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복 李民馥 | Lee min-bo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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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국적 | |
종교 | 개신교[2] |
가족 | 아버지 이포구(1925~1985), 어머니 |
학력 |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 |
경력 | 남포농업대학 연구소 연구원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연구소 연구원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표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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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포구 씨(왼쪽), 그의 아들 이민복 단장(오른쪽) |
1957년, 황해도 서흥군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은 1927년 전라도 익산시 출신으로 10대 후반 일제의 강제징용을 가까스로 모면하였고, 1945년 해방이후 남로당에 포섭되어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인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였을 때, 익산군당 선전부장으로 발탁되어 활동하다가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황이 바뀌자 남한 땅에 있던 아내와 딸을 남겨두고 인민군 6사단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고 이후 황해도 서흥에 정착해 재혼하였다. 이들 사이에서 출행하였다. 이후 그의 부친은 원유공급소 사장으로 일하며, 나름 안정적인 가정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1967년 진공관 라디오로 남한 라디오를 들었다는 혐의로 이웃에게 고발당해 보위부에 끌렸갔고 중앙당 간부로 있던 친인척의 구명운동으로 간신히 남로당 시절 활동이인정되어 간첩 혐의를 벗는다. 그러나 이후 출셋길은 사실상 막혔다.
청년 시절 평안남도 은산군에서 전체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쌀은 공산주의"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마음이 움직여 쌀 문제만 해결하면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믿었고 공대 대신 농업 분야를 선택해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했다. 1979년에는 남포농업대학 연구소로 옮겼고 1982년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연구소에서 깜부깃병[5] 전문가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85년, 남조선 간첩 혐의로 평생을 감시속에서 살던 부친이 “정치는 최대 협잡”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해 이 단장은 양강도에서 발생한 깜부깃병 퇴치 임무를 받고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작황실험을 통해 개인농과 집단농의 차이가 수확량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중앙당에 개인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1호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과학원 국장이 내려와 “중앙당이 개인농은 수정주의라며 조사를 진행했다. 당신을 정치범으로 체포하려다 순수한 과학자의 행동으로 여겨 봐주기로 했으니 더 고집부리지 말라."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연구로 인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반동 사상으로 분류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김일성에 대한 굳건했던 믿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이후 1990년 8월 강원도 철원에 출장갔다가 우연히 대북전단을 보게 되었고 점차 6.25 전쟁에 대한 의구심과 북한 체제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후 1990년 11월 1차 탈북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였고, 북송되어 감옥에서 고생을 한 끝에 풀려났다. 1991년 6월 재시도 끝에 압록강을 성공적으로 건넜다. 이후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서 1년을 머물렀고, 1992년 6월 러시아로 넘어가 생활하던 중 1995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청년 시절 평안남도 은산군에서 전체 2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쌀은 공산주의"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마음이 움직여 쌀 문제만 해결하면 공산주의가 실현된다고 믿었고 공대 대신 농업 분야를 선택해 평안남도 은산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했다. 1979년에는 남포농업대학 연구소로 옮겼고 1982년 국가농업과학연구원 옥수수연구소에서 깜부깃병[5] 전문가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85년, 남조선 간첩 혐의로 평생을 감시속에서 살던 부친이 “정치는 최대 협잡”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해 이 단장은 양강도에서 발생한 깜부깃병 퇴치 임무를 받고 양강도 김정숙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연구원으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작황실험을 통해 개인농과 집단농의 차이가 수확량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중앙당에 개인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1호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과학원 국장이 내려와 “중앙당이 개인농은 수정주의라며 조사를 진행했다. 당신을 정치범으로 체포하려다 순수한 과학자의 행동으로 여겨 봐주기로 했으니 더 고집부리지 말라."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연구로 인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반동 사상으로 분류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김일성에 대한 굳건했던 믿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이후 1990년 8월 강원도 철원에 출장갔다가 우연히 대북전단을 보게 되었고 점차 6.25 전쟁에 대한 의구심과 북한 체제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후 1990년 11월 1차 탈북을 시도하지만 실패하였고, 북송되어 감옥에서 고생을 한 끝에 풀려났다. 1991년 6월 재시도 끝에 압록강을 성공적으로 건넜다. 이후 중국, 옌볜 조선족 자치주에서 1년을 머물렀고, 1992년 6월 러시아로 넘어가 생활하던 중 1995년 유엔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민간 대북전단 살포의 1인자로 통한다. 본인도 이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다.
본인이 대북전단에 의해 탈북의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더욱이 이러한 대북전단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선교사로 활동하며 이러한 활동을 사역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대북전단 물품은 주로 개신교 신자들의 후원금을 통해 구매하고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른 북한인권운동가들과 달리 의외로 보수정부 시절에도 비판을 많이 날린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처음으로 전단을 날린 이후 “대북정책 기조가 노무현 정부와는 나와 맞지 않았지만 인권을 침해하는 제재는 없었는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시절에 더 많은 인권 침해적 통제를 가했다.”며 2014년에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다른 탈북민 대북전단 활동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박상학 대표를 매우 비판하며 사이비 활동가라 지칭한다. 이 둘은 지향점 자체가 종교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으로 매우 다를 뿐더러 비교적 온건파인 이민복 대표에 비해 강경파인 박상학 대표의 활동이 오히려 대한민국애 피해를 주는 활동이라 이야기한다. 이 둘의 갈등은 매우 첨예하게 대립중이다.#
2021년 대북전단 금지법이 통과되자, 헌법재판소 앞에서 위헌 시위를 하였다.#
2023년 북한인권상 수상하였다.
