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이 충격받은 한국인들의 이 표정 (박주희 기자 / 풀버전)
신사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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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희님의 유튜브 '주희유미TV' 바로가기:
/ @tv-np6cg
[박주희 기자]
KBS 라디오 ‘최근북한은' 진행자
통일부 남북하나재단 취재기자
북한 공연진행자
김포 라베니체 ‘해변카페더위로' 사장
✔️ 촬영일: 4월 4일
📌 신사임당은 다양한 전문가의 의견을 전달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고자 합니다. 출연자에 대한 인신공격, 근거 없는 비난, 욕설, 비속어를 포함한 댓글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출연자의 의견은 채널의 방향성과 무관하며, 소속회사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또한, 투자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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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nscript
저희가 새벽 시간에 도착을 했는데 그때 약간 정신이 벌쩍드는게 그 밝음 인천 공항이 그렇게 밝은 거예요
사실은 북한에서는 너무 어두운 데서만 살아오다 보니까 그 밝음을 보는데
뭔가 내가 부자가 된 거 같은 내가 부자나라에 온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네 안녕하세요 구독자 여러분 제가 한 달 만에 또다시 얼굴을
여러분들한테 또 보이게 됐는데요 너무 좋은 거 같아요 남한 정착 13년차
탈북민 박주라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힘들었던 탈북 과정 이후 처음
인천공항에 오셨을 때 기억은 무엇인가요 탈북민들 중에는 그 좀 여러 가지
부류들이 있어요 나만을 조금 어느 정도 알고 오시는 분들이 있고 친척들을 통해서 또 이제 중국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남한에 대해서 알고 저희 같은 사람들은 남한에 대해서 아예 아무런 정보도 모르고 한국에
들어다 보니까 그 참 막 기쁨도 있었지만 조금 두려움도 있고 놀라움도
있고 신기함도 있고 저는 좀 그랬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일단은 인천공항에 갖 비행기라는 걸 처음 타
보잖아요 태어나서 북한 사람들 중에서 비행기 탄 사람은 진짜 뭐 외교
일꾼이나 당 간보들을 당 간보들도 외교 부분에서 일을 하고 외교관 참사나 해야 왔다 갔다 하지 진짜
북한은 조선 민주주의민 공유는 해외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없는 나라잖아요 그리고 이제 국내 비행선이 있어요 뭐
평양선 3삼지연선 있는데 비행기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뭐 당대회가 갑자기 딱 모집이 되거나 보일군데가
모집이 됐을 때 기차가 연차이 되면 비행기를 띄울 때가 있는데 그것도 역시 간부들이고 당의 국가적인
정치적인 행사를 위해서만 국내에서도 비행기가 뜨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일반 사람이 비행기를 타는게
꿈도 못 고고 그리고 북한에 그런 말 있잖아요 시골에 사는 아이들은 기차 바퀴가 꼬모박힌 줄 안다고 근데 그게
진짜 고짓말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을 그니까 기차를 못 본 아이들도 있거든요 시골 같은 데는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뭐 굳이 뭐 기차를 안 타도 자동차를 다 움직일 수 있는데 그 정도로 북한이 라코하다 보니까
비행기는 꿈도 못 꿨는데 저는 일단 비행기 안에 들어가 보고 너무 놀랐어요 우리가 봤을 때는 비행기가
몸통이 좁고 이렇게 기단하기만 해서 저 안이 얼마나 좁을까 이렇게 생각했는데 들어갔는데 너무 넓은
거예요 그리고 너무 넓고 그리고 이제 단묘를 또 다 주더라고요 반묘를 와
그래 가지고 야 이게 비행기소 이렇게 여러 가지를 주고 또 뭐 식사도
나오고 뭐 식사는 솔직히 그때 정말 오면서도 좀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탈북민들하고 남한 국민들하고 이렇게 막 섞어서 앉았어요 그러니까 우리 앞줄에도 남한 분들이 앉았는데 비행기
그 여자 승무원들 제가 이게 수투디어스라고 하는데 영어 발음이 좀 힘들어서 여자 승무원들이 이제 가면서
이제 음녀 뭘 드실 거예요 뭘 드실 거예요 하는데 처음에는 있잖아 손 달란 말을 못 했어요 왜 돈을 내라
할까 봐 왜냐면 그게 그 안에 서비스에 다 들어간다는 걸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알잖아요 우리가 처음
타는데 어떻게 알아요 그래 가지고 오렌지 주술을 먹고 싶은데 저걸 먹었다가 내릴 때 돈 내라면 난
어떡하지 돈이 없는데 이런 생각이 있어서 제가 못 먹었던 그런 기억도 나고 그리고 제일 또 웃겼던게 비행기
안에서 타니까 설문 조사 용치 같은 거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이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냐 당신의 현재 직기는
뭐냐 이런게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북한에서 왔으니까 남한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뭐 어 사업가 개인 소득자
뭐 어느 회사 거기다 체크가 되는데 우리는 북한에서 왔으니까 당신의 직업이 이거 뭐라고 하지 그래 가지고
제 앞에 앉았던 분이 그 북한에 있을 때 제지 공장에 다니셨어요 그러니까
제지공장 노동자라고 거기다 써 놨는데 그 승무원이 그 정의를 다 이렇게 나눠주고 마지막에 다 걷어가지 않아
딱 보더니 제지 공장 노송자 이러는 거예요 그니까 그럴 정도로 우리가
정말 그 특히 남자분들은 북한에서 거의 직행을 하다 보니까 더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비행기서부터 저희 재우는 조금 멘붕이라고 해야 될까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모을 먹었는데 이제 음식이 너무 작게 나와요 딱 무슨 이렇게 유치원
아이들이 놀이감 이렇게 음식 빼배 노름이라고 하죠 소꿉놀이 하는 것처럼 이렇게 음식이 나와서 야 어떻해요
이렇게 밥을 조금 주지 그리고 이제 밥을 먹고 이제 남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는 걸 보고 사실 북한에서 커피란 말은 들어봤지만 그렇게 쓰고온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이제 북한에서 있을 때 제가 기억한 노래인데 장윤적 노래에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즐겁고 이런 노래가 있어서 북한을 실 때 그랬어요 야 커피를 마시면 그렇게 기분이 상쾌한가 그럼 이제 내가
남자선에 가면 커피만 됐다 마셔야겠다 이랬는데 비행기에서 커피를 주는 거예요 그랬는데 앞에 보니 커피를
주는데 아 내 앞만 돈이 없어도 커피는 마셔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커피 한 잔 주세요 해가지고 준
거예요 그래서 딱 마셨는데 야 그냥 색깔처럼 너무 웠어요 근데 정말
괴로웠어요 그 쓴물을 넘기기가 근데 사실 그때도 설탕을 달라 하면 주는데
그걸 몰랐으니까 그래서 저는 사실 비행기에서는 밥이 작아서 어 조금 배고팠고 어 그리고 그 커피가 너무
뜨거워 가지고 좀 많이 좀 당황했던 그다음에 딱 비행기서 내리는데 저는
사실 비행기가 비행장 중가운데서 내리는 줄 알았어요 서 기단한 사다리가 내려오면 우리가 막 내려가면
막 그 남한 사람들이 꽃따발을 들고 그 연도에 와서 마영 저는 왜냐면 북한에서 옛날에 제가 어릴 때 기억에
남안에서 북한으로 의거한 사람들이 있어요 옛날에 그 사람들을 환영할 때
막 그 비행기에서 내리면 꽃따발를 평양 시민들이 안겨주고 이런 걸 봤거든 근데 우리가 지금 반대되는
입장이잖아요 우리가 나만으로 탈북했잖아요 아니 근데 그냥 무슨 무슨 이렇게 계속 복도 같은 데로
계속 가는데 그냥 어떤 건물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근데 우리 탈북민들은 이제 일단은 입국수이 다
그 여건을 다 확인을 하면 그 어느 한쪽에 한쪽 그 안에 홀에다 이렇게 기다리게 해요 왜냐면 국정원에서
버스를 나와야 되니까 그래서 이렇게 앉아 있는데 아 그때 저희가 새벽 시간에 도착을 했는데 그때 약간
정신이 벌쩍 드는게 그 밝음 인천공항이 그렇게 밝은 거예요 근데 사실은 북한에서는 너무 어두운 데서만
살아오다 보니까 그 밝음을 보는데 뭔가 내가 부자가 된 거 같은 내가
부자 나라에 온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니까 북한은요 해산역전 청진역정 보면 그렇게 박지를 않아요
수렴님 얼굴 있는데만 불을 켜 놓고 대합실도 어떤 때는 정전이 돼요
