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6, 2025

[장명진 풀영상]가족을 한국까지 데려오고 숨진 북한장교의 마지막 유언!


[장명진 풀영상]가족을 한국까지 데려오고 숨진 북한장교의 마지막 유언!

강은정TV
273K subscribers

Subscribed

2.1K


Share

Download

Clip

Save

42,017 views  Jan 20, 2025  #강은정 #강사 #가수
간증, 강의, 공연, 강은정TV 출연 문의: 
kang22tv@gmail.com

#강은정#한국#가족#가수#강사#MC
Transcript
Follow along using the transcript.


Show transcript

강은정TV
273K subscribers
Videos
About

강은정의 인스타그램
100 Comments
Sejin Lifeforce 生命
Add a comment...

@jagiechung
3 months ago
안녕하세요~ 몇달전 잠실에서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서 제가 냅다 사진 같이 찍어달라고 하셨는데 흔쾌히 반갑게 찍어주셔서 감사했어요~! 항상 잘 보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북한 주민들이 한국으로 와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45


Reply


@JEONG606
3 months ago
지구에서  젤 기막힌 나라ㅡ북에서 남으로 오신 명진씨  쭈욱 행복하게 살아가십시요

23


Reply


@축복이-e1f
3 months ago (edited)
가슴이 메입니다 위대한아버지시네요ㅠㅠㅠ 좋은 몸 받으시어 자유대한민국에 다시 환생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7


Reply


@jam9543
3 months ago (edited)
명진씨 아버지 대단하고 훌륭하신 분이네요
이런 영상을 북한을 찬양하는 정치인들이 보고 반성 좀 하면 좋겠습니다

8


Reply


@조중동폐간-m5h
3 months ago
명진씨 귀한 사연 유쾌하게 풀어주셔서 잘 들었습니다.
어머니랑 가족여행 한번 다녀오시고
이제 꽃길만 걸으시길❤

13


Reply


@윤호한-d4p
3 months ago
가족이 같이 오셨다니까 저도 행복합니다.

39


Reply


@레이니-v3w
3 months ago
항상 들어도 마음 아픈 북한  더군다나 탈북 사연.   슬픈 이야기를 유쾌한 목소리로 들으니 또 눈물이 나면서 웃을 수 있네요.   남한에 태어난 저도 지금 70인데 열살 이전 기억이 발시리고  쌀이 없어 엄마가 호박죽을 끓여 주는데  먹기 실어서 배아프다고 거짓말 하고 그러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우리는 그 잔인한 핍박은 없었지만 엄마 아버지의 공산당에게 당한 이야기 일제 시대에 겪었던 그 무서운 이야기들이 북한 이야기랑 비슷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10


Reply


@seungokkwon9737
3 months ago
정명진씨 성격이 좋아서 탈북하고 잘견디신것 같아요 🎉앞으로 더 많은 하느님의 축복이 있으리라 믿읍니다 ❤

6


Reply


@smdmzz2
2 months ago
명진씨 아버님께서 가족을 한국에 모셔온것 너무 대단해요❤❤❤

7


Reply


@블루金
9 days ago
뭉클한 사연에 가슴이 아픕니다 ~
앞으로의 삶에 축복이 가득하시길

1


Reply


@명일이-j6h
3 months ago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버님사연 너무 가슴 아프네요ㆍ어머님과 가족들 아버님 몫까지 행복하세요

6


Reply


@김정란-x1i
3 months ago
아버지가 정말 대단하세요 상상만해도ᆢ눈물나네요ㆍ

14


Reply


@김희주-o9m
3 months ago
명진씨 한국에서 잘 정착하십시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보답 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월남민이 참 많습니다.
탈북민 중에는 출세한 분도 많고 부자가 되신분도 많습니다.
최선을 다 하십시오.
어러울 때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탈북의 고통을 회상 하십시오.
삶을 아름답게 이룩하세요.

4


Reply


@김동연-c9b
3 months ago
철든아들의 모습에서  한아비로  마음이  울컥 해지네요  훌륭한   아버지뚯  받들어   훌륭한   모습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행복하게 사시면  아버지 뜻 이 아닌가,,싶네요    하는일 잘되시고 건강하세요    싸랑합니다 

12


Reply


@saebyukoh282
3 months ago
정말 위대하신 아버지세요. 같은 남자로서 존경합니다!!

7


Reply


@유미-x8g4r
3 months ago
탈북하신분 한분한분.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슴아픈사연. 이루말할수 없어요. 고난이겨내시고 잘사시고. 행복하세요

2


Reply


@팔달산통신
3 months ago
북한남자 탱고  유튜브TV  꼭~~ 시청하겠습니다...명진씨 인상도 좋고, 이야기꾼의 소질이 뛰어납니다!! 늘 건강하세요!!!

14


Reply


@maryrose6404
3 months ago
명진씨. 안전운전 하시고.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화이팅하세요

17


Reply


@아름다운나라-b6q
3 months ago
"우리는 하나다"
걸어서 금강산 ~~~~
걸어서 평양 ~~~~
걸어서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그 날을 위하여 ~~~~
남녘과 북녘이 하나가 되고 
휴전선이 붕괴되어 자유통일대한민국이 
되는 그 날까지 
강은정님 화이팅 
☆한민족은 하나다☆

14


Reply


@이자영-d3k
3 months ago
명진님 노래도 백만불 이구요 말씀도 정말 잼나게 하셔요 항상 건강 하시고 좋은 일만 있으시고 행복 하시길 기원 합니다 .

