄는 극소수에 달하니 전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다.



- 초기 조회 수는 얼마나 나왔는가.

유튜브 개설초기 제일 많이 나왔던 조회 수는 2천여 명이다. 주변에서 친구들이 다소 놀라더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냥 조급하거나 특별한 의식 없이 편안하게 방송을 했을 뿐이다. 아주 단시간에 게시물 조회 수가 급작스레 늘어난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내 아버지가 출연한 일상생활 내용(브이로그)의 영상이다.

우리 아버지는 평안도에서 평생을 사신 분이다. 북한 아버지들의 진솔한 마음을 구수한 입담으로 전하니 독자들이 너무 좋아했다. 하루에 4천명이 늘었다. 유튜브 시작 4개월 만에 구독자 3만 명 보유를 달성했다. 다소 빠른 기록이다.




- 특별한 게스트는 누구인가.

다양한 탈북민들을 많이 섭외하여 방송한다. 김OO 목사, 배OO 전도사 등이다. 모두 북송되어 북한감옥 수감 경력자다. 이들의 증언을 들으며 북한정권의 야만스러움에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생명을 한 갓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북한정권이야 말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 또 다른 감동이 있었다면.

탈북민 개개인이 대한민국에서 정착하며 느끼는 감정과 놀라움이 다르다. 그 많은 사람들의 사연 일일이 거론하기는 쉽지 않지만 공통점이 있다. 남조선이 이렇게 좋은 나라인줄 모르고 살았던 북한에서의 인생이 원망스럽다고 한다.

그리고 늦게나마 혹은 다행스럽게도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남한에 와서 국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산다고 하는 많은 탈북민이다. 그들을 보면서 내가 적지 않게 배운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하는 말인 것 같더라.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다.



- 가족(부모) 출연이 특이하다.

시청자들이 탈북민 유튜브 중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한다.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우연히 부모님에게 물어봤는데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 부모님이 연세도 있으신데 그래도 현장을 따라 다니며 촬영에 협조해주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은 태어나서부터 오래도록 부모님의 신세를 지는 것 같다(웃음).



- 가족 영상 의미는 뭐라고 보나.

사랑이 아닐까 한다. 가족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남이나 북이나 가족이 우선이고 중요하다. 시청자들은 우리 가족 출연 영상을 보면서 북한주민들의 생동한 사투리, 생활습관, 사문화 등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것이다. 북한TV서 비쳐주지 않는 일반 인민들의 진솔한 생활모습은 탈북민들의 증언이 가장 정확하다.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 우선은 인민을 잘 아는 것이다.



- 탈북 유튜브의 특성은.

종편TV 방송에서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 ‘모란봉클럽’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북한의 실정을 알려주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본다. 북한을 전혀 모르는 많은 국민들이 탈북민들이 출연하는 TV방송을 보면서 ‘북한에 비해 우리가 사는 남한이 좋구나!’ 하는 생각은 분명하게 가질 것이다.

종편에서 못 다하는 탈북민들의 생동한 증언과 남한 정착 생활토크를 탈북민 유튜브가 대신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탈북민 유튜브가 너무 많아져서 치열한 경쟁 속에 있거나 식상한 것도 단점이기는 하다.



- 탈북민 유튜버는 대략 몇 명인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약 200명 안팎이 아닐까 한다. 자고 깨나면 하나씩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웃음). 내가 시작할 때 5개 정도였는데 현재 수백 개 있다.
꾸준한 유튜버는 10여 명, 나머지는 1개 영상이라도 올린 유튜브다. 이 분야도 경쟁이 치열하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이 탈북만큼이나 힘들다(웃음). 최근 후원계좌 공지를 내렸다. 시청자들의 꾸준한 사랑과 구독으로 승부하겠다는 마음에서다.



- 고향은 어디인가.

1987년 평안남도 맹산군서 태어났다. 2004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강도 대홍단군 기동예술선전대에 편입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연소품, 음악·방송설비 등을 승합차에 싣고 다니며 근로현장을 찾아가 경제선동을 하는 활동이다.

공연은 각종 경제건설 현장에서 거의 매일 오전·오후 각각 2시간 정도 진행하였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선전대 문화회관에서 연습을 가열하게 한다. 1년에 한 번씩 당국이 주는 선물은 중국제 이불이나 사탕1kg 정도. 내가 선전대에서 받은 월급은 800원 가량인데 그 돈으로 장마당(시장)에서 쌀 500g 사면 끝이다.