그래서 이제 자기 배낭 같은 것도 이렇게 안고 자야 돼요 불이 있으면 밝으면 도덕놈이 물어 이렇게 훔쳐가는
걸 볼 수 있는데 그 정도로 전기 사정이 열약하거든요 근데 인천 공강이 새벽에 왔는데 너무나 밝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앉으니까 우리는 그 버스 올 때까지 기다리니까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보잖아요 그래
이렇게 봤는데 아 정말 뭐라고 해야 될까 너무 편안한 오차림 남자고
여자고 다 운동하신어 그리고 피부들이 하얗고 제가 봤는데 그리고 거의 다
안경을 끼셨어요 근데 이제 사실은 북한에는요 인테리만 안경을 끼거든요
그래서 이제 안경을 우리가 누가 끼면 지금은 안경 낀 사람들이 제가 탈북하기 전보다 좀 많아졌지만 그렇게
많지 않아요 누가 안경을 닦끼면 야 박사 갔다 야 이렇게 얘기를 하고 될까 대학 교수나 선생님이 낄 수
있는게 안경이라고 생각하는데 와 이건 젊은 아이들부터 여사들이 다 안경 끼고 그리고 오차림도 아 너무 빨갛고
노랗어요 왜냐면 우리가 중국을 경유에 오다 보니까 중국이라는 도시를
지나가면서도 경험을 하거든요 근데 중국에 가면 옷들도 빵해 갖고 팔라고 노랗고 입어요 근데 한국에 왔는데
그냥 흰 거 까만 거 그레인 아이보리 흑색들만 입고 있는 거예요 근데 그런
것들이 딱 봤을 때 저는 자극적이지 않았어요 뭔가 평온 뭐가 튀지 않은
색깔 그리고 사람들이 이렇게 막 걸어가는데 다급함이 없더라고요 이렇게
막 전화를 하면서도이 트렁크를 달달 밀고 가면서도 머리를 끄덕이면서 누구
하나도 뛰지도 않고 그렇다 해서 빨리 뛰라고 누가 뒤서 제촉하는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데 가서
어떤 장소를 가게 되면 단체를 움직이면 자 빨리 주로 맞춰주시오 빨리빨리 가시오 항상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우리를 이렇게 지도를 했거든요 아니 근데 너무 자유야 막
길을 막 이렇게 캐리어를 꾸고 가던 여성분이 갑자기 뭐 캐리어를 꾸고 화장실로 쑥 들어가고 그러더니 또 손
씻고 나오더니 또 의자에 앉아서 누구하고 전화하고 저는 그걸 딱 봤을 때 누구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던 사람이
저렇게 자유롭게 어 그냥 여건을 찍고 뭐 내가 거기서 놀아도 되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전 너무 신기했어요 그 그런 걸 보는데 어 평화가 보였다고
해야 되나 아 그래 이제는 내가 남자 선에 왔구나 이제는 누구도 나를 보고
박주일 씨는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정치행사에 나오시오 이민반동원 나오시오 그리고 빨리빨리 빨리빨리
가시오 이런 걸 나를 누구 하나도 나를 단속하진 않겠구나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그 여행객들의 평범한 그런 모습이나 얼굴 모습이나 걸음거리 그
사람들의 행동에서 자유 평화를 봤어요 그리고 안정 그리고 누구도 나를
감시하지 않겠다는 편안 이런 것들이 조금 저는 인천공항에서 복합이 됐어요
그런데 그것에 좀 더 좀 감동적이었던게 조금 한 30분 기다리니까 인솔하시는 선생님이 자 다
모이시오 이게 아니에요 자 자 우리 조용히 이제 오스가 왔으니까 자 가야 됩니다 자 사람들 주변에 있는지 다
한번 챙겨 보세요 이러는 거예요 사실은 누구를 챙겨 보세요 이런 말을 못 들었어요 그냥 내가 누구한테 감시
받으면 대만이 대를 따라간다고 생각하는데 그분이 주변 사람들이 다 같이 가는지 챙겨 버려요 그래서
주변을 보고 호스가 왔는데 국정원 선생님이 대한민국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여기는 대한민국 인천공항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그 대한민국이라는 말에다가 울컥하고
그분이 그 아직도 저는 그분이 진짜 몸이 좋은데 양복을 입었는데 여기에
대한민국 배지가 있었어요 저희는요 김일성 김정일 배지 있는 줄 알았거든요 사람이 얼굴로만 된 그런데
그분이 대한민국 배지를 여기다 달고 나온 거예요 근데 저는 거기서 되게 그렇게 느꼈어요 아,이 남조선이라는
나라는 일개인보다는 나라에 대한 그게 더 부각이 되는 것이구나 물론 북한에도
공화국기가 있어요 근데 사실은 공화국기를 누가 달아요 다 그냥 김일성 김정일 초성아만 달고
다녔거든요 근데 그 태국기가 달린 그 빠지를 딱 그 사람이 여기다 딱
가슴에 달고 나왔는데 그곳에서 되게 아 진짜 제대로 된 나라에 왔구나 전
좀 그런게 개인 숭배가 아니잖아요 예 물론 뭐 대통령을 숭배를 뭐 하든 안
하든 건 개인이 자유지만 북한처럼 이렇게 강제적이지 않아서 참 좋고 그
사람이 오차림 태극히 배치 앞에서도 되게 마음이 뭉쿨해졌던 좀 그런
순간이었던 거 같아요 국정원에서 조사받으실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일단은 새벽에 인천공항 다리를 건너가는데 아 그 인천공항에서 내리면
그 다리가 엄청 긴 다리가 있어요 무슨 바닷기 다리가 있는데 무슨 키나
이렇게 절선 같은 것들도 이렇게고 야 근데 그걸 보는데 그 바닥을 제가 저희가 이제 보은데 이렇게 가림막이
있어요 그런데 이제 그걸 이제 가만하니까 이거 그걸 열고 봐도 누가 욕하지 않는데 우리는 북한에서 하지
말라는 경고가 너무 많으니까 이걸 열어봐도 될까 이런 생각을 먼저 하는 거예요 아니 보스 가림막이라는 건
햇빛을 방지하기 위해서 있는데 북한의 그 독재 제도에서 살던 우리들은 그게 어떻게 보면 어 북한에서 만들어 놓은
보지 말라는 어떤 그런 신호가 됐어요 그래가지고 이렇게 가만히 치고 보는데
도로에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아니 북한에는 새벽 2시간이면 인민반동으로
나와서 사람들이 거리에 자갈자갈한데 사람이 한 명도 없고 도로가 너무 깨끗하고 저는 그래 제가 눈 여겨
봤던 거는 그거 그거였던 거 같아요 다른 탈복민들은 산을 봤는데 나무가 많아서 너무 좋았더라 근데 저는 딱
봤을 때 아파트를 봤어요 아파트를 봤는데 굴뚝이 없더라고요 요렇게 조금 낮은 아파트들이 있는데 굴뚝이 없는데
물론 지금 평양시 아파트들은 굴뚝이 없어요 근데 지방 아파트들은 거의 다 굴뚝이 있거든요 그래서 굴뚝이 없고
그리고 바닥을 봤는데 진짜 나무 잎사이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어요 너무
깨끗하고 누구 와서 마당을 쓰는 사람도 없는데 너무 깨끗한 거예요 아
정말이 나라는 깨끗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가렸던 곳이 국정원이 아니고
그 접십자병원에 가요 저희 탈북들은 한국에 도착하면 공항에서 병원을
거쳐서이 신책검사 몸 건강사태 왜냐면 우리가 북한에서 병을 갖고 올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사전에 발견을 해서 치료를 할 목적으로 그래서 접식자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 가서도
멘붕이었어요 그러니까 일단은 호칭 병원에 갔는데 제가 만약에 박주의잖아요 그러면 그 선생님이
박주의 선생님 이쪽으로 오세요 그러니까 일단은 그 허칭에서 북한에서는 이제 박주 환자 이쪽에
이쪽에 이렇게 환자라는 말을 붙이고 그리고 또 뭐 이름도 안 불러 그냥 뭐 박주희 뭐 이렇게 불렀었는데
선생님이라고 하니까 아 그게 좀 되게 좋더라고요 기분이 그러니까 이제 뭐
우리 지금은 저는 이제 저보다 이상이면 모르는 사람들 저는 선생님이라고 하거든요 근데
북한에서는요 선생님은 꼭 교육자 교사들을 선생님이라 하지 당일꾼도
선생님이란 말을 안 해요 그니까 딱 이렇게 재정된 이름인데 우리 모두를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니까 너무 좀
기분이 좋았고 그리고 좀 의료 방법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좀 놀랐던게 피검사를 할 때 피를 너무
많이 뽑는 거예요 피를 북한에서처럼 몇 방울을 뽑는게 아니라 이런 그 주사기에다가네 개 다섯 개를 뽑는데
처음에는요 그까 그런 거예요 가만해서 의료 상황을 알고 그런 일이 부딪혔다면 그냥 가만히 있 깼는데
피를 뽑는데 손을 이렇게 내밀었는데 내가 아 이렇게 묘사하면 강도한테
속아서 지금 내 피를 지금 어 강도를 당하나 왜냐면 아예 몰랐으니까 그래서
저는 그 피를 뽑을 때 계속 선생님을 의심 있는 눈 처리를 봤는데 선생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뽑는 거예요
근데 그것도 이제 나와서 국정원에 나와서 알게 됐죠 아 여러 가지 검사를 해야 돼서 근데 그때 당시는
우리가 남한사에 대해서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그 피를 많이 뽑는 거에 대해서 우리들끼리도 많이 그랬어요 야
우리 피를 모아서 팔아 먹나 뭐 이런 맑지다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게 약간 남북의 그런 의료 그런 것들이
시스템이 달라서 예 그랬던 거 같고 그러니까 거기서 저희가 다 이제 엑스레이 찍고 처음파도 찍고 그래
가지고 갔는데 일단 병원이 너무 깨끗하고 그리고 복도에 있는 의자를
봤는데 북한에는 북한도 물론 이제 병원 의자는 나무 의자하고 딱딱해요
근데 거기 그 의자인데 소한 거예요 폭신폭신한 아 소파돼 가지고 야 좋다
그래 그때 그때 들었던 느낌이 솔직히 말해서 그때 감정을 고대로 얘기하려면 와 부산하러 왔네 그러니까 일단은