5


Reply

    
Transcript


통통하게 뭐 어디 가서 북한 사람이라도 안 민들 정도 트가 고민이긴 하지만 아 우아하게 통풍도
왔어요 틀에 한번 3일에 한번 뭐 운좋으면 하루 한 끼라도 뭐 감 자던
선 감 자던 쥐도 먹어봤고 뭐 눈뜨니까 병원이 있어요 기자랑 거야 웃긴게 사람이 이게 안 보이고 얼굴
다 피범벅 막 뻘 건데 냉이를 확보했다 아요요 병원에서 집까지 진짜 한 1면 만에 뛰어간 거 같아요
아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강은정 t 은정 이니다 어 저번 영상에서
정말 반가운 댓글을 제가 읽었습니다 8k 찍었느냐 어 이런 굴들이
많더라고요 그 카메라 화질이 너무 좋아서 눈이 정화했다 하시는 분들
계시더라고요 여기 그냥 장소만 바꿨다 뿐인데 여러분들이 눈이 정화 됐다니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오늘은 정말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좋아지고
재미난 어제 동갑 내기를 모셔왔습니다 어서오세요 하십니까 하 씨네 아우
그죠 반갑습니다 동무 반갑습니다네 우리 명진 씨 아시죠
여러분 자기 소비 좀 해 주세요 어 저는 탈북 래퍼로 활동하고 있는
장명진 있니다 예 은정 씨랑 동갑이고 이렇게 채널에 나오게 돼서 기쁩니다네네네 그 대표동사 우리 한번
했었잖아요 그 옷 근데 신기한게 그때 우리 그 오징어 게임에 나왔던 옷 이었잖아요 복장에 근데 오징어 게임이
나오기 전에 우리가 그거 모르고 입었잖아 맞아요 예 나오기 전에 그옷을 입고 저희가 그거 찍었죠 영상
그거 조회 수가 5만에 넘게 나왔어요 봤어요 많이 나왔더라고요 아직도
이루지지 않는 병화 끊임없이 지속적인 북한의도 대포동 미사일인가 그게
제목이대 그 사람들이 보통 뭐 대포동 미사일 평양 냉면으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 제목은 평화에 평화네 평화 피스 예평 아 진짜요 덜려 갔더라고요 나는
또 돌려까기 좋아해가지고 돌려 갔죠 한분 지금 빌 나와요 한번 불러
주시면 안 돼요 부르면 바로 부르죠 뭐 바람 잡아 줄게요 바람
예 헤 아직도 이루지지 않는 평화
끊임없이 지속적인 북한의 도발 입으로는 쉽게 말해 한반 더 평화
행동으로 보여주지 대포동 아 볼 때마다 놀래 아 창군 님 뱃살 아직도
현실은 독재와 고통 목숨 걸고 두만강 탈북은 그만 가슴 아픈 이상 가족
진정한 만남 간심을 가져 해 그곳이 통일 나 온 김에 말 좀 할게 살자
같이 와 와 아니 근데 그때 그 그냥서 가지고
후석 거리면서 들었을 때랑 오늘 뭔가이 가사의 우미해 들으니까 확실히
다르네요 이게 타이틀 곡인가요 래퍼 동무 제 유일한 이제 앨범이죠 뮤직비
갑자기 부끄러워지네요 왜 부끄러워요 아 그렇게 훌륭하진 않아 가지고 아니 가사가 예술이잖아 이거 현실적이고
그렇죠 가사는 좋다는데 이제 좀 듣기는 좀 싫다 이런 댓글들이 좀 있어 가지고 왜 왜 왜 듣기 싫지 아
뭔가 랩이면 좀 빠르거 막 두치 팍치 뭐 이런 거 해야 되는데 뭐 야야야야 달타령 갔다 졸린다
네음 가사만 집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네 아니에요 계속 확실하고 너무 잘 들었습니다 여러분
좋은 댓글 많이 부탁드리고요 탈북 래퍼 우리 장명진 씨 여러분 응원 좀
많이 해 주세요 제발 그러면은 우리 명진 씨는요 또 보니까 그 물어보
살인가 거기에 나가 가지고 아주 입담이 너무 훌륭해서 막 랩에 미쳐
가지고 이제 그거 자본주의에 특히 미국 랩 너무 좋아가지고이 한번 미지 앞잡이 제대로
해보자 어차피 뭐 유튜브도 하니까 그래서 그 랩이 랩 진짜 빠져 가지고
쇼비도 머이 나갔어요 아 그 팔에 예 근데 이제 제 가사이 가사보다 좀 더
센 거 가지 나왔거든요네 아직도 이러지 않는 평화 뭐 하면서 그런 나갔었는데 1차에서 떨어졌어요
아이고야 예 떨어져서 너무 아쉬워서 이제 이제 고민을 들어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진짜 진지 고민 스가 나갔는데
사람들이 이제 북한 개그맨으로 다 기 기억해 가지고 분명히 탈북 포로 활동을 하고 싶은데 사람들 기억은
북한 개그에 그렇게 됐습니다 아 정말 이게
개성도 너무 뚜렷해요 너무 귀여우시고 사국 같은 데서 섭외가 좀 왔으면
좋겠는데 사이요 우리 명진 씨저 북한에 보물이요 그 영화계에서 좀 어떻게
해주시라요 얼굴이 일단 개구에 말도 너무 재밌고 대한민국 제 얼마나
되셨어요 저는 이제 올해로 됐죠 와 22년이 정말 오래됐고 올일
때 오셨네요 예 그러니까 제가 다세 왔거든요 그게 기억이나요 22년
지났는데도 탈북할 때랑 기억이나요 북한의 삶도 그니까 모든 삶이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들 이름도 까먹고 뭐 할머니 이름도 가끔 생각 안 날 때 있지만 그런 북한에 살면서 특별한
기억 아픈 기억 그런 기억들은 아직 창창하고 아 가끔 꿈도 꾸고 예 꿈은
계속 꾸는 거 같아 그럼 북한의 고향은 어디예요 그니까 태어난 고향은
강원도예총 아 진짜요 예 예 이게 좀 웃긴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제 지금은
택시를 타면 기사님들이 내비 대로 갈게요이 카카오 택시로 잡으니까 근데
요즘 10년 전만에도 이렇게 말을 하잖아요 근데 세일 말 씻어요 가십시오
고맙습니다 기사님이 고양이 하면 아 강원도에 하면 그러면 보통 이제 아
강원도 하나 넘어가거든요 근데 이제 가끔 기사님이 고향이 강원도 거죠 그러면 강원도 공도 어딘데 그러면 아
그 고성이 아고 하면 고송 고송 할아버지 누구요 아 내네 이게 북
북고 성인데 우리 할아버지 빨갱이라 모를 텐데 뭐 그런 푸딩이 있거든요
그래서 태어난 곳은 이제 고성이 고찌고찌 물어보면 좀 난감하긴 한데
굳이 또 못 숨길 필요도 없고 그죠 예 그래서 웬만하면 이제는 그래서 경상도라 하고 예 이제 일반적으로 좀
좀 이렇게 민감할 때 그 경상도라고 둘러 쳤던 거예요 지금은 아니죠 알려줬으니까 지금 설분 아니시죠 하면
경상도 그래요 하면서 그냥 아 경상도나 요즘 그냥 경상도 남자로 살고 있죠 그니까 뭔가 이제 북한에서
왔다면 어휴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언제 언제 넘어 오셨어요 가정 같이 왔나요 그런 한 7천번들은 제
질문들이 계속 나오잖아요 똑같이 그니까 좀 뭔가 초 초면이고 택시 기사인데
예 그럴 때는 힘들 때는 경상도라고 그래요 뭐 그때 그때 잘 대처를
하셨네요 그러면은 강원도 고성이 이거 한국 다 보여요 제가 그 고성에 살게
된 이유가 아버지가 해군이 있어요 해군 해군 아 강원도의 해군네 강원도의 고성에 바다가 있잖아요
그래서 거기서 아버지가 해군 장교에 있었는데 원래 이제 어머니는 위쪽에음
한경도 쪽에 있었고 어머니랑 아버지가 결혼을 중매로 결혼하고 어머니가 아버지 따라 간 거죠
네 태 한 살까지 살았거든요 그래서 어머니는 뭐 저를고 그때 북한 경제가
괜찮아서 뭐 금강산 가서 불고기도 해 먹고 털기 잡아서 개도 먹고 조개도
먹고 했는데 저 기억이 전혀 없어요 그래 전혀 없어가지고 우린 장마당 대잖아아요 장당 세대도 다르고 그래서
고성에서 뭐 기억은 없지만 나중에 이제 좀 남북이 사이가 좋아지면 금강사 진짜 꼭 가보고 싶어요
고향이니까 그렇게 쁘 그 거기 세 살까지 살다가 어디서
살다가 또 한국으로 오게 되신 거예요 이제 아버지가 이렇게 쭉 군생활 하시다가 이제 위암이 걸리신 거죠
위암 아이고 그 한국에서는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데 그때 좀 초기라서
위암 걸려서 그 크게 걸린 건 아니에요 그래서 이게 제대가 된 거죠 강제도 나가라 해가지고 지금은 좀
아니지만 그때만해도 군인 이제 나오면 사회에서 취업도 잘 됐고 그래서 아버지 그 말씀 들어보면 군생활할
때는 배 이게 굶을 일이 없었대요 배급도 잘 나오고 식품도 잘 나오고
고기도 나오고 그래가지고 군 생각할 때는 아예 그본 적이 없죠 잘 먹고 잘 살았죠 솔직히 예 혹시 한국에서
온 쌀 모어 봤어요 어 기억나요 한국에 온 쌀 자체가 이제 그 뭐
십자가 표시 있거나 아니면 뭐 U 표시 있거나 이런 표시가 있어서 이제
뭐 평양부 이제 가까운 지역으로 배구의 순차적으로 섰다 그러는데 저희는 는 한경도 끝자락이 아아 한경
북도 그냥 러시아 중국 밑에라서 그런 마대 자르를 못 받고 마지막으로 받은
그 배급이 이제 강냉이 이런 쌀인 돌 절반 강냉이 쌀 절반이 그래서 어
아버지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그냥 입합네 그러니까 쌀밥을 배불리 먹는게
늘 꿈이었죠 그래서 쌀밥을 구경도 못 해 본 거네요 그냥 그렇죠 뭐 구경
해 봤어요 솔직히 왜냐면 이제 할아버지 그때 갑 본 있지만 그 뭐 맞 봤지만 배
먹거나음 그 총 뭔 기억이야 두세 번 예 그리고 뭐 고기도 그렇고 그래서
제일 경 남는 거는 왜 할머니 집에 가면 장롱에 이제 이게 수박 그림이
있었거든요 근데 저는 그 수박 그 그림 보면서
수박인형 저 수박은 무슨 맛일까 저 수박은 어떤 맛일까 예 제
수박 진짜 먹는게 꿈이었어요 북한에 있을 때야 아 그 꿈 한국이야 잃었어요 너무 먹어서 통풍 걸렸죠 아
단거 슈가 조심하세요 아 단거는 이제는 끊었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그러다가 이제 아버지가 추방 되면서 이제 평생 군인으로 살다가 어머니는
간호사로 살다가 그 지역이 아닌 이제 추방 간 추방을 가니까 이제 다시 세토 전이 생긴 거잖아요 예예 성 좀
올라가면 광 있거든요 아버지는 석을 캐고 어머니는 이제 바로 또 백수가
되는 거죠 뭔가 기술이나 뭐 아니면 장사 기술이 있으면 먹고 사는데 아버지는 평생 군인으로 살았으니까
그런게 없는 거예요 그 군인으로 살다가 제대 한 사람들은 이게 머리가 빨갛고 딴딴해서 그 제대군인은 3년
석기 그니까 3년 동안 머리가 돌처럼 굳어 가지고 그니까 세뇌가 돼서
미련하게 산다 이런 뜻이고 이처럼 우리 명진 씨 아버님처럼 장 분들은 정신 석이라 그러잖아요 맞아 예 아
이해된다네 그러니까 운동 씨 말씀이 맞는게 그냥 충성심 하나라 사는 거잖아요 그니까 뇌가 빨아서 밖 씨뻘
거쳐가지 아주 그냥 씨뻘 거 아버지래 충성 충성하고 살았는데 이제 병치료
다하고 강제 제대 하니까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 고향 와서 그때부터 집이 그냥 가세가 아 예 전 엄청 기울은
거죠 그니까 아버지는 뭐 돈 벌리지지 않고 석탄도 잘 못 캐고 어머니는 가로사 하다가 오니까 동네에서
일자리가 없고 병원도 없으니까 또 고난의 행군도 시작이 됐고 마침 곧 초반이 예 초반이 그러니까 제가
기억나는게이 가해서 어머니가 감자를 찾는데 아버지가 딱 들어오더니 야
장님 죽었다 따는 거예요 그 그때가 김일성이 주는 거예요 제 기억이 93년 93년 이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 얘기하는 거예요 야 이거 어떡하니 우리 여기까지 배급이 올까 뭐 이런 아버지 그런 얘기 했거든요
평양이나 너무 먼 거리니까 그래서 어 머니가에 그래도 우리 장군님 오겠지 그니까 아버지도 아직까지 내가 빨가
으니까 우리 장관님 우리 버리지 않을 거야 그렇게 아버지도 믿는 거죠 근데
뭐 우리 장모님은 뭐 우리 뭐 덜 보겠어요 자기 위스키나 만 뭐 먹고 있지 그래서 세상에 그때부터 뭐
95년 96년 97년 그때 북한 사람들이 제게 알기로는 뭐 몇십만 몇
백만이 굶어 죽었잖아요네 맞아요 예 그래서 저희 집도 뭐 그 집 중에 하나였죠 아 굶 많이 굶어
명진 씨 그렇죠 지금은 좀 통통하게 뭐 어디 가서 북한 사람이라도 안믿을 정도로 요즘 다이어트가 고민이긴
하지만 아 우아하게 통풍도 왔어요이 통풍 아지 와 가지고 우아하게 지금 살고 있는데 그때마다 이제
강영실이라고 아시죠 예 너무 잘 아시죠 강한 영양 실적 걸렸다 해서
강영실 예 그
맞아 누워 있고 아버지는 뭐 돈 식 구하러 계속 그냥 뭐 조선 팔도로
돌아다니고 그렇게 지냈죠 그래서 뭐 그때 막 사람들이 많이 물어봐요 그러면 뭐 하루에 몇 개 먹었냐 뭐
하는데 그렇게 그런 개념은 없었고 뭐 이틀에 한 번 3일에 한번 뭐 운전면
하루에 한 끼도 뭐 감 자던 선 감 자던 뭐 쥐도 먹어 봤고 뭐 다 먹은
거 같아요 뭐 배불리 그리고 뭐냐 감자 껍 아니야 나무껍질 아시죠 그
소나무껍질 예 소나무껍질 뭐 그거 밝아 가지고 우려서 떡 뭐 이랍시고
해 먹는데 그거 먹고 이제 밑구멍 항문이 몇 이게 막혀서 저희도 고생했거든요 맞 맞아요 저희 그까
저희이 우리는 이게 하 하모니카 집이라서 이렇게 붙어 있잖아요 저희 그 옆 옆집이 이제 마구간 하시는 그
어르신이 살았는데 이제 그분이 너무 멀 거 없으니까 이제 껍질을 많이 드신 거예요 그래서 항문이 막혀
가지고 배가 부풀러서 까서 돌아가셨거든요 그 제가 그런 상황에 살아가지고 진
그때는 진짜 진짜 먹을게 진짜 없었죠 예음 참 거기서 그래도 명진 씨
살아남은게 영화요 몇 백만이 굶어죽는데 그속에서 살아났다는 거는
감사한 일이죠 아 그죠 엄청난 운하 솔직히 세상에 정말 참 저도 물론