- 또 다른 경력은 무엇이 있나.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원’이 되려고 선전대 활동을 2년간 마치고 이후 대홍단군 발전소건설대에 입대하여 천수발전소 건설현장에 투입되었다. 작업은 산과 산을 뚫는 갱도 굴착, 광차를 동원하여 돌과 흙을 운반하는 것이다. 저녁 8시에 일이 끝나면 또 ‘충성의 작업’(야근)을 하니 그야말로 몸은 파김치가 된다.

산 속에 지은 숙소는 흙집으로 항상 춥다. 유리창이 없어 비닐로 창문을 했다. 세끼 식사배급은 언 감자 삶은 것 2~3개, 소금 넣은 시래기 국이 있으면 고급이다. 돌격대원 옷은 3년에 한 번 지급되는데 개인 부담으로 구입한다.



- 탈북동기를 말해 달라.

사회생활 5년간 북한주민들의 밑바닥 체험을 생동하게 했다. 중국에 가면 돈을 벌수 있다는 생각이 불같이 들었다. 중국에서 딱 6개월만 고생해서 돈을 벌면 고향에서 생활이 나아질 거라고 판단하여 2008년 1월 두만강을 건넜다. 정작 중국에 와보니 중국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남조선(한국)임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북한에서 너무나 세상을 모르고 살았음을 깨달고 사람답게 살고파 그해 12월 남한으로 왔다.



- 처음에 어떤 일을 하였나.

우선 돈이 필요했다. 이유는 고향에 남겨진 부모형제를 데리고 오겠다는 결심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하여 식당서빙을 했다. 그 일을 하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가족을 데려 올 수 있었다. 처음 아버지가 무척 놀라며 거절했는데 끈질긴 설득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돌렸고 2011년 12월 온 가족이 무사히 한국으로 왔다.



- 정착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는가.

전문 탈북예술단체서 한동안 활동을 하다가 어젠가부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15년간 각종 문화예술 공연 행사에서 수 백회의 사회(MC)를 맡아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다. TV와 라디오에 출연한 회수는 수백여 회. 이 지면을 빌어 저를 섭외해주시는 많은 행사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여러 분야서 통일안보 교육을 수 백회 했으며 종교단체 신앙 간증 등 다양한 분야서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다. 많은 사회활동과 교육을 하면서 유용한 통일교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고마운 분이 있다면.

경기도 이천에서 ‘이천쌀 정미소’를 운영하시는 모 사장님이다. 지난 2021년 가을 코로나가 한창 왕성하던 시기, 유튜브 영상을 찍으려 현장을 갔었다. 초면인 나와 가족(부모)을 따뜻이 맞아주었고 촬영의 편의를 위해 농기계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북에서 온 ‘우리 동포’라며 살뜰하게 맞아 혈육 이상의 마음으로 대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지금도 친척처럼 서로를 오고 가며 가까이 지내고 있다.



- 예비 유튜버들에게 하고픈 말은.

유튜브가 크게 자본(돈)이 들지 않고 쉽게 시작하는 장점은 있다. 돈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하면 나중에 실망이 클 것이다. 대중에게 공감을 주면서 그들과 한 식구가 되어 편안하게 소풍을 하듯 즐겁게 방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튜브는 보기와 다르다. 시청자들은 편하게 보는 그 영상은 제작자들이 꾸준한 창작의 결과이다. 촬영, 편집, 콘텐츠 개발, 제목설정 등 독한 연구의 노력을 기울이는 분야다. 그런 수고가 없다면 결코 대중의 신뢰를 받는 유튜브는 어렵다. 세상사는 사람의 진솔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생활유튜브의 생명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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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 탈북민의 삶에 귀를 기울이다...유튜버 강은정씨 2310서울평양뉴스

[나의 길] 탈북민의 삶에 귀를 기울이다...유튜버 강은정씨 < 나의 길 < 이슈+ < 기사본문 - SPN 서울평양뉴스



[나의 길] 탈북민의 삶에 귀를 기울이다...유튜버 강은정씨
기자명 박지현 기자
입력 2023.10.23 

유튜버 강은정씨(사진=강은정씨)

“안녕하세요! '강은정 텔레비죤'의 은정입니다!”

늘 밝은 미소와 기분 좋은 하이톤으로 인사를 건네며 방송을 시작하는 평안도 출신 유튜버 강은정씨다.

강은정씨는 다양한 배경과 직업을 가진 탈북민들을 만나 직접 그들의 삶을 체험하고 생생하게 그들의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이렇게 유튜브라는 플랫폼에서 탈북민들의 삶을 공감하고 나누며 마음 속에 남은 응어리들을 해소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간지 어느덧 5년차다. 5년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방송을 통해 북한에 대한 오해를 풀고 북한의 실상을 알아가고 탈북민들의 삶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SPN 서울평양뉴스'는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강은정씨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탈북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다

“고난의 행군 시기 때 보낸 빈곤한 어린시절이 아직 생생하다. 굶어서 쓰러진 적도 있고 12살부터 밥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노래에 재능이 있어 당 선전선동부 대홍단군 기동예술 선전대 가수로 뽑혔다.

