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영 풀영상 1부]북한의사 대한민국 병원에서 건강검진받고 오열한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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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8,440 views Aug 19, 2024 #강은정 #강사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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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정#한국#가족#가수#강사#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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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 Comments
Sejin Lifeforce 生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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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junyoon5276
8 months ago (edited)
당신들은 원래부터
우리국민이였읍니다...
우리 같이 힘합쳐
북의 우리국민을 구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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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replies
@joy3250
8 months ago
보기만하다 첨으로 댓글남겨요 요즘 사는게 힘들었는데 탈북민들 이야기듣고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배불리먹는 것만해도 너무 감사하네요 한여사님 주님안에서 평안하세요 북한의 가족도 곧 만날수 있으시길 함께 기도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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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두릅농원-s7e
8 months ago
두분다 진정한 애국자이십니다. 가족들 무사하시니 다행이네요. 하루빨리 가족들과 같이 살수 있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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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QINGJIN-o4m
8 months ago
울지마시고 꿋꿋하게 씩씩하게 사세요. 멋진분 멋지게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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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plies
@세월그리고별
8 months ago
모진 세월 고생하셨습니다, 잘오셨 습니다,
속히. 저 악마같은 집단에서 북한 주민들이 해방 되길 기도합니다~은정씨 감사합니다!
한선생님 건강하세요! 늘 응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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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원-j4d4m
8 months ago
현영님 대한민국 국민이 되신거 축하드리며 하나님의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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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윤-z2e
7 months ago
인성이 너무나 바르고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하루 빨리 가족들도 다 한국에 와서 같이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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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푸른-h9x
8 months ago
눈물 없이는 시청할 수 없는 각본 없는 드라마네요.안타깝고 서글프고 분노스럽네요.훗날 다시 만날 가족분들을 위해서도 늘 건강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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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n3w
8 months ago
여사님,너무 지혜로우시고 감동입니다.힘내세요.좋은 날이 꼭 올 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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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ro8in5dg1j
8 months ago
이렇게 똑똑하시고 지혜로우신분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셨더라면 얼마나 훌륭한분이 되셨을까 너무 안타깝네요 눈물 흘리면서 보았습니다 늘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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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정-s1b
8 months ago
두분 건강 잘 챙기시고 두분말씀에 적극적으로 동감합니다 가짜뉴스에 속지마시고 국민이 낸 세금 마구써대는 이런정치인들 퇴출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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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진-q5q
7 months ago
한국에오신것을
환영함니다
진심으로 가족분들
한국으로 모시길
빔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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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이-e1f
7 months ago
완전 애국자님들이세요^^여태 못누리신 자유 더 많이 누리시고 많이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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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써리움
8 months ago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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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바-i8f
8 months ago
저도 눈물이 납니다
세상에 어서빨리 저 체계가 무너지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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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향기-x3l
8 months ago
한현형 선생님 탈북이야기 잘 들었읍니다.
자식을 생각하면서 많은 눈물로 세월을 보내신듯 저도 마음이 뼈쏙까지 아파오네요.
이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열심히 사셔요. 언젠가는 건강을 지키면서 가족이 만나는날이 빨리 왔으면 합니다. 힘내시고 그만 우시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다보면 가족 상봉이 이루워 질것 같읍니다. 아울러 강은정님 인권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항상 응원 합니다. 파이팅!!!! 강은정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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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replies
@김광수-d5u
8 months ago
저는 매일 탈북스토리를 들으면서 많은 눈물을 훌리답니다.여러분들 34,000여명들이 감사하며 행복을 느끼시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은 존재의 의미가 있는것같습니다.감사합니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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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옥-p4m
8 months ago
인성이 올바르셔서 틀림없이 행복한 결과가 있을것입니다.
건강 잘 챙겨서 통일이후에 가족상봉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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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9단
8 months ago
가슴아픈 사연 잘들었습니다.
한국에 너무 잘오셨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응원합니다.
영상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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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m8542
8 months ago
북한에서 오신분들은 모두 참으로 말씀을 논리적으로 조리있게 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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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구급 환자가 들어오면 전기가 안 오는 거예요음 그래서 그 배전도 있잖아요 그 배전에 이제 전화를 해서 어 사정
사정해야 돼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추락했지만 이더라고요 한 집 안에서
굶어서 사람이 죽었으니까 그니까 부인도 정상이 아니고 근데 우리 신랑
살려 달라고 발 덩덩 그러는데 보니까 돌아가신 거죠 정말 이것이 언제
나한테 닥칠 것인가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강은정 t 은장입니다 오늘도 오김 없이 새로운 초대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자 만나볼게요 어서오세요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어 강은정 TV 초대받은
한현영입니다 반갑습니다네 오 정말 바쁘신 분인데 제가 이렇게 초대를
