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룡풀영상] 인천공항은 아무것도 아니죠. 한국에 금방도착해 울창한 산을 보는 순간 얼이나간 국군 포로 가족들.....
강은정TV
273K subscribers
Subscribed
5.5K
Share
Download
Clip
Save
127,363 views Oct 16, 2024 #강은정 #강사 #가수
간증, 강의, 공연, 강은정TV 출연 문의:
kang22tv@gmail.com
#강은정#한국#가족#가수#강사#MC
Transcript
Follow along using the transcript.
Show transcript
강은정TV
273K subscribers
Videos
About
강은정의 인스타그램
247 Comments
Sejin Lifeforce 生命
Add a comment...
Pinned by @TV-kl6yv
@TV-kl6yv
6 months ago
여러분 오늘도 영상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군포로 후손인 김정룡님의 풀영상을 부탁하셔서 올려드렸습니다.
꿀문의를 많이 해주시네요. 그래서 다시 올려드렸습니다.
제가 현장을 방문하고 먹어봤는데 진짜 맛있고 자부심 뿜뿜입니다.
꿀이 필요하시면 대한민국에서 열심시 사시는 김정룡 이애정 부부를 응원해주세요.
백세양반 꿀 010 8549 7524
아카시아 2.4키로 6만
잡화 2.4키로 6만
밤꿀2.4키로 6만
스틱꿀 50개 한개당15그람
한박스 3만5천
로얄제리 1병당 50그람
한박스 10병 30만
프로 폴리스 병당 50씨씨
병당6만
58
Reply
3 replies
@신-u3p
6 months ago
국군포로의 후손으로 이젠 영광스럽게 잘 사십시오 훌륭하신 아버님과 그의 이들이십니다 !
이런 진실한 이야기 전해준 똑순이 강은정님도 고맙습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39
Reply
@최완두-q8w
2 months ago
우리나라를 지켜주신 아버님 덕분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다ㅠ 김정룡님 우리나라에서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12
Reply
@ssbae548
6 months ago
70 드신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면서 고향 땅 한발짝이라도 밟아보고 싶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했을 때 나도 그냥 눈물 났다.
64
Reply
@윤은호산을닮은사람
6 months ago
국군포로 가족으로 참 고생 많이 하셨는데 대한민국에서 늘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저는 대구 팔공산에서 양봉 하는데 같이 양봉업을 하니 더 반갑네요~~ㅎ
18
Reply
@월계수다-d6h
6 months ago
선생님 아버님은 영웅입니다.
덕분에 좋은 나라에서 살고있어요
감사합니다.
42
Reply
1 reply
@안성대-b6s
6 months ago
아버님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드셨ㅇ습니다.
아버지 바램을 잊지마시고
자유 대한민국에서 행복한
삶 영위하시길 바랍니다
40
Reply
@김혜민-l6t
6 months ago
넘 감동,감격한 스토리
라서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만 흐릅니다~
북한에서 고생하신
대한의 영웅이신 후손
께서 고통의 땅 에서
탈출하신걸 이제야
알았어요~
직접 뵙진 못하지만
멀리서나마 존경을
감사를 보냅니다~
양봉사업도 더 번창
하시고 건강 보존
하셔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어여쁜 은정씨!
김정룡씨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4
Reply
@현-r5o6g
6 months ago
이렇게 말씀을 잘하시는데 북한에서 항상 억눌려 살아왔던 마음을 이제야 원 없이 말하니 듣는 내용은 가슴 아프지만 아주 시원합니다.
31
Reply
@jaeseoke461
6 months ago
강은정tv 많이 봤지만 댓글 처음 씁니다. 김정룡님 부친께 감사드립니다. 김장룡님도 대한민국에서 행복시길 바랍니다. 많이 울었습니다
30
Reply
@미스타사미
6 months ago
나라를 지키신 순국 용사님의 아드님 부디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47
Reply
@여우비-x4p
6 months ago
아버님 사연이 너무 안타깝네요ㅜㅜ 한국에계셨으면 유공자 대우받고 달사셨을텐데,, ㅜㅜ 아버님 몪까지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그리고 나라를 위해 싸워주신 아버님 감사합니다
42
Reply
@전용현-s9x
6 months ago
돌아가신 어르신게 존경을 표 합니다 행복하세요
31
Reply
@gilsangshin5347
5 months ago
얘기를 듣다 보니까 김정룡 아버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셨네요. 앞으로는 아버님의 몫 까지 함께 행복하게 사시길 바랍니다.
13
Reply
@tthanksman
6 months ago
잘산다는게? 돈 보다도 ..조금이라도 나눌고 배풀 수 있는 여유? 여유가 있는게 잘사는거다 라는 말에 공감이 됩니다.
30
Reply
@앞산-j5c
5 months ago
국군포로 후손이신 님의 생활에 광명만 깃들길 기원 합니다
25
Reply
@한식이-o7l
6 months ago
김정룡님 감사합니다 그님의아버님이계셰서 지금의우리나라가있습니다
48
Reply
@saepit91ify
6 months ago
김정룡님! 아버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국군 포로(카투사)로 잡히셔서 갖은 고생하시다가 그렇게 그리던 고향을 못 가시고 돌아가셨다니 마음이 아프네요. 아드님이 아버님 얘기를 듣게 되고 우리에게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님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8
Reply
@신동-l5z
5 months ago
충남이 아니고
충북 괴산입니다.
우연히 들었는데
국군 포로 가족이군요.
나라 지킨 애국자 집안인데
자부심 가져도 될거 같습니다.
12
Reply
@최현숙-e3e
6 months ago
너무나 고생하고도
재미있는 예기 들
국군포로님들에 고초가
너무 컸다는게 안타깝네요
지금은 공기좋은데서 양봉을 하시면서
행복하셨으면 좋겠읍니다
조카분까지 데려오신
작은아버지께 감사하네요
모른척안하시고요
건강하세요
14
Reply
Transcript
[음악]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아버지를
모시고 맹산 같은 산속을 왔습니다 아무튼 인사해 주세요 뭐 무슨
인사합니다 누구한테 구독자분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구독자분들 이렇게 또 배워서
반갑습니다네 오늘 여기이 무슨 충북도가 산 괴산 어 괴산에 우리
북한 분이 자연인으로 산다고 해서 여기 한번 저
왔습니다 어떻게 사는지 한번 볼까요 한번 뭐 벌도 잘한다
하신다는데 그것도 한번 좀 좀 벌 겸 이렇게 공기도 좋은 공기도
맞을겸 이거 산촌에 좀 왔습니다 기가 막히지요 와 진짜로 여기 완전히
시이네 산이 아버지 응 맹산 맹산 요런 더로 포장이
없지요 맹산 응 맹산 후은 이렇지 않은데 저 용 원이라데 가면은 그지
이제 어 안녕하세요네 안녕하세요 아유 안녕하세요 와니다 어서 오세요네
아이고 멋기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아유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다 오셨어요 아유 어 뭔 길이 깊은 산수 어떻게 다 타아 오셨어요 아고 뭐 대한민국 네비만
찍으니까 다 안내로 해주더라고요 뭐 근데 이거 다 벌이에요네 이거 다 벌이에요 먼길 오시느라 진짜
힘들겠는데 아유 탈북 했는데요 뭐 그렇죠 와 너무 반갑습니다 본인 소개
좀 해 주세요네 안녕하세요 춘천부터 계산해서 양봉 하고 있는 우리 양봉
부부입니다 아유는 예정이라 하고요 예 김정명 오
김정명 선생님 네 한국에 오신지 얼마나 어 저는 11년이 아 11년네
이거 양봉 하느라 우리 시행 차고 많이 엄청 많이 겪었거든요 근데 어제는 우리 아저씨가 그거간에 이거
양봉을 하시느라 엄청 고생했거든요 저도 같이 저도 역시 고생도 하고
근데 기본은 우리 아씨가 더 고생했죠 아 예 오늘 그 좀 얘기들 많이 좀 들려줬으면 좋겠어요 근데 여기 너무
지금 아름다운데 오 이거 다 버리잖아요 아까 그 볼 따는 거 보여
주신다고 아 이전 여기 오셔서 이전 완전히 기술자가 되셨네 예 아 그래이
벌통 지금 있잖아요 오늘 아침까지 밤꿀 뜨고 그다음 지금 내년 준비를
해서 벌통이기 이게 한 장 이렇게 2층짜리 2층 짜리는 내년 벌을 위해서 내네 꿀 두기 위해서 이거
지금 벌 관리하는 거거든요 분봉 치해 가지고 그러니까 지금 이층에 있는 거 그니까 이렇게
가거든요 사람이 집안에 식구가 많으면 세간 나가잖아요 그거가 갔거든요
이렇게 다 세 간 내 왔거든요 그 이것도 이제 밤꿀 뜨면 세관 내어서 금가 시키네네 보겠어요 예 예 오
신기하다 우리 이거 뜬 뜬 거거든요 오 아침 뜬 거거든요 저기 뒤에게 지금 안
떴거나 벌이 달라 붙거든요 그리고 이거 쑥 갔다가 쑥 갔다가 이까
가셔도 돼요 운영하기 때문에 괜찮아요 가까이 가도 돼요 지금 이게 다 뿌리에요 자
이게 다 지금 반이에요 반이 반인데 지금 숙성돼 가지고 애들이 껍데기를
웠어 엄청 맛있어요 엄머나 이거 먹어보고 싶다 이따가 좀 있다가 드세