건물 그다음에 그 의료 시설 그리고 버스 안 그리고 이제 그 다리 아파트
이런 것들 봤을 때 다른 건 다 모르겠고 잘 사는 나라에 왔네 부자 냄새가 나네 약간 그런 그때 13년
전에는 그런 느낌이 들었었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막막하셨을 것 같은데
한국에서 맺게 된 인연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한국 사람에 대한 인연은 그냥 간단간단하게 말하면 가장 잊지
못하는게 딱 세 사람이고 일단은 첫 사람은 제가 하나온 국정원 때 만났던
신부님이세요 그니까 이제 거기에는 종교가 들어오잖아요 이제 학생들 근데 그때 제가 이제 천주교라는
데서 제가 방장을 했어요 근데 거기 한 100 몇 명이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저희가 태소할 때 신부님이
명함을 줬어요 그러니까 저는 남한 사람한테 받는 첫 명함 그런데 제가 하나원을 태소하고 3일이 지나서 제
생일이었어요 근데 무슨 생각이 드냐면 생일날인데 누구도 나한테 축하한다는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것도 없고 내가 바닥에 밥상도 없이 라면을 놓고
끓여 먹는데 갑자기 울컥한 거예요 아 이게 고향에 있었더라면 동생도 오고 좀 즐겼을 텐데 뭐 강냉이 밥이라도
배불리 먹어 놓고 그냥 언니 축하해 막 이랬겠는데 그래서 제가 막 그
하나원에서 나온 트렁크를 막 두는데 명함을 하나 발견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 신부님 명함이 있었어요 냅다
전화했어요 전화했는데 신부님이 모르는 거예요 저를 왜냐면 교육생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제가 몇끼몇끼
반장입니다 하니까 아 안녕하세요 그까 그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그 실무적인 예 그렇게 인사를 했는데
제가 신부님 오늘이 제 생일인데요 제가 저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그래
내가 울목울목 해 가지고 얘기하니까 신보님이 놀라신 거예요 그래 가지고 그러면 자매님 오늘 어구에 지하철 탈
줄 알죠?네 네 알아요 그러면 어느 역전까지 오래요 그래 가지고 하나원에서 같이 나온 동기생을 달고
그 역전에 갔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서울 해화동이었어요 그래 해화동에 가서 한식집에 가서 저희를 생일이라고
비싼 식당에 데려갔는데 아니 한식집이니까 음식이 접시는 있다
만한데 음식이 조금씩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그때 생각해서 아 신부는 월급을
못 한다니까 돈이 없었구나 그때 그렇게 생각 그리고 그 한식집이 되게 하려한 건물이 아니었어요 약간
기털집처럼 만든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운치 있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가난한
식당인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야 내가 가난한 사람한테 괜히 생일날이라고
말했구나 제가 그래서 저는 첫 생일에 엄청 배고팠어요 너무 음식이 조금 조금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어
신부님이 그래서 저를 그날에 남산 타워에 가서 남산도 보여 주시고 했는데 그때 12년 전 이면이 지금도
있어요 그래서 항상 그분이 제 삶의 멘터였어요 그래서 제가 무슨 일이
생기거나 이러면 예 제가 항상 신부님한테 신부님 저는 회사를 다니는데 이런 이런 일이 생겼는데
저는 되게 제 생각은 그래요 그 그분이 왜 그럴까요 그러면 신부님이 그분에 대해서 욕하거나 나에 대해서
욕하는게 아니라 이게 자 그 사람 상태에서는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이렇게 얘기해 주시는데 뭔가
들으면 내가 오 그랬구나 맞구나 그래서 항상 그분이 제 삶의 어떻게
보면 멘토 키다리 아저씨 그런 역할을 했고 또 그분도 지금까지도 이제 제뿐
아니라 저희 아들도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항상 지금 케어를 해 주시고 지금도 이제 그 인연이
12년째 이어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제 제일 하나운에서 만났던 분은 그분이고 두 번째로 만났던 분은 제가
먼저 오고 아들을 이제 북한에 놔두고 왔으니까 하나을 태소하고 6개월인가
8개월이 지나야 여건이 나오더라고요 저희는 그러니까 제가 중국으로 가야 아이를 데려올 거잖아요 북한에서 그래
가지고 제가 일을 해야 되는데 다른 친구들은 막 자격 좀 따 가지고
맨조보러 다니고 이러는데 저는 제가 아이를 데려오려면 회사를 들어가면 안 됐어요 왜냐면 출근을 하는데 몇 달이
걸릴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제가 알바를 막 하고 있는데 야 근데 진짜 정착
초기는 그랬던 거 같아요 30대 후반에 왔으니까 북한에서 30대 후반이면 정말 중년이에요 진짜 어찌
보면 그냥 완전 아줌마 직업을 잡기에는 그냥 그리고 제 또래 하나온
동기생들 보면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식당 마트 점원 그냥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큰 자격이 없이도 될 수 있는 일들이었어요 근데 저는 그마저도 못 들어봤어요 아이를 데려와야 되니까
그래서 그냥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어 그 아르바이트도 쉽지 않았어요 이제
그 피자집에 갔는데 피자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냐고 해서 없다고 하니까 안
된대요 그리고 약간 그런 것들 말투에서 거부감을 좀 느끼셨던 거 같아 왜냐면 사람들한테 음식을 파는
그런 빵집인데 제가 북한 말을 하면 또 사람들이 또 싫어할까 봐 사장이
또 예 안 된다 하고 그니까 여러 번 제가 막말로 까이다 보니까 자존감도
내려가고 어떻게 살아야 될지 모르고 그래도 어떡하겠어요 살아야 되니까 계속 그 알바모인 데를 찾았는데 여양
보호사를 그까 8몇세난 어르신이 치매가 왔는데 집에서 할 여양 보호살
그런는데 거기 우대 조건이 뭐였지 아세요 집에서 하루 새끼를 먹을 수 있다는 거예요 아 그래서 제가
거기다가 전화번호 있어 갖고 전화했는데 아 오래요 면접보러 오래요 그니까 어떻게 보면 회사가 면접을
보는게 아니라 그 할머니의 자식들이 저를 면접을 보는 거예요 그래 갖고 저는 지금도 그 역전이 뭐란
여기였어요 예 저 기억해요 분당 쪽이었던 거 같아요 그래 가지고 그
집에 딱 들어갔는데 그 전실에 그냥 그 형제들이 한 네다섯 명이 앉아 있는데 그냥 제가 딱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에 그냥음 신뢰하지 못할다는 빛이 어린 여자가 나이가
조금 그래도 40대 50대 분을 원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가로를 치고 뭐했냐면 중국 조선족도 된다 왜냐면
할머니가 치매가 오셨으니까 그래서 저는 사실은 뭐 중국 사람도 되는데 북한 사람이 안 될까 이래
가지고 갔는데 형제들이 보더니 안 된다고 너무 젊어서 안 된다고 이렇게
갈게 안 생겼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안 된다고 해 가지고 다 신발
신고 나가는데 그 집에 마아들이 그때 당시 마다드님이 62인가 그렇게 됐어요 저한테는 아버지 볼이었죠
그분이 그래도 사람이 여기까지 왔으니까 안 된다 네가 어떻게 저렇게
젊은 애가 너는 못 한다가 안 안 될 거 같다 이러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그분이 얘기하면서 나가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분 다리를 딱
붙들었죠 어 그래 가지고 그때는 그분한테다가 아저씨라고 했던 거 같아요 울면서 아저씨 살려 달라고
하니까 그 아저씨가 신발을 한짝을 쉬는데 벗는 거예요 딱 외관상 봤을 때 그분이 썩 훗날에 저한테
얘기했어요 딱 외모를 딱 봤을 때는 너무 당돌하고 그러도 아저씨 말이하면
세련되고 그리고 택게 딱 부러지고 이런 일을 하게 생긴 아이가 아니더라는 거예요 지금보다 한 13년
어렸으니까 좀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죠 그래 제가 살려 달라고 하니까 아저씨가 신발을 보고 다시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저는 그때 긴 얘기를 안 했던 거 같아요 그냥 울면서 나는 탈북자고 한국에 온지 이제 한 달밖에
안 됐고 아들은 북한의 남이 집에 있고 나는 돈이 필요하고 그런데 직장에서는 내가 북한 사람이라고
알바도 안 쓴다 그 나를 어 나는 어떻게 해야 되냐 난 어떻게 살아야 되냐 이러면서 약간 절규를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아저씨가 이렇게 한참 보더니음 너 이름이 뭐냐 그래서
이름이 뭐 박준이다 하니까 그러면 내가 같은 동포로서 네가 아들을
데려올 수 있게 내가 경제적으로 너를 도와주마 근데이 일은 못 한다 그래서 제가 저는 그때 그 순간에 그랬어요
저는 공짜돈 싫다고 다 당신들도 나 힘들게 돈을 벌었는데 나는 공짜돈은 싫은데 내가 일할 수 있는 기회만