했어요 근데 또 쾌 와주셔 가지고요 한국에 얼마나 사신 건가요 아 한국에
언 12년 됐어요 어 12년이 그래도 꽤 되셨네요 예 고향은 어디신가요
고향은 저기 한복도 제일 좋은 데서 왔어요 예 우리 선생님 가족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고양이 어딘지 구체적으로 말씀 못드리는 거 양해 부탁드립니다 북한에서 어떤 일을
하셨어요 저는 북한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다 하고 병원에 내가 우사로
한 20년 정도 예 근무했습니다 예 어 그래요 남북한 똑같지만 최고의
직업이잖아요 그렇죠 북한에서 어 우사 직업은 여성들이 가장 선 선호하는
그런 직업 중에 하나거든요 예 그래서 우사를 하면은 어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음 그래도 다들 부러워했고 또 동네에서도 어 누구 집 딸이 의사
됐다더라 하면은 부모님들도 엄청 이렇게 해야죠 예 출신성분이 오셨나
봐요음 그냥 저는 평범한 그 농민의 자식이에요 근데 공 잘하셔서 예예
형제 다섯 중에서 어 아빠 엄마가 저를 공부시키다 그래서 제가
부모님덕에 고맙고 감사하게도 의사 직업을 갖게 됐죠 예예 그러시면
북한에서 우대 대학 공부 몇 살 때 하신 건가요 중학교 절로 하고
17살부터 23살까지 네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사 어떤 이런 것도
받고 하셨는데 왜 탈북하신네 어 그렇죠 저희가 대학을 졸업해서 예
의사 생활을 시작했을 그 당시는 정상적으로 어떻게 어 모든 공급이 좀
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80 90년대 이전이 예 90년대 이전부터 제가
의사 생활을 했는데 북한에서 오신 분들은 다 알지만 배급 뭐 구별 그다음에 병원에서 약품 공급 같은
것들이 정상적 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때 당시는 되게 괜찮았어요 예
직업도 좋았고 예 그랬는데 제가 또 어느덧 결혼을 하고음 애 둘 엄마가
되고 96년도 그때부터 이제 북한이 공급이 서서히 중지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 그래서 처음에는 이제 좀 적게 해주다가 이제 점차적으로 완전히 이제 끊어졌어 근데 저는 병원에서
일을 했는데 병원의 약품 공급이 안 되는 거예요 예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는 위로부터 약품을 공급받는
세계였는데 공급이 안 되다 보니 완전히 이제 환자들 치료하는게 속수
무 책이었죠 거기다가 더 속상했던 건 구급 환자가 들어오면 전기가 안 오는
거예요음 그래서 그 배 전부 있잖아요 그 배전도에 이제 전화를 해서 어
사정 사정해야 돼요 급 환자가 들어왔는데 뭐 한시간 아니면 두 시간 좀 전기 달라고 사정해야 돼요 그러면
또 배 전부에서 그러면 딱 두 시간만 주겠습니다 이렇게 하고서 이제 전기가 와서 수술을 하는데 그 수술장에 그
온도 보장은 전혀 안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막 진짜 열악하다 못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추락했지만 이더라고요 그래서
점차적으로 회의감을 느꼈고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 갈까 그 생각을
하니까 참 나의 현실도 안타깝고 어 병원의 현실도 안타까웠지만 나가서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에 항상 어 마음이 불편했어요 그러던 중에
제가 제일 그 충격을 받았던게 뭐냐면 제가 작은 애를 낳고 다가서 유치원이
어 정상 가동을 안해서 아기를 얻고 이제 병원 국물을 나갔거든요음
그랬는데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오신 분들은 아마 아실 거예요 어 병원마다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저희 병원에서는 일주일을 이렇게 쭉 돌아가면서 밤에
야간 국물을 서거든 예 그러면 는 병원에서 국물을 서면서 구급 환자가 들어오면 치료하는 거지 근데 그때
제가 작은 애를 낳고 아기 업구 나가서 국물을 서는데 밤에 이제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어떤 분이 왕진을 요청하는데 팔을 동동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갔어요 갔는데 그 신랑 되시는 분이 돌아가신 거예요 예 사망
되셨는데 이분도 정신이 이제 어 정상이 아니죠 한 집안에서 굶어서
사람이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부인도 정상이 아니고 근데 우리 신랑 살려달라고 발동 그러는데 보니까
돌아가신 거죠 그런 상황을 계속 목격하면서
정말 이것이 언제 나한테 닥칠 것인가 이것은 시간 문제다이 사회가 계속
이렇게 간다면 도대체 이거 어떻게 방법이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 그니까
더 더 와닿고 가슴 아프고 정말 그때 당시 병으로 죽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굶어서 이렇게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순간에 닥치더라도 이런 일들이 어 그냥 그때 저희가 교육을
받은게 좀 더 우리가 견디고 이겨내면 다시 말하면 장모님만두 온다 이러면서 예 맨날
그말로 희망고 예 희망 고문을 계속 하다 보니 그래서 어느 계속 이렇게 버티고 있다 보면 어느 날 또
정상적인에 그 사이가 오겠지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거죠 점점 그래서 아 이러다가 내가 내 가족을 다 굶어
죽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제가 병원을 사직서를 냈어요 여기 분들이 알아
들으시겠어요 북한에서 오신 분들은 다 알죠 매대 아고 그러죠 매대 상점
작은 매점 예 작은 매점 예 그것도 아무나 못 하잖아요 편의전 같은
그렇게 생각하면 맞 그 벌어서 얼마를 들여놓는 조건으로을 하는데 그거로
하려면 자본이 있어요 맞아 예예 그래서 자본 좀 있으신까요 그때 제가 자본이 없었어요 왜 없었냐면 계속
병원에서 직장 생활만 했기 때문에 없었어요 근데 대신 주변 사람들
속에서 좀 신뢰가 있었죠 그래서 저하고 협업을 하시고 싶어 하는 분이 나타나셨는데
그분이 투자해서 같이 한 거죠 예 그러다 보니 이제 매대도 운영하고 좀
이렇게 수익이 높아지고 워낙에 그분하고 나하고 들여서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렇게 잘됐어요 매점이 잘되 까 어 조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어 매 전보다 식당이 조금 더 수익 폭이 높아요 그래서 이제 식당을
했죠 근데 어 북한에서 그때 당시는 개인 식당을 허용하지 않을 때예요
그래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저희가 들어가서 어 국가에서 주는
공급이나 자재가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저희가 자재를 사 가지고 영업을 해서
어 마찬가지로 얼마 저희가 갖고 예 나라에 얼마 났어 는 매출에서 얼마
때는 저희가 7대 3로 7을 가지고 3을 내 예예 3을 냈어요 그리고 7을 그 안에서 일하는 분들이
나눠서네 가지고 그렇게 했는데 워낙에 식당이 되게 이렇게 어지럽고 근데 딱
보니까 안 되겠다 싶어서 북한말로 말라 우라가이라 여길로 말 리모델링
예 그래서 참 깔끔하게 예쁘게 해 가지고 그때 저희 지역에 출장 오는
분들이 많았어요 예 그러다 보니까 손님이 많은 거죠 예 그래서 그 식 에서 또 어 매출을 많이 얼리고 좀
수익을 많이 근데 그러다 보니 이제 또 어떤 문제가 생기냐 men 우리가
원래 기존에 살던 방식이 아니고 우리가 돈을 투자해서 우리가 버는 건데 이게 수익이 이제 많이 나
데다가 일정치가 않고 내부에서 자꾸 그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싸우시고 돈
가지고 예 돈 가지고 그래서 저는 그 싸우는게 너무 싫었어요 예 그래서 아
이거 언제까지 이렇게 자꾸 돈 갖고 싸우면서 이렇게 하지 어 그래서 어
사실 수익은 많이 났고 엄청나게 기어도 했지만 어 싸우는 대해서 좀
싫어서 손을 떼죠 제가 많이 싸우나 봐요네 아무튼 그래서 제가 생각을
했죠 아 어차피 이제이 나라가 원상 복기 되기는 이제 다 굴렀다 내가 어
좀 안정적인 생활 터전을 잡아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어 제가
가게를 이제 하나 냈어요 다로 예 다른 대로 가게를 냈는데 그게 어떤 거냐면 한국에는 어디
가든지 뭐 식당이든 호텔 여간 어 이런 편의 시설들이 잘 돼 있죠 근데
북한은 그런 시설들이 잘 안 돼 있어서 외부에 이제 출장을 많이 나가시는 분들이 개인 집에 들어가서
다 분석을 하거든요 그래서 아 이런 부분을 좀 공략을 해야 되겠다 해서
제가 이제 종합적으로 어 식당 그다음에 모역 그다음에 카운터에 이제
기본적인 일상 제품들 올려 놓고 그다음에 이제시는 숙 까지 이렇게
풀로 이제 만들었어요 그렇게 예 또 엄청난 큰 사업이에요 예 그렇게 해서 직원 두 명 데리고 아이를 시작했는데
가게 꾸리는 그 가정까지 다 얘기하자면 진짜 한도끝도 없어요 진짜
성 끝에 피곤하게 그 가게를 끓였고 여기는 뭐 어 건설 공사 같은 거 뚝딱 하잖아요 그죠 업체들이 다
있으니까 예 어디 맡기면 되잖아요 예 근데 거기는 막힐 데가 없으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저희가 해야
된다고 손으로 그래 그 이게 탕을 만들 때도 탕에 이제 그 한칸
만드는데 그 나무들을 쌀을 끼아 그것도 다 저희가 손으로 했거든요이
통나무를 사다가 서달 구다 실어서 통나무 켜는데 가서 제제하고 걸 또
메꾸 메꾸 기계 톱으로 또 다스려서 그걸또 이게 박아서 그리고 그 모탕
그 타이로 박는데 여기처럼 그렇게 하는게 아니잖아요 그 좀 다이로 박을 줄 아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그분들
모셔다가 이제 그분들도 또 낮에 하고 저녁에 와서 하니까 그분들 쫓아 다니면서 또 이제 시멘트를 닦아야
되잖아요 근데 북한에 거무 상갑 어디 있어요 여기는 차고 넘치는 예 거무
장갑이랑 말도 못 들어봤어요 그래 가지고 그분들이 이제 그 다이로 박는데 그분들이 꼭 밤에 일을 해요
낮에 직장 나가니까 근데 그 시멘트를 바로바로 닦아내지 않으면 굳어지자아요 그러다 보니까 다이로 박는데
쫓아가면서 맨손으로 닦다 보니까이 손끝에 비가 뚝뚝뚝뚝 떨어졌어요 진짜
세상에 나 살면서 이게 손끝에서 피가 떨어진다는 거구나 그 정도로 시와 땀을 받쳐서
삶이 터전을 구웠는데 너무너무 재밌고음 너무너무 잘됐어 예 그래서
물 운이 있구만 아 그래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아유 이젠 됐다 여기서
벌어먹고 살자 이제 굶는 죽지 않겠다 그 역시 똑같이 이제 당국에 받치는
돈이 있 그래서 아 이제는 뭐 싸우지도 않고 날 건드리지도 않고 여기서 나만 열심히 하면은 이제 먹고
사는 거는 괜찮겠다 하고 이제 한숨을 좀 돌린 거죠 우리가 오픈을 해서 6개월 정도가 됐을 때 이제 그
위에서 비사 그룹 아라 그러죠 비사회주의 그룹 그러니까는 어 한국은 이제 능력껏 벌어먹고 능력껏 살면
되는데 그리고 세금을 내잖아요 근데 북한은 개인 서유를 인정 안 하잖아요 그것이 어떻게 보면 내 개인 가게
아아네 그리고 거기서 수익이 많이 나오고 생명 줄인데네 생명 줄이죠 그것을 어 비사의 주의 그룹 바에서
와서 계속 협박하는 거죠 문다더라고 그래서 어 제가 얘기했죠 우리가
여기에서 이렇게 벌어서 어 나라에도 바치고 우리가 먹고 살면 좋지 않냐
우리도 여기서 벌어 먹고 살면서 사회주 지키자 그런다 그러면서 그분들이 얼 때마다 얘기하다 보니
틀린 말이 아닌 거지 그렇게 해서 돌아가고 돌아가고 했는데 결정적으로이 사람들이 말로 갖고 안 되겠다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하루 단속하는 기간에서 나와 가지고 재우 통첩을 받았어요 뭐라고 하냐면 적 채워서 이어 적세
채워서 군한 전부에 호성을 하겠으니 빨리 중지하라 이런 다 아니 기밀성을
욕해서 총을 들고 그 나라를 뭐 하 그랬어요네 그니까요 오직 먹고 살자
