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민, 남한사회 잘 적응…통일후 북한주민 선진화 이끌 기수되길”
[인터뷰] 강은정 탈북가수겸 방송인
통일신문
기사입력 2018-10-18
장장 70년 이상 일당통치 구조의 북한체제가 유지되는 비밀 중 하나는 전체 인민에 대한 배급제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2천만 주민에게 당국에서 일일이 식량이며 생황용품 등을 나누어 지급한다. 북한당국은 대외선전에서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된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당과 국가 간부로부터 일반 노동자까지 여러 단계가 있으며 그에 따라 배급되는 물품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노동당과 내각, 행정기관, 권력, 외교, 대외무역, 교통, 상업, 외화벌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먹고 살만하다. 외국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들도 배고픔을 전혀 모르고 산다.
그에 비하여 공장·기업소의 제조, 건설 및 보수, 농·임업, 수산, 약초생산 등 분야에서 일하는 일반 주민들은 항상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고 있다. 국가에서 주는 식량배급은 1990년대 초반부터 완전 끊기었고 이후 닥친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 지금까지 무엇이든 자체로 벌어먹고 사는 북한주민들이다.
도시와 지역의 발전과 현재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북한에서 ‘혁명의 수도’라 불리는 평양은 마치 꿈나라 같이 황홀한데 비해 지방은 30~40년이나 떨어진 낙후된 상황이다. 평양 거주는 차치하고 구경(방문)도 소원인 지방의 사람들이다. 얼마 전 탈북민 가수 강은정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자신을 소개해준다면…
평안남도 맹산군에서 태어났다. 형제는 3남매로 내가 막내다. 법이 없어도 살만큼 고지식했던 부모님은 평범한 농장원이었다. 2004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홍단군 기동예술선전대에 편입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2000년 초 김정일의 “감자를 흰 쌀로 바꾸라!”는 교시에 따라 10톤짜리 일제 이스즈자동차 80여대, 25톤짜리 중국제 동방화물차 20여대, 인민군제대군인 1000여 명이 양강도 대홍단군에 들어와 감자농장이 만들어졌다.
▶감자를 흰쌀로 바꾸라? 무슨 소린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주식은 쌀밥이었다. 김정일의 교시 내용은 감자를 많이 생산하여 그것을 수출하여 인민들의 식생활에 필요한 쌀이며 고기 등을 해결한다는 건데 현실은 달랐다. 외화는 중앙에서 일괄 취득하고 관리했으니 말이다. 타 지역 주민들은 ‘대홍단군 사람들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렇지 않다. 수출이 우선이기에 감자도 배불리 못 먹는 현지주민이다.
▶또 다른 풍경이 있다면 말해 달라
양강도 대홍단군은 북한에서 김일성 혁명사적지가 가장 많은 곳이다. 북한당국의 자료에 의하면 김일성이 항일운동의 일부를 백두산 부근에서 하였기에 그렇게 되었다. 북한에서 김일성 혁명사적지는 거룩한 성지나 다름없다.
사적지건설에 전국적 노력지원이 끊이지 않았다. 중앙에서 내 노라는 예술단이 거의 매달 대홍단군으로 와서 경제선동을 하였으며 일부 건설자들은 우리에게 조소를 보내며 ‘노래를 하지 말고 공사장에서 삽질이나 하라’고 했다.
▶예술선전대 생활은 어떠했나?
기동예술선전은 음악 및 방송설비를 차에 싣고 다니며 하는 활동이다. 공연은 건설 및 제조 현장에서 거의 매일 오전, 오후 각각 2시간 정도 한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항상 실제 같은 상황에서 연습을 맹렬히 한다. 1년에 한 번씩 당국에서 주는 선물은 중국제 이불이나 사탕 한 봉지 정도였다. 당시 내가 받은 월급은 1600원 가량이었는데 시장에서 쌀 1.5kg 정도 사면 아무것도 못사는 금액이다.
▶이후 어떤 일을 하였는가?
선전대 활동을 2년간 마치고 이후 대홍단군 발전소건설대에 입대하여 천수발전소 건설 현장에 동원되어 강제적인 노동을 했다.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6시 30분에 식사를 마치고 7시부터 현장 투입되어 일을 하였다.
산과 산을 뚫는 갱도굴착 작업인데 선두 그룹에서 발파로 진로를 개척하면 뒤에서 대원들이 광차를 동원하여 돌과 흙을 운반하는 것이다. 저녁 8시에 일이 끝나면 또 ‘충성의 작업’(야근)을 하니 그야말로 몸은 파김치가 된다.
▶힘들었던 작업은 무엇이었나?
추운 겨울철에 진행하는 갱목생산이다. 북방의 날씨는 살점이 뜯길 정도로 아주 맵짜다. 그래도 당(수령)의 명령이니 작업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그것을 아래로 내려 굴린다. 이후 수십 개의 나무를 인력으로 끌어 언 강을 건너 철길근처까지 갖고 와야 한다. 그것을 또르레(철도에서 인력으로 움직이는 광차)에 실어 돌격대 본부에까지 실어가야 완전한 작업이 끝난다.
▶돌격대 주거 환경과 의류 수준은…
산 속에 지은 돌격대 숙소는 흙집으로 항상 추운 시설이다. 유리창이 없어 비닐로 창문을 했으니 추운 바람이 방안에 들어온다. 세끼 주는 식사배급은 언 감자 삶은 것 2~3개가 전부이고, 소금 넣은 시래기 국이 있으면 고급이다.
돌격대원 옷은 3년에 한 번 지급되는데 그나마도 자가 부담으로 구입한다. 군복 색깔과 비슷한 돌격대 복에 계급장이 모두 붙었는데 이것도 어쩌면 군대 같은 규율을 성립시키고 그 만큼 노동에 대한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이다.
