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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연 풀영상] 북한 대학생이 한 고백에 충격받은 국정원 조사관!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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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49 views Jan 18, 2025 #강은정 #강사 #가수
간증, 강의, 공연, 강은정TV 출연 문의:
kang22tv@gmail.com
#강은정#한국#가족#가수#강사#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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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 Castles
The Green Orbs
Sand Cast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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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Comments
Sejin Lifeforce 生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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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뉴스TV
3 months ago
송혜연님 한국에 오신 것을 대 환영하며. 두분 다 사랑합니다. 샬롬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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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론-b5o
3 months ago
감사합니다 목사님하늘의은총이깃드시길너무감명스렇습니다 은정씨도 너무고맙습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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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거인-v5m
3 months ago
은정씨 혜연씨 응원해요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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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철-q3y
3 months ago
좋은일 많이하시고 유쾌한 송혜연씨 즐겁게 잘들었습니다.
좋은일만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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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일고
3 months ago
반갑습니다 손혜연님 대단히 환영합니다 대한민국 화이팅입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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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eply
@쏘왓SoWhat
3 months ago (edited)
이분 엄청 재미나시네요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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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토형
3 months ago
남북이 통일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모든것을 다합시다.
두분을 사랑하고 축복해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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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jmishra1745
7 days ago
옳으신 말씀을 하네요 죽을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노력해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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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8537
3 months ago
우유빛깔 강은정님 오늘도 넘나 반가워여 즐거운 주말 되셔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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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식배-e9q
3 months ago
훌륭하십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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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nor7343
3 months ago
큰사건에 연루돼지 않었으면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에 오지 않았을것 갔네요. 우리 모두는 알수없는 운명속에 살고 있습니다. 모두 함께 행복 했으면 좋겠어요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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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o1e
7 days ago (edited)
송혜연씨! 늘 고운꿈 이어 가시고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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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미디어
3 months ago
송혜연씨 대단하시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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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어-h3w
3 months ago
훌륭한 방송인데 조회수. 좋아요 많으면 좋겠네요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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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보이-h8o
1 month ago
송혜연 대표님 쵝오닷^^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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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나라-b6q
3 months ago
"우리는 하나다"
걸어서 금강산 ~~~~
걸어서 평양 ~~~~
걸어서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그 날을 위하여 ~~~~
남녘과 북녘이 하나가 되고
휴전선이 붕괴되어 자유통일대한민국이
되는 그 날까지
강은정님 화이팅
☆한민족은 하나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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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nor7343
3 months ago
괜찮아요, 맞아요 .살면서 젤 쉬운게 공부라고 해요. 삶이 얼마나 치열 합니까.. 공부만 한게 아니고 여러 삶의 현장을 경험 하면서 공부를 하면 배가 되는거죠. 좋음을 진정으로 느낄줄 알고 감사함을 아시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분 이십니다. 좋은 말씀 많은 사람들께 귀감이 될거예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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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jpee1216
2 months ago
너무 멋있어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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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gun-bn6fw
7 days ago
대단히 훌륭하십니다
잼나는영상 감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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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혜-n4b
3 months ago
우리 아들이 보고 생각좀 많이하고 반성하고 도약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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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그때 놀랬어요 정말 그렇게 굶어 주고 가는데 응 북한은 어쨌든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출세 출세를 위해서는이 부모들이 막 갖다 고이는
사람 부모들이 많은 거예요 여기는 정말 내가 봤을 때는 기회의 땅이에요 그리고 그때 코난 행원 식에 우리
집에 정말 많은 아이들이 와서 아침마다 문두 들렸어요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강은정 t 은정 예 오늘도 또 새로운 대사님을 아주 밝 그라고 하고 해