자식들 때문에 가정 먹고 살자고 그냥 피도 눈물도 없이 정말 눈썹 하나리
까다 가하고 그걸 뺏아 낼 때 이게 이게 어떤 세상이지 이게 우리가 살
만한 세상은 아니구나 그 번 예 그렇지만 우리가 거기에 해 정면으로
공격을 못 하냥 억울함만 가슴에 남는 그렇게 돼서 안 되겠다 싶어서 뺏겼어
그 가게를 뺏 그 뺏긴다는 당국에서는 그걸 어떻게 했나요 그어요 그냥 폐허로 남겨 두는 거겨 폐허 미친 예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이거 우리가 다 빼고 나가면 폐허가 되는데 그죠 이거를 폐허로 놔두 눈이 우리가
여기서 아름답고 깔끔하게 끓여 가지고 국화도 살고 개인도 살면 좋지 않냐
그 말이 안 먹 그래서 그걸 뺏기고 제가 이제 너무너 이렇게 막 눈앞이 캄캄하지 이게 앞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거기에 투자한 돈만 엄청나고 얼마 정도 어 그때 북한도로 한 200만
들어간 거 같아요 그 2005년도 예 화폐 계 하기 전이 아아 200만 더
넘어 들어갔죠 예 마지막에는 돈을 다 써 가지고 그 외상으로 가져왔어요 예
하교 집에 가서 예 그랬는데 6개월 동안 본전을 뽑기도 전에 이걸 차업
당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직원들 구별도 못 주고 거기 들어간 돈도 빼지 못하고 이렇게 돼서 너무도 이제
막 이게 절망적인 상황에 왔죠 그래서 제가 출로를 뚫어보려고 여기는 여건도
얼마나 잘 내어요 그래요 여권을 좀 내보겠다고 거기서는 외 보위부에서
여권을 관리해요 그래서 그 여권내는 외사과 예 찾아갔어요 찾아갔는데
얼마나 조건부가 많은지 뭐 26가지 저항이 들어가더라 뭐 깨냐 뭐 뭐
어쩌고 저쩌고 그래 가지고 이제 여건을 못 낸 거죠 여권 내서 어디 가려고 하 중국 가려고 중국 중국 어
중국에 저희 할머니가 중국에서 나오신 분이라서 할머니 집안이 다 중국에
있었어요 그래서 한때 북한에 중국 장사하러 나왔잖아요 그때 저희 친척들도 많이 나왔었거든요 예 그래서
그분들한테 이제 구원을 요청하려고 예 도움 받고 싶어서 여권 신청을 했죠 근데 그
여건을내는 조건이 안 된다는 거지 기준이 안 된다는 거죠 그니까 일단 저희 아빠가 한 씨고 엄마가 김씨
아아 근데 할머니가 오시잖아요 그러면 중국에 있는 친척들이 다 씨야 그러면 나고 엄마하고 아빠 쪽으로 연결이 안
된다는 거죠 거기서부터 이제 다 채 놓 갈리기 시작 예 그러다 보니까
이제 공식적으로 어 어떻게 좀 해결해 보려 그랬는데 그게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이제 사실 그 가게를 오픈하면서 외상으로 가져온 자재들도 있고 어
돈도 좀 쓰고 했는데 어 그게 이제 저한테는 빚이고 아빠 감으로 하죠 예
그래서 그걸 해결해야 되고 그다음에 당장 식구들이 먹고 살아야 되고 정말
눈앞이 캄캄했던 재산이 다 날 그렇죠 다 날아 비더 이죠 예 그래서 제가
여건도 안 된다 그래서 제가 결심을 했죠 제가 북한 아 저기 중국으로
넘어가서 돈을 좀 벌어 갖고 나오자 그래서 이제 1차 바로 탈북을 했는데
이제 저의 목표가 연길이 있거든요 어 연길에 저희 친척들이 있었는데 두만강을 넘을 때는 원래 이제 두만강
넘을 때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제 북한을 말하면 면이라는게 있잖아요 선생님을 오래 했으니까 예 그쪽에
이제 군인들도 제가 많이 치료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넘어올 때는
그들이 도움으로 이제 오기로 하고 이제 완 예 그렇죠 오기로 하고 중국 넘어가서 택시를 탔죠 연길까지 그래서
이제 가는데 그때 어 뭐라고 말해야 될까 운이 나빴다고 할까 그 여기로
말하면 도로공사 같은 데서 수금 속 그죠 어 그런 데서 어 택시 세우고
이제 돈을 내려고 하는데 게이트 같은 게이트 맞아요 예 사방에서 전도 불빛이 쫙 들어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보니까 그 공안 분들이 나와서 이제 매복을 했었죠 알고 아니죠 이제
가끔 그렇게 어 불씨 검문이 있다네요 예 그래서 갑자기 이제 방에서 불이
막 비치면서 공한 분들이 오셔 가지고 신분증 내놓라 그러는 거예요 근데
그때 이제 제가 저희 딸내미 같이 넘어 왔었거든요 마 어떡하 너무 이제
험악한 세상이다 보니 이제 너희들이 이런 걸 몸서 체험하면서 겪으면서
살아야겠다 싶어서 같이 데리고 넘어 육
교육차 그랬는데 이제 둘 다 같이 이제 체포된 거죠 강제 북성 당했어요 한 보입 끌려 갔는데요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아빠 엄마가 잘 키워 주셨고 공부도 체계적으로 잘해서 우사 20년
하다가 이게 웬 정천 병력이 이렇게 손에 이제 세를 차고 이제 넘어갔
그래서 너무너무 이렇게 북한으로 얘기하면 너무너무 이제 부끄럽고 보통
그렇게 얘기 망스 다행히 우리 지역으로 아니고
다른 지역으로 했더라고 그쪽 그래서 는 얼굴은 피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제가 그 보위부 그때 고류 장이라는데 처음 들어갔어요 예 그렇게 좁은 방에
빼곡히 이렇게 재수정 제수 아닌 제수정 예 이렇게 빼곡히 앉아
있더라고요 근데 어 다행히 저희 딸이 그때 16 살이었어요 그래서 딸내미는
이제 고화원 그쪽으로 해서 집에다 연락을 해서 그래도 내보 내더라고요 미성년이라 지금은 그런 것도 있는 거
같지 않아요 너만 이제 그 안에서 조사받고 하는데 12월에 이제 넘어가지고 1월에 북송이 됐거든요
중국의 감옥에 머물러 있다가 그러다 보니까 1월 달에 넘어갔는데 그 구류장 안이 얼마나 이게 냉방 있지
그니까 방이 아니죠 그냥 칸을 막아 넣은 거지 그런데 젊은 분들이 많이 들어와 있더라고요 그리고 말도 못하게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고 꼼짝 못하게 안채 놔요 그 하루 24시간요
자세를 딱게 하고 머리 돌려도 안 되고 돌아봐도 안 되고 들키면 다 같이 일어나서 400번 500번씩
잃었다 앉았다 시키더라고요 이렇게 순서대로 앉는데 이렇게 벽 앞쪽에
앉히더니 보는데 벽에 얼음이 이렇게 두껍게 있는 거 그리고 그 안에 또
한쪽 이렇게 최고 맣게 막아 놨어요 그래서 저기는 뭐지 속으로 근데 거기에서 영변을 보라는 거죠 대소변
눈앞에 캄캄했지 그러고 이제 앞을 내다 보니까 앞은 막혔죠 이렇게 올려다 보는데 이렇게 자그만한 쪽
창문이 보이는 거지 그 쪽 창문으로 그 바깥을 내다보는데 좁은 장문에
하늘이 보이더라고 근데 제가 그 순간에 또 오르는 생각이 너무 제가
절망적이고 나락에 빠진 그 상황에서 하늘을 우러러 제가 이렇게 마음속으로
울부짖었고 하늘에 하늘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이렇게 물어본 거죠 제가
하늘의 하나님이 계십니까 근데 만약 하나님이 계시면 저를 구원해 주세요
그러면서 제가 뭐라고 말하냐면 제가 세상에 나서 지금까지 죄지은게 없다 하면서 제가
어 이렇게 우사의 우사를 했고 사람들을 많이 구 고쳐졌고 예 제가이
안에 들어온 거는 오직 살기 위한 피하는 그 몸부림 밖에 없었다 뭐
누가 붙잡을 길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더라고 근데 솔직히 두 카은
종교의 자유도 없고 하나님의 하자도 전 못 들었고 떻게 하셨어요 그때
제가 하나님을 부르게 된게 어 사람이 너무 붙잡을게 없어 까 그 하늘을
우러 하나님이 계시냐고 물어보게 되더 저도 모르 그러면서 하나님 저를 어
구원해 주시고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어 저를 도와주세요 막 이렇게 한 거 같아 그렇게 하고 이제 계속
이렇게 하면 뒤에서 소리 지르니까 이렇게 얼리다 보고 마음속으로 앉아서 이렇게 얘기를 했죠 그러고 나서 이제
다음날부터 이렇게 조사를 나가는데 이렇게 중간에 테이블을 넣고 조사하는 선생님하고 이렇게 마주 앉아서 조사해
근데 조사하는 칸이 쭉 간 한이 돼 있는 거 같아요 저하고 그때 이제 부령에서 오신 분이 같이 잡혀서
나갔는데 그 옆에 방에서 계속 때리는 소리가 나더라고 예 그래서 그분은
엄청 맞으셨어요 예 그 북한 보위부에서 그 핍박 봤던 그분들
그분들이 제가 후에 이제 그 구류 장에서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이제 차차 신호가 가요 그래서 알고 봤더니
한국 기도한 분들이에요 예 권명 라우스 그쪽에서
잡히셨나요 날이 없는 거죠 그러면서 내가 나올 때 그분들이 그러더라고요
우리는 살지 죽을지도 알 수가 없고 어디로 갈지도 알 수가 없고 우리
앞날은 한 우리는 한참도 모른다 그런 얘기를 했었고 그분들은 그 안에 너무
오래 있어 가지고 척이 기막혀 벌써 내가 어느 날 나간다 거 다 알아요 조사 가정을 지들이 성꿈 받듯이
알아요 그래 가지고 내 옆에 있는 분이 나보고 그러는 거야 언니 언니 하고 부르는 거예요 언데 너 째 거해
가지고 몇 살인지 모르겠더라고 여기 초등학생 정도도 안 되게 제거했어요
근데 그 애가 나 보고 이러는 거 언니 언니 하는 거야요 그래서 어 그랬더니 언니 나가셔서 좋겠어요
이러는 거예요 저 가만 있었어요 그랬더니 언니 저 2살이에요 이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막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그러더니 또 이러는 거야 언니 나는 한국에 가서 밥을
배부르게 한번 먹는게 그다음에는 죽어도 원이 없어요 저는 밥 파에
터지게 한번 먹었으면 좋겠어요 이러는 거예요 제가 나오기 전 날에 근데
그때 당시은 제가 무슨 생각했냐면 아이고 내 커두 석자가 이렇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 저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저를 조사하시고 진짜 지금도 아이러니하고 지금도 미스터리 한대요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의사를 했으니까 이런 얘기 하면은 사실은 그 보위부 보안소
안에서 엄청나게 거처를 겪으신 분들한테 너무 미안한데요 그래도 어
인격적으로 크게 이제 손상 당하지 않고 이제 그래서 보위부 조사를
마치고 다시 또 보완서 조사를 해요 예 그래서 단련대 3개월 예 처벌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선방 이이 처벌을 받고 나왔죠 예 이제 다시
사회 다시 생활로 복귀해야 되잖아요 보니까 뭐 여전히 달라진 건 없고 예
더하면 도지 이제 서문이 쫙 나 버리고 이렇게 했는데 저도 도 이제 먹고 살려고 다시 이제 생활전선에
뛰어들려고 하니이 중국에 한번 넘어갔다 왔다는 이제 블랙 리스크가
계속 달라붙더라구요 넘어갔을 때 무역 지사들 막 나오고
그랬어요 북한에 예 그래서 그런 데서 되게 컨택이 많이 왔어요 저한테 일을
좀 같이 하자고 근데 중국에서 나온 무역 지사들이 이제 연락이 왔다는 거 그렇죠 중국하고 북한하고 협력하는
지사 사 예 회사들은 북한말로 말하면 좀 먹으라 있다 그래야 되나 연우
직장보다 괜찮죠 예 그런 데서 많이 컨택이 왔는데 계속 잘렸 한번 탈북한
그 경력 때문에 그리고 자식들 앞길도 다 막혀 있고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말도 못하겠어요 왜냐면 그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자죠 왜 학생 회장
그런 손연단 위원장 그런 걸 추천받았는데 엄마 때문에 못 한다 뭐 별리 별 뭐 이런 걸 다 붙여서 어
우리 애들이 스트레스 라다가 어피 한번 발걸 거니까 끝장을
보자하고 제가 다시 탈북 했죠 그때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한국까지 올 생각은
전혀 못했고요 이게 중국에서 돈을 좀 벌어 가지고 다시 이제 나가자 그
생각으로 사실 중국으로 왔어요 그렇게 해서 중국에 한 3년 있었어요 친척을 만 아 그거는 친척 사연이 정 긴데요
친척들 연락을 안 했고 왜냐면 친척들이 좀 불편해 하는 느낌이
보이더라고 왜냐면 그 저희 친척들이 다 중국 공산당 그쪽에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어 저희로 인해서 자기들한테 좀 어떤 루가 미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그렇게 불편을 주면 안 되지 해가지고 제 스스로 이제 어 쉽게 얘기하면
일자리를 구했죠 어 제가이 어르신 돌보는 가사 도움이 예 그런 걸
들어갔어요 그 들어가서 그때 이제 그분 영향을 저도 또 많이 받기는