명진 씨랑 동갑이다 보니까 같은 그 북한의 어려운 시기에 이제 겪으면서
명진 씨 이제 얘기가 다 공감이 되고 남의 같이 안 느껴지거든요 그래도 그런 속에서
부모님이 어떻게 탈북할 생각을 하셨나 봐요 그러니까 뭐 여러 사건이 있었죠
있었는데 이제 동생이랑 어머니가 놓 있는 상황이고 못 먹어서 예 못 먹어서 어머니랑 동생을 먹이려면 뭔가
음식이 필요하잖아요 근데 이제 그런게 잘 안 돼 가지고 어느 날은 눈을 떴는데 어머니가 너무 위태롭고 동생이
눈을 못 뜨는 거예요 그래서 아 오늘 이제 오늘도 못 먹고 다음 날을 넘기다 보면이 진짜 안 되겠 이런
생각에 제가 무작정 강이 밭을 뛰어 들어간 일이 생기거든요 그 도둑질하러
도둑질 그래서 들어가서 너무 배워보니까 저도 한 세 네개 이제 그냥 생 거를 먹고 강냉이를 그리고
이제 한 다섯 개에서 한 일곱 개를 이렇게 챙겨 가지고 나왔어요 강냉이
발 근데 그때 아시겠지만 북한에서 이제 한때 군인들이 강냉이 바 감자 시켰잖아요 응 맞아요 군인들이 청
매고 감자하고 강냉이 밭을 경비 썼잖아요 그래 저 딱 나왔는데이 민근이 딱
있는 거예요 AK 메이고 그래서 딱 보고 나 저보고 그러 거 아기니까 뭐
열매을 밖에 안 됐으니까 저보고 강냉이 나라 그러니까 강냉이 놓고 가면 괜찮다는 거예요 근데 저가 놓을
수가 없는게 이걸 놓고 가면 이제 집에 있는 엄마 엄마랑 동생이 위험한게 뻔이 알잖아요 그래서 못
났어 그래서 나라 나라 하다가 나라 이렇게 갓나 새끼 욕도 하면서 밀고 했는데 끝까지 이제 안 났죠 몇
신앙이 하다가이 군인이 좀 악게 맞춰 가지고 이제 박을 꺼내가지고 이제여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치우 가죠 여기를 아 어떻해 그 그래서 눈뜨니까
병원이었습니다 기절한 거예요 어이 머리가 깨져 가지고 그 어리고 먹지 못해 힘도 없는 애 내려 친 거예요
예 왜냐면 뭐 지금은 뭐 그 군인 묘하지 않지만 그 군인도 뭐 뭐
해봤자 뭐 20대 초중반이 아아 그 이렇게 금친 거를 그래 도둑을 보내면
자기도 혼나니까 입장 이해되지만 아이씨 캐로 치는 도 너무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지만 그래서 최서
여기가 지금도 상처가 있는데 한벌 됐었거든요 그래서 근데 이제 그 군인이 착한게 저를 이제 업고 강냉이
몇 개 더 따 가지고 배낭에 매 가지고 이제 이제 병원에 보낸 거죠 그래서 제가 기절할
동안에이 머리는 꿰매고 예 그래도 다행으로 병원에 들어가 꿰맸어요 예
다행 좋았죠 그래서 뜨니까 옆에 이제 강릉이 열매 알이 있고 그리고 이제
제 여기 위는 위는 뭐 다 피 범벅인 거죠 근데 근데 웃긴게 사람이 이게
안 보이고 뭐 얼굴 다 피범벅 막 뻘건데 그게 안 보이고 이제 강냉이를 확보했죠아요 그 병원에서 집까지 진짜
한번 한한 1 2분 만에 뛰어간 거 같아요 이제 동생이랑 어머니를이 감에
이제 강냉이를 삶아서 먹길 수 있다 해가지고 그래서 그날 이제 고비를 넘기고 저희가 또 한 보름 정도 이제
생명을 연장할 때 이제 아버지가 와가지고 이제 처참한 지방 꼴을 본 거죠 아 세상에 예 그래서 그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탈북을 결심하신 거 같아요이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와 예 그게 큰 사건이 된 거
같아요 그니까 아버지도 평생 나라를 위한답시고 구
눈으로 복무하다 보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얼마나 머리가 빨게 깼어요 그랬는데 그 충성심이 내
가족의 현재는 지금 별개로 느껴지 지셨나 봐요 그죠 이러단 다 죽겠다 예 그러니까 뭐 아버지도 몇 년을
기다렸지만 결국 현실이잖아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 그렇게 뭐 말씀하시기를
그냥 탈북 하다가 총맞고 주구나 여기서 죽 여기서 굶어 주구나 똑같잖아요 그래서 뭐 아버지가 그냥
어머니한테 얘기하더라고요 탈북 하자 옆동네 가면 어 개도 배불림 먹고 어
이렇게 손들면 차들 서고 뭐 빵도 있고 뭐
아 굽는 람이 없다 무슨 일도 먹고 산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아 그게
들었을 때 어땠어요 진짜 막 이렇게 된 거예요 잘 안 믿었죠 그리고 이게 우리가 네가 빨갛다는게 저는 그 어릴
때니까 좀 더 순수할 때 아니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막 야 명진아 응
우리가 탈북해 될 것 같다니까 저는 어린 마음이 이런 거예요 아버지 저는 조국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조국을 합니까 아 아버지 아버지 장기지 않습니까 이렇게 대들어요 아무리 배가 마도 우리
조국이 최강이고 뭐 그 뭐 세상 어리 부름 없어라 이런 노래 막 했잖아요
어디를 가네 아버지 아버지 말씀이 거역하고 막 아버지 저는 조국을 배반하지 않겠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다니까 아버지가 이렇게 가만히 절 보더라고요 야 내가 괴물을 키웠구나 이겠죠가 내가 더 빨간 괴물을 키웠나
이런 생각을 하신 거 같아요 예 그래서 그렇게 이틀인가 아버지가 밤
됐는데 집 문 장그라고 다 모이라 그러는 거예요 저 가족을 동생 저 어머니 해가지고 야 문 잠가라 문
잠그고 이렇게 이불 큰 거 하나 갖고 오더라고요 다 들어 오래요 들어갔어요 아버지가 이제 뭐 뚝 뚜꾼 턴이 이제
제 입에 승 넣어 주는 거예요 뭐예요 그냥 여기서 흔이 파는 어느 동네 가든 어느 뭐 마켓 가든 뭐 어디 뭐
패전 가든 할 수 있는 빵 빵이에요 빵 저는 맨날 그 강래 빵이라 그 딱딱한 그 뭐 고장 떡 같은 거
이빨이 나갈 정도의 그런 걸 다가 딱 놓자마자 이거 뭐 입이 입이랑 혀가 거의 움직이지 않았는데 싹 넘어가는
거예요 빵이 예 너무 맛있는 거지 처 처음 먹어 봤으니까 어마나 근데게 막
아마 정확한 빵을 하면 뭐 카스테라 이런 느낌일 거예요 예 뭐 우유빵 이런 느낌 아니 그것도 웃긴게 문을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뜯어서 넣어줬다고 예 넣어 그니까 말보다
행동이니까 그래서 이렇게 넣어주고 아버지가 그러더라 너 생각이 아직까지 변함이 없니 해가지고 딱 한 됐죠
아까 아버지가 그걸 너서 그런 얘기한 거죠이 중국 가면이 그런 거 매일 먹을 수 있다 맥기 물 아버지한테 한
마죠 아버지 저는 이제 조국을 배반할 준비가 됐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탈고 간
거예요 진짜로 진짜이 사실 진 예 진짜로 어떡해 명진 씨 대박이다 어릴
때부터 이게 뭔가 슬픈 이야기인데 말재주가 있었네요 아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지 그때는 더
진지했지만 무섭나 봐요 그 오인 나이에 와 진짜 하긴 뭐 저는 뭐
중국에 넘어와 가지고 저 선적이 김정일이 역할 때 우리 장 그는 왜 욕하냐고 그니까 배 고픈 거랑 세뇌는
별견 거 같아 맞아요 거죠 예 그니까 배는 고픈데 이걸 나쁜 말로 가스
라이팅도 그런 단어도 있잖아요 세뇌를 몇십년 뭐 계속하다 보니까 이게 옳고 그러 판단이 안 서니까 그러니까 정말
괴물이 돼가는 거지 모이 괴물 그렇게 부실한 괴물이 없죠 뭐 죽게 생겼는데도 우리 장군님
우리 장군님은 축지법을 쓸 거야 하면서 그러 있는 거지 진짜 아니 근데 빵은 아버지가 오디서 난 거예요
그거는 뭐 전 나중에 듣기는 장마당에서 어렵게 뭐 중국 음식을 구해 가지고 제가 봤을 때는 아버지가
그냥 전 재사를 털어서 산 거 같아요 나 어떡해 그랬구나 아버지도 이제 이제 초강수를든 거죠 뭐 아니면 없다
그래가지고 그래서 아버지가 안내를 하던가요 가자고 예 그래서 아버지가 하고 동생을 봤는데 동생은 뭐 이미
뭐 뭐 뭐이고 있다 뭐 양말 샀는지 동생을 이미 뭐 중 갔어요
어머니 이미 머리가 중 갔어요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한테 그러다 사진
뭘 챙기면 좋겠냐 그리고 저희 집도 뭐 나름에 그런 쓸만한 물건들 있잖아요 그래서 그걸 이거 어떻게
하면 좋겠냐 해가지고 그 진 내 동생이랑 저를 이제 한 명씩 보내 가지고 뭐 이거 삼촌 주고 이건 고모
줘 가지고 물건 줘라 그렇게 해가지고 다음 날에 동네가 그 동네니까 이런 좀 비싼 물건이라 싶은 거는 그냥
주고 사진 챙기고 그 밤에 친 거죠 야 두만강으로 예 두만강으로 근데
그때 경비대 군인은 없었어요 카필 또 이제 그런 혁명적인 날는 다리 받잖아요 예 그 또 어제 또 배불리
빵도 먹었겠다 얼마 신나요 서풍 간는 기분으로 딱 온 간속 가는데 보통 이제 북한에서 남자 먼저 컸잖아요
저가 그래 장남이니까 어머니랑 동성에 뒤에서 오고 이제 아버지 손 잡고 이제 철길 따라가는데 달이 너무 밝은
거예요 그 배 부리게 신나잖아요 아 신나게 아버지 오늘 다리 박다 하면서
찾길 때 그날따라 반짝반짝 빛나 아버지 좋습니다 야 어제 먹음 빵이
뭐라고요 아버지 누방 많이 뭡니까 그니까 아버지 말때 조용해라 새끼야 야야이 목소리 같은 새끼 조용 아이
새끼 그 아버 그니까 이게 저는 생각이 없는 거지 뭐 알겠어요 리이 새끼이 새끼를고 타고 갈 수 있겠나
했는데 건널 때가 2월이 든요 2월인데 그래 2월이 다리 발지 그때
실감을 했어요 이제 저기에서 거기다가 가니까 이렇게 무슨이 검은 거 이렇게 이렇게 있는 거예요 이렇게 그러니까
우리가 공동 면지가 가면 살짝살짝 올라오는 것처럼 그래서 저는 밤에 저 뭐지 하면 갔어요 근데 제가 랩가드
시체들이 넓어져 있는 두 망강 목숨걸 건너지 차가운 얼음장 뭐 이런게 있는데 진짜 숫자로 그 앞에서가
보니까 게가 시체들이 시체 어 제가 건널 때 90
하려는데 두만강에서 이제 가는 걸 쏴서 끄집어 가서 여기 놓는 거죠
엄마 아 내구 탈북 가는 거 사살했다 얘기 현장 사살 현장 사살이 왜냐면 그때 그냥를 갈라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그 시체들이 있는 거예요 근데 그때 경박자 확 드는 거예요 아버지가 그러는 거예요 이제 아버지가 띠 할
때 떼서 잘 건너면 괜찮은데 먹 건이면 너나 나나 동생에게 누을 수
있다 딱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때 이제 딱 긴장이 되는 거예요 빵이고 나발이고 다 없어졌어 지금 빵빵이
뭐예요 지금 지금 청구가 겨누고 있는데 세상에 아 그때 막 싱을 땀나면서 그때부터 막 떨리는 거예요
발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린나이 예 그 그 나이도 죽음이라는 걸 알아가지고 그죠 그런 말씀 하더라고요 내가이
군인 동성을 다 파악 했으니까 내가 띠라면 뛰는데 뒤에서 무슨 소리를 하든 보지 마라 아버지가 맨뒤 이제
뭐 어머니 나 동생 순서로 이제 다 뛰는 거죠 예 그래서 아버지가 맨 뒤에서 그래서 아버지 총알받이
하겠다는 얘기예요 예 대신 일자를 떠라 총알이 나라면 혼자서 다
막으려고 아버지가 죠 진짜 군인 같은 아버지 아버지네 군인 와 군 정신
아버지 강인한 거죠 그냥 그냥 일자로 뛰라 그냥 개소리나 총소리나 뛰라
그냥 이렇게 이렇게 손 잡고 있다가 아버지가 뛰라 하자마자이 일자를 뛰었거든요 예 그래 다행히 너무 아
안 걸린 거죠 예 감사합니다 예 안 걸린 거죠 그래 가지고 그때부터 이제 건너니까 뭐 그때는 이제 뭐 빵이고
다리 생각이 안나요 그냥 갑자기 건너 개지는 소리 나고 어 그 는데 이게
북한 땅인지 중국 땅인지 모르잖아요 그니까 아버지도 그냥 야 가라 가라 까리가 계속 밤 산 넘고 막 그런
기억 있거든요네 세상에 그래서 진짜 저희 가족이야말로 진짜 운이 좋은
거죠 왜냐면 뭐 안 걸린 거잖아요 야 그렇게 목숨을 걸고 넘었는데 안 잡힌
거를 운이 좋다라고 들었을 때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참 너무 서글프다는 생각이 막
지금 드네 예 그거를 운이 좋다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너무 끔찍하고
내가 강원도 고성인음 막말로 아 씨고 좀만 밑에 태어났으면 그 남선 고성이
태어났으면 이런 개고생을 안 하는데 하필이면이 아버지 어머니는 좀 더
위에서 나와가지고 배란 배는다고고 뭐 대가리 대가리다 터지고 그래가지고
그래요 그래서 그런 생각을 중게 좀 한 적이 있는데네 그 어디로 갔어요
그잖아 예예 갔 그래서 아버지가 나중에 들어보니까 우리가 어 다 얘긴
안했지만 이제 가서 뭐 이렇게 얘기를 좀 한 그런 사람도 있더라 도와주기로
아 그러니까 미리 조금 손을 놓고 대책을 마련해 놓고 탈북을 한 거네요 아버지가 그죠 아버지가 아버 군인
정신 살아 있는게 일단 그니까 플랜 우리가 A B C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거 하실때 안 되면 또 이걸 한번
가보자 뭐 이런 거 다 셔 놓더라고요 그 웃긴게 또 가다가 도망간 거의 건너서 제가 왼발에 빠졌어요 어마나