달라 그리고 나 동생이 집이 셋이어서 나 진짜 동생들 아기 귀저기도 잘 보고 동생 셋을 다 내가 엎었다 저
동생이 세 명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분이 이렇게 한참 보시더니 따라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집이 참 컸어요
방이네 개가 되고 되게 잘 사는 집이었던 거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근데 이제 방 한 칸이었는데 할머니가
먹을 이렇게 하고 놓았는데 여기 그냥 건버섯이 그 반세인가 이제 문을 딱 여는 순간에
그냥 악치 냄새가 그 이제 어르신들이 이제 대소변 막 이런 냄새고 아프니까
냄새 나잖아 그래 순간에 내가 멈칫하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그때는
30대였고 그래도 이쁜 원피스를 입고 왔고 황수도 그래도 싸구리 항수도
하고 왔고 저 약간 그럴 날라리를 식을 부릴 라인데 흠칫하는 거예요 솔직히 그래가지고 훔칫해 가지고 근데
그 순간에 아니다 그니까 그 순간에 그냥 아들의 얼굴이 보였어요 그냥 엄마를 기다릴 그래 가지고 내가 이게
무슨 사치냐 그래 가지고 따라 들어갔어요 그래 가지고 아버님이 이제 할머니를 자 이거 통째로 앉지 말고
어머님을 요렇게 오른쪽으로 60도를 요렇게 제치고 기적이 넣고 다시 요쪽을 요렇게 해서 들고 다리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된다 어 그렇게도 해 주고 그리고 아침마다 이제 수건을에 적서 이렇게 세수도 해
주고 이렇게 해 주고 되고 전화번호를 주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고 그냥 그렇게 하고 기적이
있는 대로 대주고 근데 제가 생각했을 때는 안 어려웠어요 그 물론 이제
간병도 여러 종류가 있겠죠 이제 막 운신을 하셔 가지고 여기저기 다니면
힘들지 모르겠지만 이분은 운신을 못 하셨어요 그러니까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기적이만 갈아주면 됐어요
그리고 할머니가 물 달라면 뭘 주고 죽면 죽 주고 할머니 여기를 조금 높여 가지고 베개를 이거는 내가
북한에 있을 때 아버지가 한평생을 아프셨어요 그래서 제가 집에서 아버지
간병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나는 이게 안 힘들었어 솔직히 말하면 그니까
내가 그때 그때 혁명 정신으로는 그래서 아들이 간 다음에 내가 그
장판부터 일단 닦았어요 할머니 주변을 깨끗하게 하고 할머니 그리고 이제 저녁 시간이 돼서 딱 나가자는데
할머니가 나한테 이렇게 그 손을 겨우 이렇게 눈을 이렇게 알아보시고 눈을
꼼뻑하시는데 이렇게 자기 옆에 자리를 톡톡톡 치는 거예요 여기서 잘해 그니까 할머니가 내가 장판을 닦으면
머리를 내 이렇게 돌리시더라고요 사람이 있으니까 근데 내가 무슨 말인가를 계속했어요 할머니 많이
아프세요 많이 아프면 말하세요 그러니까 북한 말을 한 거 같아요 그리고 오점이 말해 오면 누세요
괜찮아요 막 이런 얘기를 하면서 장판을 막 닿는데 할머니가 저를 계속 제가 가는 쪽으로 가난애기처럼 머리를
이렇게 돌리는데 저는 그때 그 할머니의 눈빛에서 아이를 봤어요 그
할머니의 눈빛이 그랬어요 나 놀고 싶어 나 살고 싶어 나 할 말이 많아
이런 눈빛이었거든요 그래서 할머니가 거기서 잘해요 그래서 저는 원래는 그
사장님이 아들이 나한테 전실에서 자도 된다 했어요 근데 내가 할머니가 거기서 잘해서 내가 베개를 가져다가
그 옆에 쭈그리고 잤는데 새벽에 6시 반에 마다들이 온 거예요 딱 왔는데
내가 할머니 곁자 그러니까 아들이 자기 그때 너무 감사했대요 지금까지도
간병원을 4 5년 동안 쓰는데 할머니 곁에서 잤던 간병인이 없대요 그래서
내가 거기서 자서 그냥 저는 그게 어떤 거 같다 간절함과 조금 진실이
있었던 거 같아요 내가 돈을 받고 일을 하지만 그때 시급이 시간당
5,500원이었어요 근데 사장님이 저한테 만 원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전기 바깥마에 밥이 있는데
먹고 싶은 대로 먹으래요 예 그래서 저는 내가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돈을 받아도 돼 할 정도로 저는 사실은 너무 좋고 사실
중간에 30일 한게 아니라 또 며칠 동안은 또 이제 제가 쉬느라고 또 집을 왔다 갔다 하고 했는데 어 어느
날에 제가 학원에 갔다가 이제 그다음 날에 할머니 집에 오기 전날인데 그
전날에 제가 할머니가 보고 싶어 갖고 왔는데 마당 앞에 어 지금 생각해도 좀 그런데 일고가 와 있었어요
그래 가지고 그 아저씨가 낮에 제가 학원에서 공부하는데 주야 주야 이러는
거예요 전화 와서네 그다음에 내가 아저씨다가 그다음에는 아빠라고 부르라 해서
아빠라고 그래서네 아빠 그러니까 아무래도 할머니 병원 데려가야 될 거
같다 그래서 언제요 그래도 나는 숨진하니까 병원에 가면 나도 따라갈
줄 알았어요 그래 갖고 언제요 하니까 분당 서울대병원에 가야 될 거 같은데
어우쯤에서 아무래도 할머니가 힘들어 보여 그러니까 너 학원 끝나면 와 이러는 거예요 그니까 할머니의
마지막을 보라는 거죠 그러니까 병원 가기 전에 모습을 그래서 저는 학원이 끝나서 밥을 먹어야 되는데 밥 먹고
싶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제가 석달 동안 할머니를 간병하니까 이게 가족 같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발이 막 어디
단지 못하게 역전 갔는데 그 할머니 골목으로 가는데 119가 와 있고 그
구루마 같은 걸 감색가 옷을 입은 그 사람들이 끌고 나오는데 할머니를 이제
거기다 나오는데 아 그때 감정을 뭐라고 해야 되나?음 음 할머니가
저를 못 알아봤어요 예 할머니가 하루가 다르게 악화됐었는데 그래 할머니 태우고 아빠 나도 갈래요
하니까 중환 자실은 간병원이 못가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결국은 어
할머니의 마지막의 모습이었는데 그때 병원에 가서 금방 돌아가시지
않으셨어요 올해 계시다가 아 1년 있다가 돌아가셔서 제가 그 장례식장도
갔다 왔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그 아빠가 나한테
이제 결산을 해 줬어요 그래서 만약에 한 달에 20일 일했으면 뭐 200만
원을 줘야 되는데 100만 원을 더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들을 어떻게든 데리고 와서 제일 데리고
오면 먼저 나한테 전화해 그러면 내가 네가 차가 없으니까 아들을 다 데리고
좋은 것에 데리고 다닐게 이래 가지고 그 아버지하고 인연이어 가지고 저는
그때로부터 거의 한 넉달 걸렸어요 왜냐면 중국에 넘어갔는데 아들이 또
거기서 아파 가지고 한 달 동안 또 여관에서 치료받고 이렇게 내려오다 보니까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와서 제일
먼저 한국에 왔을 때 그때 감정도 좀 얘기해 주고 싶은게 북한에서 탈북을
해서 처음 인천공항에 들어올 때 느낌하고 제가 다음에 아들을 구출해 가지고 아들은 3국으로 오다 보니까
태국으로 가고 저는 인천공항으로 다이렉트로 들었잖아요 근데 제가 그 비행기 내려 가지고 이제 이렇게
사람들이 나오는 개찰구 문이 열리잖아요 근데 막 그 어떤 분들이 가족들이 거기 마중 나와 있으면서 야
언니 하면 와 이러는데 저는요 이제 가방을 일으켜 매고 완전 꽃이죠 넉달
동안 중국에 가서 양치도 안 하고 제는 엄청 죽을만큼 고생했는데 누구도
마중 나온 사람이었고 야 너 진짜 제가 중국에서 아들 데려올 때 정말
위험한 고배를 많이 넘겼거든요 그니까 나는 누군가를 붙들고 울고 싶은데 나
이렇게 힘들게 아들을 구출했어요 그니까 나를 조금 누가 위로해 줬으면 좋겠는데 인천공항에 딸기 개찰구문이
열리는데 저는 그냥 혼찬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때 기차를 탔는데 1호선을 탔는데 제가 독산역에서
내려야 되는데 제가 인천행을 탄 거 같아요 1호선이 두 개잖아요 눈을 떴는데 인천공항으로 다시 온 거 제가
이렇게 돌아 가지고 거기서 자 버린 거예요 제가 그니까 그런 일화가 있는데 그때 좀 많이 그래서 제가
오자마자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죠 예 아빠 하니까 아빠가 데려왔구나 막
이러면 그래서 이제 온다 그래 가지고 진짜 아빠가 우리 아들이 하나원에서 나와서 다음날에 한 통급 화물차를
끌고 왔었어요 거기에 이제 사탕 가자 과일 아이가 좋아하는 걸 이렇게
가지고 야 가자 가자 그래서 저하고 저 아들 근데 그 한 통금 화물차에는
사람이 세 명이 앞에 탈 수 있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사고 아빠가 너무 행복하는 거예요 일소가 어디
갈래 뭐 이러면서 그러니까 받아보고 싶습니다 그래 강원도 못가 멀어서 인천 가자 해서 지금 생각하 대부도를
데려신 거 같아요 그래 가지고 우리 아들이 그 할아버지한테 할아버지
바닷물이 왜 이렇게 팔았지 않아요 막 이랬던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 그때 엄청 많이 그때 할아버지를 아빠를
붙들고 많이 울었던 거 같아요 음 그랬더니 아빠가 그때 나한테 항상 말해 주던 얘기가 나한테 그랬어요
너는 최고의 엄마다 한국에도 보면 다 그렇진 않지만 이혼도 하고 자식을
거두지 않겠다 이렇게 했는데 그 뭔데 있는 자식을 이렇게 목숨 걸고 데려오고 참 너는 최고의 엄마다