했는데 중국 인민 은행에서 이제 공화 조석을 하다가 은퇴하신 분인데 그분이
그때 91세 있어요네 그분 도움미 제가 들어가서 어 6개월을 일하고
그분이 이제 오랫동안 병원으로 6개월 만에 돌아가시고 쪽에서 또 소개가 나와서 제가 또 아기 아기 범어로
조선적 집에 들어갔죠 예 그래서 아기를 한음 그때 당시 아기는 한
1년반 했수 2년 정도 봤어요 보면서 그분들이음 자기 집에 사람을 드려는
거기 때문에이 신분에 대해서 엄청 이렇게 밝혀요 그래서 제가 어
얘기했죠 저는 이런 사람이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아 우리가 보호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네 그래서 그때 그때 제가 그분들이 그런 얘기 하실 때 너무 막
이렇게 억눌 억눌려 있었고 이게 막 참고 참았던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그 보호 한 마디가 따뜻해요 마가 저희가 보호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세도 아니고 하겠습니다 예 그래서 제가 그 아기를 보면서
연기에서 한 2년 동안 더 머물다가 계속 한국의 kbs sbs 이제 공영
방송을 보게 된 거죠 예 밖에 별로 나가는 일이 없고 아기만 보고 집안
청소하고 밥하고 이런 걸 하면서 계속 한국 드라마를 보는데 그 북한에서
한국에 가신 분들이 잘 정착하는 그런 내용들이 나오더라고 국민의 분
한번 이게 그 TV 보다가 많이 울었던 대목이 있어요 그때
SB가 가족이 부른다 아침 노래 자랑하는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우연치 않게 저는 그 시간마다 꼭 TV 키거 근데 이제 북한 분 엄마
딸 모녀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시는데 그분들이 이제 그 북한에 이제 보내지
못한 편지 그걸 읽고 그 제가 그때 엄청 울었던 거 같아요 그때 또
석으로 응원했고 아 1등 해야죠 근데 그분들이 또 1등했어요 그래서
울었다가 웃었다가 하면서 아 한국의 우리 북한 분들을 보호하는 정책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예 그래서 그때 이제 한국으로 오려는 꿈을 키웠죠 예
어 그래서 제가 그 아기 보던 집에 어 얘기했죠 내가 어차피 한국으로
가야겠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막 내 손잡고 우는 거예요 모가 가면 우리는 어떻게 사냐
너무 잘하셨나 봐요 그래서 이모 없으면 우리 못 산다고 못 가신다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어 솔직히 뭐
다른 사람들 같으면 몰래 나와도 할 말은 없어요 근데 저는 또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 그래도 그들이 나를
지켜 주고 보호해 주고 월급도고 그렇죠 월급도 받고 그렇게 했는데 그냥 그런 아닌 거 같다 싶어서 9월
달에 얘기를 했는데 어 그들이 승인을 안해 가지고 계속 있었어요 그래서
조금 생각이 잊혀질까 하는 무료 그다음해 2월이 됐는데 부부가 이모
우리 좀 얘기 좀 하시게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어 무슨 얘기 하지 워낙에 이제 평소에 저한테 너무
잘했으니까어서 이제 가서 앉았는데 둘이서 울었더라 그요 그래서 왜 그러지 그랬더니 이모가 이렇게
가정집에서 아기 벌 사람이 아니다 응 그래서 우리가 이모를 한국에 보내
드리는게 우리 도리인 거 같다 그래서 이모가 한국에 가셔 가지고 이모의 그
어떤 꿈과 마음껏 꿈과 퍼부을 펼쳐 보시라고 그 얘기하는데 그들이 이제
그 결심을 하기 전까지 둘이 손 잡고 많이 울었더라 그요 그래서 제가 너무도 고맙고 감사하고
그래서 그래서 괜찮아요 그래서 제가 어 진짜 그 날짜가 이체도 앉아요
그래서 자기들이 다 준비해 주더라고요 나가서 알아보고 브로커 이렇게
연결하고 예 그리고 이제 그 사람들을 알아보고 준비를 뭐 하고 돈도 얼마간
있어야 되고 이런 걸 다 해가지고 나가서 이게 배낭도 사오고 예 그렇게
해가지고 어 제가 이제 떠났죠 떠나서 연길 역에서 브로커를 만나게 돼 있어
가지고 예 브로커를 만났는데 브로커가 완전 한적인 거예요 근데이 제가 이게
중국에서 조선적 들라고 계속 있다 보니까 중국말을 많이 못 익혔죠 그냥
한두 마디는 하죠이 바디랭기지로 다 알아들어요으로 말 예예 다해요
그래가지고 이제 원래 그날 두 명이 넘어오게 됐어요 근데 계속 시계 버는 거예요 그랬더니 얘기하는 거야 너하고
한 사람 두 명 가게 됐는데 지금 한 사람이 안 온다 그래서 자기는 지금 걱정이다 이러는 거예 혹시 그 사람이
안 나오고 꼬장 하면 다 잡히지 않겠나 브로커도 걱정하더라 그러면서 나보고 너의 결심에 맡기겠다 어
떠나겠다 안 떠나겠다 그것만 얘기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출발하겠다
내가 그랬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힘을 딱 받으면서 슝 하는 거예요 어 어 가자 그래서 그분이 이제 저를
장춘까지 데리고 왔어요 장춘 버스에서 내려가지고 식사를 같이 하면서 또
표를 끊었어요 정주 가는 표를 끊고 잠깐 기다려라 내가 올 거라고 그랬는데 이분이 안 오시더라고요이
사람들이 알아 붙지 않고 릴레이를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이제 와서 버스를 태우는 거예요 너는 안 가니 그랬더니
아 내가 어디 가서 또 같이가 그러면서 버스가 떠나는데 문 이게 밖에 있더라고 그래서 이게 혼자니까
겁이 나는데 거기 가면 이제 예 다음 사람이 나와요 예 그래서 그때 눈치를
챘어 그러니까 처음에는 너무 무서워하니까 한 단계만 같이 얻으라 예 그래 가지고 이제 그다음부터는
계속 릴레이를 하더라 그래서 정주에 이렇게 연길에서 장춘 장춘에서 정주
정주에서 권명지 이렇게 계속 릴레이를 하는데 정주에서 우리 분들 한 여덟
분 또 만나서 일행이 내가 단계를 거쳐서 어쨌든 한국까지 무사해 왔죠
네 그게 이제 2012년도에 어디로 통해 오셨어
저는 태국으로 온 케이스죠 태국에서는 어디 수 있 태국에서는 제일 기억이
나는게 너무 더워서 너무 더웠던게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예 그리고 음식 뭐라
그래야 될까 잘 맞지는 않았지만 그런 거는 뭐 참을 수 있어요 근데 너무 더워서 아 빨리 한국으로 가고 싶다
그 많이 지루했어요 그렇지만은 우리가 안도감이 있잖아요 그 중국 땅에서
갖고 있던 어떤 불안감 그런 것이 한 80% 정도는 해소됐고 그래서 빨리
이제 한국에 가는 날만 기다렸는데 그냥 그 태국에서 한국분들이 나오셔
가지고 저희를 한국까지 안내해서 올 때까지는 계속 감동이었죠 고맙고
감사하고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냐 하도 치우고 밀리고 하도 그
뭐라 그래야 될까 이제 천대 꾸러기처럼 어 북한의 인권이 있습니까 중국의 인권이 있음 그러다 보니까
항상 이렇게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치고 밀리고 그런 분위기에서 살다가 한국
대사관에서 나오셔 가지고 이게 저희들을 이제 이름을 불러 주시고
이제 관리해 주시고 우리도 소속감이 있고 우리가 이렇게 보호를 받는다는
이게 국가적 보잖아요 대사관에서 나왔다 너무 감사하고 너무 진짜 그때
그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어요 그래가지고 이제 어 임시 여건을 내
가지고 한국까지 인천공항으로 무사히 들어왔죠 인천공항은 어땠어요 아 인천
공항은 쉽게 얘기하면 그냥 천국이었지 예 우리가 뭐 천국 얘기는 많이 해요
그니까 아 멋있고 아름답다 이런 생각 그게 이제 천국이라고 생각할 때인데
그때는 인천 공황에 들어왔는데 우선은 그 규모에 놀랐어요 예 끝이 안
보이고 예 그다음에 비행기도 어디서 시작 이고 어디서 끝인지 알 수가
없고 그다음에 그 루트를 따라서 쭉 공항에 들어섰는데 너무나도
깨끗하고 너무나도 우아하고 아 우리가 이런데 와도 되나 우리가 뭔 돈을
내서 여기를 들어왔지이 쉽게 말하면 감동이고 감사했죠 그와 당시에 완전히 그
80% 아지 왔던 그 안도감이 100% 쫙 이제 야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뭐 잡혀 간다거나 위험하다 거나 그런 일단 신변의 위험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어요 그런데 그와 동시에 그
지나온 나날들이 막 주마등같이 지나가면서 이렇게 한국에 이렇게 올걸
내가 가족들 다 같이 왔을 걸 뭐 사연은 있었지만은 어쨌든 혼자
한국당에 발을 디딘 것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예 그 인천공항에 발을
탁 내려놨을 때 그 2살짜리 그 아가씨가 너무너무 강남에서 제가 무슨
생각하면 그들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어디로 끌려 갔을까 그 죄없는 불쌍한
꽃다온 청춘들이 어디로 갔을까 그 생각에 그냥 막 그 인천 공항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계속 울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날 인천 대교를 건너는데 그랬는데 그 버스에 우리를
태워서 쭉 오는데 그분이 얘기하세요 자 여기부터는 인천 대교 있니다 인천
대교는 언제 세워졌고 이러는데 그게 이제 말이 그냥 어 일부은 들리고
일부은 안 들리는 거죠 계속 울다 보니까 그래서 너무 눈물이 나서 바깥을 내다 보는데 제가 그 한국에
입구 간 그날에 비가 엄청 왔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했죠 내가 너무 아픈 눈물을 흘리니까 하늘도 우는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 인천 대결을 건넜던 생각이 나네요 전에 이제 그 신체 검사
병원에 이제 들어갔는데네 왜 들어가지 그랬더니 안내해 주시더라고요 신 제 문제가
있는지 예 기본적인 검사를 한다고 들어가서 이래 쭉 검사하는데 그
검사하는 단계 단계마다 가서 제가 눈물이 나고 너무 부러운 거예요 이제
그 모든 환경이 정갈하고 그하고 간호사들이 의사 선생님들이 너무
부드럽고 상냥하시고 그냥 녹을 잃고 쳐다보면서 그 북한에서 너무 그
환자들을 또 아픈 사람들 제대로 치료 못 하던 그 생각이 나면서 너무너무너무 부러웠어요 부럽고 막 야
한국이 잘 산다고 그렇게 우리가 얘기를 들었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발전했구나 거기서 또 제가 좀
웃겼던게 뭐냐면 근데 북한에서는 처음에 진찰 하죠 진찰하고 진단하고
처방전을 써줘요 그럼 환자가 그 처방전 들고 약국에 가요 그럼 약극 피을 썼다가 약을 받는 거예요 근데
여기는 뭐 주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이거 뭐 뭘 줘야 아래 충에 들고 내려가지 않나 아니면 여기서
검사한 걸 뭘 줘야 다음 단계로 가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는데 이제
컴퓨터로 다 연결이 돼 있잖아요 뭐 주는 거 없이 다음 다음 단계를 가도
또 한 연형 또 다 아는 거예요 또 간데 아는 거예요 그고 제일 마지막에 아래 카운터에 내려는데 거기서도 또
다 아는 거예요 그래서 널려 가지고 이거 뭐 어디로 [웃음]
연결됐지만 한없이 작아지더라도 북한 생각나고 그런
만감이 교차하면서 예 이제 신체 검사하고 그리고 이제 저희가 국정원으로 들어갔죠 국정원은
괜찮았어요 기부라고 진짜가 죽 예 뭐 예 그런 얘기들을 많이들은
상황이었는데 이제 국정원에 들어갔는데 들어가는데 이제 제 이름을 부르더라고요 그래서 내 이름 어떻게
알지 근데 앞으로 나오세요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나갔어요 그랬더니 이제부터 총 대장이라는 거예
나보고 라는 거예 아 근데 제가 그 태국에서는 어디서든지 다 방장을
선택하자아요 계속 피했 그든 이게 여기이가 통증이 있다 아프다 하면서
계속 피하면서 좀 이제 조용히 지내고 조용히 살고 싶었어요 예 어 그랬는데
국정원에서 이름을 딱 부르니까 예 그땐 달라요 뭔가 그때 이제 아나 아
이렇게 할 상황이 아닌 거죠 그래서 국정원에서 우리 기수부터 시작해서
대열 관리 쭉 하면서 음 국정원에서 너무 이제 또 감사했던게 뭐냐면 다른 분들도 이제