종알 미까지 그 지금 제가 지금 왼발에지 그래 통풍 온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 몇시간 다니까 얼었 그든
예 다리가 살짝 아까 심각하게 아니고 그냥 발톱 두 개 정도 빠질 정도로 근데 이게 웃긴게이 사람이 시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이제 그 몇 시간 꺾고 이제 뭐 새벽역 되니까 이제 작은 차가 하나 오더라고요
빵빵거리면서 그래서 이제 그 차 탔는데 다리는 얼고 막 아버지도 막
정신 없고 어머니도 정신 없고 하는데 이제 그 온 사람이 이 빵을 갖고 온 거예요 그 그 그 탈북 전에 먹었던
그 빵 이렇게 싸 가지고 온 거예요 야 그 빵 진짜 더럽게 맛있더라고요 다린 얼고 막 정신 없는데도 빵은
너무 살더라고요 어 뭐 물 한 먹음 없이 엄마나 그래서 뭐 지금은 빵 안
먹지만 제 인생 빵이 아니었나 그때가 세상에 그랬구나 그럼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그 선을 어떻게 마련한 거예요 그니까 아버지는 이제 돈도 없고 뭐
없잖아요 백 없 예 하니까 그니까 아버지가 이제 태역 군인이 하지만이 정신력은 아직 그 임민 사상이 아아
그래서 이제 몇 주을 그 두마 근처가서 동선을 파악했나 봐요 이게 얘네가 몇시에 저 구간에 담배를
피는구나 그니까 한 그게 뭐냐 탈북기 틀 전날도 가서 동선을 다 파악했나
봐요 그리고 이제 그 우리가 잠깐이라도 멈추길 수 있는 그런 좀 지대 낮은 거 보고 보고 그리고 이제
그 그 중국에 그런 사람은 이제 아버지가 뭐 지인 있었나 봐
에서 친척 친척 연리 있으니까 중국가서 어떻게 돈을 해서 갚겠다
해가지고 차 태러 오라 지금 우리가 너무 배 것 같으니까 빵 좀 사라 해가지고 그렇게 다 이제 아버지가 한
한 달 안에 다 계을 놨더라고요 예 대단한 아버지 차 타고 가는데 감정이 어떤 감정이면 뭐 이따 살았다 이런
안 검도 있지만이 앞을 보면서 이제 연변 쪽으로 가는데 예 아 뭐
아침이고 밤인데도 응 번쩍음 어 번쩍번쩍하고 막 이렇게 화나고 건물도
높고 막 되게 화려해이 뒤를 봤는데 북한이 시컴시컴 하더라고 예예
새벽인데도 아 그리고 불빛 한 점 없는 아 아무게 세상이 아 아무게
세상 해가지고 그 그 찰라에 그런 생각 같아요 내가 침매 있는 자랑한 고향이 고향이
응 뭔가 그림보다는 떻게 다시 못 가겠다
철 보는 만감이 차 만감이 엄청 차서 차는 앞으로 가는데 이렇게 뒤로
계속 봤어요 이렇게 뒤로 계속 봤어요 이제이 저 저기 이제 두만강 그쪽으로데 그 커먼 고용을 보면서
다시 죽기 전에 돌아갈 수 있을까 아 이런 생각 했어요 묘하다 예 진짜 묘
속에서도 예 구속에서 안 그래도 그게 어머니랑 동생이랑 아버지 시선도 다 뒤에 있더라고요 어쨌든 저 저도 저
몇 년이지만 어머니의 아버지는 몇년을 친척 친 친 가족 다 있는 거잖아요
다 등지고 살기 위해서 자식만 선택한 거잖아요 아 그때 그냥 아무 말 없이
그냥 북한을 보면서 고향을 보면서 이제 이제 차 타고 이제 옆면으로
들어갔고 아 그래서 뭐 가서 어 밥부터 먹었죠 뭐 뭘 먹었어요 그 첫
기가 금 지금도 격나요 이제 뭐 밥 가메라 야죠 부 밥솥이 그 뭐 이만한
거예 이렇게 밥을 해놨어 이렇게 어 중국어 쌀밥 서 그 보고 야이 쌀밥이
이렇게 말할 수가 있구나 그 할아버지 한갑 대본 그 쌀밥 쌀밥은 쌀밥 다니구
소금이었기 이제 그 그냥 된장국 된장국을 또 이렇게 꾸려 가지고
그리고 이제 김치 해가지고 쳤거든요 저희 내 지거 다 먹었죠 뭐 그거를 예이 거의 뭐 40명 나오는 분량을
제가 다 먹죠 예 잘했어요 그것도 사실 작지 작죠 어 나는 죽을 우리
막 먹었잖아요 그때 영양가는 없고 위만 늘어나니까 우리 친오빠 같은 경우는 죽을 한 여덟 그릇
먹더라고 어 그릇도 뭐 북한의 그릇이 얼마나 커요 사발로 어 사발로 여덟
사발을 막 먹어 끼더라 그요 영양가 없으니까 해 이러고 있지 난 지금도
기억나요 저도 배에 기름과 기름기가 없으니까 없으니까 배지만 늘어난 상황이니까 그 뭐 그렇게 먹고 예
그니까 처음엔 좋았어요 예 그렇게 먹고 먹 먹으니까 일단 좋았죠 아 행복하죠 먹으니까 졸리 돼요 또 봤죠
아니 자 또 밥 주대 또 먹었죠 그때 처음으로 뭐 제 기억에는 하루 새끼를
처음 그때 먹은 거 같아요 아침 먹고 정신 먹고 저녁 먹고 근데 뭐
말씀하신 것처럼 이제 밥그릇이 막 이렇게 막 세 개네 개씩 먹다가 이제 이게 하루 이틀씩 지나니까 이제 세
개 던개 두 개가 되고 두 개던 개 하나가 되고 이게 좀 위가 줄었거든요 그걸 먹고 어머니도 기억나는게
어머니가 사과를 엄청 좋아했는데 사과가 진짜 이만 했어요 이만한 사과 그래 진짜 아버지가이 이렇게 중국에
이렇게 빨간 강주리 이렇게게 파는 게데 12두 아이거든요 그럼 어마어마해요 뭐 사가 이런 거 12두
어마 많아요 어머니가 앉 자거 다 먹더라고요 와 사가 열달 그냥 예
그냥 그래서 그 도와준 사람 충격을 먹었나 봐요 그래 너희는 뭐 먹고싶냐 가지고 저 딱 생 생각해 보니까
계란이 너무 먹고 싶은 거야 진짜 계란 저도 계란 그때 한 50 먹 나
수말 먹었어 내가 그래서 깜짝 놀렸어요 지금 수말 먹었어요 나보고 저 선적이 그러더라고 뭐 제일 먹었
아저씨 거저 계란 시컷 먹어 보고 싶어요 이러니까 저 똑같네요 와
여기서 우리 8 7은이이 가난한 시대에 태어난 애들은 이게 다르구만 똑같네요 입이 예 저 그때 소금에
찍어 먹는 거 알았어요 계란을 아 그래요 그 오시발 들어가요 어 안자서 먹었어요 그 다음 날에 야 어 그렇게
먹고 나니까 란 화 근데 다음날 비하고 닭 내놔서 엄청 고생했아요
그래서 그때부터 계란을 그때부터 계란을 좀 많이 안 먹었어요 그 계란이 그 책의 비린내
때문에 아버지는 또 돼지고기가 먹고 싶다고 해가지고 그 그분이 이만한 그
뭐 고기를 한 몇킬로를 이게 덩어리 고기 사왔거든요 네네 지금도 그 생각나요 그 저저 도와주는 분이
아저씨였는데 보를 웃더라 그니까음 그게 들어가니
뭐 중국의 삶이 저희가 불법 체류 자라는게 쉽지 않잖아요네 신분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뭐 한 한두 달은 좋은 거 같아요 근데 이제 한두
달 있다 보니까 동네에서 얼굴 투고 저희는 이제 학교 갈 라인 학교 안 가니까 좀 의심이 하는 거죠 쟤네
어찌 학교 안 가니 이런 말도 있고 어찌 다큰 어른들이 일을 안 하니 쟤네 어디서 봤니 신척 아니니 뭐
해가지고 중국에서 열몇 번 근 이사가 외진 곳으로 저는 뭐 할빈 치아를
내몽골 베이징 뭐 뭐 뭐 그냥 그 북쪽으로 타다니 거 같은데 가서 이제
좀 흉가 이런데 살았거든요 근데 그 식당일을 하는데 그 어머니 아버지가
아버지는이 불판 난다거나 어머니는 이제 설거지나 이런 걸 해가지고 진짜 코끼리 다리가 될 때까지 발 퉁퉁
부아 가지고 시간 실을 했거든요 근데이 억울한게 저희가 불법 체류 자니까 뭐 아파도 병원 못 가고
억울한 일을 단계도 경찰에 신고를 못 하잖아요 예 돈을 못 받는 거예요 돈
일을 했는데 일을 했는데 돈안 한 사람이란 이유로 이후로 너네 돈 달라 그러면 신고하겠다 머 중국 식장에서
일하니까 음식물 쓰레기 좀 많이 먹었거든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제 좀 깨끗한 그런 반찬 같은 거 두 개 세
개 이게 이제 세이브 했다가 이제 퇴근할 때 가져오면 나랑 저랑 동생이 이제 정신없게 먹건 했는데 그니까
모는 건 해결되지만 우식 주가 있으려면 뭐 씻는 것좀 필요할 수도 있고 필아 추니까 그러면 좀 돈이 좀
필요한데 그거 안 주는 거예요 엄마나 어떡하면 좋아 그래서 아버지가 한 한두 마디 했는데 기분이 나빴나 봐요
예 그래서 신고를 한 거죠 아버지를 아버지가 그래서 북성 당간 거죠 예 아버지만 예 아버지만 엄마 어 아버지
근데 어머니는 어 잡힐 수 있는데 어머니는 그때 이제 이게 가게 안 있고 그니까 시장가 거죠 중국에서
아버지만 식당이 때 그냥 그냥 딱 잡힌 거예요 그래가지고 어머니가 그 갔다가 경찰서 경찰 차가 있으니까
바로 그냥 저랑 동생 손 잡자면 야 아버지 잡혔다 뛰라 해가지고 야 예
그래서 그때 저희 가정 그렇게 생각했죠 이제 뭐 처음 느낀 거 같아요 이제 이제 배고픔 소름도 큰데
나라 없는 소름이 더 크구나 예 그러니까 해볼데 없는 거 이제 아파도 억울한 일 장해도 그래서 어머니랑
손잡고 그냥 무작적 뛰어 거 같아요 예 울면서 예 어머니 아버지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까 아버지 아버지 잊어라
이제는 뭐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엄마 그래서 그렇게 뭐 그때부터 뭐
저희 가족 채식은 그냥 뭐 그냥 소대는 거짓 생각하는 거죠 노숙하고 예 음식물 뭐 그런 거 처 먹고 예
먹고 그렇게 산 거 같아요 그렇게 살다가 어 이제 또 연락 연락 돼
가지고 한 6개월 뒤가 아버지가 재탈북 했다고 아 예 그러니까 저희가
몇 개월 살다가 어머니가 연락되는 그 식장에서 좀 우리를 좀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분이 이제 연락을 하고 시작했는데 아버지가 다시 재탈 부했다
근데 우리가 안 믿었어요 왜냐면 아이 새끼들 우리도 잡아가려고 잡아가려고 개소리 치는구나 어머니가 안 믿었어요
그 그러다가 이제 그 사람이 왔어요 우리한테 왔어요 그래서 혼자 올아 가지고 왔는데 어머니가 아버지가 지금
통화를 하게 된 거죠 아버지 목소리 들으면 알잖아요 한편 사는데 근데 아버지가 탈북을 했대요 다시 아이고야
세상에 아 너무 뭐 어항이 범하 안 믿기는 거예요 왜냐면 아버지는 당연히
총살 아니면 그냥 예 어디 뭐 유배지 뭐 아오지 됐던 수 갔다 아니 매맞아
죽거나 뭐 뻔했으니까 그때는 심각하게 고문 했으니까 맞아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버지 온대요 그래서
일주일 만에 저랑 어머니랑 동생이랑 수어지 것으로 오더라고요 예 통화하고 일주일 만에 자타고 야 아
근데 그렇게 그 나이까지 저보다 그니까 세상에 어떤
강연한 남자보다 아버지 가 제일 강인하고 큰 사람이었거든요음 아 근데 그때는
그러니까 아버지가 너무 나해 져서 왔어요 예 그니까 그까 머리가 다 깨졌고 깨져
세상이 김 여기가 이게 거의 다 찢어 그니까 아버지가 모을 삼켜 가지고 이제 피를
토하니까 이제 깜방에서 아버지가 못을 삼킨 거 예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제 하도 때리니까 하드 때리니까 막
조국의 배반 자다 뭐 너 안까 어디 있는지 불어라 하드 때리니까 아버지가
이제 삶을 포기했대요 그래서 죽으려 그러니까 저랑 동생이랑 이제 어머니가 어떻게
살지가 버리 보이잖아요 예 어떻해 죽으려 그래도 눈이 아버지가 아닌 감기 드래요 예 그래서 내가 죽을 때
죽더라도 응 가족을 어떻게 살리고 죽자 죽자 그 마음을 먹고
생각해보니까 이제 이런 모을 키면 피를 토 하잖아요 예 그러면
이제 북한도 뭐 뭐 피토 하면 그냥 임치 방편으로 병원 보내잖아요 예 처음에 아버지 중국에 좀 살았으니까
이제 좀 살집도 붙고 이제 건장한 남자였는데 하드 한 몇 개 만에 맞으니까 이제 막 약한데 피월 투
하니까 뭐 계획이거나 며칠 못 남다가 판단했나 봐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제
그 동네 병원 보냈는데 그 3층이었는데 감시원이 이제 잠깐 선해 그니까 좀 느슨할 때 3층이
뛰어내려서 예 달 가신거 예 다시 이제 두만강까지 가서 두만강에서
수영해 가지고 엄마 그니까 백지은 상태에서 머리 다 터진 상태에서 취하신 거예요 어떡해 예 그렇게 해서
다시 우리한테 왔죠 그래서 아 그때 아버지를 딱 보자마자 이런 생각
들었어요 어 분명히 우리 아버지인데 어떡해 예 오 뭐라 그래야 돼 그렇게
초라하고 약해진 모습 처음 봤어요 왜냐면 그까 아버지가 허리가게 거
그니까 그 아버지 그 3 40대 그 절대 이렇게 허리가 힐라가 아니잖아요 근데 하도 아버지 그러니까 이렇게
아버지가 이렇게 허리를 꾸정 해 가지고 손도 뭐 뭐 발톱도 막 다 나가 있고 그래서 아 그때 그때 그
아버지의 형상은 지금까지 잊지는 못하거든요 예 그래서 이게 가서 이렇게 드라마나 영감 가서 막 안아서
막 울 그러잖아요 그게 안 됐어요 너무 놀라서 예 아 우리 아버지 맞나 아버지 왜 저렇게 됐지 막 그래서 막
하다가 어 뭐 이렇다 어 아 돌아왔다 어음
그래서 어머니는 그냥 계속 울고 계시고 그렇게 제외를 한 거죠 저희가 야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 가장으로서의
부담감이 내가 살아서 만나야 된다는 그 정신력이면 야 그 어떻게 버텼을까
대단하시다 아버지가 그니까 저는 뭐 죽어도 뭐 열 번 죽어도
못할 것 같고 아버지 까 가능한 거 같아요 아버지니까데 부성애도 장난
아니네요 이게 예 아까 아버지는 그냥 제가 뭐 성격 아버지 성격
닮았다는데음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굉장히 남자 뒀거든요 한 마원 지키고
그래서 아버지는 그냥 그냥 가족 가족 살리겠다이 이걸로 그냥 아버지는 그까
군림 정신으로 내 가족은 내가 지킨다 나라가 못 지켜도 내가 지킬 거고 중국에서 못 지켜도 지킬 거고 어떻게