보세요 엄청 맛있거든요 와 우리가 이렇게 세가 내느라고 지금 왕대를 했거든요 이게 여왕이에요 예 요왕
이게 이게 안에 다 왕이 있거든요 이거를 하나씩 따 가지고 요런 데다가 이렇게 옮겨 줘야 되거든요 아요 통
하나예요 고 왕을 미적으로 만 이게 이게 다 꿀에 이거 보세요 이거 이거
꿀이든 이거 깜 참 예 꿀 껄떡 찼어 이거 득 탔거든요 지금 숙성대가
애들이 까데기 시한 거예요 예 아이 이거는 예 아 그 하얀 거는거 숙성이
돼서 예 숙성 돼서 얘들이 어서는 저장해서 자기네 자기네 먹을 거 그니까 사람으로 말하면 집안에 곡식을
독식이 많으면 저장하는 것처럼 그거거든요 이게 다 몇 통이나 되는
거예요 이게 거의 100통 넘어 대요 오네 그전에는 거의 200 300통
했거든요 근데 저는 진짜 자연산꿀 있네요네 진짜 이건 진짜 자연사한 꿀이든 뭐 설탕 1.00% 안 들어간
진짜 되 자기 꿀이든 그게 오늘 아침에 다 저기 반꿀 있어요 한번 드셔 보세요 어 진짜요 어느게 반꿀
그래요 이거 저 저게 지금 밤꿀이 그든 오늘 아침 다거 저거 아 이거 한번 수학 안데 이렇게 많이
나와요 그 작게 나온 거야 적게 나온 거 쫓게 나온 거예요 다번 할 때
드을 뜨거든요 거요 저기다 저기 더 저기다 예 저기
드러이 330km 나가거든요 한 개 드러이 우와 저기 원래 물 물로
들어가면 물로 들어가면 200kg고 꿀하고 로스가 틀리거든요 꿀은 물보다 무거우니까 이게 이거 한 말통에 이게
껄떡 채면 3 33kg 나가요 아 물은 물 채우면 20kg 나가
20kg 아 엄청 맛있어요 꿀이 그냥 넣을게요 잠깐만 잠깐만 와나 대박 그
컵 다 아 그렇게 하게 되면은 아 이게 수도 물처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우와 들 들 됐어 됐어 렇게
해서 됐어 우와 우와 자 이거 드셔보세요 오마이갓 엄청 맛있어요
아버지 아지 잘라 진짜 이거 있잖아요 젤리 만 뒤끝이 있잖아요 그 이렇게
장미 향 같은게 나 더세 봐요 우리도 오 아침 일하면서 이거 한 컵 먹거든요 아 저기 내려가서 내가 뭐
좋은 꿀 밑에 내려가 좋은 거 있어요 갑시다 맛있네 맛있어 맛있는 꿀
드릴게 이렇게 전기 하면 자동으로 돌아가면서 여기로 꿀이 내려 그렇지 어 이거 꿀 뽑는 기계 대한민국은
이거 꿀 뜨는 것도 이거 기계로 하네 이거 이거 무슨 수 다은 것도으로
수동으로 돌리자 려야 [박수] 돼면서 힘들잖아요데 세개 네게 아
힘들죠 예 근데 여기는 대한민국 얼마나 좋아요 다 자동이든 전기만 있으면 모든게 다 되 근데 여기 전기
들어 전기 들어왔 이거 그 사람이 손이 많이 안 가요 아 그런데 이거
볼 하는 거 이동 안 하세요 아 저는 이동 안 해요음이 자리에서네 저희는 이동 안
해요 여기가 완전히 요새지 그래서 이게 꿀 자원이 좀 있어요 그리고 또
우리 아저씨가 벌관리 하고 또 벌이 이게 병해충이 없거든요 벌이 엄청
양호해요 그러니까 벌이 선 달인이라 할 수 벌 관리가 힘들더라는데 북한에서 봤는데 맞아요 북한에서는 벌
시작하게 되면 범에 저 황해도로 벌통 다 씻고 쭉 남쪽으로 내려가서 꽃
피는 순서에 따라서 쫙 올라온다 말이야 여기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여기도 있어예 있어요 아
북한은 전면쪽으로 그렇게요 계속 무슨 뭐이 무슨 꽃 그다음에 아까시아 꽃 싸리꽃
피나무 이렇게 쫙 하면서 그 벌을 치더라고 벌을고 여기 여기도 저자
남쪽에 시작해서 저 DMG까지 가시는 분들이 계세요 순차적으로 북한에
북쪽이 먼저 추워지 잖아요 그러면 또 남쪽에는 늦게 추 하잖아요 그러면서
또 내려오면서 또 하더라고음 그렇게 하는 거 봐 야 근데 대단하시다 그 북한에서도 벌 좀
하셨어요네 그 에서 뭐 많이 한 건 아데 집 앞에 뭐게 뭐 한는데 어 집
앞에 개인으로 이거 북한에서 내 친구가 보려했는데 이거 양봉을 했단 말이야
그 북한에서 양봉하는 사람들은 괜찮아요 자유도 좀 있고 좀 생활도
괜찮아 쿨해서 팔아서 돈수 좀 쓰고 그리고 이거 북한에서 꿀 버 사람들은
자기도 조금 하지만 간부한테 바치는 그래요 근데 이제
여기 와서 뭐 간부들 테 쩔 길 일 없죠 아 예 아 여기 와서야 누 달란 소리 안 하죠이 누가 저희가 오히려
봉사하지 어 그래요 봉사 어디로 하는데이 노인정이 그다음에 다문화 가족들이랑 그다음에
우리처럼 있잖아요 이좀 힘겹게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한테 이렇게 몸이
아픈 분들 몸이 아픈 분들 노약자들 이런데이 기본 노약자들 주거든요 돌하
한 병씩 1km씩 드셔 보시라고 약구 이니까 아 대한민국이 우리 올 때도
진짜 대한민국 국민들 세금으로 우리 왔잖아요 그 그거 비하면 우리가 얼마나 고마워요 그 그걸 우리가 다시
이렇게 보답해 줘야지 세상에 북한에는이 벌꿀이 당기소
관리장 그다음에 보 온다 그다음에 자우 반장 이런 사람들한테 공 짜르고
봉사해 그러나이 대한민국은 간부한테 봉사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와서
탈북민들이 내려와서서 벌 해서 어 저저저 어려운
분들한테 봉사를 하다나 직접이 누가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이 얼마나 좋은 일이야 그러게요 그 그거 꿀
한번 앉았다가 큰일 큰일 나는 거예요 와 그
구박하는게 앞이 들어죠 그다음부터 수집 잡느라고 설 있잖아요 뭐 어떻다
뭐 어떻다 수집 잡는게 그 진짜 스트레스 받거든요 야 이것도 굴 안 써서 그러나 너희들한테 고이지 않아서
그러나 그런 압축이 들어온다는게 그것만 싹 진짜 스트레스가 없죠 그래
할 수 없이 뭐 울며 겨자 먹기를 할 수 없이 줘야죠 그래야지 그다음에 또 압축이 안 들어오고 북에서 보면요이
돌도 이거 풍년이 들 때가 있고 흉년이 들 때가 있어요 그런데 아
이거 북한에서 흉년이 들면은 자기가 못 먹고 돈 일전 먹어도 간부들한테
우선 주야 돼 그래야 압박이 안 들어 그리고 또 조금 가까운 친구한테
꿀을 한 몇 병이라도 앉 줬다가 니 또 친구들 또 좀 저좀 자기 좀
안줬다고 꿀이 보약이죠 북한에서 완전히 보약이다 진짜 보야지 예 진짜
꿀 두 세 본 분들이 많지 않을 건데 북한에서 사는 는요 이거 돈 있어도
이거 꿀 하기가 힘들어 꿀이 없어 원천이 그렇죠 이게 나 그서 북한에서
나 꿀많이 먹 말하면 내가 불 채서 알거든 진짜
꿀이 귀하거든요 그렇죠 다 사탕가루 섞고 가고 갔자 없으니까 더 한 거 아니 설탕
떠야 네들 한 병씩 줘야 되잖아 안 주면 아 나중에 죽일 거 같고 그러니까 그런 거도 만들어서 하나씩
주는 거예 그니까 진작 불이 좀 귀해요 그 근데 여기는이 좋은데는
어떻게 찾아서 오신 거예요 이거 이정 과 같아 자리 하나 찾는게이 남한
사람들도 이런 자리 찾는다는게 진짜 걸지 않거든요 금방 나왔을 때 뭐 차가 있어요 뭐 있어요 그냥 어쨌든간
우리 발로 뗐지 발로 떼서 그 입으로 물어보고 물어보고 가고 여기로 들어왔거든요 그러니까 여게 여기 이제
가만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벌이 이동 하하고 한다는 거는 봄부터가 가을까지
사실상 꽃이 다 있던 아니요 그렇지 않 그렇지 않 여기는 봄 한
틀리거든요 여기 이 지금 마지막 불거든 5월 달에 시작해서 6월 한
20일 정도면 끝나는 거예 그러면 뭐래 그 나머지는 벌 갈라서 벌 통수가 이게 늘어나는 거 관리하죠
내년도 불 벌 관리하 이제부터 설탕 불이 나오는 거예 이거 두고 난
다음에 그리고 이제부터 설탕을 주 설탕 먹개 하 우리가 꿀 뽑았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우리를
도와줬으면 우리가 또 네를 도와줘야 상부 상조 어지 않게 월동을 나라고
이제 이제부터 이제부터 그거 시작하는 거 월동 준비부터 시작해서 벌 얘네가
그 보한 거를 우리가 다 취했으니까 이제부터는 설탕서 겨울 겨울날 양식을
마련해 주는 거 말해줘야음 그걸 기르고 있거든요 아 여기 진짜
자연이네네 이게 우리 생활 터전이 금자리 엄머나 잠깐만요 야
꿀이 꿀 꿀을 내리는게 엄 이게 물처럼 내
네네 이런게 있어야지이 말통으로 썼다면 좀 불편하거든요 예 생꿀 생꿀
생 좀 이제 그 이렇게 까데기 밝아서 저리 체밀기 내린 거 사실은 저
공장에 가져가서 수분을 뽑아 갖고 와야 되거든데이 이거는 공장 안 가지고가고
수분 안 뽑 다 뽑 벌들이 자기 날개 짓수 해서 수분 날려 보내서 그다음에
수정되면 아까처럼 그 깍대기 씌우거나 저도 한번
먹어봐요네 제가 평생에 태어나를 이렇게 커피 받지 받아본
적은 없는 거 같아요 먹어볼게요 그냥 드 그거
괜찮을거거나 그렇지 [음악] 않 진짜 맛있다 대박이야 대박리
취하 대박이에요 향수 탄 거 아니죠 아니에요 저희는 절대 그런 거
없어요 보다 맛을 더 좋은 거 같아네 당연히 당연히 그렇죠 명품이네 명품꿀
완전히 부드럽지 않아요 아 이제 밤 꾸니 조금 좀 쓴 맛 맛이도 좋네
이거 뭐예요 꿀 꿀 티 아 이거 스틱이에요 이게 커피처럼
이렇게 똑똑 이렇게 잘라 먹는 거 이거 커피처럼 이렇게 여기 이렇게 쪽 뜯으면 이렇게 쪽 빨아 먹으면
되거든요 이거 간편하게 요거 주머니 싼게 그
또 꿀 또 이렇게 거 한번 드세 보세요이이이 꿀은 더 맛있어요 그요 예 한번 드세 보세요 이거 생산하는
난 이거를 뭐 병이라 담아가지고 다니면서 먹 줄 알았요 또 이렇게 요렇게
간편하게 그니까 이게이야 우리 아버지 젊어 지시겠다는 꿀 진짜
[음악]
[박수] [음악]
아 다 아니 여기 4 6시에 왔거든요 아
근데 건강이 엄청 좋아지실 것 같아요 아 여기야 건강 아이 정말 자신 있는데
그죠 지내 살아봐야 세상 못 없다니까요 여기 오면 할 일이 있거든
예 그래서 시골생활이 참 재미있어 그지 사모님 그래도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막 도시에 살고 싶고 좀 편하게 살고 싶고 이런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 생각이 있었죠 왜
없었겠어요 너무나도 북한에서 힘들게 살았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우선 여기 오니까음 뭐부터 생각나는가 부모들