가지고 또 모시고 나왔어요 긴말 필요 없이 이분게 이제 직접 또 얘기를
듣기 전에 짧게 소개를 해 드리자면 이분은 정말 대한민국에 와서 탈북민
중에 공부를 제일 많이 하신 분이거든요 예 그래서 어 공부를
비롯해서 또 대한민국의 자유를 찾아오기까지 그 가정들을 또 빼놓을
수 없잖아요 오늘도 좀 좋아요 구독 눌러 주시고 잘 부탁드리 입니다 어서
오세요네 안녕하세요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아네 저는 어 하나로
드림 비영리 단체 대표를 맡고 있는 성혜연이라고 합니다 안나서
반갑습니다니다 그러면 하나로 드림은 뭐 하는 것이에요네 하나로 드림은 어
이제 현수가 이제 한 130여명 정도 되고요네 거기에 이제 그 다 회비를
내세요 그중에 탈북민 30% 후원을 하는 기간입니다 음음 후원금으로
그러면 뭐 하냐 국내에서는 이제 탈북민 대학생들 장학금을 지원하고
그리고 이제 그이 2세들은 영어 교육을 지원하고 있고요 그리고 이제
특별히 이제 아이를 이제 낳는 저도 이제 아이를 낳을 때 누군가가 기저기
값을 이제 1년을 지원해 주셨어요 근데 그게 너무 고맙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제가 생각을 했죠 나도 이제
내가 성공하면 꼭 이렇게 되돌려 주리라 그래서 1년간 특별히 대학생
출산했을 경우에 1년을 저희가 아기가 있으면 지원을 해드려요 예 그렇게 아기 이제 출산 용품을 지원을 하고
그 중국에는 중국내 이제 심토 탈북민 심토 그리고 운영할 수 있는 자금도
보내주고 거기에는 아이들 영어 교육도 시키고 그리고 한골 교육시키고 이런데
저희가이 후원금을 사용하고 있고 그러니까 중국에 지금 그 신분을
보장받지 못하고 숨어 살고 있는 탈북민들을 어떤 보호하는 그 기관을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보안상 다 구체적으로 말씀은 못 드리고 하나로
드리이 이렇게 어 선한 어떤 예 약자들을 위한 예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돕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고 많이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표님 그러면 고향은
어디세요 고향은 이제 함경도네 청진 거기 바닷가 지역 있잖아요 맞아 바닷
지역이에요 바닥 물고기 많이 먹고 사셨어요 아 그 뭐
그거야말로 뭐 정거리 청어 뭐 이런 건 기본이고 뭐 미혹은 뭐 그냥 많이
먹었던 거 같고 아 바닷 가니까 어 바닷 가니까 뭐 오징어 뭐 이런 거는
뭐 기본은 낙지 이런 거 기본 하여튼 임연수 그니까 바다 옆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물고기랑 친한 거 같아 지금도 어 지금도 물고기 그리고
우리 그때는 여기서 말하는 그 어 이제 여기서 말하는 그 파레 이런 건
먹지도 않았어요 그거 그냥 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오니까 파해가 아예 고급음식 그리고 맞아 맞아
파라는게 그거잖아요 새파란 거 그러니까 파레 그게 여기서 파레라 해요 굴국 밥에 넣어주 그 그 그거
그거 북한에서는 안 먹었지 어 안 먹었 받았었는데 안 먹었었어 그 여기는 이거가 에서
먹더라 그리고 약간 이렇게 긴 거 내가 이제 이름도 다 잊어버렸는데 얼마 전 나 그거 뭐지 하니까 어떤
분이 북한말로 말해 주는데 또 잊어버렸어요 튼 그거 여기서는 이렇게 좀 이렇게 밤새 깔 라는데 바다풀
해가지고 이제 식당 가면 이렇게 매워서 나오잖아요 그것도 북한에서는 초창기는 안 먹다가 이제 고난의
행군식이 되니까 이제 채취해 가지고 국수 미 미역이랑 같이 채취해서 다시마랑 해서 미역 국수 나올 때
그게 나왔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이게 먹는 문화도 다르구나 예
청진의 삶 추억이 많죠음 그러게요 그 바닷가에 가서 실컷 놀아 보셨어요
많이 놀았어요 바다에서 수영도 많이 하고 어 뭐 여러 가지 계기가 있는데
뭐 대학때 받아가서 놀을 때는 남자는 저 밑에 가서 수영하고 여자는 자
이러는데 내가 후에 이제 가봤더니 같이 하더라고 오 그게 약간 좀
특이했어요 어 조금 시간이 지나서 많이 뭐 발전이 됐다고 보면 되겠네요
근데 난 너무 궁금한게 민국에 와서 예 진짜 정말 정착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게 뭔지 아세요 뭐예요 홍어를 먹을 줄 알아야 돼요 홍어 홍어가 진짜 맛있더라고요 홍어라면 걸 먹어
보셨어요 여기서 내가 다 잘 먹는데 나 진짜 아 비리비리 하면 다 좋아는데 나 아직까지 홍어를 못 먹는
거 같아요 야 무슨 말도 안 되는 런 그러니까 홍어를 먹으면 한두 손만
먹어요 근데 그거를 막 좋다 정도로 내가 못 먹더라고 맛있다라는 거를 못
느낀 거 같아요 그러면 전복이 있어요 북한 전복은 못 봤어요 그죠 북한은
대신 이제 전복이랑 비슷한 소라 어 어쨌든 저는 그게 너무 궁금했는데
바닷가에 대해서 이렇게 또 듣다 보니까 목는 문화가 차이가 확실히
있네요 확실 그렇죠 말했죠 그러면 거기서 이제 사셨는데 내가 알기로는
대표님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한 걸로 알고 있어요 많이 한게 아니라 북한 사람이 면 다 그렇게 하는 줄
알았는데 와보니 나랑 똑같은 나이 도래 분들하고 이렇게 얘기해 보면
나는 다른 세상에서 살다 왔나 어떤 때 이런 느낌을 종종 해서 초창기에는 내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말 못
했어요 왜 말하면 나는 왕따당할 까봐네 뭐
간부였다 먹었어요 그렇 맞아 잘 먹어 가지고 그니까 고난의 행군 시기에
대학을 다녔잖아요 그러니까 고난의 행군 시기에 다들 어려워서 내 돌에는 거의 다 가족 살리고 부모 살리고
한다고 막 산에 풀 들어 다니고 바다에 미역도 들어 다니고 막 이랬대
그래 공부를 못 했다 그러는데 난 또 그 사람들이 또 이해가 안 됐어요 아니 왜 그 그때 왜 공부를 안 했지
그 우리 때는 우리 때 막 7위로 막 탄다고 막 막 엄청 공부를 많이 시켰고 물론 일어가
뭐예요 일어 몰라요 일어가 뭐냐면 최우 동생들 중에서도 학교에서 뽑아
가지고 김 김정일이가 어 고등중학교 졸업할 때 7월 15일 날 졸업을
했어요 그래서 71호 상이라 그래 가지고 최고의 영예 상이에요 7호를 타면 대학을 내가 선택해서 갈 수
있어요 소년 영예상 학교에서 하나밖에 없어요 학교에서 하나도 탈까 말까예요
그러니까이 학생은 어 소년 어이 그러니까 최고의 영예 상을 타는
거예요 이런 상을 타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전교 상인가요 전교 상이
아니지 전교 1등이 아니지 전교 1등 넘어서는 거죠 그니까 이거는 도에서
도에서 한개 두 개 내려오는 상이에요 도에서 그러면 이런 아이들은 무조건 당일이에요음 그니까 이거를 그
쟁취하는 거가 굉장히 어려운 거예요네 그래서 북한은 군대에서 나올 때도 대학 폰 그걸 받으려 그러고 입당하고
그러고 계속 올라갈 수도 계속 만들어 놓는 거예요 그 저는 물론 알죠 우리
시청자분들이 알아셔야 돼 이게 진행자의 역할입니다
진행을 못하 여러분 저 있잖아요 지금 유튜브 매일매일 나 오늘 이 첫
시작이다 시작이다 하면서 지금 시작하고 있어요네 예 그래서 71호 상에
대해서 설명이 됐고 그래서 그 7 7일로 상 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학교 따로 뽑아요 그럼 그때는
어땠냐면 오후에는 이제 조금씩 오후에 1화로 보낼 때요 그니까 우리 때 소조가 있었어요 소조 소조 해봤어요
소조는 좀 재능이 있는 친구들이 거기 들어가서 그렇구나 그렇지 않아요 북한이 원래 소조는 어 학교가 이게
말하면 여기 말하면 반가우 같은 거예요 오 학원 가잖아 대부데 한 원래 북한이 이제 경제적으로 괜찮았을
때는 오전에는 공부를 시키고 오후에는 다 소주 활동 그랬어요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이학교 때 저기 말
초등학교 때 저는 처음에는 손풍금을 배웠어요 그래서 제가 지금 손풍금 치고 기타도 치고 피아노도 치고
진짜요 하머니 아 조금씩 다 하는 거지 나 왜 한 번도 못 봤지 10년 됐거든요 아이지지 제가 성도칩니다 예
그 기타는 우리 동생 기타를 엄청 잘 치고 우리 엄마가 가야금 수입니다 아
우리 엄마가 가야금을 안 가르쳐 주더라고 그러다가 이제 3학년 때 내가 공부를 못 하는 거야 초등학교
그니까 엄마가 공부를 해야 된다 그래서 수학 소조 활동에 참가한
거예요 그러다가 공부 좀 올라가니까 내가 근데 지금은 좀 약간 통통하지만
어릴 때 제가 몸이 많이 약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좀 건강하게도 좀 시키고 좀 이제 오해 하기 위해서
제가 별명이 너무 먹도 이제 뼈밖에 없어가지고 외가리 그 정도로 뼈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거저 당감 같습니다 여맹 연장 하다 오심 같습니다 두불
아니고도 통통하니 내가 옛날에도 많이 많이 너무 빼빼 말라서 이제 사람이
이제 약간 정신적인 어떤 것도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그래서 체용 무용을 한
거예요 어 그 체용 무용을 하면서 조금 건강해지다 그다음에 중학교 올라와서
중학교 3학년부터 웅변을 배웠어요 그러니까 많이 지금 공부를 하셨는데
아 그니까 그게 그게 이제 공부를 한게 아니라 그 북한에는 그렇게 오후에 소조 활동을 했다고요 근데
이제 언제부터 여기 살짝 없어지 했냐면 내가 고등중학교 중학교 4년
때부터 조금 조금 국가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소조 활동도 제한적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때 공부 잘하는 사람들만 학교적용 여섯 명씩 뽑아요 그래서
따로 공부를 시키는 거 올림피아드 문제 공부시켜 시켜서 이들을 어떻게 내보내냐 이제 말하는 7일로 시험을
구역에서 보고 여기서 통과하면도 아시 예 보고에서 통과하면 도에서 봐요
도에서 끝나면 중앙에 올라가네 그근 나는 구역에서 떨어졌지 아 잘되네요 한국 올 운명이었어 왜 떨어졌나 근
그때 선생님 뭐라 그랬냐면 우리 치료로 시험 볼 때 어 담배 한 각이랑 한각 담배 저 비싼 거 한
각이랑 한 각이에요 한 보고가 아니고 한 각이랑 비싼 술을 갖고 오라고
했어요 선생님 어 그래서 우리 다 준비해서 갔어 근데 다른 학교는 차로
오는 거야 차로 매물이 미다 그래서 제가 아직도 기억나는게 이게 안
되겠다 싶으니까 이게 우리가 수류탄 던지기 할 때 있거든요네 그게 그러니까 7일로 7월 시험 때 시험만
보는게 아니라 체력 시험도 쳐요 그 던지게 하는데 제가 그러니까 그 체력 시험 중에 하나가 수류탄 던지기가
이게 설명이 필요하다고요 예 아마 이런 걸 말하는 사람 없을 거예요 7로 어 시험에 도전해 본 사람이
없으니까 이거 막 할 이때까지 없었죠 없었어 그래서 7 시험 제가 진짜
그런 건 다 해어 온 거 같아요 그래서 그래가지고 그 갔는데 야 그때 놀랬어요 정말 그렇게 굶어 주고
가는데 북한은 어쨌든 출세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출세 출세를 위해서는이 부모들이 막 갖다 고이는