========================
폐쇄사회 북한에서 주민들은 기본 평상복(의류)을 배급받는다. 허나 최근에는 공급량이 절대 부족하여 인민복 및 노동복(작업복)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장마당(농민시장)에서 중국산 의류를 구입하고 있다. 일부 부유층은 외화상점 등을 이용하여 옷을 구매하기도 한다. 북한에서 의복은 1960년대 이후 서구의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양복과 간편복으로 바뀌었다. 1990년대 초반 이후부터 대학생 등 젊은 층을 중심으로 청바지, 미니스커트 등 서양에서 유행하는 옷도 일부 들어왔다. 학생들의 교복은 3년에 한 번 정도 공급되어 왔으나 1990년대부터 서서히 유상으로 바뀌었다.
북한의 주택공급은 당국에서 일정한 기준에 따라 이뤄진다. 일반 주민들은 주택을 소유할 수 없으며 다만 이용할 수 있다. 물론 간부들도 마찬가지이다. 고급 아파트에서는 살 수 있어도 자기 집이 아니다. 따라서 주민들은 계층과 직위에 따라 규격화되어 있는 각 등급의 가옥이나 아파트 등을 할당받아 사용한다. 주택공급은 보통 한 직장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모범적인 사람들을 우선으로 한다. 주로 아파트와 3~5세대용 하모니카식 주택으로 되어 있다.
입주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계층에 따라 그 형태 및 구조가 다르다. 일반 주민들의 경우 방1개, 부엌1개의 2칸 주택이 보통이고 두 가구가 함께 살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건설현장에서 사고도 많았겠다.
돌격대 시절 언젠가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던 갱도 공사장이 붕괴되는 사고가 났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겨우 찾은 시신은 3구뿐이었다. 전부 매몰되었고 가족 친인척들의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엄중한 상황이지만 국가에서 그 어떤 보상도 없었다. 물론 산업재해 보험이나 보상 같은 것도, 노동안전 교육 등도 없다. 그냥 당에서 내려오는 사망자 몇 명에게 차려지는 포상훈장 몇 개뿐이다.
▶또 다른 사고가 일어났을 것 같다.
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있은 일이다. 부실공사로 발전소 언제(제방)가 붕괴되었는데 그때 주변 있던 10여 명의 노동자들이 눈 깜짝 할 새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내려갔다. 작업을 중단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대책은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사고 다음 날도 ‘충성의 선서’ 모임을 시작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항일혁명선열들의 투쟁정신으로 살자”며 말이다. 돌격대 여단장, 정치지도원 등 간부들의 선동은 당의 선동이기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사고보다 더 무섭고 힘든 것이 뭔가?
힘겨운 일도 일이지만, 무서운 사고도 사고지만 그 보다 더 끔찍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눈꺼풀이 내려올 정도로 힘든 연장 작업(야간작업)이고 배고픔이다. 또한 2~3일에 한번 씩 있는 사상학습, 정치 강연 그리고 매주 있는 생활총화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서로가 눈을 뜨고 한 주간 꼼꼼히 살핀 생활결함을 대중 앞에서 폭로하는 그야말로 인권침해의 격전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탈북한 동기는 뭔가?
사회생활 5년간 하면서 북한주민들의 밑바닥 체험을 생동하게 하였다. 북한은 오직 김 씨 수령의 영광과 행복만을 위해 2천만 인민이 존재하는 국가이다. 수령 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인민이 자기의 행복과 권리도 없이 산다. 사람 사는 것이 동물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세상에서 더는 살고픈 마음이 없어 2008년 6월 두만강을 건넜다. 내가 태어난 조국이지만 눈물로 작별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어 목숨 걸고 그해 12월 대한민국으로 왔다.
▶남한에서 처음 어떤 일을 하였나?
가장 먼저 돈이 필요했다. 이유는 고향에 남겨진 부모형제를 데리고 오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하여 서울에서 식당서빙을 하였다. 그 일을 하면서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가족을 데려 올 수 있었다. 처음 아버지가 무척 당황하면서 거절했는데 그걸 설득시키려 내가 중국까지 갔다. 끈질긴 전화와 설득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돌렸고 2012년도 온 가족이 무사히 한국으로 왔다.
▶현재 프리랜서로 가수 및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데 어떤지 궁금하다.
초기 탈북예술단체에서 활동을 하였다. 허나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더 나아 지금은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10년간 각종 공연행사에서 수 백회의 사회(MC)를 보았으며 TV와 라디오에 출연한 회수만 수십여 회째다.
대한민국 여러 분야에서 통일안보 교육을 수 백회 하였다. 교회에서 신앙 간증, 해외공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많은 사회활동과 교육을 하면서 유용한 통일교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장 보람된 일은 무엇인가?
지옥이나 다름없는 북한에서 탈출했다는 것이고 이후 사랑하는 가족 모두를 여기 남한으로 데려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북한에서 고생을 하는 악몽을 꾼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내가 현재 자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다. 부모님이 건강하시고 형제 모두가 화목하게 남한에서 살고 있으니 이 보다 더 보람된 일은 없는 것 같다. 가족이 가장 큰 사랑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의 남북관계를 보며 차분한 생각이 든다. 통일은 남과 북의 경제적인 통합도 의미하겠지만 갈라졌던 남북의 사람들의 합침도 분명 중요하다고 본다. 남한에 들어 온 3만 탈북민은 누가 뭐라고 해도 먼저 온 통일이 틀림없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3만 탈북민과 잘 어울려 통일예행 연습을 성공적으로 하였으면 좋겠다. 우리 탈북민들도 힘들겠지만 남한사회에 잘 적응하여 통일이 되면 북한주민들을 선진화로 이끄는데 기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림일 객원기자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