북한에 부기 두고온 부모 동생들 때문에 아 그렇게 쉬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또 마침 또 누가 소개를 해가지고 우리 아저씨를 만났거든요 아 여기 와서 만나신
거예요네 여기 와서 만났거든요 여기 와서 만나가지고 하루는 저렇게 마트에 갔거든요 마트에
갔는데 우리 아저씨가 설탕하고 꿀하고 이렇게 대비하던 야 하자 그러더라고
그래서 나는 뭐 북에서 뭐 군생활 봉이도 모르거든요 벌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러는데 우리 아지가 자기 양봉 했대 그래서 어 그럼 하자고
그렇게 해서 들어게 이렇게 시골을 했어요 시골 되고 그다음에 양봉을 시작했는데 북한 양봉하기 틀리더라고요
그러니까 엄청 당황해 아하는 거예요 그래서이 마침 그때 계산에 양봉
대학이라는게 섰어요 그서 있어네 있었어요 화도 있잖아요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니까 라는게 자기만이 노예요 그니까 남이 져서 되는게
아니더라고요 진짜 그이 양봉을 하면서 행차가 우리 엄청 많이 겪어요 한번은
볼 우리 한번 200통 다 죽 였거든요 여기서 말고 저자는 다른 데서 한번 한 적 있어요 근데 거기는
이렇게이 마을하고 좀거든요 마을하고 같이는데 그 양 볼장 옆에 옥수수
봤지 조금 할머니가 옥수수를 좀 길렀어요 옥수수를
그 옥수수에 그 화분이 잖아요 거리 거리 화분 피데 할머니가 거기 볼이
매달리니까 시끄럽다고 농약을 쳤거든요 다하니 벌리 200통이 다 죽은
거요 거기가 팔면 거의 7천만 원 넘어 대요 야 그거 하루 아침에
7천만 원 다 이런 것 같잖아요 너무 속상해서 했잖아요 뭐 어떻게 할고
할머니는 모르고거든요 알면 안 치지 그래 뭐 기다고 할머니 변상하는
소리도 못 하겠지 걔 그때 가서 말도 못 하고 그냥
쏘가리를 앓고 있다가 할 수 없이 그랬거든요 안 된다 괜찮다 우리는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다 왜 우리들은
젊으니까 젊었으면 일어설 수 있으니까 다시 시작하자 그렇게 해서 우리 아씨는 나가서 일하고 나도 나가서
일하고 그래서 그래서 한 달에 월급 타는 걸로 그걸 쪼개 쓰면서 또 꼬이꼬이 모아는 돈을 있잖아 그때는
뭐 싸 입지도 않고 싸 먹지도 않고 서 살았거든 어떻게나 아굴 아굴 벌어
가지고 우리가 남들처럼 집을 땅을 싸서 집을 하자고 근데 안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람은 항상 얼마 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고 거기가 하늘에서 우리한테 시험을 하는 거
같아요 그래서 저는 생각을 아 하늘이 우리한테 시험을 시험 숙제를 해 주나
그래 다시 시작하자 해가지고 오늘에 이렇게 시장에게 이렇게 해서 완전히
어는 꿀도 어는 제 진구를 파니 그게 성인 예 국민들이 인정해주고
꿀도 재구매해 주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꿀 사이트 있어요 그런 건 없어요 어쨌든간에 예 입선으로 해서 저희는
많이 팔리거든요 대한민국 국민들이 어쨌든간 자기 꾸리라 하면 자기 친 꿀이고 1% 설탕도 안 들어갔으니까
그 맛을 보고 그다음에 구매를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려운 그때
성공하셨네요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사장님 차고 많이 겪었어요 저희도 아 님 축하드립니다 성공한 거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 아 이거 자연인으로서 예 우리 아저씨도 그거 아 근데 저
달기는 저 병화를 여기서는 거예요 사한 거예요 사 가지고 우리가 조그만
길러져 그래도 맛이 같아요 북한 맛하고 똑같아요이 똑같아 산에서 자기네 절로 이렇게 벌레 잡아 먹고
아 그기 맛 자연이네 그러 자연이가 닭도 다
자연 얘네 때문에 해 왜요 죽어나요 아이 새끼들 다 파 먹지
농사 야 이거 기가
막히다음 성개 저 닭고기가 맛에서 파는 거하고 달라요 어
돌려요 기름이 노랗게 떠요 아 다 맛에서 뜨는 거 기름 했잖아요 무은
애들이라 고기도 하해 와 향기도 다른데요 와 닭닭 냄새가 바로다
아버지 다 가야 참 이게 먹을게 풍족한 나라에 오니까 저 시골에
살라도 저기부터 고기가 꽉 차더아요이 보니까 그런 맛이 다르네 참 그죠
그지 청계란 응 뭐 먹을게 너무 많아 너무 저 난 또 한잔 얘 우리 아기가
보기 있네 그러 근데 나는 얘도 꿀로 보이지
술이 술인데 위을 때 독칼 술이라는 거
이거 많이거든 근데 후에서 제일 비싼 술이 독칼 소리거든요
그 정도로 좋은 거 이름은 독이라고 썼는데 독칼이라고 썼는데 이게 독이
없고 되게 그 효과 있는 약초 그든이
관절염이 최고예요 아 그래요 관절 예 여기 무릎 관절이란네 여기 독칼 귀해요 대한민국
엄청 기한 거예 칼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봐요 내가는 건 데는 저지대 없어 저지대 응 좀 추운
지방 높은 거지에서 잘하는 거 알는게네 그 여름에 그 더운 금복이
있고 꽁꽁 싸면 지냈어요 엄청 힘들었을 것 같아 이제라도 여기 왔으
그래서 자유가 좋다니까 있는 것도 자유 맘대로 군에 군에 있으면 샤와
시절이 있어게 뭐하네 사실 있을게 말 공동 세면 장이지 그거 씻는 것도
남자가 있거든요 응 아 매일 못있고 매일 못있고가 군대별 나는 위생병이 했으니까 괜찮았지 거리 다 병나겠다
그렇지 어 땀 어 나지 새 그릇째 먹어 아버데 배가 안 먹 나도 좀 더
먹자 우와 많이 드세요 많이 드세요 잘 팔리네 아버 응 아버지 내가
따라줘 내가 따라준 거 내가 떠 주응 서비 장 들렸더니 됐어 됐어 아버지
정말 맛있 꿀라게 저기 우리는 순 자기 진구이 거기 안에 프로폴리스
로얄제리 다 들 들어갔거든 설탕꿀 그런 거 없어 없죠에는 껑 이렇게 탔다면에 노란게
있어요 그게 프로폴 있거든요 프로펄스 항생제 항상 그데 그러니까 그 엄청
비싸잖아요 꿀은 꿀은 가지고 장난하면 안 돼 본래 단꿀 만들거나 이러면 욕
먹어 재 꿀 가지고 그래도 믿지 못하는 세상인데 북한에
가짜 꿀이 얼마나 많아요 사탕 물을 타개 주고 여기다가 꿀 한 요걸로 한
도잔 내놓고 꿀 냄새나 나게 하고 당신도 다 팔 내가 있던 데는 그나마
그래도 벌 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벌 키우는 사람이 없어 가지고 내가 거진 그 동네에 손사
키우다시피 했으니까 그래 꿀 수확량이 좀 있었어요 저희 피나도 좀 많았고
꿀이 정말 많이 나오거든 한 15통 정도 가지고 그 피들로 이렇게 한
20 니까 그람이 직 없 수수 그때
이용해서 가는 거 가서 떠 가지고 또 차 불러서 또
내려오고 이러는데 잘라는 놈들 있지 뭐 무슨 서장이 뭐뭐 먹어라 먹어라 해도 내가 그래도
많이 남았지 내가 그래도 그 아 미친놈들 많아 너무 너무 많은 많아 보안 소자
뭐 꿀 주면 그래도 조금 뭐 아 안 맞아요 안
봐줘이야 먹을 때 뿐이지 걔네 새 웬만한 다른 사람 다른
신분이었으면 맞을 수 있는 거기 여지가 있어 근데 나 같은 최악이
신분은 잘못 받았다가는 진이들이 꽃 벗을 수 있거든요 그 내하고 얽히고
설키며 무조건 진이들 없어서 그러니까 나는 사람이 아닌 거지지 아게 싫다
스타가 아우 되게 싫어라 인간으로서의 그 가치관을
상실한 그 형태지각 손끝에 붙은 재관이 있다 보니까 이불장 옷장 팔지
뭐 그다음에 치지 우선 그 경제적인 영역 있잖아 이거 그러다 보니까
남들이 고생하고 해도 난 조금 집에 먹을 것 요런 정도는 조금
있었거든까지는 되는데 그 세상에 돈이 력을 보긴
나는게 그게 참 그 그 말이 막 실감할 때가 막 완전히 막 머릿속에
전율이 일어날 때 있거든요 그니까 아 그니까 신분이 어느 정도 안 좋았는데요 조금 보라니까 최악이
신분이라고 보면 될 근데 왜 더군다나 그렇게 돼 있었냐면 그때
그분들이 전쟁 열흘 앞두고 포로 됐거든요 우리 아버지가 아버지가 예 53년도 7월 16일 날 로해요 우리
아버지 포로 딱 날 음 그러다 보니까 올라가서 저기 학구 한강이라는데 가서
4년 정도 포로스 영소 생활 했거든 그니까 사상 개조시킨 한 4년
정도 이렇게 울타리 치고 그 정치 영소 같은데여 가지고음 그리고 각포
탄광 신개발 한데다 배치했는데 그 탄광이 어디 있는 거예요 회령 해령이 있어 어 회에서 시내 시에서도 한
70년 정도 떨어진 상 예요 우 미군이 있으니까 카투사 아 예
카투사가 뭐야 아 미군의 복만 미군의 복무한 한국 사람 한국 아 그럼 미국
부대에서 방문하셨네요 미국 분명 한국 사람이 한국이 맞는데 그 우리 아버지 군번
자체가 바뀌 지금도 위군 군번 그대로 있어 우리 아버지가 군에 입대했을 때 25 살이었고 그다음에 이제 포로 될
때 28살이 간 거야 총각으로 28살 됐 한 4년간 그 가다 그니까 32살이 돼서 내보냈는데 아
32살이네 거기 가는 사람도 없고 인맥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한 4 살 38살 들 장가 못 가고 있다
그분들이 어 저런 얘들 그런 분들이 많 거 아 그렇지 기이로 그 순수
서로 어 그 하나의 그 집성촌인 그래서 저런 여도 마살 막 먹으니까
분들이 고향 보내 달라고 막 항이 일어났어 그래서 어 우리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내 가족 내 부모 형제가
있는 곳으로 보내 달라고이 사람들이 막 그러니까 그거 기회를 삼아서 그
주모자들 총살에 버리고 그김에 동조했던 반수는 정치범
가수다 다 쳐 있거든 그때 그래 그 동료들이 죽는 모습을 본 거야 그거
우리 아버지가 그 자기 그 목숨걸고 한 전후에서 싸우던 친구들이 총에
맞고 정치봉 가속 가고 막 그런 모습을
보니까 그게 사람이이 사람이 아닌 거 그게 그러다 보니까
그때부터 그런 그 요소가 있고 그 우리 아버지가 또 직급이 좀 있던
사람이랑 항상 요차 또 다른 그런 그 그런게 일어나지 않겠는가 감시 그