사람 부모들이 많은 거예요 그 우리는 그냥 선생님이 그냥 담배 한가에 술 하나가 주라니까 고급술 갖고 오라
그러니까 그렇게 갖고 가는데 우리는 떨어져서 근데 유일하게 딱 한 명 진짜 실력 있는 남자애가 한 명
붙었지 걔는 결국 치료로 땄어요 어 지금 가서 돌이켜보면 우리는 실력이
없었다 난 그렇게 생각하려고 실 그래 실 그때 그래서
우리가 구역에서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지금 좀 궁금한게 생겼는데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막 굶어서 죽어 나가는데 고등학교 졸업할 때 7 7리로 그거
상을 타겠다고 뇌물을 갖다가 그냥 차러 했다는 거잖아 그 오늘 어떤
직책을 가진 부모들이 그렇게 해요 여기는 정말 내가 봤을 때는 기회의 땅이에요 그래서 저희도 정말 우리
아버지가 옛날에는 조선을 위하여 배우자라는 탑을 학교에서 하나씩 다시어야 됐을 때 그 세멘트 모든 철
이걸 우리 아버지가 다 가서 갔다가 냈어요 그래도 그거 못 했다니까 그래도 그걸 못 했어요 그러니까
예정돼 있어요 내정자가 그래서 결국 못 하고 나왔지만 그래도 도전을 해서 구역에 가서 떨어졌다는 것도 나중에
대학교 가면 그게 다 이제 문건으로 꼬리요 그렇지 어쨌든 다 좋은 어떤
그런게 영향이 되는 거예요 북한은 그런 사회예요 그 이거를 나중에 내가음 민국 와서 보니까음 어떤
분들한테 그런 기회조차도 가질 수 없는 분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나는 너무
안타요 예 듣다 보니까 너무 진짜 가슴이 아파요 아까 얘기하셨어요 여기
한국에 와서 만나본 탈북민들은 정말 그 기회조차도 가져보지 못했다 근데
대한민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얘기하셨다아요 어떤 측면에서 그렇게 보셨나요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이제
말했던 것처럼 공부를 내가 아무리 잘했어도 돈이 없으면 출세를 할 수 없잖아요 예 또 내가 출세를 할 수
돈은 있는데 또 공부를 어떤 학력이 없으면 또 못 따라가고 그다 출 어떤
뭐라 그래야 되지 북한으로 말하면 네가 무슨 신분이 뭐 이런게 또 우리는 모르지만 그게 다 문건에
따라오니까 그런게 북한은 이렇게 딱 어릴 적부터 그게 딱 규정되는 거예요
근데 이제 대한 내가 나도 몰랐는데 여기 와서 내가 그런 분을 만났어요 여기서 어 그러니까 그분은 옛날에
이제 대지주의 딸 이었던 거예요 할아버지가 대주 지었는데 국가에 그 땅을 바쳤어요 근데 자기는 몰랐는데
공부를 그 학교에서 제일 잘했어요 그 도에 1등 할 정도 잘해 실제 그분은 잘했어요 우리 우리 학교 들어올 때
1등을 들어오셨어요 여자분 홀로 누르셨어요 지금 60이 넘으셨는데 근데 그분이 그 아가씨로
늙으셨고 처녀로 이제 북한 분이시고 박사님이 지금 내가 그랬어요 아 북한에서도 공부 잘 했을 것 같다 제
얘기했더니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자기는 모든 기회를 북한 박탈당했다
그러면서 그 자기 이야기를 주는데 난 깜짝 놀랬잖아요 아니 도에서 아지 1등 할
정도인데음 국가에서 막는 거라 대학을 안 보내 주는 거야 어떤 농천 농업
대학을 보내준 거예 근데 거기서부터이 어 이분이 완전 자자 이제 좌절하게
된 거죠 그래서 결국 어 아버님이 자살했나 자살하고 하여튼 아 할아버지가 자살하고 하여튼 그 그리고
맨날 숙박검열 당하고 나는 숙박검열 태어나서 한번 그냥 왔던 거 같아요
일생 그분은 일주일에 세 번을 수박 대요 난 그거부터 깜짝 어떻게 내가
똑같은 북한에서 태어났는데 근데 그분이 여기서 박사까지 있잖아요 북한에서 기회를 못
잡았잖아요 그니까 그거 통해서 제가 북한의 이면을 또 여기 와서 그걸들은
거예요 그니까 여기는 제가 생각할 때는 그래요 우리가 처음 들어왔을 때 이제 어린 아가씨들을 만나고 이러면
제가 그래요 공부를 해라 그니까 가장 빠른 길이 공부를 하는 길이다 그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를 해 없 때
공부에 대한 너무 두려움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초창기에는 5만 원씩 줘 가지고 학원으로 보냈어요
5만 원씩 줘서 어떻게나 학원으로 보내서 자격이라도 따라 그리고
이양이면 빨리 이분들 돈을 빨리 벌고 싶어 가지고 어 돈을 벌어야 되니까 1년짜리 학원에 가요 그래서 자격을
1년 안에 따요 근데 내가 그 아가씨한테 옛날에 그랬어 10년 전이었던 그 아가씨한테 내가 가 그때
그랬어 너는 내가 봤을 때는 간호대학을 가라 내가 이미 10년 전에 말을 했어요 그때 이제 저희가
이제 쉼터를 운영하면서 그 아가씨를 이렇게 지원을 했거든요 근데 그
아가씨가 자기는 회계학을 공부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1년을 회계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줬어요 따고 취직을 한 거야 근데 취직을 하는데 한국은 4년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사람은
어때요 따다다닥 하고 5시면 퇴근 한데 근데 얘는 시까지 그거 하는 거예요 그 월급 차이도 엄청나죠
그러니까 얘가 이제 거기서 1년 반만에 이제 좌절이 왔대요 그리고 그래도 1년 그때 내가 늘 그랬거든요
들어가서 무조건 1년 있으세요 그랬어 내가 취식을 하면 무조건 내 경력이
1년이 쌓여야 어디 가서 내가 1억 서를 낼 때 사람이 나도 내가 사장이라도 어 얘가 그래도 대한민국
와서 공부도 하고 야 한 해사에 1년 동안 가서 이렇게 했네 아 얘는 좀 그래도 끊기가 있네 하고 바뀌다
그래서 그런 거를 제가 이제 우음 칩을 주셨군요 예 많이해서 그래서 그때 내 생각이 많이 나더 그래요
그래 1년 반 하고 나온 거예요 그리고 전화가 왔어요 아 지금 간호대학 3학년 됐어요 그 지금
이번에 미국도 갔다 왔거든요 미국쪽 간호대 대학 쪽에서 초청해서 근데 그 자매가 나한테 얘기를 하는게 뭐냐면
그때 어 처음에 대표님이 나한테 공부를 하라고 했을 때 그때 간호대학을 갔을
걸 그러나 수는 안합니다 사이를 경험해봤기 때문에 근데 간호대학이
쉽지 않거든요 영어도 많이 배워야 되고 막 그런데도 그저 아주 열심히
하는 자에요 예 그래서 저는이 대한민국에서 기회의 땅이다 그러니까 출신 성분 안 보 그니까 안 보죠 딱
노력한 결과만 보잖아요 그러니까 노력을 안 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대한민국 발전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대한민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얘기를 해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우리 어 성혜연 대표님 얘기를
이어가도록 할게요 그 어떻 잘 살게 된 배경이 있어 그러니까 그게 이제 93년 92년도겠다 93년 요때
평양에는 무욕 대표부 사람들이 중국에 갔다가 기차 안에서이 그 서류를 다
잊어 버렸대요 근데 우리 할아버지가 옛날 중국 출생이 근데 우리
할아버지가 자신이 대학을 안 가고 누이 동생을 그 옛날에 대학을 보냈어
여자를 그래서 우리 고모 할머니가 중국에 있는데 거기서 이제 그 고모
할머니하고 중국에서 같이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 평양 대표부에 그 있어서 그때 그 서류를 다
잊어버리니까 우리 고모한테 부탁을 한 거예요 고모 할머니한테 찾아달라고 그러니까 도와 달라고 그래서 고모
할머니 집에 거주하면서 고모 할머니가 그 돈을 다 내서 그 무욕 대표부 사람들이 어떻게 뭘 할 수 있도록
도대 그 그게 이제 뭐 중앙당에 보가 들어가서 초청을 받아서 온 거예요 아
그래서 어느 날 우리 집에 까만 승용차 두 대가 와 가지고 나는 학교 다니까 나와 나하고 우리 동생 막내
고무만 남고 나머지 다 올라갔 아아 평양에 평 그러면서 그때 이제 투자를 받은 거죠 그러니까 투자를 받는
조건으로 우리 평양에 제가 우리 많이 갔거든요 평 갔을 때 딱 가면 이렇게 김 김일성과 옛날 김일성과 단둘이서
이렇게 사진 찍은 사전이 집에 도배가 되는 집이에요 그러니까 중국 우영근 출신으로 평양에 들어와가지고
를면서 다시 중국 가지 않고 평양의 고의으로 남한 거예요 지금 다 이제 싱가포로 다 이민을 갔어요 예 근데
그들이 고한의 군 때 우리를 투자해 줘 가지고 그래서 남들보다 오히려
고난의 행군때 더 잘 먹고 살았다 그래서 내가 많이 도와줬어 그래도 우리 반에 있는 사람들 선생님이 불러
가지고이 뭐 어렵다 엄마한테 말하라 이러면 내가 진짜 밀가루도 우리 엄마
다 많이 바치고 우리 학생들 우리 그리고 또 선생님이 또 얘기를
난 선생님 다 해줬지 그리고 선생님 도시락은 기본이고 도시락 싸는 건
기본이고 그리고 뭐 하여튼 선생님이 부탁하는 거는 우리 집에서 다 했었던 거 같아요 근데 선생님도 아이를
가르치려면 먹어야 되잖아요 근데 국가에서 배급은 안 나와 그러면
당연히이 학생들이 40명이 있어요 그중에 잘 살거나 간부 집 애한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선생님은 도움을 받고 그 아이를 하나라도 더 챙길 수밖에 없는 신 예 선생님이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어요
그리고 어 좀 갖다 이렇게 받친까 선생 갖다 받친 것도 있지만 제가 선생님을 또 좋아했고 그리고 그때
코난 행운 식에 우리 집에 정말 많은 아이들이 와서 아침마다 문두 들렸어요 우리 집 대문이 좀 높거든요 내가
제가 제일 가슴 아팠던게 그 제가 6학년 때 5학년 학급 반장 있어 애가 똑똑한 아이 네네 어느 날 걔가
우르 지문을 막 조드는 거 새벽에 그랬더니 오더니 막 그러더라고 누나 우리 엄마가요 며칠 전부터 밥 한
끼도 못 먹고 이렇게 쓰러져 있는데 누나 좀 도와주세요 하는데 근데 사실 그 전주에 학교에서 잘 사는 애들을
한네 명을 불렀어요 그래서 너네들이 집에 가서 부모님한테 얘기해서 이제 좀 학교에다 좀 내라 해서 사실은 그
전 전주에 이미 학교에다 갖다 바쳤는데 이제 거의 일주일에 세 세
명 이상은 우리 집가 대문 두드리는 거야 나를 아는 애들은 학생 때 내 육항이 때 제일 많았어요 어 그러니까
이제 어떡해 나는 엄마 눈치 보면서 진짜 많이 도둑 질에다 전 나눠주구
근데 그날에는 엄마가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와서 말하니 우리 엄마가 또 개를 알아요 그래서 그때는 엄마가
밀가루랑 쌀이랑 해서 그 아이를 도왔던 기억이 아직 도제 그 학급 반장에 너무 똑똑한 애가 아 너무
안타깝지 그래도 그 정말 팍팍한 땅에서 권한 행군때 아이들이 몰려와서
좀 도와달라 선생님이 도와달라 했을 때 도와주는 사람이 쉽지가 않거든요 너무 감사한 거 같아요 도아
도온게 아니고 그때는 그냥 어린 어린 나이니까 그냥 지금 당장 같이
공부하던 애들이 이렇게 막 하니까 그냥 국수가 이렇게 있으면 집에 있는 거 가져다가 죽어 그 그게 나는
자연스러웠던 거 같아 그래서 지금도 잘 퍼주나 봐 그러니까 대표님이 여기
와서 그 후원 받아서 문일 하는 거 맞아요 맞아요 그래서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 나 그때부터 잘