많은 감동을 받았겠죠 근데 이제 식당을 갔는데 얼마나 맛있게 얼마나
메뉴를 바꿔 가면서 얼마나 깔끔하게 그리고 우리가 국정원 선생님들 하면
되게 무섭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선생님들이 이렇게 친절하게 잘해 주시잖아요 그리고 같이 식사하는
거예요 그니까 같은 음식을 같은 식당 공간에서 우리들이 다 먹고 나서 그음
들 식사하는 거예 그때 이제 제가 그 북한에서 그 띡띡거리는 그 간부들 생각하니까 어이 없는 거예요 북한은
진짜 밥상도 간부 같이 따로 차리자아요 저도 그 부분이 놀라워 아
국정원에서 이렇게 조사 받으러 나갔는데 저를 조사하시고 분이 되게
잘생기셨어요 아 자꾸 그 얼굴에 약해요 예 얼굴에 약해요 저희가 어
되게 잘생기셨고 어 인격적으로 많이 이제 존중해 주셨고 제가 이야기할 때
그분이 처 같이 이렇게 눈물 흘리 내가이 나라에 뭘 한게 있다고 이렇게
인격적으로 대접받고 그 부분도 감사했고 그분이 이제 가끔 또 웃기는
행동도 많이 했어요 어 예를 들어서 그 키을 이렇게 목에 걸고 다니잖아요 그럼 방 앞에 가서 되면은 문이
열리잖아 근데 나 보라고 이게 손으로 들어올리지 않고 팡 튀면서 탁 갖다
대는 거지 일부러 멋있게 보이려고 예 풍 뛰면서요 높이하고 키높이를 탁
맞추는 거죠 어 그렇게 해서 열었다 이거지 그서 웃겨주려고 이게 탁 열고
나 탁 보는 거죠 칭찬해 달라고 예 그니까 지금 생각하면네 긴장을 풀어
주시느라 그런 분도 계셨고 예 그랬겠죠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국정원에서 그
조사하시고 할 그런 분을 만났어요 그분 만나서 이게 서로 성하고
얘기하다 보니 분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쭉 했어요 그랬더니 누굴까 누굴까 하면서 계속 이렇게
하는데 하도 많으니까 나중에 찾으면 알려 주겠다 그러시더라 찾으면 꼭
알려 주세요 제가 그랬는데 어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저한테 꼭 꼭 찾아야
될 이유가 혹시 있나요 이러더라고 내가 뭐라고 말씀드렸나요 어 그분을 꼭 찾아야 될 이유는
없어요 근데 한 가지 제가 고마운 말씀은 전하고 싶어요 그때 어떤 고마음 말씀이냐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일주일간 조사받는 동안에 저희 조사는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빨리
끝났어요 빨리 끝나고 나서 2분하고 어떤 대화를 많이 나눴다면 이게 그
통일 문제 그다음에 이제 외교 이게 북한하고 그다음에 그 북한의 실상에
대한 문제 그다음에 이게 북한 사람이 생각하는 통일에 대해서 어떤 대안이나
어떤 방법이냐 그게 좀음 간난 높은 문제를 기하고 엄청나게 많은 대화를
나눴어요 예 그래서 막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너무나도 많은 대화를 나눴고 제가 이제 조사를 끝마칠 때
그분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해 주셨어요 한혜령 씨는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조사를 했는데 또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이제 잊혀진다 근데 우리 하씨는 내가 오랫동안 잊혀질 것 같지 않아 왜냐
너무나도 깨 있다 예 생각이 바르시고 아 한 10년 좀 빨리 왔으면 큰일
했겠네 막 이러면서 좀 힘이 되는 얘기 많이 해 주셨는데 그분이음 제가
조사 끝나고도 저기 조사 부서가 있고 관리 부서가 있잖아요 우리 그쪽에 한 세 번 나오셨어요 저 잘 지내나
벌라고 근데 세번째만에 나오셔 가지고 그랬어요 이제 더 이상 나올 명분이
없다 내가 한현영 씨는 대한민국에 어디 가서
일을 하든지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걸 나는 확신한다 아 내가 한현영 씨를
만날 길은 없겠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가 항상 기도하고 있다 그걸
꼭 알아줬으면 그러더 제가 그 말을 듣는데 너무 막이 어떻게 표
못하겠더라 그러면서 그게 아마 내가 한국 12년 동안에 큰 힘이 된 거
같아 그러면서 예 그래서 내가 그분하고 그 소리 했더니 그분도 눈물 흘리시더라 아야 너무 고마운
분이네 예 내가 어떻게 하나 좀 노래고 해 볼게요 그러더라 그분이
저의 이런 마음을 전달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뭐 직접 만나든 안
만나든 내가 그 힘으로 지금까지 어 살아올 수 있었다는 얘기를 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그랬죠 아 참 아 정말 너무 감사한 분들이 많고 사람 말
한마디 천양 사고 뭐 말 한마디 죽 말이 있
예 어쨌든 그 선생님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기도할게요 예 그러면
이제 거기 있다가 하나운 넘무 오요 하예 하나운 거쳐 나오신 분들 다 알잖아요 또 이렇게 총무를 선택하
이제 선거하고 이렇게 하는데 제가 얘기 드렸죠 저는 국정원에서 계속
이렇게 책임을지고 있었고 하나원 와서 또 이렇게 하면은 제가 배우는 그런
시간들이 너무 줄어들 것 같으니까 아 좀 젊은 분들 시키고 저는 좀 조용히
배우고 싶다 제가 그랬거든요 그랬더니 어 선생님들이 그러면 누구를 좀 추천해 달라 그래서 제가 군에서
제대하신 분을 이제 강력하게 추천을 했죠 그러고 나서 이렇게 조영이
산다고 했는데 저희가 이제 하나원에 보면은 하나 교회가 있어요 제가 그음
국정원에서부터 월마다 가끔 나가서 예배를 드렸는데요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에서 이제 결심을 했죠
그때 는 제가 막 신앙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저에게 어떤 이제
약속을 걸었어요 새벽 기도를 나가는데여 땅 해서 시작부터 하나
수려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 새벽 예배 나간다 그걸 제가 저하의
약속을 했어요 그래서 어 어떤 나한테 목표치를 주고 그것을 실천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새벽기도를 매일 나갔어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떤 기도했어요 근데 항상 먼저는 그렇죠 이나라
이민족을 위해서 항상 기도했고 그다음에 제일 아픈게 부모로서는 자식이요 그니까 자식을 위해서도 많은
기도를 했고 또 북한에 북한의 이제 모든 이제 북의 동포들을 위해서 그런 기도를 많이 했 그냥 기도하는 자리가
그냥 눈물이 자리죠 그렇게 했고 그러다 보니까 이제 거기도 또 총무가
있어요 저는 몰랐어요 한 기스가 나가면서 또 바텀 터치 하더라고요
이제 한화원 3개월 동안 많이 배우고 많 즐 어떤 시간인 거 같아요 어떤
거 배웠어요 나 하원에서 이렇게 저기 정착 그런 교육을 배웠는데 어 한국이
완전히 서로 다른 세상에 적응을 하는 거잖아요 어 예 어 북한 분들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이런 말을 잘 안 하잖아 못 하잖아 근데 그건 북한 사람 잘못이 아 해 북한의
교육 자체가 그런 걸 표현하는 교육이 없고 그렇게 하는 사람을 이게 막 응
이렇게 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 저는 제 던고 한국사 적응하
가르쳐주는 거죠 그 하나원 안에서 여러가지 또 프로그램도 많아요 글
짓기도 하고 어 노래 경영도 하고 저는 또 이게 스타일이 이제 어린애처럼 어 안 주시하면 안고
서라면서는 스타일이라서 노래 부른다 그러면 또 나가서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모르고 나가서 너래 부르고 글짓기 하라 그러면 또 글짓기 하고 그래서 어 아마 이제 그 하나원 수려할 때
저는 상이 있는 걸 몰랐어요 예 근데 하나원에 있는 상을 다 싹쓸이하고
나온 거 같아요 그리고 그때 저희 기수에서 그 통일 항아리라는 걸 했어요 통일 항아리에 돈 넣는 건데
어 제가 저희 수중에 돈이 13만 원 있었거든요 어 근데 그 13만 원을
다 넣었어요 근데 그게 이제 신문에 나왔어요 그 왜 13만 원 넣는데
신문에 나왔지 그랬더니 하나원 선생님 중에 제일 많이 하신 분이 10만 원 넣으셨다
예 민 만다는는 이거는 히 거액 구이다
그래서 그때 저도 놀랐어요 그 항아리에 이제 그 모음이 마련이 되어서 어떤 통일 그런데 통일 관련
이래 쓴다고 그때 통일부가 그걸 주체를 했어요 저희 기수 때 거기
하나원에 있다가 서울 구경 나가죠 저는 그 또 뭐라 그니 육산
빌딩 말고 남산타워 아 소이 다 보이지 않아 거기 가서 너무 웃던게
뭐냐면 선생님이 얘기해요 오늘 우리나를 가는데 여기기는 뭐 어떤거 얘기해요 그러고 나서 거기를 구경하고
뷔페 데리고 가요 예 근데 뷔페 들어가기 전에 선생님이 얘기해요 욕심
내지 마라 열 번 가도 좋고 스무번 가도 좋으니 제발 조금씩 담아라
그리고 또 갖다 먹어라 한 접이 다 먹고 또 먹고 뭐 빼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예 알겠다 하고가 가지고
끌고 오는 거 보면 산더미를 싸가 맞아요 아무리 이렇게 선생님들도
그래요 아무리 말해도 계속 산더미를 싸우는데 그러니까 다 먹지도 못하면서
막 허둥지둥 담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래서음 지금 생각하면 한이 좀
얼굴이 좀 뜨겁고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면서 솔직히 다 못 먹으면 어리잖아요 그래서 선생님들이
얘기하시는데 역 담아 갖고 오더라고요 그래서 다 먹지도 못해요 나중에는
그래서 그게 참 웃기면서도 가슴 아프고 얼마나 못 먹었으면 항상
저장해야 돼 지금도 그 생각하면은 막 사람들이 그 삼이 쌓아가 그 뛰어든 생각하면 그때 그 사람들이 다 선생님
처 똑같이 그때는 그래지 아껴야지 이러고 살고 있을 겁니다 저희 고모가
이제 평양에 있어요 그래서 평양에 갔었는데 당연히 평양은 어 지방보다는
깨끗하고 괜찮죠 우리 고모가 그때 평양에서 인민 반장을 했어요 제대
군인인데 고가 이렇게 군간 제대군인이 군간 제대군인 당원 어 여기 사람들
이렇게 말하면 뭔 말이야 하겠지만 한에서는 간부의 표정이라 그러죠 예
군대 갔다 왔고 조선 노동 당원이 그러니까 지방의 인민 반장하고 평양의 인민반장 급이 다르더라고 그래서 저희
고모가 이제 이민 반장 하는데 어 제가 그때 큰애기 낳고서 갔으니까
아동 백화점을 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고모한테 얘기했어요 아동 백하정 가서 아기한테 필요한 거 좀
사겠다 그러니까 우리 고어가 어 그냥은 못 간대요 그래서 왜 그러니 그랬더니 그 평양에 백화점들 있잖아요
백화점들 아동 백화점 이런 데서 이렇게 뭐 잘 나가지 않는 거는 그냥
사는데 전 괜찮은 억 같은 거 막 필요한 이런 거는 예비 표가 있어야
된대요 그냥 사는 거 아니라네 그래서 내가 뭐 뭐 이건 뭐지 그래 가지고
그다음에 그러니까 그러면 뭐 나는 살 거 없겠네 그랬더니 우리 고모가 자기가 인민 반장이 표를 좀 깔아
듣더라 그래서 그걸 갖고 아음 가점에 가서 아기옷을 샀고 어이가 없더라고
아이 평양이 웃긴다 근데 그다음 또 우리가 보통 평양에 올라가면 옥류관
냉면 같은 거 먹고 싶잖아요 옥류관에 가서 냉면을 먹자고 그랬더니 표가 있어야 된대요 가서 예비 표 줄에
서서 진짜 표를 그 웃기더라고요 여기는 뭐 그래도 뭐
예약을서 어 그러니까 그래 가지고 어부가 그 예비 표를 갖고 오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표를 갖고
갔는데 그 예비 표 줄에도 어마어마해 예예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고 그 예비
먹을지 몰라요 계속 다리 아프게 줄 써야 되는데 그 줄도 대도로 변에
서면은 평양의 지도자의 위상을 흐린다고 뒤에 서게 하는 거예 예
그렇게 보면은 뒤에서 이렇게 다 서는데 사람들이 국수 한 그릇 먹겠다고 거의 반나절 줄서요
환장하겠다 한장에 지금 생각하면 맛있다는 생각은 많이 들어요 엄청
그래서 내가 그때 너무 그때 저도 음식에 대해서 좀 관심이 많았는데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그 백화점도