우리 아버지가 영향력이 있는 그니까 그 포로 집단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사람 중에 하나였거든요 살아남은 거만 만 다행이지 근데 그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 북한 그이 나 거기서 항상 감시속에 그러니까 좀 좀
시달 걔네들한테 그 뭐 보위부에 오라 하면 가서 그런 생활이 연속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아 이게 자식들까지 그 그 일방적인 연속이 돼 버리더라고요
그게 자재 그게 그 나 젊었을 때
내가 태어난 곳에서는 그래도 나도 그 못난 인물이 아니고 그래 체격도 좋고
뭐 젊어서 진짜 나도 좀 괜찮았던 거 같아 그 그렇지 가신 아들도 좋아하는 가신 아들도
많았는데 근데 그 신분이라는 것 때문에 한번는 일이 한번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 안 소문 날 거도 그 여자 관계 때문에 내 신분이 탈로 난
거예요 제 아버지가 어떻고 어떻고 그런 이상한 신분 딱 씌워 놓는데 아 그러니까 잠깐 못 가게 했더라고 나
는 가시나 없음 아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잘 나도 쟤한테 가는 순간에
인생 나락이다 이렇게 되니까 어 장가가기 힘들더라 그요 어 그래요 오겠다는 가시나 없어 그거는 맞아요
장가가는 거 힘들 겨우 갔어요음 그 그러다 보니까 아마 같은 국군포로 딸
아 그렇게 마 마주서게 되더라고요 맞아요 그 여자도 아버지가 국군
포로니 북한은 까이 까이 살고 까마귀 까마귀 그리 살 그래가지고 그 국군
장인이 국군포로 아버지가 이게 그 아버지가 삼천 용사
포로 그렇게 포로 가정에 한 집안에
또 이런이 돼 버린 거예요 그게 근데 물어봤어 후회 없나 나 만나서 사는데
신분적인 차이나 이런 그것 때문에 후회 없나 하니까 후회 없다고 나도 아버지 포로들 내가 후회할게 뭐
있냐 불쌍한 인간들끼리 모였지 사는 데까지 살아보자 음 근데 아 자식
키우면서 또 아 우리 아들 좀 만한 우리 아들놈이 아 아버지 나 여기서 안 살겠다고 나 중국 가겠다고 막
이럴 때 어 그때 아 그때는 그 못참겠더라 가자 알았어 내가 준비할게
그니까 아들이 먼저 가다 손발을 뗐네요 나래도 간다 아 이놈이 막이
그러는 거 20살 되니까 아 똑똑하네 생각해 보다가
내가 성구 때 조금 풀이 있을 때라 국경 경기대 그쪽에 어 조금 힘이
있었거든 빨 전줄 좀 있었네 내 말이 좀 그니까 언어가 좀
통했을 좋아하던 여자친구 딸이 하나 있었는데 내 신부름 엄청 많이 한 애거든 근데 그 여자 친구 보고 너
가겠나 나 내리 한국 갈 거야 사모님은 어디 가고 제 엄마는
죽었고 죽고 여자친구 여자친구 하나 있었는데 그 딸이 하나 있었어요 그
근데 그 여자친구 보고 나 내일리 한국 갈 건데 갈 거야 하니까 안 가겠대 못 가겠대 왜 못 가나 하니까
아 동생 하나 부모 당 비사 하는게 있는데 자기 때문에 타기 입을 것 같다 그럼 너 됐어 너 오지 마 나
내리 갈 거야 근데 그 딸이 듣다가 아 난 따라 간대 애가 엄마는 안 가겠다 엄마는 안 간다는데 딸은
가겠다 나는 죽어도 아 나 안 내려가면 신고하겠다고 막시나 어봐이야
아니 하나는 가겠다 하나는 안 가겠다 어떻게 할 거야 그
당시 그래 가지고 내가 한국 오게 올 결심하게 된 거는 아 우리 아들
아들놈이 세상 또 삐뚤게 살더라고요 장 안 나가고 뭐 계속 그 제
친구들하고 그 다임의 그 새가 이런 뭐 그 아마
단련대 아마 가게 돼 있었나 봐요 그는 그 한 3개월 정도 먹었다
그러더라고 다는데 근데 그래가지고 아버지 나이 땅에 안 살 거야 어 나
내 혼자 서해도 중국 간다 어 그 그때 아 뒤늦게나마 가자 그러면 전에
아 한국 가려고 준비할 때 응 내가 해 해 놓은게 뭐냐면이 대한민국의
국방부에 우리 아버지 근본되는 전화 연기를 한 거예요 내가 아 북한에서
국방부에 한국에 그니까 여기 먼저 나와 있는 친구를 통해서 이렇게
해가지고 그이 대한민국 방부 쪽으로 연기를 시켜 준 거거든 그래서 그 직접 북한에서 나 내리 넘어갈 건데
도와주실 거냐 그러니까 도와드리겠다고 진짜 내리 넘으실 거냐 그래 나 내일 넘는다 국방부 측에서
물어보더라고요 그 아버지가 어떤 분이냐 그 난 아버지 금본 가지고 있다 아버지한테 받았어요 예 어 우리
아버지가 그 다 적어 놓은게 있었거든 아 아 아 케 딱 하고 13이 딱
이렇게 해서 군번 딱 적어 놓고 쫙 불러 주니까 알겠습니다 저희 저희가
만전을 다해 드릴 거니까 건너
서시라는 딱 알려 주니니 국방부에서는 알더라 말이야 예 대번에 그거는 아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에 내가 여기 갈 거라는 그런 예감을 거진 하고 있던 사람이 거든 나는 이제는
그러니까 기회가 없을 것 같은데 너는 아직 나의 어리니까 기회가 있을 거라고 내 고향 한번 가봐라 아
아버지는 한국로 가라 너 내 고향 가면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었다고 고향 갈 기회가 생길 거야 그 내가 막내 아들이니까 나한테가
가진 모든 거 다 인계하고 돌아가셨거든요 고양이에 어떻게 돼 있고 뭐가 있고
어떻게 돼 있다는 것 구체적으로 고향이 어디세요 아버지 경상남도 하만이 경상남도 하만 예 마산 옆이
마산하이마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많이 그
내하고 어 엄청난 그 말을 많이 했죠 어 다 먼저 다 사전 준비 해 놓고
어 그리고 이제는 그 여자 친구 보고 야 나 내리 한국 갈 건데 너 갈
거야 어 그러니까 아 못 가겠다 그 동생 때문에 못 간다고 동생이 뭐
부모 당 비어 하는게 하나 있대 그래서 못 가겠다 그래 알았어 검들 오지 만하는데 그 딸이 들었거든요 어
아 나 따라 갈 거라고 따 다은 가겠대 여자 친구는 안 가겠대 근데
걔가 응 어 걔가 조금 나이 어렸을 때부터 그 나를 봄에 자랐거든요
그러니까 그러다 보니까 애가 외국에 대한 그 욕망이 되게 갈망이 되게
높은 애였어 여자가
음나 안 내려가면 신 거라고 나 무조건 그래 그 여자친구
보고 야 어떻게 할 거야 데려가 하니까 데려가라 그러더라고 와 아 그 여자친구는 안 오고 알 응 알았어
그럼 내 딸은 데려갈게 자 쟤 내가 책임질게 멋지다 그래서 아들하고 그
여자친구 딸 데리고 그 다음날 또 다시 내 다 준비시켜 놓은 거 국경
열고 가자 그 넘었거든 애들 데리고 연 에서 전화 북한 전화 하나 가지고
왔고 내가 올 때 아 몰라네 아리랑이라는 전화 있잖아요 북한 그
그 그거 하나 내가 쓰던 거 무에서 그거 하나 가지고 갖고 그때 당시 북한에 전화번호가 없을 텐데 아
있었어 내가 나올 때 나왔어 내가 나왔 몇 12년도 12년도 있었어요
최
초창기였던 그게 370달러 정도 했어요 그게 한대가 400달러 가까
한는데 그게 내 손에 내 하나 있었거든요 북에 쓰던 거 그리 하나지고 중국전 아내가 그 필요에
따라 계속 쓰던 중국전 하나 삼성폰 하나 있었거든요데 그래 두 개 가지고 넘은 거야 아 넘어서 중국에 건너서
지금 중국전화 열었는데 중국전화 안 터진다 중국 당에서 중국전화 안 터지는 거 세상에 이게지 또 세상
그런 일이 있어 아 이게 우리 해령 쪽에서 너무나 강한 그이 전 그니까
장애 내 번이다 보니까이 그러니까 중국 전화가 중국
당에서 안 터져 이거 예 기막 북한에서 터지는 중국 전화가 오 그래
가지고 북한 전화 열었거든요 할 수 없이 그 북한 전화 가지고 내 그
이렇게 심부름 했던 그게 조만한 애들이 좀 있었거든요 그 중국 전화지고 있는 애들이 그 그 북한
전하니까 북한전화 마음대로 되잖아 이거 중국당 건너서도 어 그게 그 전화 갖고 그 북한 번호 눌러 가지고
개보고 야 너 그 전화 가지고 산에 좀 가라 내 여기서 지금 전화하니까
전화 안 터진다 그 북한에 있는 애를 시켜 가지고 그놈이 중국 전화 가지고 그
한국이다 전화 그런 거 내가 전화번호 준 거 가지고 그 지금 건너서 전화 안 터진다 그래서 그
위치 때문에 찾는 것 때문에 거기서 엄청 고생했거든요 그 그러니까 내가 집접 그 전화해야 되는데 북한인 가
내가 어디 있다 어디 있다 그 장각으로 지금 통과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그래가지고 간신히 내가 있는
위치 찾아가지고 그래서 택시 나왔더라고 연길에서 연길에 있는 사람 내보낸 것도 공부에서 집접 지도한
거고 나오 그래서 우리가 뒤에 차 타고 앞에 차 한대 걸고 그 전화 두
개 걸고 그리서 나가면서 앞으로 계속 앞에 차가 해치에 그 뒤에 차를
차세워 그렇게 되면 차세우고 그다음 차에서 내려서도 길옆에 밤 들어가는데
다 숨었다가 그다음에 또 그 변방 애들이 지나가 통과하면 다시 타고 또 들어가고 이런 식으로 연길까지 들어갔
거거나 밤 한 11시 된 거 같아 들어간게 연길까지 들어오니까 우리로 대륙 들어온 그 브로커가 어 아 이젠
됐다고 살았다고 이제 진짜 마음 나도 된다고 연길시에 뭐 진달래 광장이라고
하나 있어요 메로 거리 옆에 있는데 층에 한국식 건물인데 그 건물에다
우리를 안치하고 그 다음날에 우리를 바로 보내려고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그 버스하고 가면 된 심양까지 들어가면 된다고 그래
지금 다 준비하려고 했는데 한국측에서 전화 다시 온 거야 수토 보내지 마
그 보내면 안 돼 그렇게 왜 위험하다고 그렇게 보낼 사람들이
아니라고 그리고 브로커 보고여 사진다 찍어서 날려 그 백본에 들어온 거 아
그 우리 뭐 아들 거 내 그 가시나 내 여권 사진 찍어서 한국에다 날렸고
국방부에서 거니 한주일 만에 연길 병장을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비행기을 들어왔던가 예 연길 병장을 들어와서
브로커가 가서 그 사람 만나서 그거 딱 받아 갖고 꺼지고 온 거야 그 우리 하나씩 다 차고 어 내 얼굴이
내 이름에 그 뭐 딱 제권 딱 차고 미국 국민으로 딱 돼 있고 또 나는