퍼졌다 뜻이 있었군요 어쨌든 좀 잘 먹고 잘 살다 온 애들 하면은
말 어 그 좀 살짝 싫은 평이 있어 그러니까 나 그냥 말 안 했다니까 그니까 당할까봐 진짜 지금 여기 여기
강은정 집에서 최초로 얘기하는 거잖아요 맞아요 너무너무 말 말 못 했다니까 다행히 근데 후에 그 내
하여튼 그 우리 아버지를 좋아했던 여자가 한국에 왔어요 내가 또 데리고 왔어 우리 또 사정 말을하면 끝이
없어 튼 우리 아버지 그 여자분이 그 그 여자분이 정말 착하신 분이에요
내가 마지막 까지 대학교를 다니다가 내가 후에 충하
않도록 도와준 사람 내가 그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 우리 아버지 여자들 중에서 그래도 아버지가 여자가
많았어요에 근데 그 여자분을 제가 중국에서 이렇게 돕는 일을 하다가 예
만난 거예요 예 그래서 그 여자분을 데리고 왔죠 제가 한국으로 근데 그 여자분이 저희이 단체 오셔
가지고네 그땐 다 몰랐지 내가 북한에 있는 이야기를 안 하니까 그 우리 그
같이 일하는 아줌마들한테 얘기를 한 거지네 어 그래서 다 알게 됐잖아요
그다음부터 이제 난 널리 거죠음 그 그분이 이제 우리 베님 살았던 거를
얘기를 해서 폭로가 된 거네요 노가 됐죠 그래서 그 이후부터 이제 가끔
놀림을 받아요 어 잘 모르셔요의 사을 어떻게 알겠어요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나 내가 말하죠 나는 북한의 감옥을 세 번 왔다 와가지고
어면 그러게요 지금 막 너무 재미나는 얘기들인데 한 10시간 들어야 될
얘기들이 갑자기 이제 중국 친척들이 투자를 받으면서 먹고 살만 해 가지고
여기 와서 왕따 당할까 봐 먹고 살았다 말도 못했다고 그랬잖아요 그리고 대한민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이제 얘기를 해 주셨는데 기회의 땅에 오셨으니까 그러면 공부도 많이 하셨겠어요 아 사실
예 공부 와서 어 대단하십니다 난 공부가
제일 어 그게 아니라는 내가 책상에 앉아 있는 꿈을 계속 껐어요 아 그
그니까 이게 그걸 못 끝내고 북한에서 못 끝내고 와서 그런지 계속 나는 공부하는 꿈을 껐어요 그래서 한 번도
나는 난 대한민국 와서 나는 어 공부를 하리라고 결심을 했던 거 같아요 닥치는 대로 자격 좀 다
았어요 제가 오전에는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외래 자신
생각했는데 나오는데 이제 막 식당에서 막 이러는데 냅킨을 가져오래 예 냅킨이 뭐예요 안 배워가지고
나와가지고 내키를 모르겠더라고요 아 그래서 가만히 생각했는데 자존심 생한 거야 아 내가
왜이 사람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못 알아듣지 그래서 제가 거기 있는 그때 당시에 금방 고등학교 졸업하는 애들이
아랍 아이들 같이 겠어요 야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내가 한국의 이런 외래를
빨리 익히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어 누나 편이서 말마 하면 금방 알아
그래서 어 그럼 편의저 발발해서 강남에서 편의저 발발을 했어요 그니까 낮에는 공부하고 낮 오후
2시부터는 10시까지는 편의저 말말 하는 거예요 그니까 에피소드가 많아요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오더니 콘돔을
달래 근데 내가 오마이갓 콘돔이 뭔지 모르겠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빤이
쳐다보면서 콘돔이 뭐예요 근데 이분이 나를 한참
남자분이 하고 그것도 한참 이렇게 보더니 탁 가더니 뚝 가져다가 탁
주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띡 찍고 보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뭐 이런 무슨 검 새끼도 없고 이러니까 사장님이
오셨어요 사장님 콘돔이 뭐예요 막 하더니로 와 봐 하더니 응
어떻 이거 이거 하면서 가르쳐 주는 거예 얼마나 내가 얼굴이 막 새빨게 지금 막 내가 진짜 놀랬는지 그니까
그런 쁘 이거는 이렇게 이렇게 이런데 사용하는 거야지 알려 준 거예요 그죠 그러면서 여기 있다고 그런 물건들이
다 여기 있다고 알아라고 야 그러면서 담배 담배 이름 그것 또 예언이라고
생 하튼 그 편의점 알바 6개월을 했어요 6개월 하면서 외래어를 그냥 싹 다 그냥 접수를 했지 진짜 외래어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거는 편리 밟아야네 그러면서 거기 있는 모든 물건의 이름을 싹 다 외운 거예요
외운 거죠 어 그러니까 뭐 6개월 딱 지나니까 내가 한국사람 같아 지더라고
우와 대박 그리고 클럽 음 그
강이니까 그때 정말 내가 정말 대한민국이 기회를 잘 잡아 그때 어린
나이인데도 26살 때인데도 정말 시간을 허트 쓰지 않았어요 공부하지 않으면 아르지 않면
근데 어느날 우리 그 이제 그 고삼 애들이 그러 거 이제 그 땡 하면
이제 날 데리고 누난 하는 자유야 막 이러더라고 니 다섯명이 자유 하더니 나 우 술 맞을 수 있어 이러는 거야
가 아 그래 그랬더니 누나 이제 우리 놀로 가지 그 클럽을 날 대로 갔어
그때는 뭐 아가씨가 뭐 날 신나고 하니까 따라서 따 어 해들이 코삼
애들이랑 그 클럽에 간 거예요 근데 걔네 또 나를 너무 잘해줬어요 아 진짜 어 지금도 내
걔네 군대 갔을 때도 나한테 전화 왔었어 어 지금도 연락해요 아 지금도 다 이제 카톡으로 아
페이스북으로 누나 누나가 이런 거 할 줄 몰랐다 이러면서 예 클럽에 이제
갔는데겠다 나는 클럽 딱 들어가는 순간 나 딱 한 번 가봤어 어 나랑
너무 안 맞는 거야 어 딱 들어갔는데 어떻든가요
미친 세상에 왔구나 아 나는 진짜 나랑 안 맞는
거 같아 다른 사람은 막 좋았다고 하는데 난 솔직히이 나는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있지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예요 뭐가 보였어요 그냥 막 이렇게 이렇게
춤추고 막 난리 막 나지 막 번쩍번쩍하고 그래서 제일 좀
힘들었던게 새벽 4시 반 그랬는데 실신한 여자들이 남자들한테
실려서 나와 그리고 막 토해 근데 나는 그거 보면서 응 왜 저렇게
살까 난 좀 달라 나 좀 이상해 나는 그걸 보면서 아니요 정상이에요 그
정상 난 그 이유에 한 분도 안 갔어요 그니까 그걸 보면서 그니까 내가 그 그래서 이제 우리 딸이 어
나도 클럽가 그럼 나 가보라 그러는데 딱 들어가면 느껴질 거야 나 이렇게 말까 나랑 경험해 봐라 가지 말라
아니 가봐야지 나는 나도 나는 뭐 가고 싶어 간게 아니라 얘네가고 무슨 뭐 해방이다 이러면서 술먹으러 간다고
어 난 진짜 얘네 때문에 많이 배웠어요 노래빵 가가지고 노래빵 노래빵 무슨 노래하는 것도 배워주고
튼 얘네한테 배온 거 같아요 얘네가 내가 아르바이트 끝나면 얘네가 하여튼 그 세 명이 하여튼 나를 유독 잘
챙겼어요 어 세상에 대한민국에 내가 20대를 경 보지 못한 걔네를 걔네를
만나서 다 경험하는 거예 송문이 또 난 거예요 북한 아가씨가 거기서 일한다고 희기 그때는 좀 희안할 때
몇 년 도예요 그때가 이제 2006년도 5년도 도니까 어 완전
어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 계속 그 강남이니 강남이니 그
이제 아 튼 그 얘기해봐요 아니 나 나오면 맨날 쫓아오고 막 이랬었어
그래가지고 남자들이 근데 한두 명이 아니 나 너무 그것도 힘들었고 그리고 북한에서 왔다니까 북한에서 왔다니까
보러온 거야 뭐 하여튼 뭐 남자 쫓아 이야기는 하도 어 이제 20 20년 전 20 몇 년 됐 10년 됐으니까
그니까 지금 이렇게 너무 바른 모습이시다 그때는 막 20년 전이니까 얼마나 아름다우셨어요 그러니까 남자가
진짜 였을 것 같 뭐 그 리면서 이제 배수 알바 끝내고 그다음에 이제 어
이제 그 어느 날 이제 그 거기 거기집 사장님이 그니까 학원 밑에 있었어요 아이 한 달만 일해 달라는
거야 한 달만 그래서 한 달 일하려고 이제 들어가서 이제 막 불판 나르고 막 이러는데 아니 나 그때 20대야
20대면 아 지금은 이제 아줌마지만 그때는 아가씨가 이뻤어요 나도 나름 아니 이쁘세요 아 그때 더 이뻤어
근데 나를 부르는데 맨날 아가씨 얼마나 좋아
보 아줌마 불 알아요 아줌마 그런데
이런 생각 드는 거야 불판 갈다가 누구는 저기 앉아서 고기 먹고 누구는 앉아서 이렇게 불판 나루고 아 이거
안 될 거 같더라고요 아 그래서 그때 근데 그때 사실 자격정 시험까지 같이
보다 보니까이 욕심이 많아가 돈은 벌어야 되겠고 나 쌍코피 터친 적이 없어 난 진짜 독해 가지고 밤에도 막
잠이 오면 밖에 나가서 그 얼음 물에다 수하고 들어 공부했던 사람이에요 근데 아니 얼마나 대한민국
사리가 힘든지 싹 오늘 공부하는데 피곤해 일어나니까 쌍코피가 이렇게 내
퐁퐁 그렇잖아요 아요이 쌍꺼풀 내가 그래서 대한민국 와서 내가 그때 시험
한번 떨어졌어요 예 그때 생각했죠 고민했지 왜 내가 시험에 떨어졌을까 근데 내가 일하고 이걸 두
개를 못 하더라고요 아 내가 내가 다른 사람은 는데 나는 그 생각했어
나는 두 개 중에 고민한 거예요 뭘 더 잘하면 뭐가 더 빠를까 내가 공부가 더 쉽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일하면서 싼커피 터지 깨달았고요 나는이 공부에 내가 오래하자 그리고
일을 그만뒀어요 그리고 공부를 집중하니까 자격 중을 다 따 버렸어요
세상에 예 그러면 또 자격중 따면 그때 6개월 동안의 기간이 한 달에 20만 원씩 했어 120만 원에 자격
주을 따면 그걸 가지고 산업 산업 언더 산업 어디 가면 200만 원 좀
총 320만 원 나오는 거예요 그 내가 생각했지 그때 내가 나가서 아르바이트 그때 당시 우리가
4,700원 받았어요 그근데 자격 중을 못 따고 이렇게 계속 늘어질 바에는 내가 320만 원을 받 공부만
해서 320만 원 받는게 훨씬 이득이더라고요
이득을 그때 생각을 한 거예요 아 자기 쪽을 못 다니까 내가 안 겠더라고요
내가 잘하는 걸 하자해서 공부를 하게 된 거예요 아 예 그리고 이제 바로 학으로 대학으로 들어갔지 예 근데
어쨌든 저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쉬웠다는 거보다 근데 대한민국 와서
공부하니까 너무 힘들었어음
대한민국에서는 청년들이 태어나면이이 힘든 공부를 의무적으로 하잖아요 이걸
보면서 느끼셨어요 어떤 걸 내가 놀랬던 거는 내가 장학금을 받았어요
무슨 말이냐면 원래 우린 장학금 봤는데 애들이 와 다 놀아 응 그니까 공 못
하 받았어요 왜냐면 얘네가고 3까지 죽으라고 공부를 해 어 한국 친구들
대학면 안 해 그 한 1학년 1학기 때 놀더라고요 놀아요 얘네 왜
놀아요 그냥 놀아요 몰라 그 거 안 해 잘 내가 다 정내 올려줬는데 뭐
어 그니까 얘네가 너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다가 좀 이렇게 탈출하
대학교 오니까 탈출구나 이게 어 그리고 얘네는 정말 쉽게 공부해요 그니까 한국 친구들 어 그 대한민국
애들은 어릴 주부터이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툭 말하면 탁하고 알아듣잖아
근데 나는 툭하고 말하는데 저게 뭐야 이렇게 앉아 있는 거예요 북한은