그리고 아버님이 그랬어요 그 돈이 일전이 정말 귀한 아이데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공짜돈이 싫다고 했을 때 아 얘는 제대로 되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왜냐면 그분이 사업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너무 많이 대상했대요 그래서이 사람이 웃음
소리를 듣고도이 사람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래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진짜 도와주고 싶었대 몇백만
원을 도와주자 했대요 내가 그냥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근데 공짜도는 싫다고 할 때 아 얘는 뭘 해도 제대로
되겠구나 기본이 된 아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
그런 얘기들을 해서 그분하고 큰 인연이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세
번째 인연은 저희 아들을 데리고는 왔는데 제가 일을 하다 보니까 아이가
학교 갔다 오면 가서 놀 데가 없으니까 맨날 그 쓰레기장 옆에 근해 있는데 거기 앉아 있다가 엄마가
저녁에 오면 막 뒤에와서 다리 매달려요 그래서 그때 그 인근 교회에서 교회 목사님 사모님이 우리
아들을 걷둬 줬어요 직장 갔다 오면 우리 아들을 근데 그 사모님이 후에
나랑 만나서 수첩을 나한테 내미는 거예요 일석이 엄마 일석이가 대한민국에 와서 제일 처음 웃은 날이
언젠지 아세요 저는요 사는게 바빠서 아들이 언제 웃었는지를 기억을 못
했어요 근데 그 디딤돌 센터 같은 큰 이런 센터를 운영하셨는데 안 웃더래요
그냥 볼이 부어 있고 그랬는데 수영장에 한번 데리고 갔는데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할 때 그렇게 웃더래요 그래서 그 사모님이 사진을 찍어서 오늘은 일석이가 처음 웃은 날이 그
날짜를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아 부모도 사는게 바쁘다고 내 자식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들고 알긴 알지만 그걸 어 만질 여력이 없었단 말이에요
근데 그분은 자기 자식도 아닌데 아이가 처음 웃은 날을 사진 찍고 날짜를 기억하고 그리고 우리 아들이
이제 축구를 하다가 목에 불러져 갖고 수술할 때 그때 그 사모님이 자기
적금 통장을 깨셨어요 그래서 100만 원을 현금을 인출하셔 갖고 저를 주셨어요 아들 수술비 보태라고 그런
걸 보면 어 되게 제가 어 사실은 솔직하게 말하면이 인연들이 매일
만나고 매 달 만나진 않아요 정말 어떤 때는요 1년에 한 번 전화하나
왜 그분도 일하고 저도 일하고 근데 전화를 해도 낯설지가 않은 거예요 어
잘 지내시오시오 저 살아 있어요 그까 저는 미안하면 그래요 선생님 저 살아
있어요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그 말씀의 뜻을 다 아세요 아이 들이고 혼자 살아가는게 바쁜게 언제 그럴까
내가 일석이 엄마한테 전화가 안 오면 일석이 엄마가 잘 사는구나 이런 생각을 한대요 그래서 그분이 후에
제가 그런 얘기를 했었거든요 정말 감사하다 이렇게 돈도 적금을 깨고 막
이렇게 해 주시고 보니까 열심히 사는게 예뻤대요 그냥 사실은 일석이
엄마를 처음에 딱 봤을 때 어 조금음 젊고 그리고 또 외모도 보니까 또
이제 혹시 또 쉽게 돈을 조금 벌고 그런 쪽에도 약간 치우칠 수도 있는데
사는게 힘들어 그냥 오직 그냥 너무 열심히 너무 제대로 살아서 자기가
도움을 줄 수 있는게 그냥 열심히 사는 사람한테 도움을 주는게 자기도 힐링 받는 거라고 그런 얘기를 하셔서
어 아마 제가이 방송을 지금 녹화하는 기준에 아마 한 달 전엔가 통화를 했을 거예요 근데 진짜 1년 만에 예
그래서 선생님 저 살아 있어요 그랬니까 아 잘 살아 있냐고 한번
얼굴 보자 그니까 제가 배운 만독한 거 같아요.데 이게 연락을 제가 해야 되는데 이제 그런 걸 조금 생각이를
잘 못 하더라고요 그래서 참 미안하고 좀 그래요 한국에 오기를 잘했다는
마음이 가장 많이 들 때는 언젠인가요 저는 사실 저 개인보다는 엄마였던 거
같아요 개인들이 나만에 대해서 왔을 때 만족도 이런 것들은 사실 북한에서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그 가정을 배제할 순 없는 거 같아요 내가 정말
거기서 너무나 힘들게 이렇게 살아오면 나만에 와서 그 약간 성공이나
포보감이 더 많을 거고 그쪽에서도 대충 밥이나 먹고 왔으면 이렇게 좌절되고 이러면 조금 그 만족감이
덜어질 수밖에 없어요 근데 저는 한국에 와서 사실은 아이를 데려오면서
알바를 하면서도 힘들었고 내가 나이가 있다 보니까 이제 어떤 대학을가
가지고 뭘 개척하기도 힘들고 그리고 일단은 저는 약간 정신적으로 좀 많이
조금 힘들어 했었어요 왜냐면 저는 이제 결혼을 해서도 한국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나 딸바보라고 해야 되나 아버님이 이제 자식이 다섯 명이었는데
아버님을 닮은 딸은 제가 유일했어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밖에 내놓은 아팠대요 길바닥에 내놓으면 감기 걸려
들어대요 그러니까 이제 부모들은요 아픈 자식일수록 더 애착이 가잖아요 그래서 아버지가 제가 이제 결혼을
하고도 한 4km 밖에서 살았는데도 아버지가 마음을 못 났어요 늘 내 딸이 어떻게 될까 봐 그리고 결혼을
해서도 집에 가면 아버지가 감기 걸리면 감기약을요 통 걸 저한테 안 줬어요 먹구멍이 접아서 너무 못
간다고 숟가락에다가 이렇게 손을 풀어 주셨어요 그니까 그 정도로 좀 아버지
아버지하고 유대감이 엄청 많았고 근데 이제 한국에 와서 그 아버지를 속이고
왔으니까 그 죄책감 그리고 그리움 저는 조금 그런 것들이 많아서
심리적으로 한국에 오면서부터 계속 병원 생활했어요 저는 한국에 와서도
19에 두 번나 실려 갔었고 그러니까 이제 나는 육체적인 거보다는 정신적으로 나약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처음에 왔을 때는 왜 왔지 솔직히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왜 왔지 그러니까 일단 그거 같아요
배고픔이라는 기본적인 1차원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니까 그다음에는 다른
걸 생각하게 돼요 그러니까 이제 북한에 있을 때는 먹고 사는데 집중하다 보니까 그리움이나 정서적인
생각들이 약간 필요 없는 것들이 생각할 여율이 없었는데 한국에 오니까
내가 하루 새끼 밥을 굶어 죽을 일은 없어 그러니까 약간 외로움 미안함
이런 것들이 그리고 저는 요즘 MBTI를 말하면 저는 감성적인 사람이에요 현실적인 사람보다는 저는
약간 감성적이어서 저는 사실 기자보다는 사람들이 제가 쓴 거를 보면 소설이나 시를 더 좋아해요 제가
조금 감성적이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금방 왔을 때도 그 이적이 부른 다행이라는 나라 비가 올 수 있어
집이 있어서 다 행이다.이 노래 들고는요 버스에서 이어폰을 킨로 아
버스 기사님이 제가 너무 오니까 말은 못 근데 저는 이어폰을 깼기 때문에
제가 온다는 걸 몰랐어요 근데 이게 그날 비가 왔어요 근데 그 노래를 정착 저게 이렇게 알바를 끝내고 지쳐
가지고 버스 탔는데 이렇게 듣고 오는데 어 그래도 홀로 내던져지지
않다는게 다행이다는데 그게 너무 와닿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오기 시작하는데 저는 제가 그렇게 생활
세계 오늘 좀보다 워스기사 아저씨가 계속 보는 거 아 저 여자는 시련을 당했구나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정도로 심리적으로 힘들었는데 이제에 그래서 조금 처음에
왔을 때는 막 이게 없었어요 야 내 진짜 잘했다 그러니까 이게 약간 환경
이런 것들도 많이 기인되는 거 같고 그리고 아들을 데려오면서부터도 또 내가 해야 될
몫이 더 많아지니까 삶이 더 힘들어진 거예요 근데 그 아들이 처음에는 나를 더 힘들게 했어요 아이가 적응을 더
못 하잖아요 근데 그때는 저는 좋은 옷만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 그 아이를 제가 타일러야 되잖아요 근데
저도 나만에 정착한지 1년밖에 안 됐어요 저도 새내인데 얘가 더 애를 먹여요 그래서 제가 뭐라 했지 알아요
아 그냥 당해 그랬어요 왜냐면 학교에서도 왕따예요 말을 못 해요
북한 말을 하니까 애들이 주변에 원숭이처럼 와서 붙는데 야 너 북한이
그렇게 못 산다며 북한 말 한번 해 봐 애가 너무 싫은 거예요 엄마 나를 왜 데려왔어 그다음부터 따지는 거예요
그 아이는 고생을 안 했잖아요 엄마가 장사해서 밥을 배불리 먹기고 친구들이 다 거기 있는 아이를 갑자기
데려왔으니까 애 입장에서는 그 북한이 더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 나를
왜 여기 데려왔냐 그리고 왜 우리 집보다 작은 집에서 왜 사냐 이러면서
저한테 난리치고 빨리 고향에 가자고 그 저는 그때 일서기를 끌어앉고 많이
울었어요 왜냐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어요 그래서 나도 힘들다 그랬어요 나도 회사 정착하기 힘들다고
그래 당해 그러다가 아들이 이제 축구를 하면서 어 달리기를 하면서
학교에서 막 소문이 나고 막 아이들이 축구를 잘한다가 학교를 다니면서