지킨다 그걸로 아버지는 그냥 버티신 거 같아요 예 정말 아버지가 참 너무
대단하시고 위대하시다 생각도 드는데 그렇게 만나 가지고 이젠 더 이상 중국에 살 수 없지 않아요 그렇게
그렇죠 그 그 그래 된 거죠 예 기가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에 던 이유인데 아버지가 그때부터이 나라에 미래가
없잖아요 뭐 이래도 돈을 못 받지 아파도 병원 못 가지 이렇게 오구나
일 당해도 뭐 공안한테 친구도 못 하지 솔직히 뭐 동네 뭐 개 돼지 뭐
고양이 들 고양이보다 뭐 그냥 못한 거잖아요 예 들 고양이는 돌 받은 사람이 있지 우리는 뭐 누가 와서
우리를 죽여버려도 모르니까 그래서 아버지가 그때 이제 말씀하고 그래도 내
나라음 저 이렇게 버림 받았지만 이렇게 이런 꼴을 받았지만 그래도
남자손음 남도 손 그래도 같은 민족인데네 잘 산다고 들었다 예 가면
너희 공부도 할 수 있고 예 아픈 몸도 치료할 수 있고 어머니들 뭐 늘 계속 몸이 안 좋았으니까 예 그래서
한번 남수 한번가 보자 그때는 이막 99년 2000년 2000년이
초반이니까 정보가 거의 없었어요 우리는 우리는 뭐 어디 뭐 격리한다 이런 거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런 얘기하 라디오를 계속들은 거죠 그 주파수 그 한국 그걸 해가지고 중국에서 아 중국에서 한국 라디오
라디오를 들었구나 KBS 라디오었습니다 여기는 했 엄마나 어 제가 신부는 못 밝히겠지만 기자님이
한 한번 계세요 중국 기자 아니 한국 기자 기자가 이제 북한 동포들이
중국에서 헐 벗고 금지이고 힘들게 사는데 그 거기서 이제 특별한 가족 어려운 가족을 좀 구출하고 싶다 뭐
이런게 있었어요 그런 프로젝트가 있은 거죠 신문사에서 그래서 그 기사님
얘기를 듣고 아버지가 사연 보낸 거죠 엄마나 그걸 그거 라디오로 듣고 보낸 거예요 예 아버지가 그 몇 개 동안
어떻게 갈 고민하다가 그걸들은 거죠 왜냐면 그때는 루트가 없었으니까 예 그래서 아버지가 이제 아버지 인생사
난 무슨 일을 했고 북성 망했고 지금 뭐 다리 상태 몸 상태 어떻고 가정
어떻게 살고 우리는 뭘 먹고 있으며 어디으면 했는데 기자님이 그걸 보고
바로 이제 넘어온 거죠 중국으로 중국으로 비행기 타고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예 왔어요 그래가지고 만나가지고
때에서 만나고 식사하고 하다 보니까 처참한 거죠 저희 집 꼬리 그러니까 이제 그러면 이제 좀 기가 은 참 몇
개월 걸지만 이제 가짜 신문증 만들고 뭐 그 공안한테 돈도 어떻게 뭐 해
가지고 예 한국 올 수 있게 하겠대요 근데 뭐 솔직히 우리가 북한에 살 때 남조선 안 좋게 배웠잖아요 반신만이
했어요 남조선 가면 뭐 살찌 어서 비법 간다 눈 감문 코백 한다 뭐 이런 얘기만 맨날 들어 가지고 반신
반이 했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보면 예 북한보다 더 하겠냐
이거죠 예 내 나라 내 조국이 응 그냥 순수하게 배고파서 응 살려고가
살려고 그냥 나 그냥 옆나라 가서 밥을 먹는 건데 그거를 그냥 조국의 배반자 배신자 그냥 쓰레기보다 못한
취급을 하면서 그 그 한때는 아버지가 몇십년 동안 군대에서 그 나라를 지킨 사람이잖아요 야 진짜 기막히다 그래서
그 그분이 이제 또 사람들 연결 연결해 가지고네 저희는 진짜 이런 얘기하면 좀 탈북민들이 싫어하실
거예요네 왜 싫어해 너무 쉽게 왔으니까 아니 뭐 어때 그 어떻게
쉬워요 지금 그 과정이 지금 처참한데 예 얘기는 거의 안 하는데 제가 운동
씨 저의 동문이 처음 얘기하는 거지만 한시간 반만에 왔습니다
하더래요 세상에 사람 죽으라는데 없구나 예 그래서 그때 이제 제
기억에는 아시아나 같은데 정화까지 저랑 동생이 먼저 왔거든요 아 동생
나이 그때 명지 씨 나이 몇 살이었어요 제가 그때가 15 동생
13 살이죠 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면 그 왜 두 사람 먼저 오게 된
거예요 그니까 아버지 어머니는 이제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니까 막 중국 인사나 얘기하면 잘 안 들리는데
저희는 중국에서 거의 3년 가까이 숨어 지내다 보니까 뭐 그래도 들리는게 있잖아요 애 애들이니까
그래서 공간이 무슨 얘기했을 때 질문서 대답할 수 있으니까 좀 통화 통 통화기 통과되기 쉬우니까 저랑
동생은 먼저 보내고 그 한국에서 임시의 여권이 온 거네요 비행기 타고 올 거면 시건이 나오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뭐 그 어쨌건 그 방법을 그 다 해 주신 거예요 문 비행기 탔을 때 기억나요 기억나죠
어때요 어땠어요 난생 처음 우리는 뚱 것만 보고 우리나라 비행기 이러고 살았잖아요 그러니까 뭐 뭐 그런 노래
있잖아요 빠르면 기차 뭐 그런 노래를들은 적이 있거든요 뭐 뭐 뭐 원세 엉덩이 빨게 그런 거 같 그
그때 뭐 비행기를 들어봤지 뭐 비행기를 본 적이 없잖아요 그죠
그래서 딱 그 가서 포서 야 저렇게 큰게 난다고 이런 생각을했고 그 그
그 기사님도 좀 꾸진게 뭐뭐 신벌 벗어 된다 예 그리고 뭐 손 들고
들어가라 뭐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장난치는 거예요 우리 상하니까 하 그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 발 먹
손들이 들어왔지 해맑게 그니까 아 뭐 그분들이 이게 손 들리세요 뭐 그런게
나거든요 그래서 들어가서 이제 그 되게 예쁜 누나가 와서 물도 주는
거예요 바고 야 이게 씨 자본주의 물인가 다 먹으나 보자 뭐 하면서 그
하니까 뭐 뭐 그냥 뭐 이제 뭐 뭐 나가면 뭐 올거다 뭐 올거다 이런게 있었거든요 예 그래서 이제 좀
긴장하고 있다가 이제 탁 착하더라고요 그 그때가 밤이었어요 밤이었는데 딱
내리니까 이제 이제 팻말이 있는 거예요 제 이름 딱 쓰고 들어 있어
갔죠 제 동상이 갔죠 예 기다리고 있었구나 한국에서 예 기자들 나와 있고 아니 기자가 아니고 국정원 아
국정원 예 국정원 국정원 국정원 익숙하지 잖아요 예 국정원 그래서 고문 정장 두명 두 형이 나와 있는
거에서 막 그래서 또 대명 오신 거 환영합니다 이러고 맞죠 그래서 인천왕 보고 너무
커가지고 놀란 것도 있지만 그 형형 형님들의 그 포스에 눌려 가지고
해가지고 그래서 이제 탁 안내 승년 타 건네 시커 먹고 다고다 조용하
그랬어 어 자유 땅고 환영합니다 동생분이 고 해가지고 막 물이 너무
긴장니까 둘이 안 닮았다고 어 긴장 풀어준다고 그래서 뭐 에어컨도
틀어주고 뭐데 길이 그러니까 저희는 중국에 살다 보면 구경 같은 거 거의
못 하잖아요 수머 하다 보니까 근데 이제 인천 인천 인천에서 이제
서울까지 오는데 너무 이제 길이 너무 큰 큰 거예요 아니 뭐라 잘되 그러니까 중국에 살 때는 이게 차가
가면 아시면 다알겠지만 이제 사람들이 왔다 갔다 다 걸리잖아요 무 다 아 그게 자연스 가잖아요 예 아 그러니까
사고도 많이 나지 뭐 사고도 나고 뭐 마치 차랑 사람이 왔다 갔다 하는데이 돌에 던 사람이
없잖아요 어 무단 횡단 왜 안 하지 생각하면서 근데 막 차 달리 속도
보니까 어 속도는 차는 줄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도 하면서 그때 이제 국정원이 갔거든요
네네 그때 이제 국정원이 갔거든요 예 가니까 옷을 주세요 저는 옷을 그래도 중국에서
제일 하려하고 이쁜 걸 입었는데 들이 옷 딱 주는 거 보고 야 이거 제질이
다르구나 그걸 뒤 한 버리고 벗어 놓고 밥 먹었냐 그러는 거서 아 밥
안 먹었습니다 하니까 다 이제 다 오래요 싹 갔어요 그러니까 이제 형님들이 이제 탁이 뭐 들려요 응
국정원에서 예 그래서 들었어요 철판 뭐 이런 거 딱 들래 들었어서 이게 뭘까 했어요 그까 따라해 봐 해가지고
예 하니까 이제게 하 올리는 거예요 그래서 뭐 제육 볶음 올리고 뭐 오년
뭐 올리고 네은 그 육이 너무게 생긴 거예요네
고기 뻘 맛있겠다 매콤하고 딱 해가지고 딱 젓갈 딱 넣었는데 너무
달아 아 왜 이렇게 달아 아니 그래서 우리 남성 농부들은 단 걸 좋아하나
뭐 그런 기억이 있어 진짜이 중국에서는 막 이렇게 이렇게 먹잖아요 근데 양이 적잖아요 그래서 너무
눈치가 보이니까 배가 안 찼어요 이제 긴장 풀리니까이 들어갈 거 아니에요 형님이 좀 먹어도 됩니까 하니까 저
다 먹어도 돼 퍼 가지고 엄청 배벌 먹 기억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하고 동생은 좋아해요 동생에서 그냥 신났죠 저보다 두사 어린게 더 신난게 뭐냐면 뭐 물어보지 않아요 우리 뭐
혼자서 이렇게 왔다 갔다가 요거로 두었거든요 요거트가 마셨나 봐요 그러더니 눈치를 봐요 근데 이제 형이
빨대 닦고 와서 먹으니까 어 저렇게 하는구나 하고 딱데 자기 맛에 처음 먹는데 너무 달
맛있는 거지 떡 꽂고니까 한 세개 세력 먹으니까 그만 먹어라
설사한다 여도 얼마 맛있어 예 처음 먹어 보니까 샤워를 하라는 거예요
근데 저는 북한에 있을 때도 샤워 몇 번 안 했고 그리고 이제 예 그니까
우리 목욕이라 그러잖아요 그리고 중국의 일 때 번 목욕을 해요 그런 여유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전 안
씻는게 너무 당연한 건데 씻을 해요 그 왜 씻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
씨 왜 씻으라 그러지 그래서 이제 물만 틀고 이렇게서 따가 나왔죠 그런 기억이 생생해요 아씨
집에 왜 냄새도 안 나는데 왜 씻으라는 거 오메라 대박이다 그래 중국에서 살면서 얼마
숨어 살았으면이 위생적인 신경을 못 쓰지 안전한 안식처가 없으니까 그렇죠
예 그래서 아 열 몇 번을 옮겨 다녔다고 하셨잖아요 예 중국에서도 거의 뭐 한 한 다섯 번 씻었나 뭐
먹고 자는 걸 해결하지 뭐 또 씻고 그 씻으면 또 뭐 바르고 뭐 이런게 있어야 되잖아요 뭐 그런게 없으니까
그렇게 하고이 첫날밤은 들어가니까 치매 살이랑 그 노란색물 그 스죠 그거랑
이제 가자를 이렇게 주는 거예요 또 다 다 들어가 돼요 너무 맛있어 가지고 야 그렇지 맛있지 아침의 살
너무 맛있잖아 제일 감동인게 뭐냐면 저는 지금 기억 생산하는데 tvl 틀었는데
아무리 돌려도 다 말이에요 다 알아듣겠어 야 그게 제일 행복했구나 예 저 진짜 행복했어요 왜냐면
중국에서는 무슨 뭐 책을 보던 뭐 라디오를
중 그니까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냥 그런 이감 있었거든요 근데 이제 아
이게 같은 민주 생각한게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다 한국은 거예요 야 예 참 말이 통하는게 얼마나 행복한
건데 그니까 3년 동안 나라 없이 살아보고 문화 다르고 언어 다니고 다
다른 데서 살아 봤잖아요 그런 외딴 딴 나라에 살다가 같은 조 가서 같은
문화서 이렇게 으니까 이제 배드 부르고 지수도 먹었잖아요 피 뽑을
타이밍 됐는데 피 안 뽑았잖아 아 그래 잘해요 뭐 피 피 안 뽑으니까
아 피가 넘쳐 않는 나라구나 피를 뽑아야 되는데 이제 배 배 불게 먹였으면 피 뽑을 타이밍 됐는데 피
안 뽑더라고요 그래서 세상에 그거를 서위 괴담이라고 하죠 그죠 북한에서
아주 괴담으로 우리를 다 세뇌시키고 그랬던 건이 괴담이 무섭거든 얼마나
공포스러워 우리는 무 기 들었냐면 양광도 대단 이잖아요
그니까 거기 국경지대는 밤 8시인가 이후로 다니지 말라 그랬어요 처녀 애들만 납치를
해다가 안기부가 이제 그 특공대 있잖아요 특공대의 그 실험 영으로
가죽 장갑끼고 배 내장을 집어낸 다음에 장갑차에 달아서 질질 끌고
다닌대요 그러다 죽인대 그니까 달아서 죽여 버리는데요 끌면서 이게 괴담
아니고 뭐가 괴담이 그 우리는 그렇게 들었어요 흑백 팁을
보면서 남자 어리들은 헐벗고 금지리 얘네는 감자 하나도 못 먹습니다 하면 딱 속으로 딱 감자 딱 들었다가 야
이거 나중에 통일되면 파나나 줘야 되겠구나 아 새끼들 감자도 못 먹네 딱
하니까이 한국 오니까 감자는 이씨 다이어트 때도 안 먹어면 맛없다고 나
진짜 돼지 먹는 감자 그러니까요 그 그렇게 존 그 다 뭐 그니까 그런게
다 붕괴가 되는 거죠 살면 그 하루 이틀 살수록 그니까 오린 나이에도 그냥 그냥 그 들었던 세네가 그냥 한
방에 정리가 됐다고 보면 될까요 그렇죠 그 한 방에 그 궁금한게 국정원에서 그 15살인데 혼자 앉아
놓고 조사해 동생이랑 같이 지내긴 했거든요 제 기억에는 근데 이제 조사할 때는 따로 그니까 철저히 따로
왜냐면 그니까 제가 어디서 살았고 언제 나왔고 제 동네에 뭐 있었고 이게 동생이나 일치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조랑 동생이 기억 똑같으니까 일치해 가지고 저희는 뭐 다시 얘기세요 뭐 이런 거 없었어요 왜냐면
뭐 아기 때니까 너무 정확 기억하고 있어 저희는 조사 며칠만에 끝났어요 아
그러면 부모님을 어떻게 만나서 언어가 잘 안 되니까 한 한 달 정도 좀
이제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러는 거예요 저는 진짜 심장이 조리는게