좀 많이 긴장해 그 그니까 애들 데리고 오니까 내가 혼자 중국 다닐
때는 그 몰랐는데 나 혼자서 뭐 내 맘대로 다니던 사람인데 강 아 더강
했 예 많이했죠 중국에 뭐 내 집처럼 드나들 정도로 구경 잘 알았거든요
근데 근데 애들 데리고 떠나니까 아 내가 너무 긴장했다는 그래서 그죠
연길에서 비행기 타려고 내가 준비하는데 중국에서 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응 거지는 아 부 중국에서 병경 타지 말라 부럽고 붙이겠습니다
안내자 붙이니까 베트남 넘어 서라고 아 그거 베트남 오는 과정이 한 주일
걸린 거예요 아 그게 예 그게 연기에서 떠나서 오는게 아 그게 진짜
힘들대요 그 중국 아 그래도 대한민국 교권 있으면은 안전은 한 50% 담당
돼요 한 70% 담당들 걸 아뭐 아니 버스에서는 뭐 보 때로 올라서서 그
분증 하는데 여권 꺼내기 전에 아이고
이렇게 하고 이렇게 보이게 이렇게 찾거든요 그 여름이라 이게 그러니까
이렇게 러닝 같은 그런 반팔 티셔츠 였는데 왜 이렇게 올라와 대한민국
여건이라고 그 뭐 꺼내려고 하면 보고 아고 보 소리도 안 해 체도 안 봐
기분이 어떻던가요 아 그래 그 한두 처음에는 내개
당황했는데 뭐 두 한두 번 두 번째부터는 거 뭐 스스럼 없이 그죠
이렇게 그러면 그게 건의 안이지 예 그러면 뭐 그렇게 해서 베트남
국경까지 온 거예요음 와서 베트남 넘어서니까 거기에 이게 그 국방부에서
사람이 둘이 나와 있는 거 그 한 뭐 가장이라 그러더 한 사람
그 후에 다시 만나는 못 봤는데 막 그 사람들 막 안고 울더라고 우리 애들 한 울고 짜 오시라고
수고했다고 감동 그분들이 참 우리 애들한테 아 정말
잘해줬어요 아 이게 근데 한국에 대해서 몰랐거든요 너무나 정보가 없은
거예요 내가 근데 아버지도 뭐 나이가 많았다고 당시 베트남 하 이 바로
대사관 인도 하더라고요 어 저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대사관이 아
대사관 갔을 때 또 가슴 섬지 니 그 대사관 바로 그 옆에 아게 북한 북한
대상 관이 있는데 그 인공기 보는 순간에 아서 뭔가 딱 떨어지는 거
같은 거 이게 야 그 베트남에서 저거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
아 그 꿈에도 생각하지 않 그 인공기 보는 순간에 와 나 가슴에서 뭐 막
이렇게 막 떨어지는 거 같더라고 아 이게 막 무엇인가 막이지 막 그러더라고요
아 그리고 거기서 또 긴장이 되고 막 손발이 다 굳어지 야 정말 막 소름이
치더라고 그거 보면서 그리고 아저 같이 온 그분들하고 아 나 저기
못가 다 그니까 왜 나 적어 보니까 나이 진짜 손발이
다 힘이 다 빠지고 막 주저앉을 거 같은데 아 저 진짜 못 가겠다니 아고
저거 저기가 대한민국 대사관이라고 저거 저기라고
그러는데 와 애들도 긴장이 막 그 얼굴에 막 굳어져 가지고 막 얼굴
낯빛이 막 시큼해지 아 막 공포에 질려
가지고 막 지더라고 그 얘들 못지 않게 나도 공포해
질렸는데 뭐라 그 그게기만 받은 무섭지 아야
진짜 무섭더라고요 그 겁이 질리죠 나올 때 그런 생각 한 번쯤은 다 해
봤어 실패하면 죽는다 뭐 그거는 실패하면 죽어요 나 오다 실패하면 죽는인 예 그렇지 예 실패가 없이 딴
한번 실패하면 죽는 길이니까게 장난삼아 오는 길이 아니니까 더 공포에 질렸던 거
같아이 그 진짜 목숨 걸어 보니까 야 무섭게 무섭더라고요 그 그렇죠 예 그때
나오이 생각했던 게야 나는 그래도 한 40년 이상 살아 봤으니까도 내가 죽는 거는 뭐 그래도 그나마 두렵지
않은데 어 저기 오래 아 요거 20대 초반에 애들이 뭐 세상 꽃도 뭐
피워보는 애들이 지금 바깥 세상 처음 보고 이거 보고 저거 보고 세상이
희한해서 막 막 이러는 애들 그 그 시향 찬 난하지 그래리 거기
못 들어가고 그 앞에 종과 집이라고 있는 그 식당에 들어갔거든 너무 무서 아거 무서워서
못 가겠더라 그리고 전 같이 가서 다가 대한민국 대상한 전화번호 딱
남기고 그리고서 자기는 여기서이 가야 된대요 여기까지만 자기네 그 의무라고
만나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사람들 가고 그리고 그 전화 가지고 그 종가집 그 사장 보고 아 전화 좀 쓸
수 있냐 하니까 왜 그러냐 그 전화 보는 내놓으니까 리 보더라고요 그러던게 대상관 전화 걸어이 사람
던게 딱 북한에서 오신 분 같은데 어 대사관에 그니까 지금 전화 요청한다
그 전화 바꾸라 그러더라고요 그래 그 아버지 이름 딱 묻더라고요 그 우리 아버지는 김성만 하고 새 책을 자 딱
대니까 아 오이나 수고 많았습니다 금방 나갈게요 그 전화 좀 바꿔 달라고 그래리 그 종가집 사장한테
바꿔 주니까 그분들 식사시 그랬나 봐요 그 사장이 또 사시키
밥먹지라고 그거 한번 본다음에 너무 공포이 가지고 겁이 나가지고 그
먹지도 못하고 애들 둘 데리고 배 안 고파 뭐고 근데 아들 못 먹더라고 이거 5분도 안 돼서 금방 온 거야
가자고 그래서 베트남 그 대우 호텔 그 대우 호텔 제일 위다가 그다 한치
하더라고요 거기 야우 지금 녹기도 높대요 대한민국에서 들어가 지운
건물인데 그니까 베트남 정부하 해가지고 안 있었어 얼마 안 있고
그래서 바로 그서 비행기 타고 내 가족만 탁
때리고 비행기 탈 때도 정말 아무
느낌도니까 그 어떤 감정도 그 못 느끼고 인천 공항이 눈에 안
들어오더라고 그 그 번쩍번쩍한 공항이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고 그
나는 인천공항이 그렇게 멋있다는 거 고 그냥 국정으로 왔던 거 같아
아무런 것도 못 봤어요 오슬이 단지 본 본고 있다면 대교 지나고 오는데
아이이 숲이 나무가 얼마 부르 징징한 나무가 꽉 찼는지 어 아이고 대한민국
사람 나무도 안 그니까 밥 안 해 먹는 상 여기는 여기 사람들이 밥 안 해먹고
이게 뭘로 해먹지이 나무 한구루 자리가 없이 숲이 꽉 찬 거거 그
그거 보면서 그 오면서 그것만 딱 본 거 같아 아 놀랍더라고요 그 숲이
그리고 국정은 들어왔는데 내가 정보가 없이 들어오다 보니까 너무 겁먹은
거야 긴장 최대로 긴장한 거예 근데 아이 국정원이라는 그 국정원이라는
말조차도 처음 들어봤고 그 여기 와서 섬들은 거야 내가 안 기부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그렇지 그래서 아 이게 안기고 다음에 그 후석 건물이다
그러니까이 분야라는 거는 다 두르면 느꼈거든요 벌써 앞에 그 철조망 치고
딱 검사에 들어오는 거 딱 보니까 거기서 또 긴장한 거야 근데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게 북에서 내가 그렇게 된 사람 살 람 항상
얼음장 딛고 살던 사람이라 그런 사람 사르는 판이 없이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라 여기 오니까 또 나도 나도 그 먹 마음이 진짜 불안불안한 걸 그
국정원 들어오니까 더 불안했던 거 같아 그 다 가둔 거지 그러니까이이 사람들이 뭐라 물어봐도 한참을
생각하는 거야 내가 말 한마디 방향이 어디로 갈 것인가 내
내이 한마디에 이게 그 뭐 그니까 뜻도 진짜 없이 뭐 없이 이게 한마디
하는게 그 신경전 하고 있더라고 내가 거기서 엄청나게 그 말 한마디를 이해
이해해보려고 그러고는 웬만하면 답변을 안 했고음 그 말을 될수록이면 안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거든요 그러니까 어이 사람들이 나를 지금 데려 왔는데 아 이게 대화도 안 되고
대화도 안 되고 애들 보고 물어보니까 들어올 때 내 애들한테 딱 말한게 있거든요 모든 걸 나한테 밀어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 이제 응 너희는 응 너희는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지서 아빠따라 아빠 가자에서
갔고 그래서 아빠 시키는 했을 아무것도 몰라 거기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있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대화가 더 안 되는 거 그래서 한 한 다세 지났는데 그
국정은 안에 거기 데려 가는데 그 그 진짜 탈북민 있는 거기죠 야 나
탈북민 그렇게 많은 거 거기서 처음 봤 거 어 깜짝 몇백명이 있는 거 어
그렇지 와 내가 있을 때 한번에 막 100명 씨 빠질 때거든요
2012년도에 와 전성기였던 그 그래서 거기서 이게 다
뭐냐고 그니까 탈북민들이 이렇게 많 그렇게 많다 그 놓고이 사람이 계속
매일 정심 식사는음 저기 밖에 데리고 나 가더라고 나 그니까 애들은 떼놓고
나 하나만 그 대회가 안 되니까 그 한 번은 저기죠 안산에
갔다가 어 한분은 안성에 갔다가 그다음에 한 분은 저 인천 갔다가
점심 식사 때마다 계속 들리고 나가더라 나는 그 뭐 드시고 싶으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아는 음식 있어야
말하죠 그 내가 뭐 세상 이름조차도 모르는 맨 그런 음식인데 내가 뭐 먹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게 한 가지도 없는 거예가 음식은 뭐 알아야 뭘
알아야 뭘 먹고 싶다고 말하지 그 그 내가 단 한 번도 답변해 본 거 같지
뭐 먹고 싶다고 말해 본 적도 없고 그래서 가만히 있은 거예요 그 사주는데 뭐 일식집 가서 해싸 주면
아이 그 뭐 그이 분들이 먼저 먹는 거 보고 따라해서 한두 점 먹어 보고
소고기도 그 그 사 주면 그 이렇게 그 피기가 만
있으니까 그런 고기를 안 먹어 봤으니까 그러니까 아 조금 좀
거부감도 생겼고 그리 국정원 있을 때 한 한 20일 지나서 이분이 너무
안타까우나 선생님 사실은 어 저희가 이게 그러니까 다 그거 완료했다고
그러니까 그 지금 선생님 그거 기본 그 그 함안에 있는 분 그 사촌
분들도 다 만나봤고 그리고 DNA 다 99 99.9로 나왔고 다는데 선생님
마음 좀 내려놓으시면 안 될까 대화가 안 되니까 좀 살다 오신 그 경유