운동을 잘하면 그렇게 아이들이 좋아한대요 저는 몰랐어요 근데 이제 아마 탈북을 혼자 하다 보니까 겁에
질려서 잘 뗐나 봐요 달리기도 잘하고 근데 아이가 주변에서 야 너 축구 잘한다 달리기 잘한다니까 그다음부터
자전 자존감이 딱 붙으니까 우와 태권도 돼 나가서도 막 땅 상받고
들어오는 거예요 근데 저는 그때부터 약간 아들이 정착이 저희 정착이 된 거 같아요 그니까 이제 부모라는 거는
그런 것 같아요 여자 내 이름 박주인 없었어요 나는 아이의 엄마였어요
그니까 애가 행복해 하니까 그다음부터 저도 정착이 되는 거예요 그다음에서 이제 아들이 막 대회 나가서 그
얘기를 하고 막 이런 얘기 하면 야 내가 한국기 잘했구나 얘가 지금 북한에 있었다면 강냉 밭에서 김을
매겠지 왜냐면 학생들도 협동 농장에 동원을 되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아들이
어떻게 보면 정착을 하고 애들하고 어울리면서 그다음부터 이제 한국 애들을 저희 집에 데리고 오면요
저는요 저는 사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안 믿을 수도 있는데 한국에 정착해서
횟수로 2년 3년 동안 수박을 못 싸 먹었어요 저는 수박이 비싼 줄
알았어요 북한에서 비쌌으니까 근데 수박이 그렇게 쌌어요 그러니까 저는 그만큼 돈을 안 썼다는 거죠 그냥
밥에다가 반찬 왜냐면 돈을 모아야 되니까 그래 가지고 그다음부터 제가 조금 가일도 사고 이랬는데 그 한
가지 문제가 풀리니까 제 삶이 약간 부유해졌어요 그냥 밥에다가 국에다가
반찬만 먹던 집이 어떤 순간에 가일도 먹고 그러니까 내 삶이 다체로워지니까
내가 여기에다가 정을 붙이는 거예요 아 나 지금 생각해 보니까 나 진짜
남조선 온 거 같네 왜까 돈을 너무 아끼고 그래서 아이의 정착이 되면서
저도 그 때부터 나만의 오기를 잘했구나 왜냐면 아이를 보니까 그렇게
전기가 이렇게 밝은 세상에서 내가 아이를 키우고 싶어서 데리고 왔던 그
탈북의 꿈이 현실이 됐구나 했던 걸 아들이 나만의 정착을 제대로 하면서부터 느꼈던 거 같아요
그다음부터 오기 잘했구나 사실 첫 창계에는 좀 재수러운데 좀 그런 생각을 못 했던 거 같아요 한국
생활에서 좋게 느껴지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아들은 남만 친구들이
북한 친구들보다 착하대요 근데 저는 그게 이해돼요 이렇게 북한 아이들도
아이는 아이 다워야 된다고 하잖아요 근데이 집이 가난해 보세요 그런 착함이 물론 가난하다 해서 다 착하지
않은 건 아는데 가난을 하고 이렇게 되면 내가 간식을 가자를 하나 ঝ을
때 가난하면 언제 가자를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없으니까 그걸 친구하게 나눠 줄 생각을 못 해요 그렇게
되잖아요 내가 이걸 먹으면 친구를 주면 나는 굶겠구나 근데 한국은 조금
간식도 이제 흔하니까 그니까 좀 그런 것들이 있고 친구들이 어 엄청
착하다고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그래서 왜 착하냐 했더니 한번은 친구랑 같이 막 가다가 길에서 돈갑을
주었대요 근데 그 안에 돈이 만 원짜리 막 있는데 그 친구가 자기한테 일석가 이거 빨리 저 경찰서다 개다
줘야 된다 해가지고 자기는 순간에 그 돈을 버는 순간 그런 생각을 못 했대요 그렇잖아요 아이니까 오 저
돈이 있네 얘는데 그 친구가 그러면 엄마 걔는 나보다 더 착해 이러니까 그럼 나보다 더 착하면 너는 그 돈을
뺄 생각까지 안 했는데 돈갑을 버는 순간에 경찰서에 게다 줘야 되겠다는
생각은 순간에 못 했단 말이야 막 이런 얘기를 하는데 저는 그래서 그 친구들이 영향이 우리 아이들한테
좋은게 있고 그리고 선생님들 선생님들이 그랬대요 일석가 너는 최고야 나만에서는 운동만 잘해도
평가받을 수 있고 인정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아 나는이 사이에 와서이 운동 하나만으로도 난 살아갈 수
있구나 이런 자신감이 붙은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이제 친구들을 보게
되면 초등학교 때 친구들하고 지금도 휩쓸려요 전화를 만나더라고요 전화를 해서 야 우리 주말에 어디 만나자
하면 또 차를 가지고 모이고 요즘에는 또 지금 알바 한다고 좀 돈이 생겼다고 어디 펜션을 예약해 갖고
친구들이 막네 다섯 명씩 가요 그래서 엊그제도 야 돈을 그렇게 물수도 써 가지고 세간살이 못 해 하니까 나한테
어머니 제발 제 삶에 끼워들지 마세요 뭐 이렇게 하는데 저는 그런 것들이
흐뭇해요 그리고 그 친구들한테 감사하고 그래서 제가 이제 8년 전에
임대 아파트 작은 데서 큰 아파트를 이사 갔을 때 그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구을 쳤어요 주말에는 그래
가지고 야 너희들 집 안 가 아 저희 어머니한테 전화했는데요 안 간다고 그러면 일석이 엄마한테도 물어봐야
되잖아 하니까 일석이가 된대요 이러 그래 보면은요 그래 제 그때 사진 많이 찍어 놨어요 그러면 저는요 제가
그때도 그냥에 경제적으로 지금도 유속하진 못하지만 저는 그게 너무
좋아서 피자네 판 시킨 두 판 콜라 다 시켜 줘 그 그러니까 저는 그랬던
거 같아요 북한에서 온 우리 아들을 차별하지 않고 이렇게 친구처럼 놀아주는 그 남한 친구들이 저는
고마웠어요 예 그래서 그 친구들한테 제가 더 잘해줬고 그 친구들 중심에
우리 아들이 앉아 있는 근데 그 친구들이 우리 아들이 막 이렇게 축구 얘기하잖아요 야 호날 몇심 맞지
친구들이 막 집중해서 우리 아들을 봐요 그 그때 무슨 생각이 야 저금 북한에서 굴러 들어와 가지고 나만
아이들 중심에 앉아 있는 거야 그래 나는 우리 아들이 그 친구들 아니었으면 지금이 우리 아들이 없지
않았을까 그런게 있어서 아들은 지금 보면요 북한 얘기하면요 이렇게 쓱
웃어요 완전 완전 남한 하가 된 거예요 그냥 남한 청년이에요 이제
12년 되니까 그리고 열살에 왔기 때문에 세계관이 금방금방 바뀌어요 그래서 저하고 좀 부딪히거든요 그러면
그냥 아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정말 꼰대야 오빠 엄마 그렇게
생각하지 마 얼마 전에 저희가 이제 론쟁이 붙었는데 열로족에 대한 론쟁이 붙었어요 내가 욕을 했어 야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야 뭐 오늘 살고 내일 안 사냐 응 적당히 해 놓고 이렇게 하니까 엄마 그 사람이 삶이야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데 엄마가 왜 평가를 하냐고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걸 나쁘다 좋다
평가하지 말라는 거예요 엄마 그건 그 사람이 삶이래 그렇게 자기가 연석처럼 살고 싶으면 사는 거고 내가 그렇게
사는 건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냐 그러니까 그니까 우리 아들이 말하는 거는 누가 잘못하든 잘하든 그게 죄를
지은 거는 여겨도 되지만 그 사람이 선택한 삶에 대해서는 엄마가 판단하지 말라는 거 근데 가만히 듣고 보니까
맞는 말이야 근데 저는 자존심이 구기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엄마한테
롤리적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제가 그렇게 했는데 그니까 그런 걸 보면 제가 그 아이의 인성을 읽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연로적으로 사는 청년들을 비워하진 않아요 근데 이런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도 있어 근데 왜 그걸
엄마가 욕을 해 왜 평가해 그건 그 사람의 삶인데 세상에 멜라밀한
사람들이 다 있는데 그러니까 그런 거하고 말할 때 저는 욕은 해요 왜냐면 아들한테 지긴 싫잖아요 그래
가지고 제가 생각지는 뿌리인데 돌아앉아서는 다 컸네 예 전 좀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이제 막 정치적인 얘기도 하고 그리고
아들하고의 공통점이 딱 하나 있어요 유기견 아들이 한은 이제 딱 집에
왔는데 얼굴이 너무 무거운 거예요 왜냐니까 엄마 우리 헬스장 지하의 여름인데 주인이 개를 묶어 놨어
강아지를 근데 그 지하 주차장 온도가 기가차 숨이 탁 막히는데 개가 거기서
한다 줄 묶여서 그 안에 있는데 아 엄마 내가 그래서 생수를 사다가 그
아이를 줬는데 자기가 그 아이 앞에 30분 앉아 있었대요 그니까 너무 속상해서 그 털이 많은 아는데 자기
너무 속상하다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막 이렇게 막 얘기하다가 그 아이한테 그런 얘기하죠 뭐 어떤 휴가지에서
유기견들이 많다 이런 거 우리 둘이 보면 우리 아들이 너무 속상해 하는 거예요 야 엄마 강아지를 선택을 하면
생명을 가진 아이인데 저걸 책임져야지 저런 뭐 책임이 어디 있어 어 그까 이런 이런 얘기를 하거든가 저희
집에도 이제 강아지가 두 마리가 있거든요 그 우리 아들이 나한테 그래요 제가 얼마 전에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는데 한쪽 해가 거의 기능을 못 하기 때문에 지방 공기가 좋아야 된대요 특히 강아지 털 같은게
날리면 안 된대요 공기 그래 저는 집에 가면요 마스크를 써요 솔직히 말하는데 우리 아들이 뭐라고 했지
알아요 엄마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 집에서 파향은 없어 딱 저한테 결론 내려서 그니까 엄마가 건강이 안