저랑 동생은 안전한 곳에서 물론 조사는 받지만 배블리 먹고 과도도
나오고 형님들이 산책도 시켜 주고 막 이렇게 옷도 주고 다 해줘요 그 안전한데 있잖아요
예 근데이 그 연락이 안 되고 그리고 어 기사님은 믿고 기다리라는데 하루
이틀 되니까 불안한 거예요 왜냐면 아버지가 한번 북성 당하셨서 한국 안 오면 생이 변인
거잖아요 동생도 물어보고 속으로 계속 생각했죠 야 어머니 아버지 다시 또 볼 수 있을까 그니까 그니까 한
일주일 한 열흘 하다 보니까 이제 밥이 안 넘어가는 거예요 아 어떻해
어머니 아버지가 저를 한 달만에 보고 그런 말씀 한게 기억 나거든요 또 어째 살이 이렇게 빠졌니 잘 먹고
그러니까 제가 그 저의 기억에는 잘 먹고 잘 지낸다고 생각했는데음 그 어린 나이에도
스트레스 엄청 많이 받았나 봐요 부모님 생각하면서 그래서 그때 그 한 달이
지금 뭐 편하다면 1년 같은 그런 기억이 있어요 왜냐면 저도 뭐 뭐 예를 들어 헐버 금지이고 있으면 제가
상황이 너무 각박하게 막 어머니 아버지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할 텐데 지금 제 생
생각이 너무 호화스럽다아요 그러니까 하루 생일 이제 어머니 아버지 생각만 하는 거예요 언제 올까 음 그죠
공에서 어머니 아버지 말 잘 안 되는데 무사 통화가 될까 예 그 그렇게 계속 국전에 지냈어요 아
그래서 이제 국전에서 어느 날 이제 응 주말 같은데 이제 그때 국전에서
교회 그때 경 예 있었죠 그때 그래서 가다가 끝나는데 이제 올라오 그래요
그러니까 딱 가니까 어머니 아버 어머니 아버지 딱 왔다 어마나 세상에 아버지 엄마가 무사히 한국까지
온 거네요 예 왔죠 야 아 그때 또 눈물의 상봉이 그냥 예
그때는 그냥 다교 꿇었어요 진짜 야 진짜 자위의 땅에 왔고 그냥 제가
이제 한 달 가까이 살았잖아요 이제 안전한 나라 알았잖아요 예 제가 알던
남수 아니고 예 정말 친절하고 예 그래서 짜 이제는 그런 생각하더라고요
나도 공부할 수 있겠구나 아 어머니 아버지도 이제 일해도 월급 받을 수
있겠구나 이제 어머니도 나도 그렇고 아버지도 아픈 몸을 치료할 수 있겠구나 예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러면서 뭔가 그런 뭐 뭐 말로 말도 못하는 기쁨 그리고 아버지가 그런
얘기도 하더라고요 야 명진이 이제 장가갈 수도 있겠다 이제 저 그때
이해를 못 했거든요 근데 아버지가 그 그 생각을 그런 생각을 계속 하신 거
같아요 제가 그때 사축이 때니까 아버지한테 그런 얘기를 좀 많이 물어봤어요 막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 결혼했습니까 응 저 언제 사랑했 귀여워 중민이 어디서 뭐 먹었습니까
그리고 여자는 어떻게 만납니까 그런 질문을 많이 했는데 아버지가 아 얘가
이제 여자에 관심이가 가졌구나 관심이 생겼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버지가
그런 미래까지 생각했나 봐요 근데 제가 중국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고 어떻게 직장 올 어떻게 결혼을 하겠어요 근데 이제 아버지 자 땅에
왔으니까 아버지가 그러 야 너 이제 자갈 수 있다 이러더라고요 아 세상에 근데 아직까지 못
갔어요 이제 가야지 예 아버지 뭐 어떤 어려움 같은 건 없었고요
아버지는 좀 이제 군 그런게 있었잖아요 그 정보를 좀 많이 물어봤을 거 같아요 예 정보 이렇게
많이 보죠 북한 해군 생활은 어떻냐 뭐 그니까 그때 마도 이제
탈북민이네 많지 않을 때 같은데 예 그 뭐 끼 있어 봤죠 2,000명 3,000명 예 진짜 없을 때니까
그래서 그 아니까 한국에 나온 청체 수가 2천에서 3천 정도 되다는 거죠
예예 그래서 아버지 처는 이제 미지 방 이제 해군 이런 케이스가 거의 없었나 봐요 그래서 이제 그 해군
문화에 대해서 좀 더 이제 많이 물어본 걸 알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도 아는만큼 다 말씀드린 거 같고 저희랑
같이 잘 하원으로 갔죠 예 하나에서는 어땠어요 가족이 같이 지냈다고
했잖아요 예 하 우리이 조선 사람들은 조은 사람이다 생각하게 있습니다
뭔데요 어떻게 눈만 맞으 치면 싸니까 이제 배대 좀 부르다고 어찌나
싸웠는지 누가 하나 안에서 사람들이 예 뭐이 누나 들러 남자 하나 하나
놓고 저 내거다 가나야고 아 막 다시 만나 가지고 야
이쌍 하면서 뭐 뭐 온갖 갓나 뭐 열두 간나 나오면서 쌍 뭐지 하면서
뭐 씨배 나오면서 어째 이렇게 싸우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우어 야이 조선 사람들은 같이 있으면 안
되겠구나 진짜 어제 그렇 생각했어 와 너무 싸워 그러니까 말 싸도 하고 몸
싸도 하고 응 난또 부모님이 싸웠다는 아 우리 어머니 싸우 우리 엄마 아빠
싸우는 건 다 일상이고 뭐 다 아시잖아요 북한에서는 싸우는게 뭐 이게 유일한 뭐 낙이자
취미이자 활동이니 그거는 뭐 우리가 그 덜려 가게 한 거예요 예 그 가난이 싸움이니 그렇게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긴데 예 야 그랬군요 거기서 하나원에서 그러면 이제 집을
받고 나오겠네요네 그니까 아버지가 몸이 좀 많이 앉 주셨잖아요
그래가지고 아버지는 좀 치료도 많이 하셨고 그니까 아버지가 좀 자 단
아버지는까 아버지는 좀 몸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요 아버지 얼마 그렇겠지 못을 삼키는데 제일 가슴 아픈게 뭐냐면요
예 아버지가 술 고기 좋아하시거든요 근데 아버지가 한국 와서 진짜 딱
1년도 기절 동안 술 고기를 시컷 드시다가
돌아가셨으면네 저는 그래도 굉장히 만족할 것 같거든요 그니까 그렇게
다시 앉을 거데 아버지가 몇 개월 만에 돌아가셨어요 한국 와서 좋은 날에 와서 엄마
어떡해 그 술고기 삼겹살도 뭐 한 번 드셔 왔나
그러니까 술고기 술고기 그냥 제대로 몇 번
못드시고 돌아가신게 지금도 어머니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그게 너무 좀 한 이거든요 가슴 아프고가 아 예
그래서 아버지가 예 좀 그래요 지금도 저한테 아버지가 상처고 제 늘 그리
사람이고 그렇거든요 뭐 진짜 늘 그리운 사람인데 아버지가 좀 그렇게
되셔 가지고 저희가 나와서는 그렇게 행복할 줄 알았거든요 예 근데 이제
아버지가 그렇게 되니까 그래 나와서 몇 개월 만에 아버지를 큰 하니까 얼마나 상심이 컸겠죠 예 그니까 좀
그런 생각을 했죠 뭔가 좀 좀 불공평하다 응 살이 그러니까 뭔가 제
기준에서는 우리 가족은이 정도면 충분한 고생을 한 거 같은데 어떻게 또 아버지 이렇게 이게 하늘에서 불러
불러 가시지 몇 개월 만에 그러니까 좀 억울했어요
억울하고 그때 좀 제가 좀 방한을 했거든요 뭔가 학교도 가야 되는데 막
뭐 학교도 안 가고 그 학교 가서도 잠만 자고 그런 적이 있는데네 그때는 진짜 뭐 많이 힘들었죠 그걸 말로
어떻게 표현하겠어요 야 그러니까 아버지는 그거였던 거 같아 한국에까지 내 가족을 데려다
주는게 내 내가 해야 될 의무이자 최선이다 정신력으로 그동안 버티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북한에서 그 정도의 몸을 상 몸이 상한 상태에서
중국으로 넘어와서 어떤 치료도 못 받고 거기서 방황하면서 버틴다는 거는 그 육체적 고통이 엄청났을 것 같아요
또 정신적 고통까지 하면은 예 그러니까 아버지가 한국 와서 국정원이 한이랑
있을 때 이런 말씀 여러분 하셨어요네 나는 이제 죽어도 영안이 없다 그래서
진짜 특히 싫었거든요 예 그런 얘기를 왜 하시지음 이제 좋은 나라 왔는데
이제 어머니랑 저랑 동생이랑 같이지지 먹고 사면 되는데 근데 아버지가
아버지는 느끼신 거 같아요 몸 상태를 근데 말씀 안 하시 그러니까 그런 뭐 북한은 예 그런 거 남자가 약한 거
싫어하잖아요 그래서 아버지 그러했 나는 죽어도 없다이 안전한 나라 왔다
어 예 그래서 먹으면서음 아버지의 그런 그때
마음가짐과 생각과 왜 그때 그런 말씀과 행동 하셨구나 그게 이제 늦
알 알겠는 거죠 한두살 계속 먹으면서 아 너무 늦게 좀 깨달았는데 그래서
지금은 예 아버지 그런게 아 나 명진 씨 아버님 못
봤지만 정말 감사하다는 말 인사와 박수 한번 보내 드리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아씨 와 [음악]
아이고
아버지는네 제가 유리하게 응
인정하는 남자고네 저희 가족을 위해
해 너무너무 고생 고생하셨습니다 아버지
한번 좀 꽉 안아 들려야 되는데 제가 그걸
못 했어요 아버진 고맙습니다 아이고 세상에 가족을
여기까지 데려다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도 아유 명진 씨 힘든
얘기 해줘서 고마워요 아 종이가 없네 운 방송도 하는데 갑자기 아버지
얘기하니까 눈물이 나네 아유 그렇죠 이게 북한에 지금 명진씨
아버님 뿐만 아니라 모든 아버지들이 이런 마음을 지금 또 갖고 탈북하고
계시는 분도 있고 또 오신 분도 있고 오다가 돌아가신 분들도 계실 거란 말이에요 그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체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대목에서 또 느끼게 되는 거 같아요 솔직히
어떤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그렇지만 그 악조건에서 명진 씨 아버님과 어머님은
특별히 아버님을 최선을 다해서네 중국이라 선 북성 과정에서 그 모진
그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을 견디면서 한국까지 이제 가족을 데려온
진정한 군인 아빠다 와
[음악]
진짜 어머니의 삶은 좀 어떠셨어요 한국에서 어니가 진 이세요 그러니까요
저희 어머니가 대단한 사람이에요 야 진짜 예 그러니까 예 그니까 저는
성격이 어머니도 많이 닮았거든요 뭐 아버지 그런 그런 성격 고집이나 이런
거 좀 닿긴 했지만 어머니도 좀 유쾌해 하시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저가 와도 대단한 거예 예 어머니는 지금도 큰 금액을 못 보셔도 한국
와서 쉬지 않고 일하셨어요네 지금 어머니가 60년생 지대인데 그리고 어머니가 늘 그런 긍정적이세요 예를
들어 꿈을 크게 가져라 참 너무 멋있는 말이잖아요 왜 어머니 하면 그
꿈이 깨지더라도 그 조각이 크지 않니 엄마 멋있다 예 그래서 어 저가 또
저 새끼 보죠 그래 어머니 꿈은 무엇입니까 하니까 내 꿈은 재미있는 드라마 하나 발견하는게
꿈이다 어머니 꿈은 왜 이렇게 소박합니다 하니까 나는 겸손하게 사는게 꿈이다 막 뭐 이렇게 어머니랑
가끔 치키 하는 예 어머니가 해외가는게 꿈이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예
어머니가이 조선 팔도 살짝 중국 빼고는 벗어난 적이 없어요 진정한
조선이 어머니인데 예 그래서 어머니를 좀 뭐 가까운 뭐 필리핀이 태국이
일본이든 좀 더 좀 뭔 나라든 해서 좀 해외 꼭 좀 보내 드리고 싶어요
아 그날이 꼭 왔으면 좋겠어요 명진 씨 제가 가열차게 돈 벌어야죠
살고 계시거든요 우리 용진 씨 여기 와서 이제 학교를 들어갔잖아요 북한에서는 배가 고파서
솔직히 학교 못 갔어요 거기 학교 생활은 괜찮았어요 어땠어요 사춘기에
와 가지고 좀 더 남다른 얘기가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남다르죠 저만 할
수밖에 없는 이런 이거는 뭐 웃기다고 해야 되나 슬프다고 해야 되나 그런 일들이 있는데 뭐 좀 있는 거 같아
그러냐면 일단 처음에 대한학교 아시죠 대한학교 갈래 그 학교를 갈래 하는데 응 그 저는
학교 가고 싶은 거예요 아 남선 왔으면 남산에 새끼들이랑 놀아야지 그것도 입고 교복이 너무 입고 싶은
거예요 아 그래요 북한에서도 그렇지만 중국에서 제일 부러운게 아침마다
어머니 손 잡고 응 이게 교복이 그 등교하는 그 저 나이 또래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거든요 예 저건 무슨 기분일까 저런 책 가방 매고 싶다 저런 교복 먹고 싶다 그래서 교복고
학교를 를 이제 가게 돼요 처 중학교를 가게 되는데 입학하면 먼저 이제 가서 무슨 교생님 교관님 면담을
하잖아요 그래서 면담을 하고네 그래서 막 아 잘 적응해 봐라 아 근데이
말투는 좀 좀 상냥해 져야 돼 예 알겠습니다 막서 어 그쪽이 좀 말투가 이게 좀 투박한 면이 있으니까 그렇죠
지금 지금은 지금 제가 솔 말 쓰잖아요 아 예 말 거의 뭐 서울
강남 말 쓰고 있는데 그때는 뭐 거의 뭐 한경도 뭐 거의 뭐 나 아닙니다 뭐 이고 쓰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게
교시를 보여 주겠대 교 교시를 갔는데 아니 채권 상이 너무 작은 거예요
그까 제 기억에 북한 책상도 훨씬 컸는데 한국 책상이 너무 작은 거서