가보고 줄을 서서 수 먹던 생각이 나죠 근데 이제 한국에 와서 보니까
한국에 와서 보니까 북한이 어둡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 평양이 예 그리고
동상 주변 내놓고는 밤에 또 불 다 꺼요 전기가 전기 사정이 그러니까
근데 한국은 어느 시간에 나가도 대나 같잖아요 그리고 밤에 오히려 더
아름다워요 예 밤거리가 끝내 주잖아요 이거 뭐지 이게음
뭐 응 38선 하나 사이에 두고 이렇게 같은 민족이고네 고구려의
기상이 평양이 아아 쪽이잖아 근데 오늘날은 더 바보 천치가 되 바보를
만들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제가 무 어이 없어 야 언제 북한이 이렇게 될까 나게는 그 생각하죠 그러네요
들을수록 놀라워요 분노가 치밀고 그 중국에 연락해서 그 가정 그 아기
봐주셨던지 어떻게 소식 전했어요 아 그럼요 그 중국에 연락해서 그 가정
그 아기 봐주셨던 친 어떻게 소식 전했어요 아 그럼요 제가 그 아 또
눈물 나 왜 오늘 자꾸 올리세 제가 그 집을 떠났는데 그분이 이제 불교를
다했어요 왜냐면 중국인 절들이 많잖아요 근데 이분이 제가 떠난
그날부터 매일 108배를 했대요 저를 무사히 한국까지 가라고 예 근데 이제
제가 이제 태국에 와서 그때 통화할 기회가 있잖아요 예 태국에서 제가 전화를 했거든요 그때 그 집에 제가
아기 버던 외 할아버지가 한국에 들어와 계셨어요음 그래서 그 전화번호를 머리에 달달 외우고
있었어요 그래서 태국에서 연락을 했죠 그때 진짜 너무 감사한게 나라는이
생명 하나가 어디선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걸 세상 밖에다가 알 수
있다는게음 감사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했는데 그분도 전화 받으시면서
막 울고 저를 떠나보내고 온 집안 식구들이 울면서 기도하고 저에
올라가서 팔배 하고 어떻게 된지 몰라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 가지고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막 울음이 터지더라고요 그분이 살아 있구나 이러면서 감사 예
너무 감사하 그래서 나도 또 세상 밖을 향해서 내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게 그렇게 행복하더라 그죠 무연
거잖아요 예 가다가 어디서 죽어도 아무도 알아줄 사람이 없어 없어요 그리고 누가 찾겠어요 나를 그죠
그래서 그 전화를 하고서 그분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리고 또 그분이 중국에 전화해서 딸한테 알려서 이모가
살아 있다 태국에 무사 있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이 여기 먼저 갔던 사람들
얘기 들으니까 이렇게 이렇게 움직인다고 하니 전화를 자주 못해도 안전하게 살아 있다는 걸 알아달라고
제가 그랬거든요 그러고 나서이 분들이 한국에음 음 덤 벌러 오셔서 지금
저기 영인의 예어와 계세요 예 영인의 와서 얼마
전에 둘째 가졌어요 아 지금도 연락하고 계시는구나 어머나 세상에
그래 예예 그래서 그냥 이게 한집안 식구처럼 예 지금도 예 그래서
그분들이 항상 만나면 우리 애들
문난 아 누가 이렇게 응 내 자식을
무난하겠죠 그들이 항상 저를 만나면 첫 말이에 애들 문하에 어 애들 잘
있냐고 잘 있냐 안전하게 있냐 연락을 됐냐 내가 지금도 생각하면 그분들이
너무 감사해 그요 상 선생님에게 정말 진정한 가족이 되어주 거잖아요 맞아요
그 지금도 가족이죠 그냥 가족처럼 가깝게 잘 지내고 있고 가족의 안부를
물음 있는 유일한 진짜 가족이죠 북한 사람들을 붙잡아서 이제 강제 북성
키는 그 정부가 잘못된 거죠 예 근데 그 정부의 눈을 피해서 이분들 어떻게
까딱 잘못 걸리면 그 나라에서 벌을 받거든요 근데 그걸 무릅 쓰고 그래도
북한 사람들 많이 지켜준 사람들이 많아요 또 그걸 악용해서 나쁘게 한 사람들도 있고 하지만은 저 같은
경우는 진짜 지금도 그분들하고 살 붙이죠 살 그렇죠 그래서 지금도 이제
친가족 친형제로 잘 지내고 있고이이 강은정 위를 보게 되면은
이모가 항상 고맙고 항상 감사하고 평생잊지 않고 어 살아가고 있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저도 너무너무 감사하고 언제 기회가 되면 한번 뵙고
싶습니다 선생님 자꾸 눈물을 흘려서 너무 죄송 너무 감사 감사함의 눈물이요 오늘은
행복하게시다 예 돈까지 울면 이게 날 거 같아서 그러면 그날에 서울 구경
잘하시고 이제 들어와서 한국 사회로 나와야 되잖아요 집 어디 받으셨어요
그렇죠 저는 서울을 좀 받고 싶었어요 나중에 아이들을 좀 데려와서 예 공부 좀 시키려고 또 한편 가만히
생각하니까 너무 서울을 많이 가고 싶어 하니까 이거 뭐 경쟁에서 밀릴 거 같다 하는 생각에 그럼 그다음
좋은 데가 어디냐 봤더니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고 경기도 수도는
수원이다 그래서 아 그러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수원으로 가보자 그래서
제가 처음부터 수원으로 넣었어요 그랬는데 어 그때는 또 이상하게 제가 수원을 넣어서 그런지 15명이 수원을
넣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거 어떡하지 어 그래서 이렇쿵 저렇쿵 하기 싫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애들이 설보다 수원이 더 많으니까 다 자체 포기를 했더라고 어 저는 그걸
몰랐어요 그냥 저는 가만히 있는 스타일 수원이 당첨됐다고 그래서 왜 저희는
이렇게 제비뽑기 그런 거 안해요 그랬더니 다 스스로 포기해서 두 분이
갔습니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수원으로 왔죠 어땠어요 받아갖고음
수원으로 이제 집을 받아서 지금까지 그 집에서 살고 있는데요 너무너무
감사했던게음 북한 분들이 다 감사할 거예요 어 24시간 전기를 벌 수
있다는 어느 순간에도 따뜻한 물을 틀어놓고 샤워할 수 있다는 거 저는이
두 가지 때문에 응 정 진짜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금방 나와서 얼마나 그것
때문에 울었는지 그 두 가지가 너무 감사했고 그다음에이 한국의이 대중 교통 대중 교통 버스 전철 예 이런
걸 타면서 KTX 예 너무 많이 울었던 거 같아 북한 사람들이 너무
불쌍하고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그들이 물론 우리가 거기서 얘기는
했죠 중국도 잘 살고 한국은 중국보다 더 잘 산다 뭐 이런 기 들었지만 그
우리는 현실에 왔잖아요 그래서 너무나 그 이게 좋은 어 음식 좋 환경 좋은
조건 이런 거 벌 때마다 계속 북한 생각나는 거죠 북한에서 우리는 대중
교통이란 말도 못 들어보고죠 북한에서는 어 일단은 거주
이전에 자유가 없잖아요 예 내가 뭐 어디 가서 살고 싶다 해서 사는 거 아니잖아요 딱 지정된 지역에서 살아야
되고 그것만 해도 진짜 숨 막히는데 이동의 자유가 렇 어 이동의 자유라
내가 오늘 수원에서 여기 서울로 왔는데요 그걸 승임 받아야 승림 받는데 승리만 받을뿐 아니라 증명서를
내야 돼 근데 그 증명서를 내려면 증명서 내러 가야 되잖아 근데 그 중명사 내로 이동하는 그거 그다음에
이제 중명사 내려가면 또 바로 내줘요 얼마나 천대하고 뭐 조 갖다 뇌물
갖다 주고 그다음에 그도 조금 저처럼 병원에 같은데 오래 군무 하면 저같은
경우는 그래도 많이 괜찮아요 근데 다른 분들 같은 경우는 엄청나게 평 주민들 형 주민들은 엄청 그 한계가
있죠 그래서 급 거만에 뭐라 예 예 거리고 그러니까 거기에 버들이나이
보안소 여기로 말하면 경찰 이게 막 소리하고 쌍말 하고 반말하고 그게
당연시 하는 걸로 생각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들도 그때 국가가 저 사람들한테 저렇게 때때 그릴 권한을
졌나 보다 근데 한국에 와 보니까 경찰분들이 오히려 저희들한테 이렇게
어 무 다서 고이 하고 이제 불 예 불편한 것이 없냐 언제 시간 되면
같이 나와 식사하시죠 그리고 이제 꼭 언제든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밤이고
낮이고 신경 쓰지 말고 전화해라 그래서 제가 놀랬어요 원래이
공권력이 큰소리 치는 거 아닌가 막 이게 처음에는 혼돈이 왔어요 그리고
제가 또 어느 때 많이 감동을 받았냐면 감동이라 이보다 그건 감동이 아니에요 이게 음식을 버리는데 막
제가 막 가슴이 미어지는 거 같더 제가 혼자 있으니까 밥 조금 했어
근데 딱 요만큼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조금 밥이 있어 그러면 내가 조금 먹고 조금 올려 놨어 또 조금해
그니까 요렇게 렇게 놓은 밥이 어느 날 보니까 각 어 아 진짜 막 속상한
거예 그래서 그 온 밥 덩이를 붙잡고 제가 얼마나 막 울었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때는 지혜가 없어서 그랬죠 지금은 그렇게 안 하고 어 밥을
이렇게 해서 조금 남으면 걸걸 다 누룽지 늘려 놔요 예예 누룽지를 쫙
늘렸다가 넣어놔요가 그냥 넣었다가 어느 때 필요하면 누룽지 물 넣고 이게 끌려서 먹긴 하는데 그때는 막
일하느라고 막 정신이 없어 가지고 그 음식물 쓰레기 버릴 때 그렇게 울었어요 이게 양심 있는 행동인가
그서 계속 놔둘 수도 없고 한 2 3년 던
조금조금 그리고 더 웃기는 건 뭐냐면 이게 김 있잖아요 김을 처음에는 저희가 크게 사서 먹기보다는 좀
이렇게 도와주시는 그런 분들이 김도 갔다 주고 어머 갔다 주는데 김이 너무 아까워 가지고 계속 놔뒀어어요
나중에 못 먹으면 그는 거 생각 북한에는 유통 기한 이런 개념이 없으니까 그 김이 너무 아까워서 목자
꺼냈다가 또 넣고 또넣고 그러다가 해가 넘어가는 거예요 그 쌀알 한알이 없어서
굶어가는 예 굶어 죽는 그런 것들을 많이 봤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 건
아니다 지금은 그래도 지혜가 생겨서 막 버리고 그러진 않아요죠 오 우리
정말 큰 지혜를 얻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탈북민들이 정착 초기에 나오면은
우리는 기초자산이 없잖아요 그래서 어 6개월간에 생계 급여와 쌀과 이런
것들이 이제 지원이 돼요 그때 얘긴데 저도 들으면서도 그때 그 감동이
가시지를 않습니다 너 감 그래서 어쨌든 저희가 너무나도 행복하고
너무나도 좋은 세상에 온 거 같고 이러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
우리가 모르는 많은 분들이 수거와 많은 분들이 피와 땀 땀 그래서
우리가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거고 그래서 저는 그래요 항상 이런 어떤 얘기를 할 수 있는 제 마음이
전달될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된다면 상음 한민국 국민들께 감사하고 예
그리고 어 저희를 어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는 정부 모든 관계자분들 이런 다
감사하죠 항상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진짜 이동의 자유가 없다 우리가 그
얘기를 했잖아요 뭐 여행 같은 건 꿈도 못 보고 꿈도 행이란 말도 없어
한국에서 살려면 일단 여행 가보셨어요 예 저는 이렇게 깨끗하고 이렇게
문명하고 이렇게 편리한 나라가 진짜 외국에 나가 보면 더 느껴요 제가
이제 중국 북경에 갔을 때 중국 하면 대국이 아아 북경은 대국의 수도 아아
우리나라 공항 수준에음 발 뒤꿈치도 모은다 이러면
좀 너무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그 위생 시설 화장실 이런 거는 아예
게임조차 안 아예 이제 그 말을 말어라 예 근데 우리나라는 진짜
화장실이 하나의 그 공간이잖아요 할 있 건 핸드폰 잡 20 30분이
있다네 그래서 제가 그 부분에 대해서 너무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참 살기 좋
나라고 이런 나라를 지금까지 이렇게 일 떠오신 분들에 대해서 항상
감사하죠 예 그럼 우리 아버지 뭐라는지 알 언제 미국 여행가 우리나라도 다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미국을 가니 아니 뭐 미국 간다고 뭐 우리나라를 뭐 선대하는 겁니까 그니까 아니야 나는 죽기 전에 한국을 다