아이라도 좀 들어보면 안 되겠냐고 그 그래서 그때도 그 계속 긴장의
연속이 해서 말을 크게 안 했던 거 같아 그래서 아 그래서 고생 좀 하다 왔다고 그래서 이렇게만 했고 그
하나원음 왔을 때 어 그때도 달봉이 처음 접하는 거랑 그 예
그게 그래서 말 안 하고 살았거든요 근데 하고 탈북민들 되게 씩씩하다고
그 사는게 무습 모습이 얼마 행복해보이고 기 김리 하나없고
뭐 웃고 떠들고 하는데 그 모습이는 안 들어오더라고요 아 나는 밖에 나가
나 이제 어떻게 살 거야 하는 생각이 내 내 혼자만이 생각에 빠져 가지고
계속 한쪽 구석기 죽을때 앉아서 신문만 보고 앉아 있는 거예 그 나중에는 하나원 졸업하고 나오니까
우리 마누라한테 누군가 들려요 때한 사람하고 하
있을 때 보니까 아 사람 참 모해 보 그 막 그렇게 평가하더라도
뭐 크게 뭐 아 그 사람이 그렇게 봤으면 그 사람이 뭐 인식에 그렇게
보였겠지 나 그거 놓고 뭐라 할 그건 없다 그 사람이 눈에 그렇게
보였으니까 그렇게 말한 거고음 그럴 수 있는 거 한국에 와서 국방부
만났어요 또 아 여기 와서 처음에는 찾아갈 그 국립도 안안 했고 나는 뭐
국군포로 무슨 이런 거 대서 전혀 그 그서 내사는 거만음 그러다가 그 제
작년도 그 우리 아들이 다 찾았더라면 그까 나는 그거 거지는 몰랐는데 우리
아들이 우리 할아버지 그 과거에 대해서 응 러고 다 찾아냈다고 아들이
어 나 잊어먹고 살고 있었더라고 정착하다 힘들었구나 정착하데만
그 사하고 몰라고 난 그 다 잊어먹고 살다가 작년도에 아 이게 그 작년
겨울이 됐어 찾은지 얼마 안 됐어 그니까 아버지하고 내 북에 있을 때
아버지 돌아가시기 한 몇 년 전인데 그때 내가 좀 이렇게 사회적으로 너무
안 좋고 연애 한창 할 때인데 아 혜령씨 보위 부부장 따라고 좋아했던 거야
내가 그니까 나도 그 신에 대해서 이해를 잘
설마 그 걔가 또 그 나도 형도 엄청 그 좋아했고 그 그러다 보니까 그 둘이서
뭐 오랫동안 연애하다가 괴로운 문제까지 간 거예요 그게 처음에는 걔 아빠가 야 너
데려와 뭐 너 남자친구 있다는데 한번 데려와 봐 그래 걔 아버지 앞에 갔지
가니까 너 지금 하는 일이 뭐지 그래 아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다 다
그러니까 그래 무슨 이런 운전학원 같은데 1년짜리 거기
보내서 거기 운전 매 나오면 어이브 차
운전시키고 뭐 신분 뭐 다 신분 모르니까 모니까 생긴 것만 보고 뒤로
딱 파보니까 아이고 이게 기막힌 신분인 이게 성분이
완전 나쁘네 그 나는 그거가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신분이라는게
뭐였는지 이게 그 신분이라는 그 두 글자 가지고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그런 기준이 뭔지음 아 그때는 그 나이도 어렵고
그렇 이해 이해할 수도 없었고 그거 그래서 둘은 죽자 살자 했는데 그
집안이 반대하는데 아 강력히 반대하는 거 반대하는 것 특히는 보이데 뭐
아들들 둘이 그 군에가 있는데 군에 간 아들 둘 다 와서음 야 그때
보니까 아 지키겠노라고 아 찾다가는음 죽일 거 같더라고요 그게
좀 더 한걸음만 더 접근하면 나 내가 더 내밀면 그래서 알았다고 그만둘
거라고 어 그러다 보니까 혜령씨 소문이 강난 거 어이 제 신분이
어떻고 어떻고 하다 보니까 내 애가 그 정말 감춰 놓고 감춰 놓고 있던
그 프라보 물이 확 폭로 됐네 딱 폭로된 거야 음 옛날에는 그 선망의 눈으로 보던
그 여자들도 외면 하더라고요 왕따 당하는 기분이라는 거
그때 한번 느끼게 되더라고요 우리 아버지하고 말이 많았어 그때 그 아버지가 야 어쩌겠냐
까치는 까이끼 살아야 되고 까마귀는 까마귀 그리 사는게 그게 정답이다 어
그니까 나도 그게 마음에 안 들었다 그게 그 너무 그래가지고 조용이 또
아버지한테 물어봤거든 아버지야 이게 어떻게 돼서 내가 내가 무슨 못 쓸지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뭐 누구한테 뭐 죄 짓거나 누구한테 잘못산 그런
인생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말 밥에 올라야 되고 내가 이렇게 막 이상한 그런 거에 이렇게 시달려야
되는지 아버지 그니까 아버지 사 가거 좀 듣자 그러니까 집에서 지금
아버지가 운서 말하기 시 는데 우리 할매 또 우리 엄마가 또 막 그 천길
뛴다 막이지 뭐 이상한 쓸겸 소리 하냐고 한두 사람 죽은 것도 아닌데
아직도 눈에 선하지 않냐고 자식한테 왜 그런 말 하냐고 아니 우리 아버지
또 그 동료들이 죽는 거 우마는 봤거든요 총살 당하고 정치범 발리서가
고행 가겠다는 말한 거 우마는 그 본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데다 지금 태어나서이 얘기 듣자고 하니까
한국에 대한 얘기 해야 되잖아지 살아온 가정 음 왜 군이 됐 됐고
전쟁은 어떻게 했으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로서는 너무 의문스러운게
많고 내가 왜 지금의 현재 이렇게 살아야 되는 내 인생이 왜 이렇게까지
이렇게 나라 그 떨어져 살아야 되지 너무고 분하고 분통하고 하니까 아버지
물어본 거지 아버지 왜 아버지가 뭐 어떤 사람이기에 내가 이렇게 거지 살아야
되는 인생 좀 듣자 그니까 아 우마 막 날리지 그걸 왜 말 주 그다음에
아이 안 되겠더라고 그 다음날부터는 아버지 산에 가자고 그 배낭에 술
준비하고 뭐 조금 안주거리 해가지고 아 산에 갑시다 아버지 그 아버지까지
산이 가는 거 둘 있어 그 우리 또 산 되게 좋아했거든 그 뭐지 구 둘이
사에 산에 가면서부터 말을 지키는 거야 아 어떻게 된 거냐 그래 아버지가 살아온 전 과정을 다
들었거든 아 한주일 동안 내가 산에 못시고 갔거든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느
거지 어슬어슬 배고파 내려왔 그 술 뭐지 도시락처럼 막 싸 갖고 그리고
한배 내고 밤에도 막 밤 열까지 앉아서 목이 김에 그 아버지가 계속
내가 너무 물어보고 싶었던게 많더라고 알고 싶었던게 그래서 그때 그 아버지
견해 그런 거에 다 들었지 아 그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지 이게 아버지
과향 가게 되면 아버지 형제들이 있을까 혹시나 그 형제들은 몰라도 그 너
사촌들은 살아 있을거다 그러니 그 사촌 누이 이름 하나 딱 부르더라고
내가 전쟁 나올 때 둘째 형한테 딸이 하나 있었는데 딸 이름이 그 뭐
자였다 금자 그래서 딱 기억에 그저 그 우리 아버지 말한 거 그저
한자한자 정말 뭐 청사진처럼 박은 거야 내가 완전히 어디다로 없 그
문제 잘못 남다 하는 그 나도 죽을 거 같아서 박은 거예 막 머릿속에
그래가 나와서 찾으니까 있다 금사 누이가 남게 먹은 누이가 이름이 금사
딱 만 내 그 기억이 그서 어떻게 어떻게 알아봐요 반가워해요 모르지 뭐
처음에는 반가워 안 하죠 반가울 수도 없고 그렇지 세상 모르는 데서 뭐지
진짜지 말지도 지금은 어디 나갔다 막 들어와 내동 왔다지 막 명이라 막 내가 여기 와서
두 번 울었는데 한번 아버지 고향 들어갈 때 한번 울었고 그 고향 모습
보면서 우리 아버지가 말하더니 그게 탁 보이더라고 그 모습 보면 들어가기
전에 아 정말 죽기 내기로 한번 울어봤고 생각하네 그리고 작년 겨울에
아또 엄청나게 울었네요 한 며칠 진짜야 눈고 살았네 아버지 그 기록
다 뽑고 나니까 그다음에 보이는 거예 난 그거까지는 못 봤는데 그 거기서는
못 들었거든요 전투 기록에 대한 거네 아버지 그 기록을 다 보니까
어이 이게 억울해도 너무 억울한 인생 여기에 계셨더라면 아 정말 그 멋진
인생 중에 하나을 사람인데 전쟁 3년을 대한민국 역사에
없는 전쟁 3년을 스란이 보낸 사람이 우리앞는 사람이더라 없는 거예 그런 기록 가진
사람이 50년도 7월 20일 병인데 옥기 나와 아 입병 했거든요 그니까
전쟁 일어나서 7월 20일이 한 달 정도 걸렸죠 그러니까 이게 다 내려 밀렸을 때 어 7월 22일이니까 7월
21일이 거의 한 달 됐네 북에서 저 부산 거지 완전히 다 내리 쓸었을 때
거기서 그때 입대한 거예요 아버지가 그래서 입대하면 제 미군에서 바로 오키나와를 뽑아 갔고 거기로 그리고
오키나와에서 그 인천상륙작전 준비할 때 그 전에 군사교육 바둑 그러니까 두 달반 정도 군사기 받았더라고요
9월 달에 인선 상 적전 이루어졌을 때음 그 준비 단계를 우리 아버지가
거기 가서 거친 거지 그러니까 그때 아버지한테서 그 말은 들었는데 군사
훈련이라 하루 종일 총만 쐈 대요 만소 하루 종일 군사이 미군 군사
기이 하루 종일 총이에요 어 아침 눈떠서부터 저녁 때까지 총 쏘는게
그게 그 일이었어요 그러니까 두 달반 총 쏟다 나니까 총에 대한 그 개념을
확실하게 익힌 사람들이죠 두 달 이상 총 쏘면 명이는 없지 아이 대단한
사람들이 그 뭔가 이렇게 눈에 보이려 말하는데 이렇게 조그만 병 매단 대요
이렇게 한 세 개씩 그리고 그거 마치는 사람한테 저녁에 상 주는데 진짜 우리 아버지 그 술 그렇게
좋아하 그 술 타 먹겠다고 술 한 박 그 타 먹는다고 그거 그렇게 맹 연습
했대요 그거 그러다 보니까 그거 다 지금 그 명사수 다 만들어 놓은 거고 두 달 이상 그 받으 명수는 얼만
소천 그렇게 잘 맞는데요 저기 또 뭐 눈 갖고도 뭐 대충 갖다 데고 쏴도 맞는데요 그게 그 정도로 그렇지
않았으면 다 죽었대요 그 그걸 배우지 않고 작전이 참가했으면 아마 장진호
살아나올 사람이 없었대요 그 사람들게 살 는 그 수들 때문에 그 3천명의
명수들 때문에 그 미군이 살아나고 우리 아버지 자기 목숨 건졌고 그
사람들이 아니 그 카투사들 그때 진짜 대단했어요 그게 그게 그 그
교육이 참 적절한 교육이었다 거 우리 아버지 말하게 내가 살아남은 은인이
거기 있다고 그리고 그 9월 달에 그 메가도 같이 인천 상육 작정 딱
참가했는데 인천에 내 상륙할 때 전투 한 건 없고 저 월미도 팔미도 쪽에서
그 한포 사격 그거는 그 아버지가 다 기억하더라고요 들어가기 전에 그 한포로 해서 다 때려치고 그리고 그
뭐 무엘 입성 했다 그러데 우리 아버지는 배멀미 일본에서부터 거