본인이 대북전단에 의해 탈북의 동기를 가졌기 때문에 더욱이 이러한 대북전단의 중요성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선교사로 활동하며 이러한 활동을 사역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대북전단 물품은 주로 개신교 신자들의 후원금을 통해 구매하고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른 북한인권운동가들과 달리 의외로 보수정부 시절에도 비판을 많이 날린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시절 처음으로 전단을 날린 이후 “대북정책 기조가 노무현 정부와는 나와 맞지 않았지만 인권을 침해하는 제재는 없었는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시절에 더 많은 인권 침해적 통제를 가했다.”며 2014년에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손배소를 제기하기도 했다.#
또한 다른 탈북민 대북전단 활동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박상학 대표를 매우 비판하며 사이비 활동가라 지칭한다. 이 둘은 지향점 자체가 종교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으로 매우 다를 뿐더러 비교적 온건파인 이민복 대표에 비해 강경파인 박상학 대표의 활동이 오히려 대한민국애 피해를 주는 활동이라 이야기한다. 이 둘의 갈등은 매우 첨예하게 대립중이다.#
2021년 대북전단 금지법이 통과되자, 헌법재판소 앞에서 위헌 시위를 하였다.#
2023년 북한인권상 수상하였다.
2020년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자금유용 등의 혐의로 대북전단 살포단체 4곳을 경찰에 수사의뢰했다. 이 중 한곳으로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또한 지목되어 경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대북전단 기부금이 단체의 돈벌이로 유용된더는 의혹이 언론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횡령혐의로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고 결국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단체 3곳은 송치되었다.
다만, 이민복 대표는 수사결과 혐의없음으로 불송치 결정되었다.#
당시 대북전단 기부금이 단체의 돈벌이로 유용된더는 의혹이 언론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횡령혐의로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고 결국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단체 3곳은 송치되었다.
다만, 이민복 대표는 수사결과 혐의없음으로 불송치 결정되었다.#
[1] 대한민국 헌법과 국적법을 바탕으로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의 주민과 후손들은 외국 국적을 따로 취득하지 않은 이상 태어날 때부터 한국 국적을 보유하게 된다. 북한에 행정권이 미치지 않음에 따라 북한주민은 남한 국적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을 뿐, 남한 국적을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 표기를 하지 않는다. 대법 96누1221 판결[2] 탈북민 선교사[3] 재혼[4] 전부인과의 소생으로 현재는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5] 옥수수가 곰팡이균에 의하 까맣게 되는 전염병====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 북한이탈주민 출신의 북한 인권운동가이다.
1969년 2월 16일 북한의 량강도 혜산시에서 태어났다. 북한의 명문대인 김책공업종합대학에 입학했으나 예비과 과정을 4개월 다니고 성적 미달 퇴학을 당했다. 김일성사회주의노동자청년동맹 청년돌격대 선전지도원을 역임한 바 있다고 한다. 박상학은 재일교포 집안 출신으로 부모는 조총련 한덕수의 선전선동에 속아 재일교포 북송사업을 통해 1961년 북한으로 오게 되었다. 박상학의 아버지는 조선로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으로 일본인 사업가로 위장하여 해외에서 공작금 조달을 담당했다. 이러한 활동 중 북한의 골동품 등을 판매하기 위해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서울에도 몇번 드나들게 되었는데 1996년 신라호텔에서 안기부에 체포되어 이중간첩이 되었다.
1998년 아버지가 주선한 브로커를 통해 일가족과 중국으로 탈북해 다롄에서 비행기를 타고[1] 1999년 11월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서울대 모바일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숙부들이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했고 사촌들은 꽃제비가 돼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2] 2005년부터 북한의 독재 정권에 대한 내용을 담은 대북전단 배포 등의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고 한다. 2011년 9월에는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이었던 안학영이 북한 정찰총국에 포섭되어 건네받은 독침으로 박상학을 만나 암살을 시도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사전에 인지한 국정원의 통보로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아 화를 면했다. 2013년에 노르웨이 '오슬로 자유포럼'에서 '창의적 반대운동을 위한 바츨라프 하벨상'(Vaclav Havel Prize for Creative Dissent)[3]을 수상하였다.
1998년 아버지가 주선한 브로커를 통해 일가족과 중국으로 탈북해 다롄에서 비행기를 타고[1] 1999년 11월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서울대 모바일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숙부들이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했고 사촌들은 꽃제비가 돼서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2] 2005년부터 북한의 독재 정권에 대한 내용을 담은 대북전단 배포 등의 활동을 벌이게 되었다고 한다. 2011년 9월에는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이었던 안학영이 북한 정찰총국에 포섭되어 건네받은 독침으로 박상학을 만나 암살을 시도할 계획이었으나 이를 사전에 인지한 국정원의 통보로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아 화를 면했다. 2013년에 노르웨이 '오슬로 자유포럼'에서 '창의적 반대운동을 위한 바츨라프 하벨상'(Vaclav Havel Prize for Creative Dissent)[3]을 수상하였다.
“일부 단체들이 하는 공개적 방식은 나도 반대한다. 북한 자극하고 우리 정부와도 충돌을 불사하는 건 옳지 않다. 이건 심리전이다. 세상 어느 나라가 심리전을 공개적으로 하나. 은밀한 방법으로 조용하게 보내면 된다. 북한도 거기에 대해선 뭐라고 안 한다.”-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2021년 6월 30일 한겨레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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