2008년, 23살이라는 나이에 친구와 함께 탈북했다. 동네 언니의 권유로 탈북 길을 올라섰다. 인신매매로 팔려 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중국에 도착하고 인신매매로 친구와 헤어지게 되었고 다행히 도움의 손길에 닿아 도중에 도망쳐 나와 제3국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는데 성공했다.

한국에 와서 북한에서 예술 활동을 하던 분들과 함께 북한 문화도 알리고 남북한 문화적 이질감을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공연을 펼치며 활동했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해 신분도 없이 숨어 살고 있는 수많은 탈북 여성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 여러 차례 경험했던 인신매매를 떠올리며 탈북 여성들과 그들의 2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어려움에 처해있는 탈북 여성들과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돕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마침 그때 주위에서 목소리가 좋다는 말을 많이 해줘서 유튜브를 통해 아이들을 후원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유뷰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단순한 생각으로 유튜브를 찍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대한민국에서 정착하는 이야기, 북한에서 살았던 이야기, 대한민국의 산업 현장이나 농촌 탐방 등 다양한 콘텐츠에 도전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탈북민들을 차례대로 초대해서 그들의 탈북 스토리와 대한민국 정착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영상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들이 이야기할 때 굳이 질문을 많이 하진 않는다. 그냥 초대해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들을 듣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 보면 그들도 부담 없이 그 삶에서 우러난 이야기들을 술술 말하곤 한다.”



강은정씨와 강은정씨 아버지(사진=강은정TV 갈무리)

▶ 이야기로 전해지는 선한 영향력



“너무 감사한 일은 유튜버라는 직업이 적성이랑 딱 맞는다. 북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탈북민들의 이야기가 너무 공감된다. 또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물론 빙산의 일각이지만) 그 체제 속에 살아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 내고 있다. 정말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어서 감사하다.

게스트 분들이 겪은 에피소드들을 들을 때 너무 재미있다. 예를 들면 여성들 같은 경우에,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생리대를 사용하는 썰을 들으면 웃프다(슬픈데 웃기다).

댓글 읽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은정씨 진행이 너무 좋아요’, ‘편안해요’ 등 이런 댓글들도 좋지만 ‘북한 사람들도 똑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우리와 함께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통일이 필요한 것이다’라는 댓글을 봤을 때 너무 뿌듯했다. 이런 댓글들이 가슴에 와닿는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 모든 희망들이 가로막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리고 ‘대한민국에 태어난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 이 나라가 얼마나 소중하고 내가 지금 처한 이 상황이 힘들지만 북한 사람들이 겪는 데에 비하면 내가 겪는 어려움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맙다’는 댓글이 있었다. 제가 전하는 북한의 현실과 탈북민들의 이야기가 어떤 분들에게는 삶을 더 소중히 여기는 계기가 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뭔가 한 생명을 살린 느낌이었다.”



강은정씨의 농촌 체험 영상(사진=강은정TV 갈무리)

▶ “초심을 돌아보면 늘 답이 있다”

“한 동안 창작의 고통을 느꼈었다. 어느 순간 그렇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할 때마다 유튜브를 시작했던 시발점으로 돌아가면 늘 답은 있었다. 유튜브가 이렇게 성장할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열심히 했을 뿐인데 많은 분들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러면서 책임감도 같이 느낀다.

탈북민들도 강은정TV를 많이 시청해 주고 계신다고 알고 있다. 탈북민들은 방송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되찾으며 더욱 열심히 살게 된다고 한다. 남한 분들도 탈북민의 삶을 더 알아가고 더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해주고 격려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통일 관련 공연 중인 강은정씨(사진=강은정씨)

▶ “북한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해주시는 마음에 감사”

“어쩌면 짧고 평범한 삶일 수 있는데 많은 분들이 저의 과거를 함께 아파해 주시고 공감해주셔서 힘이 된다. 북한에서의 고단한 삶, 탈북의 기구한 과정, 중국에서 세 번의 인신매매 등을 겪었다. 고생 끝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받아줘서 잘 정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열심히 돈도 벌고 가족들을 다 모셔올 수 있어서 더 없이 감사하다.

구독자님들이 이런 삶을 눈물로 바라봐 주시고 응원해주셔서 늘 감사한 마음이다. 또 저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해 주시는 그 마음에 감사하다. 앞으로도 진솔된 이야기를 전하며 북한과 대한민국의 체제 차이를 알리기에 힘 쓰고자 한다.”@



박지현 기자1551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