돌아봐도 못 돌아볼 것 같아 맞아요 아빠 말이 맞아 그러니까요 이것만 해도 감사한데 진짜 외국을 나간다는
거는 북한의 외교관이나 나갈 수 있는 거를 우리는 진짜 대한민국 요건 한장
들고 그냥 무사 통 가잖아요 그러면 제가 그 여건을 낼 때도 참
감동스러웠는데 그냥 내 신분증 제시하고 신호만 정확하면 여권을 낼
수 있잖아요 아무런 부대 조건이 없어 그래서 제가 여권이 나왔을 때도 참
감동이었는데 여건을 지금 어떤 생각 이거 들고 진짜 내가 비행기 탈 수 있다고 이거 사실이야 막 너무 쪼이고
너무 통제하고 너무 그 탄압하던 세상에서 살다 보니 이게 맞아 이게
맞아 근데 이제 한두 번 나갔다 오니까 맞구나 예 이런 생각이 들고 참 감사하죠 근데 우리가 대한민국에
와서 너무나도이 좋은 나라에서 사니까이 제도를 어 정말 우리
자손들에게 잘 지켜서 잘 물려줘야 되겠다음 습니다 그거는 모두기를 낳아
보니까 우리 은하를 딱 바라보면서 내가 이제 대한민국에 왔으니까 우리 딸도 얻은 거잖아요 그러면 저 딸에게
더 좋은 나라를 물려주려면 내가 열심히 살아야 되겠구나 참 그게 애를
바라보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부모 잘 만나는 거보다 나라 잘 만나는게 정말 중요하구나 부모를 잘못
만났다고 해도 나라를 잘 만나고 체제를 잘 만나면 자수 성가 의 어성
재능과 노력에 따라서 길이 열리 이거는 나라를 개떡같은 걸 만나면
부모를 잘 만나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 다 막혀 버리잖아요 그게 일단 북한이
아아 그래서 그 생각이 진짜 많이 들었어요 예 맞아요 제가 그 중국에
체포돼 중국 공안 감옥이 같이해요 진짜 우리 북한을 너무 이제 그 뭐라
그래야 될까 인간 취급을 안 하는 거야 그 에 걸치면 걸치는 대로 툭툭
차고 어 소리 지르고 그냥 인격체로 상대를 안 해요 그래서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어 나라 없는 백성이 삼가지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잖아 잖아요
기가 예 자기가 그렇게 해놓고 그게 이제 중국에 와서 그 공안 사람들이
벌써 차오신 초우 이렇게 하면 완전 거짓 치급 근데 우리 그 중국 공항
감옥에 같이 있었는데 복도를 사해 두고 건너편에 남자방
근 이게 방이 이렇게저렇게 돼 있다니까 얼은 안 보여요 자 이렇게
계속 가다 놓으니까 가끔 이렇게 너무 답답하니까 어 가끔 이렇게 소리도
지르고 무슨 노랜지 뭔지 이게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소리 들어보니까 젊은
사람인데데 너무 답답하니까 노래를 몇마디 한 거 같아 근데 저희는 못 들었는데 어떻게 들었는지 때서 사람을
패는데 중국에서 중국에서 중국 애들이 이 그게 무슨 그리 큰 죄라고 아주
그냥 딜이 패는데 막 사람이 아악 하고 죽는 소리 치면서 맞는데 누가
그걸 말래요 죽은들 알겠어요 그러니까 죽어 나간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는 거잖 엄청 많이 죽었죠 제가 그 우리
동네 고향 와서 고향 분을 만났는데 이분 말을 듣고 제가 충격에 빠졌어요
그래서 제가 북한 인권위원회 그분을 보냈는데이 중국 감옥에 갇혔는데이 남자들이 여럿이 갇혔대요 그랬는데
거기도 또 사람마다 다르긴 해요 음 감 어 죄송해요 이쁜 말만 해야
하셨어요 욕 하셔야 돼요 그랬는데 쎄 얘네를 다 불러 내더 이렇게 손을 다
묶은 상태에서 불러내고 이렇게 새 상찰 있잖아요 그 앞에다 쫙 세더니 이제부터여 땅하고 박아 그
자기 머리를 거기 박으라는 거 천벌받을 그러니까 이게 얘들이 막 박는 거예요 제 머리를 막 박는데
어떤 애들이 아파서 못 박아요 그럼 뒤에서 찬단 말이야이 색 그러니까 또 들이 박는데 애가 있잖아 정신이
이상해 졌더라 거기서 또 박아 가지고 애가 참 똑똑한 앤데 그래 가지고 그 얘기하는데 제가 있잖아요 그 장면 막
상상만 해도 내가 너무 내가 아픈 거예요 그래 갖고 뭐 그런들 어떡하겠어 이미 다 됐는데
그니까 정상인이 아닌 거지 그래서 제가 그런 걸 볼 때 정말이 나라 없는 그 서름 우리가 막 정상적인
사과와 정상적인 걸 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신분의 예
그런 우리가 다시 말 불법이죠 중국의 불법 체류아요 그런 것 때문에 마음껏
활동하지 못하고 그냥 숨어 살아야 되고 항상 마음 절해야 되고 제가 한국 올 때 무슨 생각했냐면 야
나한테 국적만 줘도 좋겠다 다시 말해 신분증만 줘도 나는 살 거 같아
그래서 왔는데 진짜 신분증이 나오던 날에 하나원에서 나올 때 우리가 임시
신분증 주고 나와서 정식 신분증 나오잖아요 그때도 진짜 그 신분증을 안고 너무너무 울었던 생각이나요
그게요 그게지 내 삶에 나를 대표하고를 그렇죠 나를 지켜주고 예
그래서 그런 부분들도 너무 감사하고 그 신분증을 내줬다는 자체는 나의 이제 국적을 인정하고 너는이 나라의
보호받을 어 당당한 국민이라는 거고 그것만 해도 감사한데 저희한테 또
임대 집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예 자격도 주고 한국에 와서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감사했던 새 삶을
시작을 하신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말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좋은 걸 좋다는데 그럼요 그럼요 맞아요 그러니까 이제 감사하다는 걸 감사하다고 표현해야 되고
독자분들이 정말 우리들이 한국에 와서 정말이 자유 대한민국에 대한 고마움을
안고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알아주셨으면 좋겠고 예 그것에 대해서
항상 이렇게 알리고 싶어요 그 데굴이 항상 이런게 달려요 우리같이 이렇게
감사함을 표현한 영상에는 세군 게 아깝지 않다 내가는 세금이 이렇게
쓰인다면 100번이고 천번이고 내겠어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얼마나 이게 저희도 보면서 그래 이분들이
피땀흘려서 일래 가지고 낸 세금으로 국가가 운영이 되고 우리 같은
사람들도 와서 기초를 이제 다지면서 살 수가 있는 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늘 감사하고
열심히 살아야 되 우리 선생이 이제 그 병원 에서
20년을 의사를 하셨는데 그 아까운 기술을 함께 와서도 사람을
살리셔서 사실은 한국에 와서 진짜 새로운 제이 인생을 살고 싶었어요 어
제가 하고 싶었던 직업은 어 평생 배운게 의사니까 우사를 하 하고
싶었죠 우사하나 마음이 있었고 저는 또 자격증이 있기 때문에 그렇죠
20년이면 로 이제 되는 줄 알고 생각을 했는데 한국에 오니까 다시 자격증을 따야 되죠 예 저희가 이제를
졸업한지가 이제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어요 20대 졸업하 예 그리고
학교 졸업하고 9 동안에 쭉 이제 우려 활동을 했지만이 공부하고 우려
활동은 또 달라요 모든 것이 새롭게 정리돼야 되고 저 같은 경우는 시간이 이제 허락을 안 하죠 북한에 애들
두고오고 그렇게 했으니까 빨리 돈을 보내줘야 되니까 막 그냥 한국 와서
바로 이제 생계에 뛰어든 거죠 가족을 책임지 예 돈을 보내져 그래 가지고
제가 한국에 와서 제일 처음에 무슨 일을 했냐면 정말 그 잊지 못할 첫 직장인데 용기를 조립하는 회사
다녔어요 1년 다녔는데 이렇게 쭉 라인이 지나가는데 여기 이렇게 앉아서
조립하는 거예요 그러면 근데 같은 자세에 앉아서 계속 조립하다 보면이 어깨가 다 나가요 어깨가 나가고 허리
아프고이 막 가슴이 다하고 그렇지만 저는 행복했 했던게이
노동이 대가로 우리가 또 구별을 받잖아요 예 통장에 돈이 딱 거칠 때
그 기품은 또 말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엔 그 대가 북한에는
이래도 대가가 없잖아요 예 1년 동안 화장품 용기를 조립하면서 우리 현장에
한 열명이 있었거든요 근데 그분들한테 제가 항상 감사의 말을 많이 했어요
예 우리가 한국에 와서 이렇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이런 모든 이런 조건들이 다
얻들에게해진 혜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게 산다고 그 표현을 많이
했어요 감사 천예 그리고 제가 그분들에게 항상 웃는 모습 씩씩한
모습 이런 걸 많이 보여주려고 했었고 그들이 오히려 저 때문에 많이
울었어요 왜냐면 항상 이렇게 울고 밝은 모습을 벌 때면 자기들이 더
가슴 아프다 그랬어요 그분들하고 지금도 연락이 되고요 그리고 제가 는
날에 그분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서 북한 음식도 대접하고 그래야 될까 끈끈한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가면서 어 살아왔어요 그러면은 그쪽으로 이게 가족들에게
성금은 좀 됐나요 그렇죠 제가 그 북한을 떠나서 연락을 못 했어요 6년
때까지 그러니까 중국에서 3년 한국에서 3년까지 연락을 못 했었어요 근데 북한 사람들한테도 많이
당했어요기를 예 이게 가족을 찾아 주겠다고 그래서 그 가정에서 약간
마음 아픈 것도 있었고 그랬는데 고향 분이 오셔 가지고 저를 자식들고
연결해줘서 그러니까 만 6년 만에 연락이 된 거죠네 그랬는데 다행히도
애들이 너무 이제 바르고 씩씩하게 잘 살아 있고 애들한테 보내려고 너는
모았던 거를 차근차근 차근 다 보내고 진짜 막 세금 낼 돈 내놓고는 다 보냈어요 엄마로서의 어떤 책임감 내가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하 상 어 살더라도 내가 엄마는 항상 너희들
곁에 있다 이런 걸 보여주라고 이렇게 돈을 보내 줬죠 그래서 그들이 또
살게 해주고 근데 사실은 데려오는게 목표인데 세월이 많이 지나다 보니까이
큰 것이 시집을 집을 시집을 갔을 더로 갔었 아기까지
보고겠다 너무 보고 싶어서 이보고 싶은 걸 하려 그러면 이게 막 살이
막 떨려요 너무 보고 싶어 이게 살이 막 떨리고 제가 그 애들이 연락이 다올 때까지 계속 이게 강직성 마비
그런 증세가 있었어요 상태를 언제까지 살아 있을까 막 이런 생각을 했는데
참 신기한게 애들하고 전화 통화가 되고 애들한테 돈을 보내면서 이게
강직성 마비가 풀리더라고요 이게 참 신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선생님을 짓누르고 있었던 책이었던 거죠 그런
거 같아 예 그리고 어 그 애들이 이 연락이 닿기 전에는 모든게 이제 이게
내가 이게 죄스런 밥을 한 숟갈 딱 들려 그러면 애들이 뭐 먹을까 어디가
좋은 걸 탁 보면 애들은이 시간 뭐 할까 여기도 좋은게 천지 계속 그런 생 요새는 애들이 뭐
초콜 그 뭐다 뭐라 그러니 초코파이 초코파이 그런 거 먹지도 않잖아요 뭐
당분이 높아서 뭐 살찐다이가 상한다 근데 그 초코파이 벌 때도 그렇게
울었어요 라면을 보면은 또 그렇게 울었어요 우리 작은 애가 엄마이 라면을에 하나씩 좀 먹었으면
좋겠다 이게 밥에 좀 옥수수가 안 섞으면 좋겠다 쌀 옥수수 안 넣고 맨
쌀로 햄밥 한번만 먹어보자 이렇게 사정하고음 그리고 한번은 더 우리
근혜가 나보고 그러더라고 엄마 엄마 중국에 갔을 때 중국 애들은 초코파이
많이 먹나 중국에는 초코파이 많나 많이 있나 물어보더라 근데 그때는 뭐
이렇게 지금처럼 슬프진 않았어요 한국에 오니까 이게 뭐라고 막 진짜 막 초코파이 봐도
눈물 나고 라면을 봐도 눈물 나고 흰쌀밥을 봐도 눈물 나고 그냥 막
이게 남들이 안 보는 데서 엄청 울었어요 근데 회사 다닐 때도 그
초코파이만 보면 우는 거야 그 초코파이 근처에 못 갔어 너무너라서 근데 어느 때부터이 중세가 좀
나아졌냐 애들이 연락 되고 돈을 좀 보내고 내가 내 마음에 위 안을 조금
얻은 거죠 엄마로서 뭔가 했다 너희들이 엄마가 보낸 돈가 뭐라도
사서 먹겠지 그때부터 이게 증세가 조금씩 내려갔어 안 그러면 나는 못
살 것 같아 우리는 진짜 울기라도 하잖아요 맞아요 울음조차도 내 보지도
못하고이 세상 바깥 세상 있다는 것도 모르고 죽어 간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
이게 똑같이 인간으로이 인류에 태어나 가지고 예 우리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이렇게 개 돼지만도 못하게 죽어 간다는데 참 이게 분노를 안 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그러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와서 제일 좀 안타까웠던게 한