들어오는게 그 배에서 배멀미 죽을뻔했다가 막 토하고 막 그 배에서
쓰러져 이런 못나다 한주일 후에 그 개우 정신 차렸다 더라고요 그 인천에
그 내려서 그 장 안에 가서 갔을 때 우리 아버지가 나이 많은 축에 속해
있었대요 25살이이 때였으니까 그래서 그때 그 25 이상 짜리가 그
카투사들 중에 37 명이가 있었대요 나머지는 22살 19살 살 막 16
심지어 미군도 역시 나의 어 됐다 거기들은지지 않는게 그때 그 연대장이
성희수 워커라는 사람이 난 당신들한테 그 명령할 그 그걸 잃었다 난 명령할
수가 없다 어떻게 하겠냐 살아나가야 되는데이 이거 다 죽일 수 없지 않냐이 애들은 그 그 서른명 나이많은
사람들 그도 한국 한국인 그 카투사들 불러놓고 어떻게 해치 겠냐 살아나갈
수 있는 그 방법 찾자 아 그래 그 사람들이 전위에 서고 후위에 서고
측면에 서고 그 매일과 같이 어딜 치면 되겠냐 그래서 그 정찰도 나가고
그래 가지고 그 극복에서 나왔다 아 치고 나왔 나오면서 많이 죽었대요 기
치는 순간까지는 괜찮은데 나와서 나와서 많이 죽었다 아버지가 말하는데 한 반수로 잃었다 그러더라고요 왜
어서 아니죠 그 한쪽을 치고서 다 넘어섰는데 중공군이 그때 측면에서
들어오니까 아 또 중 아 거기 그 갇혔을 때 기 얘네들 그
무장이 그 하다고 약하니까 살아 나왔지네 매 1인당 다 총 있었으면
살아나올 수도 없었대요 그게 거기서 어 중국인들이 예 중국이 나는데 한 다섯 명이 하나 총지고 나온 애들이
었어요 그러니까 깽 가리지고 그 10만 명이 그 포위하고 깽 가리 치면 그 안에 있던 애들이 다 얼어서
막 바지다 오지 아 심리전에 했네 기간이 그 북치고 갱가 치고 하는데
그 나이 어린 애들이 밭이다 진짜 오음 지었대 그때 그게 너무 두려워서
그 관경이 그 상상만 끔찍하다 그러더라고 그 그러니까 그 애들
얼어죽지 않게 보살펴야 되고 그 나이만 우리 아버 고생 많이 했다 그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뭘 기억하냐면 배에서 애들 태어났던 거 김치 1
김치 2 김치 3 김치 4를 알더라 예 그때 이름 달아주 이름이 없어
갖고 김치 2라고 달았다는 그래서 국방부에서 그 전투
기록을 아들이 찾아가지고 저는 크게 요구하거나 그러지도 않았어요 그 뭐 아 내가 공 세운
것도 아니고 그거는 우리 선대들이 공 세운 건데 내가 무슨 내가 해는 거 마냐이 나와서 한 1년지나 한 2년
정도 됐을까 그때 본초에 찾더라고 어 훈장 증하고 훈장 아고 그다음 내
유공자 증하고 이거 다 이렇게 해가지고 그 주더라고 근데 요번에
찾은 거는 우리 삼촌고 찾았는데 천권 아직 못 받았어요 우리 삼촌은 뭐였다고 하셨 학도병 전사 52년
6월 달에 전사했는데음 아 그 우리 삼촌 거 전투 기록은 못 찾았어요 아직 근데
내가 생각하는데 그 우리 그 삼촌도 좀 그러니까 공 공로가 좀 있었나
봐요 그 훈장이랑 다 다 있는 거거 마랑 운장 있더라고요 3천 대신 된게
근데이 국방부도 그래 본사도 그 모르고 있는게 하나 있은 거예 형제를 모르더라고이 두 형제를 이렇게 묶어
안 놓고 지금 딸로 따로 우리 삼촌은 저 지금 그 현충원에 그 훈장이 다
제시돼 있는데 누구 타갈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거기 그대로 묶여 있더라고요 요번에 그
찾은거 여기에이 산골에 그래도 본소에서 두 번 왔다 갔지 아 여기를
국방부에서 두고 왔다 아 그러니까 전쟁 기록을 찾아도 응 우리 선대
애들 훈이 참 찾기 어려운 훈이 사람
예 한 사람 도병 전사했고 한 사람은 일선에 3년간 그것도 그 고스 선만
딱 그 이선 전투 기록이 대단한 그 아버지 삼촌들이음이 나라를 지키 해서 진짜
힘든 전투를 했고 진짜대 대한민국을 지은 분들이 그렇지 삼촌이 거두
작년도 찾았고 장인도 장인도 찾았고 누구
장인 장인을 만나게 된 것도 하루
아버지가 나보고 야가 술 좀 가져와 이러더라고 오리터 짜리에 하나 가져오라는 거야 그리고 알았어요 아버
술 가지다 주니까 그거 두고 가자 그 어디가 따라오라고 그래 그래 아버지
같이 지금 내가 술 수한방 강 치고 지금 아버지 따라가 강기 장인 집이지
우리 아버지가 그 그 포로들에 입지가 되게 높은 사람이 제일 라이 많았고
제지 그람는 던 사람 중 야 송규 형님 막 맨발로
놔서 형님 들어갑시다 야 이게 내 아들인데 막내 아들인데 야
괜찮지 보던게 어 잘 났네요 책도 크고 아 들어서 같이
앉는데 김치에 다가고 사발 가져오라고 그 김치 그다 그
대접 놓고 그 부 그런 부 한사발씩 부으면 한사발 마시고 앉아서
말하더라고요 나 너 딸 둘째 그지 그 딸 데려가려고 왔다 뭐 나는 아무런
반대 없다고 사인 봤으니까 까니 그 이제 아 좀 있으면 들어올 거라고 그래서
들어온 거 나도 처음 봤거든 그때 어봤는데 아버지가 우리
아버 우리 아버지가 계속 그러 거네 갈길이 지 않아 숨크게 고민할게 뭐
있냐 너 네가 가야 될끼리 뭐 딱 정해 놓은 건데 어 잘 살면 되는
거야 그 아버지가 항상 말하는게 잘 살아 잘 살면 돼 응 세상 사는 거는
그 잘 사는 거는 법칙이 뭐 딸로 있는 것도 아니고 주어진 것도 아니야 본인 노력이야 했지 우리 집 앞에
이렇게 한 60평 정도에 터전 있었거든음 그 우리 아버지가 여기다 마늘 치는거 쫙 그 마늘 심어서 그거
한해 다 잘 가꿔 가지고 그걸 다 팔아서 뭐 이렇게 딱 그 목돈 한번
지어 주는 거예요 그 딱 거기서 단 한 번에 내가 딱 느낀 거야 아 이게
내 갈 길이 많네 이거 근데 그렇게 만나셨으면 사이는 좋았어요 응
그러니까 우리 와이프는 눈 지마이 보더라고요 그니까 내가 사회적으로
자꾸 무리를 일으키는 거야 내가 어린놈이 집에서 돼지 키우고 뭐 저
가구도 만들어 팔고 저기 트러블이 많았지 그 그지 아 그니까 어느 때
거기가 그만한 드냐면 그 북한이 그 96년도 한 몰아칠 때 고난 행군할
때 그때는 그 우리 와이프가 알더라고 사람 막 굶어죽고 막 동네에서 막 그
앞 옆에서 굶어죽고 막 뒤 그럴 때 그거 느낀 거야 이걸 하야 되겠구나
어 그러니까 그때부터 하지 말라 이런 말 절대로 안해 그렇지 그게 살길인데 사고로 죽었는데 고로 사고 사모님이
2003년도에 차사고를 죽었는데 고생 많이 했어요 고생 많이 하게 된게
우리 큰형이 제일 큰형이 자지 남자애만 둘이 있었는데 아 그
와이프하고 또 제대로 못 살고 둘이 각태 가다 또 갈라진다 어 아 갈라지니 형 혼자서 남자애들 키우는데
키우기 힘드니까 아 그 하루 저녁에 애들 나한테 둘
데려왔더니 내가 아들 하나 있는데다가 조카 두 놈 앉다 보니까
갑자기 자식이 채시 해버린 거야 98년도부터 그때부터 내가 키운 거지네 그 제일 힘들 야 힘들 야
그때 진짜 굶어 죽을 때잖아 가두거나 그 우린데 많이 죽었거든요 그 근데 그 우리 와이프가
그 하도 발 맞춰 주고 그러다 보니까 같이 키운 거지 그 힘들게 힘들게
키워서 한 2003년도 그때 어떻게 갑자기 사고를 죽었거든 아 아
또 사고를 죽고 나니까 내 혼자서 애들 새 데리고 있는데 그 남자 애들 뭐 적게 먹어요 뭐 밥 진짜 막 그
뭐 누구 더 먹을까 봐서지 뭐 그렇게 애들 크는데 그래도 와이프 없으니까
또 한 손이 끊어 나잖아요 그요 근데 또 자리가 크지 그 형 조가 두 분은
어떻게 됐어 하나는 데려왔고 하나는 데려왔어 하나 한놈 그 위에 장가 가서 못 데려왔어
아 내가 나와서 그다음 다음에 내가 그냥 뽑았지 오겠 대요 아 강자로 도채
왔지 안갔다고 하던가 아니 그니까 이놈 겁이 나니까 국경 못 넘는 거야
두망 강을 못 넣는데 내가지 야 우리 아들 보고 야 그 한번 만들자 그 뭐
그 만드는게 뭐 간단하잖아 그럼 걔 하나 올리는게 그니까 아 아버지 내가 만들겠다 그러니까 전화로 지금 딱
하는게 야 야 내 너 어디 쪽에서 넘어오면 내 딱 거기서 기다릴 거니까
그 저녁에 잠깐 와서 만나고 너 그 도로 건너가라데 야 만 원 줄게 딱게
린 거야 돈 중국돈 만원 돈에 렸네 내 돈 만 원 줄 거니까 야니 어떻
많지 않은데 내가 저 만원 주고 내 다 한번 만나보고 싶어 그러는데 그 만나 잠깐 말 그 하고 내가이 좀
준비해 놓은 거 있지 어 그거 가지고 내 그 보해 줄게 뭐 이렇게 탁 얼린 거지
지금에서 만 생각해보니까 야 저 건너가면 지금 만 원 주겠다는데 저 있다는데 그니까
이놈이 하루전 모으면서 딱 건선 거야 거기 나도 올려서 그 저저 두망 넘
그 우리 아들이 올린 거거든 그 내 렸 그렇게 하는 그니까 그다음에 딱 건서 야 전화 딱 온 거야 야이
새끼야 나이 건너는데 너이 새끼 막 이이 막 전화를 막막 소리
깨 소리 치는 거야 막 새새끼 야 야야 야이면 그 그러지 말고 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 야 내이 찾아갈게 니지 내가 찾아가니까 그 앞에 올라가게 되면 거지 그 집
보이지 그 벽돌집 그니까 어 보인다 그 집에 가서 전화 그 그러니까 그 집 이놈이 딱 올라가서 그 사람하고
전화 바꾼 거야 아이거 저 한국에서 그인데 그 동생이 전화 바꾸라
한국이라 그러 뻑 죽잖아 연선에 다 다 아 얘 세 그래서 그놈을 옷좀
가라 피고 돈다 거니까 조금만 하루만 거기다 좀
그 잘 안 패 달라 못 가게 옷이 다가 잘 먹여 달라고 돈은 내가 보내겠다고 버
됐다고 그지 연기 그 딱 위치 딱 보냈지 그놈 덮치러 보내지 덮쳐올 때
그 주인 집에다 돈 쳐 놓고 오라 그 그 지금 그 거기다 돈 쳐 놓고 이놈
딱 덮쳐 갖고 들어온 거지 저하 그다음에 오는 과정에 계속 전화 봐
어디까지 왔냐고 어제 한국에 오는 도중인데 아 그래
저 지금 떠나서 지금 어는 가정인데 라우스 들어갈 때까지 어디까지 왔냐고 물어봐요 근데 그 조하는 뭐 라우스
가지 한국 온지도 모르 너 모르지 그냥 그 시키는대 아 이제 좀 기다려 그 시키는 대로 해지 라우스 들어갈
때까지 어디까지 왔냐고 어어어 한국 가서 하나원 가서 깨지게
왔다이지지기 나이 똑같거든요 들라고 좋은
삼촌이다어야 거 처음에 후회 안 하던가요 아 무에서 살기 힘들었는데 내 내가 나온 다음에 고생 그렇게
했다는데 그래 그러면 그 형님은 어게 됐어 형님은 2003년도에 정치병
관리소 들어간게 카 그 저저 이거 조카 둘 예 야 정치범 관리소
들어간다 영영 헤어졌고 그러다 보니까 내 의무가 내 책임이 더 커진 거예요 형님 정 정치범 왜 가신 거예요 중국