좋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에서 파향은 없다 그러면 결론은 뭐냐 내가
돈을 벌어서 독립을 하면 내가 강아지 갖고 나가겠다 이거예요 엄마 죽어도 우리 집에서 파향은 없어 제가 그 말
딱 할 때 어 그냥 아 얘는 어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있구나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나는 아들이 물론 스포츠 쪽 공부를 하지만 강아지를
연습시키는 그런 직업 해서도 좋고 좋아니까 아무거나 해 봐 그러면 우리
아들이 그런 얘기 하면 그런 얘기해요 아 우리 엄마 못 친데 우리 엄마는 마인드가 젊었어 그니까 자기하고 뜻이
맞으면 젊었대요 그래서 뜻이 안 맞으면 엄만 꼰대야 이렇게 얘기하거든 그러니까 저는 그런 대화를 할 때
내가 북한에 있었다면이 아이하고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런 대화를 안 했겠죠 돈 벌어 들려와라 엄마를
도와줘라 지금쯤 아마 군대에 나가서 러시아에 파빙됐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그런 걸 생각하니까 점점 해마다
느껴지는게 대한민국에 온게 천만 번을 잘했구나 그게 해마다 높아가는 거
같아요 태해보다는 그 아들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성장하는 데서 대한민국에
잘 왔다는 그 성취감이 더 이렇게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러시아에 파병된 군인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인데 김정은은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국민을 왜 전쟁터에
보낸 걸까요 그걸 퍼장하기 위한 프레임이 필요한 거죠 포레임을
쉬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런 거예요 형제의 국가 러시아가 제국주의에
침략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형제의 국가로서 강건너 불보듯하면 안
된다 왜냐면이 러시아의 불행이 곧 우리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왜 그런 전제 조건들을 제시해 왜 미국과
남두선 계도당들 한미 연합훈련 호시탄 우리 국가를 노린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침략에서 우리는 피를 나는 전으로서 무조건
도와줘야 된다 이런 투레임을 씌우기 때문에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생명 전중 이런 거하고는 영 그 모든 것들을 다 그 프레임 안에 가두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 저는 항상 그래요 우리 아들한테 너는 북한에
지금 있었으면 러시아에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런 소중한 그러니까 그런 거예요 러시아에 가서 목숨을
바치는 것도 조국의 안과 인민의 행복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그런
정치적인 프레임을 씌우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그게 커버를 세울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예 이제 막무관로
내보낸게 아니라 처음에는 모르고 나갔지만 이제 이제부터 이제 정치적인 프레임을 계속 씌우는 거죠 그러면 어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나라 같으라면 큰일 나죠 수령 탄핵하죠 예 근데
북한은 그런 제도가 아니잖아요 뭐 그런 것도 있을 수 없고 설령이 사람들이 이제 러시아 전쟁이 끝나
가지고 북한으로 들어왔다고 해도 그 입을 다 막진 못해요.이 사람들이 이제
26살짜리도 나오고 20살짜리도 나는데 28 30이면 제대되잖아요 나가요 근데 그러면 북한 주민들
속에서 일시적인 도면은 일겠죠 근데 그거는요 이게 우리가 양동이 안에
물이 절렁거리 맞자잖아요 바다하고 다르잖아요 그 안에서 출렁일 끌고지
그 양동이가 넘어지진 않아요 왜 북한은 독재라는 큰 도구가 있잖아요
주민들 속에서 그게 소문이 안 퍼질 수가 없어요.이 사람들이 눈과 입을
어떻게 막아요 나가서 다 얘기하죠 뭐 시간이 지나도 그렇지만 주민들 속에서
이렇게 웅성웅성거리지만 그런 것들이 정부를 뒤집거나 수령에 대한 그런
걸로 이어질 가능성은 100% 없는 거죠 그니까 우리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거죠 만약 기자님이 탈북하지 않았고 아들이 러시아에 파병을 갔다면
어떠셨을 것 같나요 억울했겠죠 그리고 원통했겠죠 원통에서 많이 울었을 것
같아요 통곡 하지만 알고 있어요 정답을.이 이 나라에서 살면서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거 내가 우는 것과
원통하고 분통한 것밖에 없다는 거 왜냐면 그것도요 계속 울고 계속
원통해 하면 또 주변에서 단속해요 그만 표현하라고 예 저국을 위해서 그렇게 됐는데 그러니까 그냥 운이
나빴구나 그냥 가슴을 치면서 죽을 때까지 자식을 가슴에 묻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겠죠 네 그 나라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제 자체도
북한에 있었어도 내 아들이 그렇게 됐어도 나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저는 이미 알고 있어요 만약
러시아 파병 북한군들이 북한으로 송환된다면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언론이나 대중적인 걸로 해서 뭔가 문제가 제기됐을 때 눈에 띄는
움직임이 있어요 한국 같은 경우에는 뭐가 잘못했다 어떤 기업이 잘못했다 이것을 이제 막 유수가 나와야
사람들이 그 회사걸 불매 운동하고 이렇지만 북한은요 지금도 퍼질 지역은
퍼졌어요 왜냐면 이게 북한서도 이제 탈북민들하고 이제
통화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고 그리고 또 이제 중국이나 이런 간역 매체를
왜냐면 북한 국경 지역에는 중국 채널이 잡혀요 예 알고 있을 사람은
국경 지역이나 이런 사람들은 알고 있어요 근데 북한 사람들에는 어떤 경우가 있냐면요
생존의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이 내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그냥 아유 어떡하겠니 이걸로 끝나요 내 자식이면 우와 어이고 막 가슴
치고 그니까 이게 그런 거예요 우리는요 사실 오늘 나가서 뭐 강화문 앞에가 시를 한 데서 내가 다음 날에
먹을 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나라의 경제 정치 이런
문제에 누구나 관심을 갖고 하는 거야 북한은 그렇지 않아요 절대 다수의 인민들이 살아요 오늘 보는 내일 사는
사람들이에요.이 사람들한테 이런 소문이 들어갔다 해도 순간에 야 진짜
너무하다 이렇게 되는 거지 막 그런 것들이 이제 큰 이제 사람들의
반항이나 분노로 이렇게 커 가지고 그걸 막 합법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 지금도 이제
어지간한 데서 소문이 났고 이제 전쟁이 끝나서 북한 군인들이 들어가면 아마 북한 당국의 입장에서는 그
전사자들을 다 숨기지 못하겠죠 당적인 어떤 큰 대회를 열어 가지고 그 전에
아마 정치적인 그런 감성 정치 같은 걸 해 가지고 러시아 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 거예요 거기서 이제 막 러시아 군인들 우리 군인들이 희생적으로 싸우는 영상을 만들어서 자
이렇게 해 가지고 승리로 끝났다 이거는 우리게 뭐 러시아와 조선이
합작해서 만들어 낸 승리다 이렇게 해가지고 해 가지고 뭐 그런 거예요 피를 흘리지 않는 어 자유는 없다
그니까 우리가 피로서 찾은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 주권이다 이래 가지고 아마 많이 만들어서 사람들을
1차원적으로 주민들한테 거부감을 없앤 다음에 아마 큰 대회를 열어서 그
전사자 가족들한테 표창도 주고 훈장도 주고 선물도 주고 천년색 TV도 주고 할 거예요 그렇게 해 가지고 이렇게
또 잠잠하게 만들겠죠 근데 사실은요 만 명이 사망했다 4천명이 사망했다
그게 이렇게 전체적인데 봤을 때 북한 군물에게 봤을 때 세발에 핀 거예요 그리고 북한 주민들 자체도 먹는게
힘들기 때문에 내 자식이 그렇게 안 됐기 때문에 그냥 아이고 어찌겠냐 이런 걸로 만다는 거예요 그니까 이게
아 정말 저는 남한 사람들한테 정말 남한 사람들은 그러잖아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이해를 하실지 오해를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나라에서 거의 40년을 살았잖아요 생존이라는게
죽음보다 두려워요 저는요 제가 아파서 돈 벌리 못 할 때 집안에 있는 두 자식을 볼
때 겁이 났어요 내가 돈을 못 벌면 저 아이들은 굶어 죽겠구나 이런
것들을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매일매일 체험하면서 산단 말이에요 그 주민들 앞에 남의 자식이 다른 나라 전쟁에가