세 가지 분들이 좀 안타까웠어요 한 분은 한국에 금방 오니까 병원에 같이
근무하던 분이 먼저 오셨더라고요음 그분은 우리 회사에 보이라 공이었다 공 나이가 좀 있죠
근데 그분이 저보다 훨씬 한 국에 먼저 오셨는데 가족이 다 왔어요 근데 와 보니까 그분은 벌써 이제 병원에
이제 식물 인간으로 누워 있더라고요 제가 왔을 때 그래서 가족들이 계속 면에 다니는데 제가 와서 한 5년
만에 돌아가셨거든요 그니까 그게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 어떻게이 좋은 나라에 와서 병원에서 사람도 모알라
보고 있다가 돌아가시고 그리고 한 분은 북한에서 그 보위부에
잡히셨나요 막에 판결이 나면 내가 좀 살아남기가 힘들겠다 그래 가지고 이분이 그 보위부 조사하는 방에서
보위부 직원들이 출입 문에다 쇠를 잠그고 밥 먹으려 간 사이에 어 아마 손을 안 묻 건가 보죠 그러니까
자기네가 문을 걸었으니까 마음을 놓고 또 여자분이 그래서 창문밖을 내다 보니까 3층이 드래요 근데 이분이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하고서 내려다 보니까 잔디밭에 있더래요 그래서 떼 내렸는데 살았어요 살았는데 한국 왔죠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한국 왔는데 한국 오셔 가지고 정말 열심히 살았어 이분이 그래 갖고
식당에서 돈을 고기고기 먹고 먹고 모고 이렇게 해서 자식들 데려오고
엄마 데려오고 형제 데려오고 이렇게 데려왔 그든 그래서 저도 그분이 너무 존경스럽고 더보여 가지고 그분 가게도
갔었어요 갔는데 그분이 가끔 얘기하는데 이게 허리를 못 쓰시더라고요
아파서 그렇게 하시는데 병원가 보세요 제가 그랬더니 아유 너무 힘들게
이래서 아프겠죠 이러는 그래 갖고 이제 자기 가족들 다 데려다 놓고 어느날 이분이 일하다가 쓰러진 거예요
쓰러져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척추 암인 거예요 암 그러니까 내
생각에는 아마 뛰어내렸을 때부터 이상 충격을 딱 받으면서 진행은 그때부터
됐어 근데 이분은 그걸 의식하지 않고 오직 내가 돈을 벌어서 내 새끼
데려오고 애 남자애 둘 있거든 그 생각에만 멀도 하다 보니 제 몸이 녹은 걸 몰랐죠 그래 가지고 이제 암
진단을 받아 가지고 그다음부터 이제 방사선 치료하고 암하 이러는데 그
제가 중간중간 그분을 뵀어요 중간중간 뵀는데 어느 날 이제가 보니까 항암을 해 갖고 머리가 다 빠져서 머리가
홀랑 빠졌더라고요 모자를 계속 쓰고 계시는데 내 손을 꼭 잡고 그러더라고 다 필요 없다 어떤 자식들이 잘되는
거 벌려고 해도 그렇고 이런저런 걸 다 생각하지 말고 건강을 좀 보면서
이래라 그게 제일 지혜로운거다 그 얘기를 항상 하면서 근데 그분이 어느 날 돌아가 하셨어요 그리고 또 한
분은 북한에서 내려오셔서 자식들 두 명 부인까지 오셨는데 한국에 와서
1년 만에 위암 진단을 받은 거예요 그래서 위암 진단 받 수술 날짜까지 잡았다가 어 수술하기 전에 위추를 한
거죠 그래서 다시 또 진단 했더니 유의하고간에 암이 퍼진 거예 그래서 이분이 진단받고 1년간 투병하다가
돌아가셨어요 제가 그 세 분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프죠 좀만 신경 쓰면
그렇게 빨리들 가시지 음 저도 마가지 고에 대한 그리움 자식들에 대한
책임감 이게 막 쫓는듯한 삶을 살아요 그래 가지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자기에 대해 건강 얘기하는 거를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아니라는 거 꼭 이제 어 건강을 챙기셔야
되는데 어 우리 한국에는 얼마나 건강 식품도 많고 그런 많잖아요 그래서
지혜롭게 건강을 챙기시고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제가 강의도 많이 하고 이제 내비게이션처럼 또 안내도
해주고 그런 일을 지금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의사의 어떤 자격증은 여기서
따진 않으셨지만 자기의 실제적인 그걸 가지고 또 역할을 하면서
공사하고는 너무 감사합니다 귀한일 하고 계시네요네네 그래서 어 어떻게
보면 지금이 제일 긍지도 있고 좀
자랑스럽고 지금은 참 행복하고 어 한국분들이 그런 질 을 많이 해요 그
TV 어 이만갑에서 북한에서 그렇게 죽어 간다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최근에
만났던 어떤 분은 그 얘기까지 심지어 하시더라고 그게 연출된 거 아니냐 막
이런 얘기도 하시는데 그때 제가 막 억장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우리가 말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면이 제도에서 정상적인 제도에서 살았기 때문에 북한이란 나라는 정상적인
제도가 아니다 그래서 거기서 이러한 거기서는 딜레마 거죠 우리는 정말
목이 터져라 이렇게 이렇게 말을 하고 싶은데 도저히 정상적인 사회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을 이해가 안 되 이만가 그거 다 작가들이 써 주죠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어떤 작가가 어떤 또라이 같은 작가가 그런 거를
지어 내겠냐 아니에 여기게 한국의 막장 드라마가 나와도 이만갑 같은
드라마는 없어 없어요 정말 여러분 사실입니다 북한을 제대로
알려면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증언을 들어야 됩니다 예 참 이게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아휴 그리고 어떤 분들이 한국에서 이게 잘못 이해하시는게 뭐냐면 북한은 사회주의
제도다 그러니까 북한은 공급 체계다 그러니까 이제 그림으로 문의는 맞아요
근데 공급이 끊어진지 이제 거의 20년 넘었거든 그러니까 이게 한국에서 정치인들이나 또는 북에 데
관심 있는 분들이나이 분들이 정확히 아셔야 될게 뭐냐면 문의만 사회주의
실지 사회주의에 해당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이제 거의 20년 돼간다 20년 넘어서 90 90년 중반부터
그렇게 됐으니까 그렇지 그러니까는 포장만 사회주의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라는 거 주는 대로 먹잖아 짐승도고 한국이 왜 잘살
수익을 받 일하는만큼 보상을 받고 누 누구든 기업인이 될 수 있잖아요 그 2까지도
정해주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 어른은 뭐 몇 그 아기는 몇 그 이렇게 다
정해 놓은게 북이에요 그 그고 그 정해 놓은 걸 약속도 안 지키고 그렇
그래서 결국엔 죽게 만들고 배가 고파서 살기 위해서 나오면 짐승 잡듯이 때려 죽이고 저기 미친 저
마귀의 나라죠 저기 아 저건 나라다 당국도 아니고 저 집단입니다 사이이 노예도 노예 제도지 완전히 노예 제도
여러분 분명히 말하지만 무너져야 될 대상이지 우리가 껴앉고 가야 될
대상이 아닙니다 북한을 끌어 안아야 될 대상은 주민들입니다 열받았어요 진 죄송합니다 목소리를
해서 주민들은 우리하고 똑같은 국민이지음 통일이 언젠간 되겠죠 또
어 통일 이전에 또 우리가 어떤 교리가 이루어질 거라고 분명히 저는
믿고 있음 든 그렇게 돼야만 그때 가서야만 비로소 우리 자식들을 만날
수 있잖아요 그래서음 그때 내가 우리 자식들을 만났을 때 엄마가 한국에
와서 얼마나 걸음걸음 너희들을 한 시도 잊지 않고 너희들을 해서 내가 열심히 살았고 애들이 봤을 때
안타까운 그런 엄마가 아니라 어 당당하고 씩씩하고 또 건강한 또
사회를 위해서 공원을 하면서 어 사는 그런 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 아
세상에 진짜 그러기 위해서 선생님도 건강을 잘 계셔야
예 자식들은 어때요 자식들은 엄마가 한국에서 이렇게 열심히 잘 살고
있다니까 반응이 어때요 애들이 이제 너무 둔둔의 하죠 아 그래도 엄마가
우리들에게 희망의 등대다 엄마가 그렇게 목숨 걸고이 땅을 탈출해서
나가서 우리들이 살 수 있는 탈출구를 열어줬습니다 열어줬다 그러니까 애들은
항상 엄마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단 하나는 뭐냐면 애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보고 싶을 때 못 보는 야여
여권 한장 가지고 전 세계 다 가는데 북한만 못 가요 올 수도 없고 진짜
야 빨리 이게 뭐 어떻게 좀 좋은 진전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 전에 선생님 선거
처리였다아요 이게 이제 한국의이 선거를 보면서 어떤 걸 느꼈어요이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 아이 선거
제도가 이제 선진국 북한의 선거하고 비교해 봤을 때는 너무 우월 음
북 선거가 있어요 근데 100% 찬성투표 그니까 우리는 선거 처리는
막 노래 부르고 난린데 왜 선거 하는지도 몰라요 그리고 누가 누군지도
몰라요 그냥 선거 장에 가서 표 한 장 주면 들어가다가 놓고 나가면 돼 그게 선 거예요 그래 갖고는 사진 한
장 내려고 공약도 없어 없어요 그냥 우리가 표 받아서 너은 끝이에요 그래서 이런 이런가보다 했는데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이면 왜 거하지 어 이럴 거면 왜 선거하는 생각은
잠깐 들었었지만 그 제도에서 그런 생각을 너무 깊이 하면 문제가 생기잖아 그래서 그리고는 또 조금
있다가 뭐라고 말하냐면 프로 찬성 투표입니다 그러더니 또 어느 때부터는 99. 무슨 몇 % 그래서 0. 몇
프는 왜 깎지 그랬더니 그때 우리 오빠가 그랬나 누가 그러더라고 저게 세계 눈을 의식해서 그런다는 거예요
그래서 맨날 100% 찬성 투표 라더니 조금 뭐 0 19 몇 프라는
그거 그니까 이게 놀리는 거지 사람을 응 그래 가지고 근데 한국에서는 나의
의사를 표현하는게 투표권으로서 국민의 권리를 예 행사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한국 국민들은 내가 갖고 있는이 소중한 한표를 어떻게 투표할 것인가에
대해서 엄청 신경을 써요 저는 그게 맞다고 보거든요 예 근데 조금 이제
그 민주주의가 다 좋데 조금 부작용이 뭐냐면 어떤 이제 선거 철회라는 약간
이제 그 프레임 같은게 몰아가는 어 프레임 같은 그런 것에 속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저는음 나를이 자유의 나라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기초한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어느 정당이 들어서야 더 안전하고 어
더 우리 후선 만대까지 잘 지켜 줄 수 있느냐를 잘 판단하고 성
좋 절대 개인이 하는 어떤 달콤한 퍼플리즘음 막퍼주는 거 망하지 당장
너한테 뭐 얼마를 주겠다 저는 그런데 절대 속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들이 퍼주기 포퓰리즘 정책이 중에 우리 자손들의 빚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가 저도 살아보니까 결국엔
국민이 뽑아 줘야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은 국민이 이 사상적 빈곤이
없어야 돼 머릿속에 그래서 이게 국민이 똑똑해야 깨여 있어요 어
국민이 똑똑해야 정신도 똑똑한 거 뽑고 나라가 지켜지고 발전하고 그게
맞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부족한게 많은데 좀 똑똑해져야 될 거
같아요 충분히 똑똑하 아 너무 많이 진짜 한국에 살면서 선거철도 뭐 겪어
보고 막 이렇게 했는데 진짜 북한에 비하면 진짜 대한민국 거성은 너 는
너무 우월하고 이제 정말 긴 시간 동안 선생님 너무 귀한 얘기들 많이
해 주시고 눈물바다를 만들어 주수 감사합니다 그래요 앞으로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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