한국 기도로 한국 기도하다 잡히셨나요 잡혔다 그보다는 만든 거지 중
갔다왔다고 정치 관리 열 대상 치 없 여자친구는 연락했어요 안 하지만은 그
한 2년 3년 차 됐을 때까지만 해도 전화 연결이 됐거든요
됐는데 주회 하더라고 지금 생각하니까 내 왜 무슨 바보지 했는지
모르겠다 진짜 막 지금 막 발 부둥 치고 싶다고 막 너무 흘리네 막 당
치네 그렇 그리고 지금 딸이 한국에 와서 살아요 어 영인의 시집가 가지고
애가 이전 열살 넘었는데요 이제가 오요 오자마자 지집 가가지고 어 우리
사장님 요러 살렸네 그 걔가 오자마자 일이 잘 잘 되겠더라고게 그러니까
이게 참 사람 잘 만나는게 중요해게 이런 분을 또 만나
가지고 내가 대한민국에 대한 느낀게 한 100년 뒤떨어진 그 진짜
세상에서 100년 앞선 세상으로 오니까 이제이 모든 거를 내가
채득하고 답습하고 이여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야 된다는게 더 힘든 거야 어 북한 언어 하게 되면 여기 분들이
뭐 알아듣더라 그요 이거 어 내가 말하는 거이 사람이 못 알아듣고이
사람이 말하는 거 내가 못 알아듣다 그래서 야 내가이이 모든 걸
다 캐치하고 살 수 있는 그 순간이 참 두렵기만 하더라고 그러니까 긴장의
또 연속이야음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그 단순한 생활이 그래도 그게 그 별
느끼는 것도 없이 머리 쓸 일도 없이 잘하는데 여기 와 보니까 세상이 길이 너무 많은 길이 열려 있으니까 더
힘든 거 이게음 내가서야 될 자리가 어딘지 내가 가야 될 길이 어디 오
어느쪽으로 가야 되겠지 여기 아 여기 나와서 내가 할 기술이 없더라고 내 목공일
전문인데 여기 탁 아파트 받고 탁 문 보고 장 보고 해봐야 나무 한 조박
들어간게 없어 여기 아빠도 아 다 샀지 어디 어디 봐도 나무 가지고 뭐
아이 그래도 손도 있으니까 먹고 살 수 있지 않 한 그 내가 생각했던 그
기대 하라도 허물어지다서 그 상이 있다는게 그 TV 다이 뭐 밥상 뭐 이런 거
있는데 그나마도 그 가서 가격 물어보니까 그 품이 안 나올 것 같아
내가 만든 품이 근데 왜 그거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그 우리는 손
그니까 손으로 만들어야 되는데 여기는 기계가 발달 했으니까 기계를 만든다는
거 상상 못한 거예 그때 초기에는 그 밥상 하나 가격이 너무 싼 거야
손으로 만들어서 그렇게 팔아 하면 그건 죽두 밥도 안 되거든 그건 진짜 죽가 이렇게 손으로 만들 팔 안 팔
북에서 내 밥상 손을 하나 만들어 딱 내놓으면 어 그래도 아 내가 뭐 하루
벌이 되고 남는 거거든요 그게 그 며칠 그 만들어졌네 몇천원
받으려고지 당 북한에서 북한식 대지라고 했으면
한 10만 받을 거는 여기는 그 기다 만 원 정도 그 하루 마 갔는데 진짜
말마 못하나 설탕 가득 사이 있는데 꿀도 있어 예 그 꿀 가격 보니까 꿀은
5만 원이고 어 그 설탕 가격 보니까 설탕 가격은 7,800원 9천 9,000원 만원 밑 이더라고 예
꿀은 한 병이 5만 원인데 15km짜리 하나 아 9,000원 7,000원 어 어 그 가만 딱
계산해 보니까 야야 야이 꿀이 나자 야 이게 꿀 꿀은
맞겠다 북한 설탕 되게 비싼데 꿀 값이 있데 그게 꿀이나 한번 해 볼까
그 하자고 그래 또 꿀 또 시작했고 시작했는데 아 시작했어도 아
이게 참 참 이게 무식하면 용감하다 하고 있지 무식함
용감하지 맞아요 했던 그거 가지고 자신감에 딱 내가 지금 해 본 거야
어 아 웬걸 벽이 나오니까 다 다른 같은
벌인데 어 방식이 틀리고 그다음에이 온도차가 틀리고 꿀 두는 시기가
틀려지고 어 멘붕이 오더라고 그러니까 북한식이 아니니까 아 배워야 되겠구나
그 그다음 저 중국대학교 딱 때마침 입학생들 딱 봤을 때 거기 입학해
가지고 1년짜리 대학도 나오면 거기서 친구들 많이 살겠거든 우리 학급이 한
40명 됐는데 70대 노인부터 예 젊은 그 뭐야 아
70대도 있어요 70대 그 대학에 다녀 아 배우에는 그게 만만치 않아고 북한에는
40 35 30 중반도 대학가는게 없는데 아유 여기는 여기는 대에는
그러니까 그 우리 학급이 한 40명 가까이 됐거든 그게 다 친구된 거예요
70 70 노인부터 그 내가 나이 좀 어린 축에
속 하더라고요 거기가 내 나이 돌리가 제일 어리고
그리고 정대 우로 다 있는 거예 야 대한민국이 배우의 나라는 북한보다 더
크네 주식 시간이 되면 아 씨 그 물어보는
거예게 그 생들이 모여 앉아서 그 논쟁하는게 실질적인 낸데 학습이 되는
거예 내 앉아서 그게 배움이 되고 그
[음악]
교수분석 그 사람들이 말하는 데서 거기서
배움이 근데 신기한게 뭐냐면 언어가 똑같은 거예요 남북한 그 양봉의 한해
언어가 더라이 말하는 거 내가 금방 금방 알아들어 알아듣고 뒤 알 수 그 이해하는 거야 그거음 그 거기에 같이
다니던 그 친구 하나 그 사겠어요 내 나이 돌래 내보다 딱 한 살 이상인데음 그래도 양봉 경력이 한 2
30년 되는 분이 그래서 그 사람한테 밥도 사며 술도 사며 그 사람이 집에
양봉하는 그 양봉장에 거가 붙어 살다시피 2 3년 내가 그거는 못
살게 었어요 2 3년서 실습을 했네 그의 3년 정도 계속 그 집에 그
사람하고 같이 그러니까 아 이게 이제 됐다 이제 이제는 보이는구나 어
그다음부터 그도 양봉에 그래도 조금가 이 보였고 성공하기 시작했던
거 같아 아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뭐 왔지 그 사람이 아 처음에는 안 돼
주려고 하다 그 하도 북에서 왔는데음 그 살려고 너무 애쓰는게
아마 그게 그 눈에도 보이니까 아 알았어 내가 해 줄게 뭐 그리고
원래 기술자들이 자기 기술을 안 가죠 예 그 북에서 왔다 하는 거 하나 그
그분도 사람 좋은 분이네 어 참 좋은 사람이음 좋은 분이네 너무 좋은
사람음 괜찮게 내가 잘 산다는 이미지가 돈 많아서도 아니고 누구한테
빌지 않고 누구한테 그거 아니라 뭐 조금이 나름이 조금이나 베풀 수도
있는 조그만함이 그것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참 이쁘게 보 봐주는 거
같아요 금 지금 님은 오셨어요 아 우리 아버지 이는 아들 앞이랑 어
눈물 크게 안 보이셨는데 돌아가실 딱 전에 어 세상에 살기 싫다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나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 왜 왜 왜요 아 그래도 뭐 어떻게
알아요 아버지 고향 갈 수 있는 길이 있겠는지 아 그지 말라고 앞이 안
보인다 그 다음날로 단시 가는데 아 단식 그래요 야 한주 딱 단식하고
목숨 끊더라 아버지 그때 나이 몇 치어 70이 내 나이가 갑 때네 때
고향에 한 발만 데려 놓고 죽어도 원이겠다고 고향 땅에 가서 아 내가
태어나고 내가 자랐던 그 고향이 사무치게 그렸다고 아 한 발만
들어놓고 죽었어도 운이겠다고 그서 그리고 엄마가 보고 싶다고 그 70의
그 나이에도 엄마가 보고 싶다고 그때도 내가 철이 없었었나 봐 나는
그때 아 그거에 대한 깊이 있는 감정을 못 느꼈거든 내가 그 철이
없었다고 밖에 할 수 없는게 정말 많이 울었어
[음악] 근데 정말 아 지금 정말 생활이 너무
많 아 여기 여기 이만한 반쪽 당이
있다는 것만 정말 감사 감사해 난 열번 100번 어 이런 곳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거에 아 너무 만족하고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하죠 00번 감사하지 난 난
지금에 많 진짜 너무 좋고 너무 만족하고 아드님은 어떻게가
장착하셨어요 응 우리 아들도 그 뭐 여기와서 열심히
살았어네 정말 열심히 잘았어네 정말 너무 진한 감동 얘기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앞에서 촬영하면서 이게 눈물이 많이났습니다
아이고게 어 우리 꿀 이름이 뭐라고 했죠 백시 양반 꿀이야 백세 양반 꿀
세라고 이게 지우신 이유가 있습니까 그게 그 우리 와이프가 지운 이름인데
이게 그거 드시면 백살까지 건강하게 산다는 뜻이 아니까 좋다 백세 그리고
양반 양반 꿀 꿀도 이게 여기서만 나오는 구이에요 찔레 자이 찔레 자
꿀이라고고 세상에 이거 막 눈으로 보기만 해도이 꿀은이 대한민국 있어도
이게 알아주는 꿀이야 이거 이거 세상에 그러니까요 데서 요거 아카시아
꿀 요거는 진레 잡꿀 방꿀 요렇게 세 가지가 나와고 진레 잡꿀 정말
여기서만 나오는 어머 진짜이 귀한 거구나 예 그거 한병이 10만 원짜리 와 10만 원 우와 대박 우와 근데
10만 원 아버지 보이지 않아 얼마나 고급스럽고 맛있어 보여 보약같이 보여
드시면 응 참 맛이 투게 해요 진짜 오늘 너무 행복하다 얘들아 차렷 경내
온전히 서라 인사드려야 된다 야 더 너무 감사합 북강 중앙당 간부들
부럽지 않죠 에이 제가 더 더 센데요 예 더 세죠 우리가도 행보 가죠 자
마 거기 진짜 안 부러 여러분 오늘은 우리 진짜이 충남 괴산에서 백세 양반
꿀을 하고 계시는 예 종룡 선생님을 또 찾아서 만났는데요 어 스토리 쭉
들으시면서 어 많이 눈물을 흘리셨을 거라 생각이 돼요 자유를 위해
희생하시고 또 그 자녀분이이 땅에 오셔서 또 열심히 살아가면서 꿀을
지금 하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나 꿀 살 필요가 있다 하면은 꼭
우리 백세 양반에 전화 주셔 가지고 예 이렇게 구매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 대박 나시고 파이팅 아이고 좋은 일에 많
있어야죠 그냥 살아온게 아니라 참 참 너무 성실히 사는 탈북민들이 이렇게
산골에도 숨어 있고요 더심 속에도 숨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이 찾아 다닐게요 진짜이 아버님이 대는거
영웅이야 a
[음악]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