야이 남자나 새끼들 여리여리하고 키가 작구나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겠죠 뭐 야 또 나이 한 살람 많게 들어가다 보니까 야 새끼들
이게이이 조그만 새끼들이랑 못내 공부를 하지 하면서 딱 원래 딱 등교해서 딱 갔죠 그래서 가서 예
안녕하세요 막 뭐 이사하고 딱 들어가서 앉았어요 그 다 앉아 있으니까 오르잖아요 그래서 쉬는
시간에 이제 애들이 막 뭐 매정 간다 다서 이렇게 막 서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 키가 큰데
애들이 아 그래서 그 오전에는 너무 당황해가지고 일어나지 않았어요 너무
작아서 너무 작으니까 아 근데 여자애들도 보니까이 여자들이 너무 키가 커 그래서 아 이거 이거 아
이거 이거 잘못된 거 같은데 이게 아셨어요 그래서 이제 이제 그 정신 지나서 오후에 이제 전개성 모임이
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키순으로 서아요가 앞에 남자 중에 제일 제가
맨 앞에서 있더라고요가 잡아서 아 아 여기는 한국은 키 작은 순서대로 앞에서나 봐요 북한은 키 큰 큰
순서대로 앞에 잖아요 예 그러니까 지금 또 바뀔 수도 있겠지만 저때는
예 키 작은 애들이 앞에 서고 키큰 애들이 맨 뒤에거든요 그 저는 솔직히 중간이나 좀 큰 편이라 생각했어요 예
저는 뭐 그런 정보가 없으니까 네네네 그래서 제가 맨 앞에서서 있더라고요 귀여워 그래서 야 이거
잘못됐다 야 북한에서 감자 하나에 더 먹을 걸 뭐 이런 생각하면서 어게
진짜지 생생해요 예 그리고 북한 사람 치구는 그 짱 키가 아니잖아요 중간 정도잖아 딱 중간 키이 나가서 이제
근데 이제 여자들을 이렇게 봤는데 여기서는 이렇게 봐야 돼 이렇게 이렇게 보통 이거 이렇게 보는
거예요음 그래서 야 이거 남녀를 다 우르러 봐야 되는구나 여기가 여기
여기 있었네 자기님들이 뭐 이런 생각들 하면서 와 그래서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무슨 행동 될지 보서게
가만히 앉는데 애들이 와서 이렇게 찌어 보는 거죠 이렇게 야 피부는 똑같네
뭔이 손톱이 넘 쓰니까 어 손톱이 없네 하면서 막 그고 오 오 야 빨간
머리 없네 막 이렇게 애들이 가지고 막 육 받은게 있으니까 예 볼드 찍어보고 그때 2000년 초반
2001년 뭐 그 때거든요 그니까 북 친구는 처음 본 거야 태서 그러니까 얼마나 신 거예요이 친구가 전학을
왔는데 북한에서 왔대 근데도 한경 처 왔어 어 뭐 말 뭐 모른다 가라 막
싫다 이러니까 얘는 외계인인가 바보인가 그 그런게 있을까 짝꿍이라고
아시죠 예 예 예 예 짝꿍 있는데 이제 여자가 된 거죠 참 진짜 속대
말로 너무 고운 거예요 첫 짝꿍 있잖아요 와 필통도 곱다 어째 글씨
글씨도 고운 거예요 막나 삐뚤삐뚤 쓰는데 막 야 그래서 말을 걸고 싶은데 말을 못
걸게는 거예요 아 떨려서 떨리잖아 응 세상에 그래서 특게 눈치 보이셨죠 근데 이제 먼저 말 걸러 주더라고요
친절한 아이었어요 역시 서울 여자 그래서 탁탁 치면서 혹시 그 짱구 아니야 그러더라고요 혹 짱구
짱구 아세요 예예 마나 캐릭터 예예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는 맨날 소련 장수 보면서 동상이나 보다가 짱구
어떻게 알아 했어 야 영친아 짱구 하라 해가지고 모른다 했죠 그 걔가
굉장히 한 표정으로 장를 모른다고 모른다 그러니까 그때가 막 지오 이런
가수 있어 저보고 또 뭐한을 때 저보고 또지 어디 알아 이런 거서
제가 어떻게 알아요 예 또 모른다 했죠 그러니까 표정이 묘하게 변하면서 야 야 새끼는 뭐 아무것도 모르는 거
표정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러면 생각을 했나 봐요 그러면 이제 뭐 만화 캐릭터도
모르고음 그리고 가수도 모르니까 그러면 뭐 공부를 그래도 북한도 공부하니까 예 역사적인 인문을 알겠다
예 예 그래서 간디 아시죠 예 예 간디도 예 인도 예 그게 굉장히
유명한 분네 그래서 탁 명진아 혹시 간디 하러 하는 거예요 근데 간디
누구 봐도 사람 이름이잖아요 그래서 딱 이러죠 간디 아 간디 자는
모르겠는데 혹시 응 그 친구는 나 안 돼 옆 옆 옆 반이나 옆반 친구인 줄
알고 그러니까 걔가 그 북한말로 굉장히 스급들 표가 있죠 예 어 무
표정 이러더니 그냥 이게 쑥 돌더니 응 졸업할 때까지 말 걸었어요 아
진짜요 그러니까 그 그니까 막 저를 엄청 무시하라 그런 거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뭘 말해도 모르는 애니까
무슨 말을 하니 내가 하더라고요 뭐 그런 것도 있죠 그리고 또 북한이 막
거 유교상 있어 가지고 그 우리 보통 여자를 여자 이러잖아요 그 북한말로
여자야 물 좀 달라 했거든요 아 굉장히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뭐래 그래서 저는 학교 생활이이야 여성 농부들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어 진짜 어려웠어요 그리고 또 남자애들 왜 어렵냐 혹시 사격한
적 있어요 북한에서 예예 아니 무슨 그 군사 훈련 예 하잖아요 그 저희는
유년 시부터 총 솔 기획도 있고 사격 훈련도 하고 그 춤도 추고 그런게 있잖아요 우리는 뭐 전투 훈련이 뭐
일상이니까 그래 저는 그런 그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어느날 학 났는데 애들이 피시방 피시방 피시방이
뭔지 알았어요 그 막 그렇게 듣고 막 오락실 이렇게 듣다가 어느날 어떤
애가 와 가지고 이제 동씨 저한테 아 명진아서 왜 하니까 총 싸 하러
가세요 어 너무 놀란 거야 야 너네도 총 싸 아니이야 뭔데 야 야 새끼들 드디어
나랑 맞는게 많 있구나 야 그 어딘데 딱 하더라이 아 새끼들 몇 명이 데리고 가는게 PC 방을 데리고
가잖아요 그래서여 여기 왜 왔니 하니까 앉아봐라 그 제 말도 라니까 안 안 좋는데 딱 치더니 그 총게임을
딱 하더니 송 싸해요 아 뭐 알아요 뭐 하 막 어지럽 그만 총 소라야
야이 총 뭐 엠퍼스 하는데 놀리니 그 진짜 어려웠어요 아 이게 얘기하면
끝이 없는데 저희가 북한 같은 경우는 이제 남녀 녀서 이제 어린이부터
할머니지 다 대화가 되잖아요 그렇죠 왜냐 발전된게 없으니까 세대 차이가
일단 없어요 애들이 막 방가구 활동하고 저랑 좀 친해지려고 그면 애들이 막 돈가스 먹어 봤어 돈가스
아 이거 뭐지 돈을 깐다는 얘긴가 저 새끼 뭐라는 거지서 야 그
뭔데 먹거 맞아 돈가스 그 어간이 안 좋은데 그 또 원 가면 이제 햄버거도
한 번도 못먹 왔잖아요 햄버거는 자본주의 상징이요 애들이 뭐 멍지아 햄버거 몰
하어 햄버거 하 응 햄버거 햄버거 그 무슨 형인데 어 야 그까 진짜이 외로
때문에 진짜 고생만 했어요 슈크르 박 아이스크림음 그거는 정말 한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기본적인 음식의
이름인데도 못 먹어 봤으니까 먹을 수밖에 없죠 못 모르 주니까 그래서 그때 친구들이 많이 알려줬어요 답답해
가지고 고맙네요 그래도 지금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를 하지만 그 어린 나이의
소통이 안 되는 상향에서 얼마 본인도 힘들고 슬프고 그랬겠어요 나는
내라는게 없어서 좋을 거 같아 아 아 나는 나 진짜 북한에서 우리 명진 씨
동갑이니까 공감하자아요 고무 내라 파지 내라 철 내라 어 토끼풀 해오라 토끼 가정
내라 그다음 장갑 인민군대 테 보내는 거 만들어 오라 엄머나 한 열 대까지
됐던 거 같은데 심지어는 도토리 쌀까지 바치라 그러잖아요 철도 갖고 하잖아 철 동 동도 갖 그랬고 예
한국에서 내라는게 있었어요 자본지가 돈내라 그러죠 뭐
아니 자문지 가동 통신문이라고 내래
이제 한 아기마다 가는 그 수련에 가니까 돈 내세요 뭐 이렇게 돈을
가끔 내라 그러지 뭐 부당한 거 있잖아요 아니 뭐 학생이 공부하면 되지 그런 건 없었어요 아 그게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렇죠 왜냐면 북한에 있었으면 제 제가 기억나는 것도 뭐 제 고향에서까지가
하 많아 가지고 쥐꼬리를 잡아야 되거든요 엄마나 진짜요 그 뭐뭐 없는
나라에지가 있어 먹을게 없는 날라 저희 그 동네 그 한때지가 확 늘어나 가지고 쥐 한 마리나 꼬리 하나잖아요
그 뭐 쥐꼬리 세 개 맞춰라 골 다섯 개 맞춰라 이렇게 했었거든요 학생들을 통해서 쥐잡이 하라고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그때 이제 그 뭐 어린 나이긴 하지만 아버지가 중매로 이제 이게
정략을 걸어 놨어요 저랑 그래서 또 얘기하면 기지만 스카 어릴 때 그런게 있지 있잖아요 장난반 진단만 해가지고
그 친구 집까지 해가지고 제가 막 여섯 개 여덟 개 이게 르는 기 있거든요 근데 너무 싫었어요 왜냐면
마나 하나 끔찍해라 예 그러니까 뭔가 쥐를 잡는 건 잡을 수 있는데 그 꼬리 자르는 그 그게 진짜 좀 뭐라
그래야 돼 아무튼 좀 굉장히 징그럽다지는 꼬리가 징그럽지아요 그래가지고 그런 기억이
있거든요 그냥 인간 기계였다 예 그래서 학교 생활하면 좀 좋았던
기억들 밖에 없죠 한국와서네 그래서 아무리 힘들었어도 북한에 비하면
꽂히니까 그렇죠 긍정적으로 잘 이겨내신 거 같은데 그러면 학교생활
때 좋은 건 어떤 거였어요 그니까 제가 북한에 있을 때 볼 차보는게
어쩌면 공 예예 볼 차보는 거 예 볼 차보는게 꿈이었거든요 왜냐면 북한에는 공두 하잖아요 공하고 축가가 어디
있습니까 신발도 없는데 좀 치는 그 형 형님들이 공을 찾는 모습이 진짜 보기 좋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니까
중국 살면서 한국 사람 늘 공리 타고 싶었어요 응 그 축구를 그 하는게까
예 처음에 제가 지금 포지션이 가지고 이제 제 처음에 제 위치가 였거든요
왜냐면 이제 발을 써야 되는데 공을 발에 갖다 내면 공이 다 지나가요 안
맞는 거지 몸은 맞춰야 되는데 그래서 키퍼 보고 스비 보다가 미드 가다가 지금 공격수까지 올라왔는데 그래서
저는 처음에 이제 같이 이제 공차는 거는 거 그게 좋았구나 예 그게
좋았고 또 좋은 부분이면 이제 명찰 있잖아요 제 명찰 보고 이름을 불러 주잖아요 아 명진아 그 예 그렇죠
그게 너무 좋았죠 왜냐면 저는 굉장히 민감한 시기에 유년
시절에 누워 있거나 숨어지내다 보니까 저 나이 돌래 친구가 저를 다동
다감하게 이름을 불러진 경 경호가 없으니까 상 예 설말 얼마나 예뻐요
명진아 아 한 말인가 설말 뭐지 명진 명진 튼 뭐 그래서이 뭔가 다동
다감하게 이름 불러주는 것도 좋았고 그랬구나 예 공구도 좋았어요 물론
교복 입어봤어요 교복 입어 봤죠 어때요 느낌이 일단 그 생각보다 제가
치가 작으니까 바지 이제 밑단을 많이 잘라가지고 좀 속상하긴 했는데 교복
입으니까 그게 소속감이란게 있잖아요 아 이게 이게 늘 이제 동떨어져
지내고 숨어 지내고 뭔가 안정감 소속감 이런게 없지 지내다가 처음으로
교복 있고 같이 등교를 하니까이 무리에 낀 거잖아요 굳이 뭐 같이 안 해도 그게 행복했어요는 야 아 그래
알 거 같아요 예 그리고 이제 학식이 나오잖아요 그럼 이제 같이 줄서 이제 기다려서 밥밥 기다리잖아요 그 너무
좋았어요 예이 뭔가 이제 같이 이제니까 그냥 뭔가 같이 뭘 한다 제
나이 돌에 친구들이랑 동물들이랑 그 그냥 그 일상이죠 일상 그 자체가 그
소산 일상이 저한테 좀 가장 큰 행복이 아니었나 예 진짜 진짜 그때는
그냥 그게 좋았어요 다 그 어찌 보면은 정말 평범한 것들인데
한국에서는 그죠 정말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것들인데 그게 이제 너무
행복감으로 다가 왔다니까 우리가 진짜 보면은 행복이라는게 큰 데서 찾는게
아니라 진짜여 작은 데서 나 나라는 전재를 발견하면서 찾게 되는 거
같아요 그렇죠 그죠 예 또 아파트도 배정 받았잖아요 예
어머니 받았죠 데어 어땠어요 처음으로 반 살아본 아파트 아니었어요 와
처음에 응 그 그거는 확실 이제 응 어머니랑 서울 와서 이제 집을
받았잖아요 서울로 그래도 받았어요 아 처음에는 집방 받았다가 나중에 서울 올라왔는데 왜냐면 집방 일이
없어가지고 일자리가 없어 가지고 올라왔는데 아파트에 산 적이 없잖아요
예 그래서 일단 리베이트 타 올라가는 데부터 심장이 둥둥 거리더라고요 1층
층 와 호텔도 다니고 이런 엘리비터 타고 올라가는구나 우아아
뭔가 영화처럼 야 이씨 저 올라가 때 또 심지어 저희 집이 층이란 말이에
열리고 끝 집이에요 딱 가서 딱 해서 딱 가고 들어갔는데 뭐가 단 놀랐냐
예 이게 센서등이 켜지잖아 아죠 동 야 남선 불알도 날 한내
해주 아 지금 북한은 전기를 부활이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불해 강민
불리죠 예 긴 거는 긴불알 글리는 떼불알 하는데 불알이 딱 반겨 주잖아
그래서 와 남 상성 반는 남자 불알이 딱 반겨주고 왜 이렇게 좋아하십니까
우리의 표수데 그래가지고 썼는데 예 이게 유이 미지한 물 어 찬물 따
찬물 어떻게 수도꼭지에서 세 가지 물이 나와 대박요 그 그게 좋았는데
어머니는 가스불을 돌리고 있더라고 딱 켰다 야 풀이 야 우리 조선에서