대학이 어떻냐면 그냥 수업을 국가에서 정해 줘요 어 월요일 날 뭐 두고 나
그렇게 고대로 들어야 돼요음 어 그러니까 말하자면 고등학교에 이어진 것 같아 근데 조금 다른 건 뭐냐면
은 가면 대학부터 북한에서는 엄 퍼를 라요 어 거까지는 우무 교육이지만
여러분들은 우가 아니다 어 최고에 와서 공부하는 대학이기 때문에 우모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최선을 나야 된다 이렇게 가르쳐요 근데 대한민국은 내가 선택을 다 해야 되는 거야
그니까 이게 어려웠어요 그니까 북한은 뭐야 국가에서 다 정해 주니까 그냥내가 때때 따라하면 되잖아요 그
북한 사람들이 가장 어려운 거 그건 거 같아요 선택 이거 두 개 중에 하나 선택하라 그러면이 선택을 잘
못한 사람 내가 많이 만났어요 그럼 내가 대신 해줬던 경우도 있고 그니까 내가이 선택을 뭐가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그때는 뭐 도움이도 없어 지금은 뭐 들어가면 선배도 있건
됐든 선배도 없어 가지고 내가 다 그 찾아가지고 공부를 해야죠 내가 한번은
나도 북한에서 영어를 했지만 여기와 이제 영어를 해야 되잖아요 근데 또 그때 이학인 때 영어도 시키고
독일어도 시키고 다 시켜 했죠 그러니까이 영어하고 독일하고 헷갈리는데 그 영어를 예 때 밤새
공부를 했어요 자지도 않고 도서관에서 정말 자지 않고 공부하고 밤날 시험을
쳤는데네 하나도 안 맞는 거예요 어마나 어떻해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알아요 한국에서 퐁퐁 울었어요 진짜 내가 그래고 그저 땡깡 챘어요 너무
힘들어 갖고 내가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어떻게 쟤네는 저렇게 땡깡땡깡 노는데 저렇게 잘하고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도 하나도 안 될까 그래가지고 막 너무 힘들어 가지고 그 고충 기도 탁 가서 얼마나 오르는지
몰라 포기하고 싶어 가지고 1학년 때 막 너무 힘들어 가지고 그래 가지고
교수님이 나를 찾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수님한테 갔더니 교수님이 책을 세권을 이렇게 주더라고요 그러니까
요걸 갖고 나를 평가하겠다 하시면서 중학교 교재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단어를 이거 해 갖 고라고 그거를 다
외워 갖고 다 했죠 그래서 지금도 내가 이렇게 대학교 이제 성적 보면
0를 받았어요 영어를 그니까 교수님이 어 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그
기회를 한번 주 기회를 주신 거예요 예 그러면 그러니까 그런 도움에 성격도 많고 그러니까 결국
공부 그다음에 기숙사이 도서관 그거밖에 하니까 4년 졸업하니까 딱
졸업할 때 그니까 배운 건 하나도 안 남아 근데 뭔지 알겠더라고 그니까
배운 건 하나도 진짜 안 남아요 근데 뭔지는 알겠다 이게 중요한데 어 하나도 기억도 않나 뭐 더해 보면
남는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남았더라고요 음 너무 많은 거를 내가 한국 사회를 남보다 빨리 볼 수 있는
눈을 공부하면 튀었다 그러니까 공부하면서 막 구충에도 뛰어 올라갈 정도로 막 울고 그랬잖아요 그니까 그
고통을 겪으면서 깨달았다는 거잖아요 너무 힘들어요 책을 사봐야 되는데
책이 그때 커피 한 잔이 150원이요 예 근데 책이 4만 원짜리 거예요
정신 식대가 2,500원이 있어요 근데 그때는 한 풀이에 아껴 되잖아요 진짜 제가 우리 더소가
알바도 했거든요 근데 그 책을 사 보려고 정심을 계속 굶었던 거 같아요
아 그래서 그 책을 지금도 못 버려요 집에 있어요 아 갑자 새가 우 눈물 날라
그러네 지금은 제가 우리 후배들 생각해서 저도 1년에 두 번 우리 후배 만나로 가요 그래서 장학금
이렇게 장학금도 주고 책 사 보라고 밥 맛있는 것도 사 주고 꼭 나올 때는 한 사람이 5만 원씩 열명 을만
써도 50만 원인데 수명 줘봐요 100만 원 들어도 1년에 두 번 가요음 깨져도 그걸 돈 모아서 이제
가거든요 그럼 북한은 장학금 제도가 아 없어요 북한 있잖아요 제가 우리
다닐 때 고난의 행군 때 내가 대학을 갔잖아요 얼마나 내라는게 많은지 절반이 내라 오늘 일주일에 가면 오늘
가면 뭘 내라 다음날 가면 뭘 내라 대학 있잖아요 대학 들어왔다 중도 포기가 절반이었다 고난한 그때 그
내라는 것 때문에 내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지금도 똑같을 거예요 북한도
대학교 들어갈 때 여기는 한국은 예 시험 수능이라고 3 때 수능 한번 치잖아요 북한은 세 번을 쳐요
학교에서 대학 통수권 안에 들어야 돼요 그리고 전국 이렇게 해 가지고 전국에서 치거든요 그래서 이제 어떤
장소에 가요 학생만고 3이지 여기 말하면 그 다 쳐요 그 거기서 또 합격이 돼야 대학에서 와서 또 시험을
보 대학을 가가지고 시험 보잖아요 그것도 대학도 3일 봐요 아 그러니까 굉장히 어려운 가문을 통과해서 대학을
가잖아요 그래서 학교에서 대학을 가는 애는 반에서 우리 반도 60명이 대학
들어가 애는 딱 두 명밖에 없었어요음 예 북한은 통신 대학이 그렇게 많아요
각 그 이런 그 공장 기업소 다 그 그 공장 대학이 많아요 그러니까 그
안에서 기사와 기능공을 키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히려 그런게 북한이 어찌
체제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평생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든 거는 잘 만들어 놨는데 그거를 유지를 못해서
이제 문제고 여기는음 지금 얼마나 잘됐어요 내가 공부하고 싶으면 뭐 온라인 이러든 뭐
오프라인이든 간이든 개 지금 다로 북한은 전자 계산기 까라 그러죠 거기
제가 나왔어요 자동 학부 예 북한에서 여자가 대학을 나왔다 그러면 왜 대학
왔나 그랬 그랬을 때요 제 들어갔을 때 예 그래가지고 아 시집 여자가 시집 한 번 잘 가면 되지 어 대학
다섯개 나오는 거보다 시집 잘 가면 된다 했는데 그때 우리는 무슨 생각하냐면 저런 남자들 막 저런 사상
저런 남자들 막 이상하다 그랬어요 우리 여자들은 약간 깨어 있으니까 어 우리가이 사회를 막 바꿔야 된다 막
이러면서 젊은 애니까 젊고 막 이러니까 그 대표님 내고
또래가 제가 대학 들어갈 때 이것도 웃기는게 하여튼 하여튼 우리 엄마 참
유별난 엄마예요 예 왜요 왜 대학까지 쫓아와 갖고 나 시험보는 3일 내내
우리 엄마가 예 지켜서 밖에서 어디 이제 이제 어느 날 나오래 시험 보래
나오래 그래서 강당에서 시험 보는데 근데 나보 그래요 시험치 왼쪽을 상반기 조금 주어 내려는 거예요
나보고 왜 그냥 뜯어 노래 그래서 찢었어요 그리고 내가 이제 원래는
내가 운영 학부로 들어갔어요 그니까 운영 앞으로 뭐냐면 공부 안 해도 돼 그냥 딸딸딸 외워 가지고 그길 나오면
별을 박아요 난 그 까에 가고 싶은 거예요 아 운영 학부 운영 가에 가고 싶은데 그리고 이게 여기 말하면
한국으로 말하면 약간 어 어 경제 무슨 뭐라 그래야 되지 여기 여기도 그런게 있잖아요 운영이라 그래야 되냐
그거 보고 운영 말고 뭐라 그 경영과 경영과 비슷한 경영학과 같이 그런
거를 가고 싶은데 우리 엄마 때문에 못 간 거야 우리 엄마 유별날 우리 엄마 치맛바람 때문에 아니 카는
총장이라고 그러지 않고 확장이라 그래요 학장님이 찾는데요 나를 내가 지금 일주일 운영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그래서 갔더니 학장님이 나를 단독 면담을 하는데 나보고 수학 1등을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 내가 잘못됐다 그랬어 내가 나는 수학 1등 들어올 실력이 아니에요 왜냐면 진짜 내가 들어가
보니까 다 뭐 여자애가 하나 치르러 상 받아 애가 오고 하나는 중앙에서 떨어진 애가 하나 오고 내가 걔네 다
지치고 1등했다는 거야 세상 내가 집에 와서 통곡 침이
울었잖아요 엄마 때문이라고 뇌물 주면 다 그렇게 되는구나 엄마가 뇌물을
학교 1년 동안 살 수 있는 석탄을 갖다가고해 마친 거야 세상에 그럼
학교에서 사라고 봤 써 봤지 그니까 내가 공부 못 하고 떨어질까 봐 그랬는지 어쨌는지 그 엄마가 일단은
합격부터 시키고 보자 이거였지 그러면 1등을 만들지 말아야죠 아 그래가지고 내가 졸지 수속적 수속 입학자가
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학장이 그러 거예요 나보고 나 아직 뒤쳐지잖아 어 1등으로 들어왔으니 새롭게 신설된
가로 거기는 아주 어 머리 좋은 사람들만 들어가 거기를
들어가라는 거예요 그러면 너는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대학교 으로 떨 떨구다 어 영애예요 영예 대학 교훈으로 바로
떨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 없는 거거든요네 그러면 뭐 여긴 대학은 막 시설이 진짜 잘 돼 있잖아요 어때요
북한 대학교랑 여기 대학교 맞 잘어 우리 때도 북한대학교 안에 이제 말했던 거 기숙사가 있어요가 보면
여자 기사는 그래도 따뜻하게 해 준다고 온돌 빵이에요 여덟 명이 살아 내가가 들어가 봐서 알아요 아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 그다음에 그 뭐 그 사오실 씻는 씻는 데는 땅크 그래가지고
물 뭐이 뭐야지 가지 같은 이런 가지 이렇게 그냥 끼게 이렇게 만들어 놓고
예 그렇게 여자 이렇게 칸막 해 놓고 이쪽은 남자 이쪽은 여성 이렇게 했어요 남자 기숙사도 들어가 봤어요
거기는 침대로 됐는데 거기도 여덟 명이야 근데 새로 이렇게 쭉대 가지고
바닥에서 이렇게 올라와 있는데이이이이 구멍이 숭숭숭숭 난
즐기더라 거기다 그냥 매트리스 매트리스에 예 그걸 깔아줘요 불도
안된 그 차간 콘크리트 위에 그런데 살고 그 북한에서 대학교 그 식사하는데 내가 이제 가보니 국수
있잖아요 그때 고란 행문 식이니까 그 아침에는 죽이 나와요 죽도 그 어제 시꺼먼 죽 같은게 나오고 그래서 항상
북한의 대학생들은 배가 고파요음 특별히 우리처럼 직통 들 집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그나마 괜찮은데 이제 외지에서 와 갖고 이렇게 공부하는 대학생들이 많잖아요 북한은 우리 또
그런 대학교 외지에서 막 너무 불쌍한 거예요 그래서 한번은
친구가 내 그 친구를 이제 밥도 많이 사 주니까 친구가 어 자기 그 기숙사 가서 같이 밥 먹자 그래 가봤더니
국수 있잖아 다 부른 국수 옥수수 국수를 이렇게 팅팅 불어 가지고 그
그릇도 윤 그릇 같이 있잖아 그런 데다가 그냥 절반 칼랑 mal lang게 국물 채워 준게 저녁
식사였어요 닭도 없더라고 그냥 그 그렇게 그냥 먹 먹고 그게 내가
권한의 식 던 기숙사 생활 실었어요 근데 대한민국은 기숙사가네 명이
사는데 너무 깨끗해요 세탁실이 따로 있고 샤워실이 따로 있고 공부할 수 있는 도서관 있고 운동 내가 아침마이
운동 나보고 군대 갔다 나 물어봤어네 헬스 하는 거야 예 예 그러니까 학교 안에 운동 시설까지
있다는 거잖 운동 시설 있어요 너무 그리고 진짜 그 학교 시설이 운동 시설 이제 문화 시설 이제 비디오