죽었는데 야 우리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이렇게 나오겠어요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남한과 북한의 그런
상황들 이런 것들을 봤을 때 거기다가 또 북한은 강제적인 프레임을 만들고
정치사 교향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큰 센시에이션은 아니라는 거죠 그니까 그 내부에서
주민들이 으그 하다가 그냥 참자 드는 거예요 뭐 어떡하겠어요 주민들이 불만을 해 가지고 죽었던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걸로 해내 가지고 또 정치적으로 또 감옥에 들어갈 일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주민들
자체도 그냥 분통하지만 그냥 참는 거죠 근데 참는 거밖에 그 나라에선 방법이 없어요 왜 방법은 오직
하나예요 탈북이에요 근데 아직 못 하잖아요 이젠 중국까지 막혔기 때문에 이제 북한 주민들 자체도 그거예요
그냥 내가이 나라에서 다른데도 뭐 하늘로도 못 가고 땅으로도 못 갈 바에는 아 그냥 어떻게든 살아남자
장사를 해서 땅을 두져서 떼기밭을 해서 이러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의 일차적인 신경이 생업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러시아 전쟁 이런 것들은 그렇게 탑쓰 안에 들어가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냥 그때그때마다 또 북한 당국이 북한 주민들의 그런 겨강된
심정을 누를 수 있는 정치 선전 사업을 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그냥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큰 파도가
아니라 그냥 출롱이다가 그냥 잠잠해질 거예요 근데 항상 깃소리 남겠죠
이분이 죽었다더라 어쨌다더라 막 이런 그냥 그냥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북한 정권 입장에서는 국민이
못 먹고 못 사는게 더 유리할까요 그렇죠 그 여러 탈북민들이나 그런 얘기 하잖아요 배가 부르면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하잖아요 그니까 저 같은 경우에도 생존에 그런 압박감이 없으니까 그리움 정서적인 허탈감이
있지 않아요 근데 똑같은 거예요 사람들이 이제 다 이제 남한 사람들 좀 경제적으로 풀리고 이러면 아
그러면 우리 세상 아닌 바깥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새것을 지향해요 그러니까
내가 배가 부르면 그렇잖아요 놀러갈까 근데 이제 북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배가 고프니까 놀러 가고 우리 수령님이 뭘 잘못하고 이거보다는 당장
내 배 내 자식들을 굶기지 않는게 일선무기 때문에 더 다른 것을 보고 싶어도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북한에서 이제 그 뭐 북한 전문 매체들 소식 보면 대남 뭐 남한
드라마를 밭에서 청소년들을 처벌하고 근데 실제로 청소년들을 처벌하는 거 북한 매체가 통 공개했어요 그 불순
녹화물을 봤다고 그니까 그런 걸 보는 아이들은 대체 보면 이제 물론 두
가지로 갈릴 수 있어요 꼭 잘 살아서 보는 것 아니지만 한창 젊은 이팔 청춘이라고 하잖아요 새것에 민감한
트렌드에 민감한 아이들은 조금 남한 드라마를 보고 싶어서 벗고 또 어떤 애들은 돈이 많으니까 그런 CD 같은
거 돈 주고 살 수가 있기 때문에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애초에 진문계죠 그니까 북한엔 그런
말이 있어요 잡초는 뿌리채로 뽑아야 된다 북한에서 말하는 잡초가 바로 남만을 동경하고 북한에서 안착을 안
된 사람들을 잡초라고 해.이 사람들을 뿌리차로 뽑아야 된다고 해요 뿌리차를 안 뽑으면 또 사소화 올라난다고
그러니까 그 정도로 이제 북한 주민들한테 배불리 내겨놓고 윤택하게 하게 되면 다른 세상을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때문에 북한당국에서는 차라리 고생하고 이런 걸 유지하면서도
우리가 이렇게 헐벗고 고생하는게 수령님 잘못이 아니라 미국의 대북 제재와 남조선이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서 우리는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서 이런다 이런 것들을 다큐멘테리를 통해서 보여주고 김일성이 현재지도
영상을 보여주면서 봐라 수령님은 지방을 다니시면서 인민들의 행복을 위해 이렇게 불철 주야를 하신다
이렇게 하니까 그게 세뇌라는 게요 마약이에요 무서워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 북한에서 아무리 이제 막 정권에 대해서 막 욕을 하던 사람들도 김정은하고 직접 마주치면 울어요
왜냐면 오랫동안 정치적인 세뇌를 받아왔고 TV에서 신에 대해서 우리가
뵙기 때문에 그 사람을 앞에서 보면 온단 말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북한 당국이 가장 노리는게 북한
주민들의 윤택한 생활이 아니라 어떻게든 고생하게함으로써이 사람들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당에만 눈을 돌리게끔 할 수 있는 1년의 정치 더고 정치 방식일 수도 있어요 근데
이런 생각을 북한에선 한 번도 못 해 왔어요 그리고 사실은 다른 생각도
하긴 했었어요 왜냐 남만 드라마를 보니까 그러면서도 그래도 어 이렇게까지 판단을 못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약간 그거잖아요 우리가 어떤 여기서 말하면 주축이라고 하죠 그러니까 야이 이렇게 하는게 제대로
된 정치 아닌 거 같은데 아니 다가 아니라 아닌 거 같은데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것들을 방황을 했는데
한국에 와서 세상 밖에서 북한을 보니까 딱 정점을 찍는 거예요 잘못된
거다 우리 북한에 했을 땐 야 이게 잘못된게 아니야 물음표 여기서는 느낌표를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신사임당
구독자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저는 사실 심사인당이 되게 유명한 채널인 줄
몰랐어요 저는 제가 나온 영상들을 잘 안 봐요 그니까 이게 그런게 있어요 말할 때는 모르겠는데 영상에서 보면
내 목소리도 싫고 왜 저렇게 인상을 찍으렸지 그런 것도 있고 저는 그냥
쑥스러워서 잘 못 보는데 어 며칠 전에 제가 아는 한국 아나운서님이 저랑 라디오를 하는데 어 자기
신사임장 나갔더라 이러는 거예요 몇 번 나갔는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왜냐면 워낙 여기 오면 비리님들도
되게 너무 젊고 나 생각했는데 그냥 우리 일반 길에서 벌 수 있는 MG
세대들 그냥 항상 때가방 매고 그냥 그렇게 다닐 수 있는 그런 분들이어서 되게 권의적이지 않아 가지고 그랬는데
야 곧 되게 유명한 채널이야 이러는 거예요 어 진짜요 난 그냥 출연해 달래서 출연해 줬는데 어 그랬더니
어거 엄청 유명하고 많이 봐 나도 곧 구독자라고 본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아 그래요 그래서 내가 아
내가 사실은 그냥 유튜브 채널이고 이제 내가 그냥 북한에 대해서 좀 내 생각을 제대로 전달해야 되겠군내만
신경을 쓰고이 채널이 이렇게 대단한 채널인지를 제가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이제 좀 더 뭐 저는 그런 거예요 대단하다 이런 것들은 좀 진실성이
있을 때 그 대단하다는 말에 조금 플러스가 되는 거 같다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뭐 유명한 사람들을 초청을
해 가지고 대단한게 아니라 북한뿐 아니라 이게 채널이 여러 다양한 분야잖아요 그니까 북한뿐 아니라 이런
데서도 이제 우리가 말을 이렇게 해도 이제이 사람들이 이제 편집을 하고 이런 분들이 우리 국민들한테 제대로
견뎌질 수 있는 팩트를 편집을 잘하는게 되게 문제되잖아요 되게 기본이잖아요 그런 것들 너무 잘해
주시고 저도 출연자로서 이렇게 대단한 채널을 아직 얼마 안 됐으니까 우리
구독자분들도 주변에 이런 채널이 있다는 걸 예 좀 많이 알려 주시고 예 많이 구독해 주시고 좋아요 거기다
엄지 손가락까지 딱 눌러 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예 시청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입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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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희님의 유튜브 '주희유미TV' 바로가기:
[박주희 기자]
KBS 라디오 ‘최근북한은' 진행자
통일부 남북하나재단 취재기자
북한 공연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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