감사라 먹으려고 이걸 몇 바퀴 돌렸네 이거 아 풍로 폭로를 바람을 불어
넣어줘야 불이 매달리니까 온동네 남자들이 붙어 가지고 돌려야 그 불이 붙는데 이거는 뭐 똑 감 켜지고 또
가가지고 어머니가 그걸 한 열 대번 하더라고요 또 그래도 가스 올라서 어지러운지 그러고도 좋았고고 그리고
벽지가 너무 깔끔해서 좋았어요 하얗게 깔끔한 거 좋고 그리고 안다라는게
좋아 왔고 뭐 뭐 뭐라 그래야 되죠 그 그때 그 감정은 그러니까 예
집다운 집을 처음 들어갔잖아요 그래 그래 예 근데 그것도 그냥 주택도
아니고 그냥 아파트아이 야 내가 이서 살아 살아도
되나 응 괜찮나 예 아 이게 맞나 이런 생각 들고 뭔가 그래서 제가
사실 눈이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예예 근데 이제 한국 와서 너무 놀라는
일들이 많아가지고 리 커진 거예요 얼굴도 원래 얼굴 크고 눈 크지 않았거든요 근데 한국에서 너무 놀라다
보니까 얼굴도 커지고 눈 좀 커진 거예요 진짜요 이거는 과학적으로 제가 얘기할 순 없지만 너무 놀라가지고 다
놀라와 처음에 진짜 다 놀라잖아요 예 그래서 그때 잘 써 그죠 아파트
들어가고 눈이 좀 커지지 않았나 예 어떤 사람은 그 아파트가 좀 이게
연구인데 국민인데 거의 좀 이게 다 똑같잖아요 브랜드 아파트들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똑같은 아파트요 가지고
자기 집을 까먹어 가지고 아 그럴 수 있겠다 예 그럴 수 있겠다 똑같이 딱딱게 있어 가지고 우리 탈북민들
진짜 보면 진짜 순수하지 않아요 대학교도 가셨죠 어 뭐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예 예 왜 부끄러워요 겨울 졸업해 가지고 아 그렇지 우리는 다 기초가 약하니까 몇 년 만에
졸업했어요 그러면 6년 만에 겨우 그냥 아 그래요 겨우 겨우 6년 만에
그냥 예 예 아주 축하드려요 그래도 6년만에 그 졸업했다는게 포기한
친구들도 있는데 진짜 진짜 와 대학교는 처음에는 좋았거든요
1년은 뭔가 대학교는 술과 연애의 전당이다 해가지고 뭐 그런 아름다운
생각만을 다 갔는데음 진짜 술이 진짜 죽을 때까지 먹고 연애는 그 그래도
좀 기본기 있는 친구들이 또 하튼 저는 좀 좀 아쉬웠어요 많이 아무튼 뭐 얘기하면 또 너무 마음 아픈
얘긴데 또 많이 였구나 혁명적으로 들리는데 네물 차게 차였죠
대구 까이나 잘 사는지 모르겠어요 아 진짜요 밥도 같이 먹고 영관 다 같이 봤으면 이제는 이제 손만 잡아보면
되는데 지금까지 연락이 안 되네 진짜요 예 예 아무튼 그런 친구도
있는데 그래서 대학교는 그냥 제가 나온 건 당연히 후회가
같고요네네 한국에서 제일 감사 중에 뭐 여러 감사가 있잖아 아픔 치료하고데 제가 중국이 됐으면 지금
뭐 초등학교도 뭐 뭐 배움이 뭐예요 뭐 가나라도 제 네 우리 대한민국에서 저에게 기회를
줘서 진짜 대학교 명대까지 졸업했잖아 예 그래요 예 이거 이거 진짜 살면서
문득문득 감사해요 왜냐면 예를 들어 이제 뭐 경제 뉴스 나오거나 하면
제가다는 뭐 알아듣지만 그래도 절방 이상 알아듣고 아 이제 뭐 세상 세상 사람들이랑 소통할 수 있는 거는
그래도 제가 공부를 좀 했으니까 그래도 알아듣긴 하잖아요 그 그런 걸
가끔 생각하면 야 내가 북한에 있거나 중국에서 쓰면 이런 고급 단어 이런
고급 속담 이런 경제 언어 알아 들었을까 그런 거 생각하면 진짜 너무
기적이고 진짜 감사해요 그런면 진짜 아 그래요 그러면 아픈 얘기 조금 더
파 볼게요 그렇죠 예 6년 만에 원래 4년째 아아 근데 2년이 지금
플러스가 된 건데 너무 힘들어서 알아서 좀 쉬어서 간 건가요 어 일단 1 2학년까지는 괜찮았어요 그냥 예
그냥 아네 근데 원래 대학교는이 1학년은 논 대요 놀고 2학년 때부터 정신 차리고 공부한 돼요 그러니까 응
사실 정신 계속 차렸는데 너무 착점이 안 나오니까 친구들한테 정신 못 차는
척했어요 저는 진짜 나름이 했는데 아 그랬구나가 나오는 거예 쌍 청이라
했는데 그때는 그래 들개 뜨고 아니 이거 출석 잘했고 가져 냈으면는
면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응응 근데 이제가 나오더라고 그래서 그때 이제 제 주제 파악을 했고 1학년 2학기
때 그래서 다 안 나오더라고요 근데 제가 2년 더 다닐 수밖에 없는 거는
영어 그까 대학교 졸업하면 영어 그게 기본기 중요하잖아요 거기 도전 안
나는 거죠 아 그래서 자 하루에 영어 단어 단어를 한 500개씩 외워
가지고 이제 단기 그건데 지금 다 다 까먹긴 했지만 아 진짜 그 그 영어
그 영어 하나 때문에 거의 년도 다닌 거 같아요 저는 기본기가 안 되잖아요 응 아무리요 있으면 해도 안 돼 아
안 되잖아요 근데이 친구들은 저랑 똑같이 뭐 예를 들어 동아리 활동 같이 공도 차고 응 같이 술도 먹고
노래방도 가고 집도 가고 할 것 다 했어 밤 셌어 근데 나는 F 걔는 B
아니면 a 그까 이게 기초에 이게 문제가 있던 거죠 예 그래서 뭐 저
저한테 물어봐요 뭐 하면 나 나 뭐 뒷불 이렇게 하면 야씨 그거 어떻게 그거
어떻게 받을 수 있니 그죠 놀래 가지고 예 놀래가지고 그래서 와 와 진짜 뭔가 이제이 기본기 게 진짜
이거는 뭐이 뭐 철칙인 거 같아요 바뀔 수가 없는 아 그러니까
이게 이길 수가 없습니다 여기는 교육부터 벌써 뒷받침이 다 돼 있잖아요네 솔직히 15 가지도 제대로
된 학교도 못 갔고 공부 못 했잖아요 그런 좀 한해 있었거든요 그래서 아씨
내가 기소도 약하고 머리도 안 좋지만 그래도 뭐 고학점 뭐 나와서 취업
잘되는 것까지는 못 빠르겠지만 그애도 어떻게든 졸업장은 따보자 해가지고
거든요 야 그래도 보틴 보람이 있는 거잖아요 경제 뉴스 반 알아들으면 그
대단한 거지 사실 반 모 알아들 때도 있지만 으니까 반정도 알아듣는 걸로 그
졸업식 날 좀 남달랐어요 좀 그런 거 셨죠 이제 저한테 칭찬 좀 많이
해졌죠 야 너가 해 놨구나 야 대단하다 네가이 명문대를 그래도
졸혼을 하는구나 그래서 뭔가 굉장히 뿌듯했어요 아 뭔가 좀 크게 저 자신
을 칭찬한 느낌 아이 정말 너무 자랑스러운 거죠 예서 지금 굉장히이이
종이장 한 장이지고 종이짱이 한 장이 뭐라고 그걸 딱 받으니까 예 굉장히
그 뭐 그거는 뭐음 진짜 행복했어요 그러면 프리랜서인가요 그렇죠 이제
저도 유튜브를 하니까 예 북한 남자 탱거네 유튜브는 뭐 제가
2016년부터 했었거든요네 뭐 탈보 크레이터 1세 대인데 조수가 좀 안
나와요 운 잘 아시겠지만 그래서 뭐 그걸로 먹고 살 수 없고요 그래서 이제 그거는 제가 시 선택한 길이니까
쭉 가고 이제 오토바이 타면서 이제 배고픈 영혼들이 많잖아요 저녁도
먹어야 되고 야식도 먹어야 되고 또 그래서 그런 배프 영혼들 위해서 쿠팡이 치라고 예
배달해서 많은 영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남조선 아 새끼들을
잘서 살고 있죠 굶주림에 시달린다는게 이게 지금 또 돌려 가게 한 거죠
아닙니다 뭐 계속 돌려 가니까 근데 그 친구들 보면 정말 저를 반가워해요 제가 창 고플 때 갖다주니까 엄청한
거예요 우와 감사합니다 하면서 제가 해준게 없잖아요 갖다드린 건데 그래서 뭐 그럴 때보면 뭐 뭐 뿌듯하죠
오토바이도 타고고 다니면서 예 가끔 이제 좀네 짜증내는
분들 계시지만 예 그래도음 그래도 또 배분이 예민해 줄
수 있잖아요 그냥 죄송합니다 한번 하면 그 사람들 머쓱한지 아 괜찮아요 하거든요 분들이 이렇게 가끔 이게
해맑은 표정 보면 기분 좋아요 근데 뭐음 조심 다야죠 더 많이는 그렇죠
그렇죠 근데 우리가 처음에는 솔직히이 땅에 온 것만으로도 감사가 넘쳐요
근데 살다 보면은 적응이 어려워서 힘든 시간들을 진짜 많이
보내잖아요 그렇게 좌절되는 순간들도 있었어요 제가이 졸업을 하고 대학교
예예 이제 취업을 하잖아요 네 취업을 다하 저는 대기업 이런 건 점 때문에
포기했고 뭐 좀 목표를 크게 가지면 중경 기업 아니면 중서 기업 했는데
한 1년 반만에 겨우 취업이 됐어요 중서 기업이 스타트업인 이제 그서 이제 강광문 출문 하는데 신입이아요
예 영업 사원이고 이제 술자리가 작고 작고 이제 명감 돌리는 일을 했는데
그래서 저는 나는 열심히 살았거든요 6개월 동안 근데 이제 술을 계속 먹다 보니까 아 영업이다 보니까 예
살이 찌고 통풍이 걸린 거예요 아이고야 떻 그래서 이제 좀 사회 자리 잡으려고 사회 뭐 그런 떳떳한
청년대로 했는데 병이 걸려 버리니까 일일 짜리를 잘렸거나 할 아침에
어마나 그때 좀 자절 만 좀 했어요 그니까 잘린 이유가 잘린 이유가
통풍이 있데 풍 통풍이라는게 살이 쪘다 아 통풍이라는게 이제 요산이 쌓여 가지고 이제 왼쪽 발면 걷지를
못하거든요 잘 아 그 얘기였어요 우 그래가지고 이제 걸어다니면서 명암
돌리고 술 자리해야 되는데 통풍 걸려가지고 걷지를 못하니까 발목이 무어 가지고 그래서 그때 잘렸 아
근데 그 술자리 거 해야 돼요 명암도 돌리고 그 영업 하는데 그런게
기본으로 있나 봐요 예 저거 부동산이나 뭐 이렇게 뭐 아파트 이런데 가서 명함 돌리는 건데 사람들
보면 이제 신입이 그 아기잖아 이제 뭐 이제 뭐대 후 3때 뭐 이렇게 되니까 이제 막걸 한잔 주고 뭐 저
때면 뭐 치명 목자 이렇게 이렇게 술자를 좀 세 우리고 또 회사에서도 다 영업 사원 이렇게 선배님도
계시니까 이제 좀 일찍 끝나면 또 술 먹고 주말 또 주말에 술 먹고 그러다 보니까 술자리가 잤죠 그러다 보니
이제 한번 살찌고 백수 백수인데 병까지 얻어 가지고 그때 좀 자절
했었죠음 내가 대한민국은 뭐 워낙 일에서 내가 직업을 가질 권리도 있고
또 때려칠 자유도 있고 그죠 그죠 언제든지 선택했다 포기하고 이럴 수가
있으니까 상황을 맞춰가면서 돈보리 하는 것도 나쁘진 않죠 맞습니다 예
그러니까 프리랜서 뭐 여즘 투잡 쓰리잡 한 승도 많고 뭐 자본 지에서는 움직이는만큼 돈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뭐 직업에 뭐 귀천이 없다고 저는 그냥 합법적인 일이면 다
인정하고 존경하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저도 뭐 오토바이가 위험한 1일이
하지만 제가 신호 잘 지키고 필메 쓰고 안전하게 라이딩만 하면 굉장히
그 저는 보람 차거든요 예 그래서 뭐 무슨 무슨 직업이든 그냥 열심히
하는만큼 그게 뭐 꼭 탈북민이 뭐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든네 돈이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그게 너무 좋은 거 같아요 북한은 이래도 돈 안 들어오잖아요 그래 중국은 또 신분이 없다고 돈도 안 주고 그랬는데 아 정말 대한민국이
어서 일한만큼 내가 가져갈 수 있다는게 참 행복한 거 같아요 우리 명진 씨가 유쾌한 분이라서 좀
재미나게 해석을 해서 얘기를 해 주다 보니까 시간가는 도 모르고 두시간
어쨌든 넘게 지금 얘기를 들었는데 너무 고마워요 명진 씨 아니 불러서 이런 전부터 부린다 그러더니 이재야
불렀어요이야 저는 통일 도에 나올 수 있나 이런 생각했는데 다행히도 통일에 나왔네요 아 너무 감사하고 또
아버지는 안타깝게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도 유쾌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 계시고 명진 씨도 나름 잘 살고
동생분도 잘 큰 병 안 걸리고 잘 살고 있다니까 그저 감 사하고 체제
중요성 나라의 소중함을 우리가 뼈저리게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거 같아요 그죠 그래서 이제 앞으로 더
열심히 우리가 사는 방법밖에는 없죠 그렇죠 상어처럼 움직여야죠 예 꿈을
꿀 수 있는 나라에서 우리 그냥 더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명진 씨 북한남자 탱고 유튜버인데요 그 강은정 TV은 또 맛이 달라요 좀
많이 응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세요 여러분네 감사합니다 아 뭐 저도네
마지막으로 할 말 없어요 아 뭐음 운정 씨 늘 이렇게 옆에서 열심히네네
찍고 사시는 모습 늘 응원하고 보기 좋습니다 감 친구였어 뭐 저는 뭐
그죠 예 그렇고요 저도 강문정 TV 많이 보거든요 그래서네 아 그 버긴 예 그리고 댓글들이 굉장히 재밌 재미
쓰시더라고요 그래서 유쾌한 분들이 많으시구나 몰래 봤는데 그래서 뭐
혹시 뭐 남는 시간 있으면 가끔 제 채널 도시고 앞으로 운정 계속 많이 사랑해 주세요 정말 멋있는
사람이거든요네 아유 감사합니다 옥탑방에 살고 계신데 한번 더 놀러 가야 될 것 같아요 나중에 또 시간
되시면 놀러오세요 나름 풀리면네 여러분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이 자유가 보장되는 대한민국에서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 일에
파이팅 넘치기 바라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세요
l [음악]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