벌려 가지 비디오 방도 따로 있었고 어 동아리 모임은 동아리 모임 동아리 방이 바깥 한테 따로 있지 동아리 뭐
해 보셨어요 아 청년아 동아리 세 번 회장 했습니다 나보고 3대 세스
아이하고 북한 동아리 회장 보고 3 3대 세습 한다고 맨날
예 그래서 동아리 활동도 많이 했고 예 동아리에 어 남한 형제들 꼬시기
위해서 많이 데고 와야 되니까 앞에 가서 막 우리 막 나가가지고 막 프랑 가스도 막 열심히 활동하고 그렇죠 어
아니 근데 이게 북한에도 회장이 있어요 북한은 회장이 하지 않고 어
대라 그래요 대학을 군대 군대식으로 대학을 운영하든 그래서 련대 그다음에
대면 전체 회장과 같은 거예 전체 우리 말하면 어 연대장이 그다음에 어
대대장 소대장 소대장은 대대는 뭐냐면 운영 학부 그 우리 학부는 대대장
거기에 까가 들어가요 소대장 그 까면 우리는까 회장을까 회장님이라고 불러
본적 없어 소대장 동지 서대 동지 대학인 대학인데 그다음 그 안에
비서가 있어요 비서 동지 어어 그 그러면은 거기도 연대장 뽑을 때
어떻게 뽑아요 거기는 거기는 연대장 뽑을 때 이미 그 북 뇌물이요 뇌물이
아니라 이미이 사람 우리가 우리는 직통 이잖아요 직통이 뭐냐면 직발 3이라 그래 가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가는 경가 있는데 국가에서 대학 군대에서 추천을 받아가지고 온 사람들 중에 입당하고
추천받고 온 사람 무조건 일꾼이요 대군인 제대 그리면서 입당하고 벌써
군대에서 입당하고 대학 추출을 받아 왔다 예가 출 아 그러면 러면 그중에서
그중에서 정말 이렇게 토대가 좋은 사람을 이미 내정하는 거예요 그리고
당 그 교 그 학교 안에도 비서가 있어요 당 비서가 제가 당비서 속사
였어요 이거 이거 기록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벌서 나는 학교 딱 들어가니까 바로 찾던데 어 그래요
문건이 올라오니까 너 너 딱 보니까 학교 고등학교 때 이런 거 했네 이게
신 성군으로 가는 거잖아 어요 근데 신문 나는 것 얼마 그랬을때 그래 딱 가자라 그러는 거야 얼마 없긴 나면
어느 날 공부하고 있는데 나오래 나갔더니 이제 아주 멋있는
이제 우리 학교도 멋있는 데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데리 가더니 이렇게 이렇게 까운 흰 까운 같은 거 입고
이제 그 시험실 같은 데서 여자 세 명 남자 두 명이 대학생 벗고 우리 때 대학생 복이 치마 조건이었어요
얼마나 이쁜 줄 알아요 치마 저거리 끌어가면 기가 막히죠 우리 때지마 저거리 하야 하얀 거 우리 때 그게
나왔 나왔던 그거 그 그게 어떤 치마 저 거리냐 그 이설주가 대한민국의
응원단으로 할 때 입었던 맞 그게 저의 대학생 교복이 있습니다 근데 가까이서 보면 상큼하고 순수해 보이고
이뻐요 특별히 20대가 입으면 그래서 한 때는 그게 대학생 교복인 너무 이쁘니까 오느 순간부터 사회생 애들이
거의 다 따라 입었어요 예 그래서 우리도 막 불만이지 왜냐면 이게 특권이 아아 대학 다니는
특권이었다 생 애들이 딱 따라 입으니까 그런 마음이 생
는구나 세상 그래서 그 대학생 복을 입고 그렇게 사진을 찍고 가짜로
기사를 낸다는 얘기 그러니까 그러니까 가짜 기사가 아니라 그렇게 흉내를 내고 그 기사를 내가 나가는 거지 간
나는 그냥 못도 모르고 가서 끌려가서 이제 노동 시문에 한번 났나 대학 청년 전에 한번 났나 보여주기
식이니까 그러니까 나 그래서 그 다 가자라 그 집에서 맨날 일어났어 나도 옛날에 저기 저렇게 아 대학교때
가갖고 저랬는데 저 또 똑같이 아직도 이심이 없구나 지금이나 똑같이
서네 대한민국에 오기 전에 정말 충격적인게 있어요 여러분 이분이
북한에 북성 세 번이나 남어 세 번 났죠 맞아요 세 번 했죠 왜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제 그때는 어 한국에 온다고 생각을 안
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우리를 우리 가족을 제가 어 이제 데리고 나와
꼬셨던 사람이 미국 국적까지 신 선교사님음 당시 연병 과학기술대학 교수님 아 저를 알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이분 찾으려고 엄청 내가 연병 과학 기술 대학교를 세 번이 나갔습니다 한 번은 직접 그 내까지
보고가 학생 있어 가지고 그 안에까지 들어가서 어 이제 확인을 했는데 사진이 없더라고요 그때가 아마 2
88년도에 갔으니까 예 그래서 못 찾았어요 그리고 나중에 후에 내가 미국을 이제 매해마다 지금 가잖아요
그 미국 갈 때마다 내가이 분을 너무 고마운 분이니까 왜냐면 이분이 그때 어 저를 이제 연병 각 있을 때게
넣기로 하고 내가 공부를 했었거든 거기서 중국하고 영어를 따로 공부하고 있 있었고 그래서 당장 미국에 못
간다 그래서 여기서 연병가 기스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그리고 가정이 미국 가는 절차를 받자 하면서 이제
했는데 어 이제 우리 아버지와 이제 중간에 이제 선교사님을 해방 놓는
어떤 것들이 또 있어 가지고 우리 아버지가 만약에 우리 중국에 친척들이 없었다면 거기 그냥 했었을 건데
친척들이 너무 많은 갈때가 많으니까 아버지는 실망을 했던 거 같아 그 선교사님 테 아 미국을 데려다 주기로
약속을 약했는데을 했 금방 그게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간 거예요
7개월 8개월 이렇게 가니까 이제 아버지는 너무 조급한 거죠 모든 재산을 다 놓고 왔는데 그렇지
그러니까 야밤 도도 하다시피 다 왔는데 어 그 우리를 받아줬던 전도원
님이 지금 이제 나이가 여살 거의 되데 저 저희가 좀 섬겨 드리고 있 있거든요 그분이 그 그때 이야기를
아직도 계속 하셔요 근데 근데 어쨌든 그렇게 돼서 와서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까 우리는 중국에 이제 친척들이 많이 있었단 말이에요 그러면서 이제
여기저기 갈 수 갈 수가 있으니까 그래 그러면서 이제 그 통독반이란 데서 이제 그때 어 정말 내 인생을
바은 어떤 사건을 만나게 되죠 제가 그때 자살하려고 아버지가 너무 미웠어요 그 선교사님 고도 내가 연병
가교 들어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도망쳤던 말이야 가족을 데리고 님한테 말도 안 하고이 사람은 믿을게
못된다 영 역시 미국놈 미국 넘다 막 이러면서 아버지가 친척집으로 도망간
거네 그때 또 친척집에 갔는데 근데 난 또 그런 친척 집은 또 처음 봤어 그 우리 친척이 잘 살잖아요 그냥 잘
사는 정도가 아니라 그때 이미 2층 아내 집 안에들은 거 2층이에요 2층
제가 2층에 있었는데 계단 타 이렇게 내려가는데 그날 따라 우리 보고 다 올라가라는 거예요 우리 보고 막
올라가서 숨어 있으라고 막 방해하 그래 숨어 있었는데 평양 대부가 온 거라 중국에까지 온 아 쫓아온게
아니라 그 사람들 무하로 온 거라 왔다 갔다 그냥 하는데 그럼 그 사람들 가고 나서 나는 2층에 있고
이제 그 할 우리 고모 할머니하고 우리 아버 친 고모 아아 둘이 싸우는 거예요 뭐러 써 하면 고마 할머니
우리 다시 가래 어 북한으로 어 왜냐면 무역을 해야 되니까 다시 자기네도 누구 믿고 해야 되잖아요
그니까 우리 아버지 다시 가라 그렇게 뭐 잘 살게 었는데 왜 왔냐 그니까 우리 아버지는 어 희망이 없다 북한은
아버지 어 아무리 잘도 나면 우리 아버지가 그때 그 아버지는 회사에서
중국하고 이제 밀가루 급수가 나은 밀가루를 들여오고 대신 고철을 가져다가 이제 중국으로 넘겨서 철이라
그러죠 북한에서 근데 그때 라남매 군수 공장이 하나 있잖아요 라남 무슨
나는 잘 모르 이건 나중에 내가 누가들은 얘기해 우리 아버지는 말 안 해어이 하나도 몰라 그러니까 이제
라남 있는 그 군수공장 기계를 뜯어다 팔았대 그거를 우리 아버지 회사에다
판 거야 고철로 예 근데 이게 사람이 코에면 코리고 귀에면 거리요 그니까
군수품을 뜯어다 팔아먹은 제목이 우리 아버지한테 이제 쉬 거야 어떡하냐 어
나는 근데 난 대학교 때였거든요 갔다 오는데 우리 엄마 밖에 있고 우리 집 앞에 방책 차가 와 있더라고 약간
느낌이 좀 이렇게 있는 거라 내가 근데 아 우리 엄마가 대학 다니는 딸이라 그러니까 아 잘 공부하라고
진짜 나는 그렇게 선한 아저씨 잘 그러더니 그다음 우리 엄마 그런 거 너 갔다 다 갔다 오라고 그래서 그냥
갔다가 좀 늦게 갔어 집에 근데 아버지 간거랑 끌려가 가지고 세상에 어 6개월 그 키도 크실 다 78
체격도 엄청 크시고 안경 쉬고 북한 말하면 간부 스타일인데 감옥에서 나올 때 한
40km 내 팔에 절반 돼서 나오셨어요음 난 그리고 아버지 벗겨
보니까 뭐 아버지 발가락이 전기 고물을 했던 발가락 발가락이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이렇게 해가지고 그니까 아버지 중국 왔다 갔다 했으니까 그 중국 그 안기부 하고 소통했나 근데
아버지가 했던 말 뭐냐면 전기를 투입하나 여기 아래만 왔다 갔다 했 했대요 그러니까 그래서 그거 썩어
가지고 나왔더라고 하여튼 그랬어요 그래서 이제 어쨌든 가족이 그래서 나오게 됐는데 그 아버지의 생각은
그거죠 북한에는 미련이 없다 근데 우리 고모 할머니는 자꾸 가라 거기서 둘이 막 싸웠어요음 그데 그때부터
나는 예 데리고 왔는데 그때 나는 뭔가 목표가 있잖아 그 연병가 학교 있을 때 학교 들어간다는데 없어서 진
거요 그때부터 나의 인생에 고민이 시작된 거지 아버지에 대한 미움 거기서 나왔지고 고모하고 대판 싸우고
그게 우리 아버지야 자기 친구 모의 마지막이었어요 세상에 나중에 고모 할머니가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다
그러니까 펑펑 울더라고요 거기서부터 인생에 고민이 시작된 거예요 그래 그게 매일 아침에 나내 아버지
했다니까 북한 가자 왜 대로 왔어요 나를 난 어떻게 살아야 돼 그랬던 또
우리 이모들이 와 갖고 시집을가 래 응 그럼 내가 물어봤어 시집 가서는 그다음은 그다음에 애낳고 살지
그다음은 근데 결혼이라는게 그러면 결혼해서 뭐 하냐고 그 이렇게 애낳지
애 나면 뭐해 그 우리 이모가 그러 거야 애 나면 그렇게 다 살아 이모가
다 그렇게 살아 난 그렇게 살기 싫어음 그니까 약간 좀 계속 그런
고민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아빠한테도 북한 가자니까 북한이 다 나쁜 건 알겠는데 그 그게 뭐냐면
어쨌든 북한이 어 자기네 어떤 걸 충성을 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쇠뇌가
시킨 건 있지만 뭐는 있냐면이 목표는 분명하게 정해 주는 거예요 응 그게
무슨 목표예요 탄가 수령을 위해서 살아라 가는 목표지 그니까 그 수령은 뭐예요 조국이 아아 그니까 우리
나라를 빛내기 위해서 우리 나라를 위해서 막 이런 거를 북한이 엄청 강조하지요 그 그 당이 뭐예요
김일성이고 수령이 김일성이 그 빨개 머리가 그냥 빨 사상이 있었지 멍청한
사상 근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이 아무리 바보 바보여서 지금까지 저렇게 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간 그래서 아마 좀 허무가 빨리 한 거 같아 허무 그러 허무함이
그냥 빨리 와 가지고 죽어버리자 그래서 자살하려고 했 그렇지 약을 먹었죠 그러니까 그 약을 먹었어요
그래서 북성이 돼 가지고 세 번 동안 북한 감옥을 경험하고 대한민국에 오셨는데 북한 감옥의 실상이 어때요
남한 감옥에서 이제 우리가 상화로 들어가면네 이제 먼저 거기서 말해요이 분한테 이렇게 간식 비용을 이제 내가
선택해서 해 줄 수 있어요 그래서 뭐이 사람이 좋아하는 소세지 뭐 이런 것도 뚝뚝뚝뚝 눌러서 내가 싸 주는
거지 그럼 그게 그대로 배달이 되더라고 하고 감 먹여요 예 그러니까
내가 만약 어 무슨 그 얼마의 치 넣고 싶다 근데 그게 가격은 너무 비싼게 아니고 거기서는 얼마의 치까지
넣으세요 5만 원이었던 거 같은데 미만까지 놓으세요 이렇게 해줘요 그러면 고게 그대로 그 사람한테 가는
거예요 예 그니까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이 다 그냥 우리가 봐도 너무나도 지금 우리가 밖에 나와서
편의점에서 사목을 법한 것들을 다 그 감옥 안에도 먹을 수 있는 거예요 그게 허이 되는 거 허이 돼요 근데
북한 감옥은 제가 그래서 북한이라는 사회를 확 달라진 계기가 그니까
북한에서 나왔다고 해서 그 내가 좋았던 북한에서 대학까지 다녔던 그게 딱 그게 한거도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왜냐면 나는 여기 있었으니까 항상 북한이라는 어떤 그 사상적인 가치관이
매가 됐던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기억에 굉장히 북한 난 좋은 사이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사실은 내 감옥가
가지고 예 이렇게 북한이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이고 난 거기서 나는
북한이라는 사회를 봤던 거 같아요 감옥을 보고 그 그땐 또 얼마나 나를
욕하는지 나라에서 대학까지 공무 시켜줬는데 뭐나 막 그리고 또 신하고
중국 만 갔다고 어 중 중국 갔다 그리고 대학생이 또 나밖에 없어 가지고 얼마나 구박을 또 주는지 근데
또 그때 또 나라에서 그때 당시에 하도 대학을 다니는 사람도 없고 도망친 사람 많은지 이렇게 그
감옥에서 나올 때 이걸 뭘 써 주더라고요 보위부에서 그때 김정일이가
어 대학생들이 다시 들어오면 다시 원래 대학으로 올 수게 해 준 거야요 또 방치가 가기 난 가기 싫은데 다시
그대학 돌아가는 파장 같은 걸 또 져요 어 감화 시키려고 그래도 그때
선군 사상이 처음 나왔을 때요 근데 거기 보면이 문건에 보면 다 있
그래고 이게 쓰래요 그래서 난 솔직히 그 안에 결수 안에서도 만 썼어요 그래서 글 쓰는데 저보고 어 선군
사상 막 그거 갖고 막 수령님의 선군 사상지고 저치 하는데 왜 중국으로 도망을 갔냐 그때는 거짓말 했죠
어떻게 가족이 다 갔다 그래요 혼자서 배고파서 갔습니다 이래야 빨리 통과하니 가장 빠른 대답이에요 왜냐면
내가 어떻게 어떻게 갔다 그러면 이건 큰일나니까 그때 그 감옥 안에서 이제 말했던 그 그 여성이 애를 가졌는데
네 한 여성은 6개월 예 한 여성은 9개월네 6개월하고 9개월짜리 여성을
애 중국 애를 갖고 왔다고 떨구는데 아 나는 그걸 봤잖아네 같은 감감 다
여자들 다 있었어 그리고 3개월짜리 있는 걸 우리가 감 감싸 졌잖아요 4개월짜리 5개월 막 불어나는 거
우리가 막 그 여성이 애 못 떨어지게 하느라고 그 그 중에 한 명은 9개 짜리는 그 중국 남자한테 그래도 팔려
갔지만 남자가 너무 잘해 줘 가지고 집에 음 정말정말 다 대요 어떻해 그 그
정말이 아이를 가지려고 엄청 노력해서 아이를 가진 아이를 9개월짜리 그냥 주사 한 방 마치고 죽였죠 그
6개월짜리 구 그서 그날 왔을 때 그 온 감옥 방이 우른 바다였습니다 근데
그때 내가 아 개새끼들 내 마음에 처음으로이 사회에 대한 분노
여성으로서 수치심과 그고 또 그때 또 이쁜 애들이 맞다고 이쁜 애들만 또
같은 간방에 하더나 미친 새끼들 아 진짜 진짜 그 화장실을 봐야 되는데
지켜보는 거야 그 수치심이라는 거는 미친 내가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는 정말 나는 그 올바이 진짜 올바이
새끼 아 올바이 나쁜 놈 그 그 사람 있을 때 소변을 안 보려고 그 별명이
올바이 올바이 얼마나 빠이는 악 신 올바이 아우 내가 진짜 막 악독한 번
형사 이름 그 일본 형사 이름이 바이인데 얼마나 그 올바이 럼 놀았으면 별명의 올바 씨였어요 그
사람이 이제 그 있는 그 두시간 근무서는 기간은 화장실을 가는 사람이
없었어 여자애들이 근데 근데 화장실 막 설사하고 막 이런 애들 가야 되니까 그 수치심은 이름 말할 수
없고 그러니까 그 안에서 내가 북한을 봤지 그러면서 정말이 분노가
올라오더라고요 분노가 올라오고 그다음에 또 이제 지결서 나왔는데 그 또 그 한 놈이 그렇게 여자들을
가추고 장난친 놈이 한 명 있었어 근데 이렇게 내가 들어가니까 벌써 감옥안에서 누가 이렇게 언니들이
찾더라고 이쁜 애들을 찾더라고요 그랬더니 너희 누구누구 주의하라고 알려줘요 거기서 거기서 성착취가
일어나 어 성착취가 일어나니까 그러니까 우린 그때 뭐지 했는데 뭐 예를 들어 이런 거지 어 저 저
누구를 가르치더라 저 여자애가 지금 여기 산지 1년 정도 됐는데 그때는 21년 2년이 때니까 누가 와 데려고
가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사가 올 수 있는게 없으니까 그냥 무한정 기다리는 거예요
아 그러니까 거기는 근데 한 8개월 1년 된 애가 있었는데 막 사람들이 손가락 지나면서 쟤는 맨날 그
남자하고 붙어 먹어 가지고 쟤는 비누도 받고 막 이런다고 들어갈까 수근수근 하더라고 너희는 절대 거기
하면 안 된다고 근데이 들어갔는데 어느 날인가이 나랑 이제 옆에 같이
앉아 있은 여자애가 있었어요 근데 걔가 좀 약간 이쁜 거보다 맹 하면서 약간 순수하게 생긴 애가 있었어요
나보다 두 살 어 두 살이나 어리 그때 내가 2 2둘 셋 됐으니까 걔가 한 살 때였 같아 걔 불려 내간 거야
어 마라 나 김에 켜라 얘가 갓 왕왕 울면서 들어왔어요 세상에 왜 그러냐고
말하 말을 하는데 말을 안 하는 거야 아 계속 울어이 새끼가 글쎄 애를
간간한 거 간 강간은 못 해요 그러니까 이렇게 그 유사 성행위를 하는 거지 막 가슴만지고 막 그냥이
막 이렇게 하니까 얘가 너무 놀래 가지고 그 얘는 얼어 가지고 2살짜리 밖에 안 되 애가 아 어떡하냐
그래가지고 근데 사실 그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게 뭐냐면 집결소부터는 그렇게 하면 뭔 줄 아세요 뭐예요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우리가 이거를 나중에 힘이 있는 사람이 나가서 이렇게 말하면 얘는 잘려요 응
아 그런게 있어요 그래도 그나마 아 그 거긴 그래 지켜서는 그래 갖고 이제 나 내가 이제 가만 안 놔
두리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근데 아이이 사람이 그러더니 그날 저 얘를 또 찾아 이게 밖에 불러내 얘가
부들부들부들 떠는데 그러더니 얘가 나갔다 오더니 5분 만에이 남자애가 무마시키려고이 경찰이 무마시키려고
사탕을 숨 갖고 들어 미친새끼 근데 들어봐 수말 갖고
왔는데 욕좀 하겠습니다 죄송해요 그 그 수마를 갖고 들어왔는데 뭐가 문제
나면 딱 나갔다 오후 만에 들어왔어 그니까 오래 있지 않았을까 그 무슨 어떤 행위는 없었어 근데이 남자애가
분명 얘가 들어가 가지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을 해고 얘 입막음 하려고 사탕으로 입막음 한 거지 그 사탕
근데 내가 어 너 그 사탕 왜 갖고 왔냐 그랬더니 그 사탕이 있어야 그래도 살
수 있으니까 갖고 왔어 감옥 안에서 진짜 너무 그거 개하고 내 둘이 나눠먹으면서 울었잖아 그러면 난
먹었어 그거를 어떡하겠어 살 나도 살아야 되니까 근데 그런게 한두 명이 아니에요 그리고 하루는 그다 우리 그
그 비서는 정말 괜찮은사람 그 비서한테 내가 말했지 비서한테 그랬더니 그 아식 길에 또 그랬어 막
그러더라고 왜냐면 내가 돈을 가지고 나간게 있으니까 비서한테 이렇게 찔러 주고 비서가 그래서 비서가 나를 이게
더 잘해줬어요 돈이면 다 통하는 거야 또가 어 그래가지고 비서가 그리고
내가 입고 간 것들이 다 좋았어요 한서가 그 돈을 바꿔 주면서 나 몰래 불러내 이렇게 불러내 가지고이이 두부
밥도 먹 빨리 먹고 들어가라 이렇게 가지고 해 주거든요 그래 내가 이제 친하니까 얘기를 했지 그 사람이 그
해가 그 아새끼 또 그랬어 하더니 나중에 내가 세 번째 잡혀갔을 때 그 아새끼 또 있을까 봐 그랬더니
갔더니 옮겼더니 많이 들어가 가지고 예 그 나쁜 새끼가 그런 일들이 너무 많아
그러니까 이거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아 야 겪어본
사람 그래 참 대단해 세 번씩이나 북성 당하고 무슨 정신으로 또 재
탈북을 해야 되겠다이 생각을 하 근데 마지막 탈북할 때는 바닷가에 장사하다가 잡혔기 때문에 그때는 어
저도 정말 돈 많이 벌었어요 어쨌든 중국에서 중국 아니고 신의주와 중국 왔다 갔다 놓던 그런 데서 마지막에는
이제 큰 사건의 연류가 됐어요 그래 뭐 신주로 넘어왔는데 어 다시 이제
그 이제 그때부터는 법이 강화가 돼 가지고 한번 하마트 죽을 뻔했잖아요
다행히 우리 집 쪽이 전 그래 힘이 있어 가지고 병 엄청 많이 썼죠
병보석으로 그때부터는 거의 감옥 보냈어요 막 2003년부터는 막 감옥
보내고 막 이럴 텐데 그때는 모든 경찰서 있는 사람들한테 뭐 10km 쌀을 줬다 그랬나 우리 엄마가 일
다쳐가지고 내가 나왔죠 근데 그때부터 온 가축이 못 가게 맞더라고요 그래서
북한에서 1년 동안 살면서 대학 친구들 다 만나고 선생님 다 만나고
죽지 않고 살아나온게 너무 다행인 거 같고 거기서 근데 죽은 사람은 없을까
그니까 이게 뭐냐면 그 치적으로 문제가 없는지를 먼저 보고 그까 직결로 오잖아요 그 집결소 와서
여기서 이제 그 가나 지역의 경찰이 와서 데리고 가요음 그러면여 여기서
이제 힘 없는 사람은 감옥에 보내는 거예 그러니까 내가 여기서 또 느낀게 음 감옥 가서 죽은 사람들 정거리
가든 개천 가든 어디 가든 다 힘없는 사람가 다 죽어요 어 힘없는 사람들이
다 가서 그래도 우리는 힘 있 힘 있고 돈이 있으니까 중간에 빠져 나오기라도 하지 힘없는 사람이 가서
다 죽고 그리고 누가 그러더라고요 개천 감옥에 갔더니 여자 감옥소에 갔더니 80%
탈북자들에 탈북자들이 솔직 말해서 누굴 죽여서 갔습니까 뭐 때려서
갔어요 요만나 위 채우러 간 건데 배고파서 그냥 거밖에 없는데 그래 오주 가면 간수가 그랬잖아요 야 그게
온 사람들 뭐 그 몇명 뭐 그러 그 자기네도 안타까운 거야 한수도 아는 거지 왜 그 사람들
무슨 제거 너 제 제 명이 탈북한 거밖에 없어 그 탈북해서 뭐 했냐 뭐 사람 죽였어요 도둑질 했어요 뭐
팔려가서 그냥 애놓고 그냥 왔는데 그 끌려 갖고 왔는데 어 그 팔 그래도
도망갔다고 그 재명을 씌어 갖고 이들이 생각할 때 이런 곳에 와야 될음 사람이 아닌 한 거지 특히
여성들 같은 경우는 하나면 하란 대로 하는 사람들이 와서 거기 들어가면 열 명 중 일곱 명은 다 죽으니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 간수들도 그런 다잖아 어떻게하나 한 명이라 더 살리려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게 다행이다 누가
이렇게 어 이렇게 옥수수를 좀 많이 가면 옥수수가루 많이 가주면 정말 이렇게 다 죽어 가는 사람들한테 야
너 그 옥수수가루 어 한 컵만 여기다 돌어 놓으라 그런데요 어 그러면 그
한 컵 들어놓으면 그 다 죽어가는 사람 데고 내와서 기는 거 먹기는 거지 그니까 하면 간수도 그러겠어요
그러게요 참 이게 드레스로 너무 가슴 아프고음 하다 보니까 갑 화가 날라
그래 그게 그러니까 이게 정상인 거예요 그래서 저 잘 분노하자아요 그래서 나뭐 욕 좀 하지 말라는데
오늘 욕했습니다 예 저는 진짜 대한민국에 와
가지고이 감옥이라는 데를 이제 들어가 보기 전에 그 뉴스 나오잖아요 뉴스
턱 나와도 이거 이거 이거 뭐야 이거 이거 포순 스야 스탠 이거는 스
반짝반짝 그 아 그리고 뭐 어떤 거는 뭐 그 인기에 따라서 연예인 같은 거는 이거 보여도 안 도만 싹 감춰
버리고 옷도 양복 쫙 입고 어마 그러고 조사받으러 가고 응 그러니까
또하는 연예인이 뭐 감옥 간다 그러면 막 나와서 뭐 시위도 하고 막 응원해요 뭐 한쪽에서는 뭐 그렇게
살지만 막 이런 것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난 이걸 보면서 참 이게 체제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라는 거를
이제 일차적으로 느끼게 됐고 북한 같은 경우는 우리 대표님 얘기하셨던
것처럼 곧 차은 위를 채우려고 갔다 왔는데도 그 동네에서 돌던 지더라고요
나도 덜 던졌어요 신자라고 그니까 그러니까 이게 그 아 내가 그러니까
북한 사회에 가서 완전히 이게 돌아섰지아요 감옥 보면서 이제 완전 북한에 있기 싫은 거예요 이게 근데
오느 날 우리 그 이제 그 사춘 동생이죠 근데 그때 막 북한에서 TV 그 그게 나오더라고 제 제기 밥
드시면서 김정일이가 배가 이렇게 나 밥면 산 올라는 막 그 해이
장군님께서 막 이렇게 하는데 갑자기 내 마음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정말 백성들은 죽어 나가는데
어 제기 먹는 사람이 저렇게 배가 나냐 그랬더니 그
천문을 이게 못고치는 거야 이게 갑자기 이게 참고
살았는데어요 화가 나니까 이게 화가 너무 나니까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니까 그러니까
나는 북한에서 살 때 대학가 살면서 멍통 구리로 산 거야 어찌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어 정말 금 궁고
놓고 살아라 데로 살다 보니까 너무 우리 아버지 그래서 항상 나한테 맞말 너는 왜 그렇게 굴 뛰 주냐 그랬어
난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아버지 말이 맞았구나 공부는 많이 했지만 사해 돌아가는 걸
하나 모르는 거야 그 옛날에 그런 말 있어요 공자라는 아들보다 말자라는 아들 나 아 그런가 그 그 비슷한
거지 세상 좀 돌아가는 거 보 청물이었던 거죠 근데 고생을 하면서 탈북이 아는 어떤 걸 겪으면서 북한
감옥을 겪으면서 내가 내가 그렇게 충성하고 내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했던 어떤 모든 가치관이 뒤바뀌는 어떤 다
썩었어요음 다 썩었어요음 김정은이 모르겠어요 알지 다 썩었어요 이제 굶었다 다 못 이제
터져 지지 못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이게 그 어떤 사상적인 것들을 딱 잡아서 그러 그래서 그래서이 가치간의
싸움이라 그래요 저는 예 우리 가치간의 싸움이다 한국과 북한은 가치간의 그래서 자유 민주주의다 그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거를 겪어본 사람은이 고마움이 원 어떤 건지 아는
거야 어 내가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지 목숨을 걸고 선택해서 온이
땅에서음 쉽게 자기 목숨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러워 가지고 그리고
이렇게 왔으니까 좀 최선를 다해서 살자음 그리고 여기는 우리 그
할머니들이 가끔 오다가 그래요 들려가 제 사무실이 들르면 할머니 요즘 힘드시죠 그러면 아유 여기는 나가서
일하면 일당도 많이 줘 할머니 아직래 내 설거지 얼마나 잘하는데 막 이러 시거든 그니까이 할머니가 뭐라면
북한에 일하고 싶어도 일할데 없는데 여기는 나가면 설거지해도 7만 원씩
받는다 자랑하세요 10만 원 받을 그니까 이렇게 자유롭게 내가 선택하고
일할 수 있고에 대한 어떤 이런 고마음을 그니까 근데 여기서 이렇게
요즘 청년들도 막 자기를 고립시키고 막 이렇게 하는 거에 대해서 좀 난 안타까운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나는
어 이런 청년들는 좀 한국에 있지 말고 좀 배낭 하나 딱 매고 아 20대 해보지 언제 해보겠어 어 공부
인생에 공부 만다 아니다 엄마도 공 그렇게 했더니 글이라 말 만들었다 근데 내가 세상을 배우고
나서 공부하니까 내가 중국에서 개고생하고 개고생하고 감옥 갔다오고
어 그리고 공부를 하니까 이게 정신이 보적 어 그 공부가 내가이 아주 그냥
여기서의 대한민국에서의 1분 일촉 아까 거예요 제대로 살아야지 언제
남자하고 휘닥 다 그럴 수 있어 제이 자유로운이 대한민국에서 자
그니까 이게 이거는 아무나한테 주어지 않는 그 특권을 태어나면서 받는이 대한민국 사람들 얼마나 좋아요 맞아
얼마나 좋아 그래서 그 청년들이 나는 막 청년들이 막 우울증 걸려이 나는 안 놀라워 나 사무실에 전화 와
가지고 나 북한 사람이지 모르고 전화와서 자기가 이렇게 어렵고 이렇게 어렵고 말해요 그래서 돈 이렇게
20만 원을 봉투에다 담아 놓고 기다렸어요 오라고 근데 전화 띠리링 왔어 아 자기 지금 차비가 없어서 못
오겠대 그데 갑자기 화가 나더라고 그내 전화로 내가 북한에서 한 북한
사람이다 그랬더니 깜짝 놀리는 거예요 내가 사실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준비했다
근데 당신 이제 나이 27살 밖에 안 됐는데 어 나는 용기를 주고 싶었는데
거기서 이까지 차비가 없냐 나는 여기까지 죽을 거생 와서 이렇게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 정도까지
되는데 부끄럽지 않냐 오히려 내 그랬어 27살 작은 나이 아니다음 어 난 27에 대학민국 와서 27살에
나는 공부를 다시 했어요음 그래서 일어나라 그랬어 다시 그랬더니 전화 끊더라 그니까 너무 안타까울까
대한민국이 얼마나 좋은 사예 그러니까 자꾸 아 불평하고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까
이렇게 하지 말고 지금 내가 오든 것에서 열심히 하는 거죠 어 이렇게
말하면 또 아 그렇게 열심히 해도 안 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해외에
나가라 해 나가서 가방 배낭지고 어 우리보다 좀 낙한 나라에가 보면
느껴요음 내가 대한민국 왜냐 내가 캄보디아 갔더니 그때도 도망자 신세였는데도 쳤지 한국 사람이라고
그런데도 한국 사람이라고 말하니까 그다음부터 달라져이 사람들 눈빛이음 베트남 가도 달라지고 예
한국으로 오는 과정에서 가정에 그렇게 한국 사람이라고 뻥치고 다녔는데도 한국 사람 이러면
레야 아니 이런 대한민국에서 왜 죽어요 왜 죽어 왜 자살해요 아 오늘또 방송을 보신 분들에게는 좀
엄청난 아 미안해 나 미안할까 아니요 왜 왜 미안해요 왜 미안해요 너무 잘한 질만 아니에요 이런 얘기가
있어야 도전이 되는 거예요 그래요 근데 맨날 그 메리트 없는 얘기는 필요없고가 쉬웠어요 이러면 또
막데 아니요 공부만 또 하지 말라면 그 내가 편집 잘할게요 악플 안 달리게 악플 좀 달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난 진짜 너무 머리 아픈게 우리 북한 사람들이 여기 와서 세뇌가
탈출이 됐거든요 근데 말하다 보면은 자꾸 위대한 수령 김성 동지가 서어
있단 말이야 이래요 마음은 안 그런데 자동으로 나와요 그럼 죽었다 그래요
그 죽은게 맞지 서거는 원래 전칭 있데 그놈은 독재자가 그 그 독재자
테 속어라고 했다고 아주 그냥 근데 그게 마음이 그런게 아니라 그 그
그게 굳어진 거야 굳어진 거야 그래서 습관이 물어 왜 한 살 벌어여 살까지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마음이 그런게
아니라 근데 뭐 우리도 살면서 노력을 해야 될 부분이겠죠 그래서 내가 나도
그 그 댓글를 먹고 찾아 봤잖아 도대체 소고가 뭔 뜻인데 이렇게 난리가 났어 보니까 존 칭하더라 그요
아 그런 근데 그런 걸 일일 신경 주지 마요 훨씬 우리 강원장 텔레비전을 좋아해 주시는 분이 더
많으니까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우리 어 대표님을 통해 가지고 마지막에 한
방이었다 거 같아요이 자유의 소중함 받아준이 고마운 땅에서 일분 1초가
아깝고 포기하지 말고 살아가자 아멘 사실 잘 일났어 할렐루야 왜냐면 그
진짜 저도 탈북민이 이제만 한국에 어려워하는 우리 청년들 요즘에 막
용기를 잃고 사는 청년들 많이 보잖아요 그래서 그분들에게 어떤 좀 힘이 되는 그런 시간이 그런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저는 이제 일반적으로 탈북민들 다 초대를 해서 방송을 했지만 공부 쪽에 대해서
그니까 역시 배운 사람은 깨닫는 것도 다른 거 같아요 예 그죠 이게 배운게
없이 단순하아요 그러면 바라보는 것도 단순해요 깨닫는 것도 단순해요 그
좋게 말하면 착하고 안 적게 말하 멍청이 거지 그니까 대한민국이 응 정말 좋은게 내가 보고 싶은 거 다
볼 수 있어 북한은 금서가 많아요 내가 북한에도 대학때 도서관 다녔잖아요 금서가 많은데 그걸
몰래몰래 보거든요 근데 대한민국은 해골도 보잖아 북한의 해골도 어 그 미치는 왜 봐 아
그러니까 어쨌든 내가 지금 말하고 시원하면 응 그렇게 자유로운 땅 이자는 소리예요 그니까 그만큼 인간의
개인 전 내가 할수 내가 보고 싶은 책 많이 볼 수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이 땅에서 얼마나
행복해 난 너무 나는 내가 대한민국게 너무 좋아 나 이거 어떻게 설명 못
축복이죠 근데 축복이 진 근데 뭐 너무 좋아요 이게 맨날 좋은게 아니라 힘든일을 겪으면서 석에서 가치를
발견하니까 좋하는 거라고요 지금 근데 그 가치가 뭐냐면 자주 내가 받은 사랑을 많이
돌려주면서 살자 예 물론 뭐 갈등도 있고 왜 오느 사이나 다 갈등이 있고
대립 있고 있지만 정말 좋은 사이예요 마지막으로 우리 이분이 이제지 이거
좀 못 느끼셨어요 목회 자시요 그래가지고 여기 목동 쪽에 있어요
브로그에 있는데 한번 또 신앙을 갖고 계시거나 여기 탈북민들이 예배를 많이
드리고 또 중국가 또 이렇게 하니까 오셔 가지고 정말 삶이 지친다 내가이
사람들이 도대체 목숨 걸고 와 갖고 뭘 얼마나 살길래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얘기 하느냐 내 두 눈으로 확인 점 해야 되겠다 가서 봐야 되겠다 하시는 분들은
오시라요네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나라에서 힘을 내시고 용기 내셔서 인생길 어렵지만 강 와 함께
이겨냅시다 하이팅 감사합니다 감사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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