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6, 2025

2311 강은정 평안도여자 ‘강은정TV' 대표 -림일작가의 통일인터뷰 -

림일작가의 통일인터뷰 - [림일 작가의 통일인터뷰] - 강은정 평안도여자 ‘강은정TV' 대표 -



[림일 작가의 통일인터뷰] - 강은정 평안도여자 ‘강은정TV' 대표 -


탈북여성 최고의 유튜버가 되기까지...



최근 구글(Google)에 의해 폐쇄된 북한체제 선전용 유튜브 채널 2개는 일부 특권층만 누릴 수 있는 취미활동과 위락시설 등이 등장해 일반 주민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폐쇄사회 북한체제의 겉모습은 ‘조선중앙TV’가 잘 전한다. 그것도 모자라 세계적 개인 홍보방송인 유튜브까지 진출하려는 노동당의 행태가 놀랍다.

지난 10월 24일 북한서 굶주림에 시달리던 일가족 4명이 목선(경운기용 엔진을 달은 길이 7.5m)을 타고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왔다. 뗏목 같은 목선은 아프리카서도 보기 드물다. 김정은 정권이 계속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에만 신경을 쓰기 때문에 주민들의 고통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올바른 통일교육 및 정보를 가지려면 미지의 세계인 북한의 겉과 속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조선중앙TV’가 못하는 북한내부 소개는 남한의 ‘탈북민TV’(유튜브)가 한다고 보면 맞다. 최근 20만 명의 유튜브 구독자를 보유한 탈북여성, 강은정 평안도여자 ‘강은정TV’ 대표를 서울시 양천구 모처서 만났다.





- 유튜브 강은정TV를 소개해 달라.

2019년 8월에 시작했다. 당시 탈북여성 유튜버가 3명이었다. 물론 생활유튜브다. 어느 날 출석하는 서울OO교회 모 권사님으로부터 “은정 자매는 목소리가 너무 좋아요. 유튜브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하는 건의를 우연히 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도 여러 TV, 라디오 방송채널에서 MC로 활약했었다. 손에 든 휴대폰을 켜서 일상의 생활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다소 호기심이 갔다. 출석교회에서 북한선교를 하며 유튜브 수익금으로 중국 내 탈북자녀(고아)들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은 마음에서 유튜브를 시작하게 되었다.



- 처음 올린 영상물 내용은.

내가 탈북한 노정을 상세히 설명하며 거쳐서 온 나라를 일일이 직시했다. 해당 나라 국기를 화면에 넣어주고 리얼하게 설명하는 영상물이다. 그리고 하나원에서 처음으로 남한TV를 보면서 했던 걱정이다. 그것은 ‘뉴스를 보니 범죄가 많은데 이런 무서운 남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는 걱정이었다. 구독자들의 반응이 대박이었다. 댓글에 “그런 범죄는 극소수에 달하니 전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했다.



- 초기 조회 수는 얼마나 나왔는가.

유튜브 개설초기 제일 많이 나왔던 조회 수는 2천여 명이다. 주변에서 친구들이 다소 놀라더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냥 조급하거나 특별한 의식 없이 편안하게 방송을 했을 뿐이다. 아주 단시간에 게시물 조회 수가 급작스레 늘어난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내 아버지가 출연한 일상생활 내용(브이로그)의 영상이다.

우리 아버지는 평안도에서 평생을 사신 분이다. 북한 아버지들의 진솔한 마음을 구수한 입담으로 전하니 독자들이 너무 좋아했다. 하루에 4천명이 늘었다. 유튜브 시작 4개월 만에 구독자 3만 명 보유를 달성했다. 다소 빠른 기록이다.




- 특별한 게스트는 누구인가.

다양한 탈북민들을 많이 섭외하여 방송한다. 김OO 목사, 배OO 전도사 등이다. 모두 북송되어 북한감옥 수감 경력자다. 이들의 증언을 들으며 북한정권의 야만스러움에 다시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생명을 한 갓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북한정권이야 말로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 또 다른 감동이 있었다면.

탈북민 개개인이 대한민국에서 정착하며 느끼는 감정과 놀라움이 다르다. 그 많은 사람들의 사연 일일이 거론하기는 쉽지 않지만 공통점이 있다. 남조선이 이렇게 좋은 나라인줄 모르고 살았던 북한에서의 인생이 원망스럽다고 한다.

그리고 늦게나마 혹은 다행스럽게도 사람을 귀중히 여기는 남한에 와서 국민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산다고 하는 많은 탈북민이다. 그들을 보면서 내가 적지 않게 배운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하는 말인 것 같더라.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다.



- 가족(부모) 출연이 특이하다.

시청자들이 탈북민 유튜브 중 보기 드문 사례라고 한다. 의도적으로 한 것은 아니고 우연히 부모님에게 물어봤는데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감사하다. 부모님이 연세도 있으신데 그래도 현장을 따라 다니며 촬영에 협조해주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은 태어나서부터 오래도록 부모님의 신세를 지는 것 같다(웃음).



- 가족 영상 의미는 뭐라고 보나.

사랑이 아닐까 한다. 가족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남이나 북이나 가족이 우선이고 중요하다. 시청자들은 우리 가족 출연 영상을 보면서 북한주민들의 생동한 사투리, 생활습관, 사문화 등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것이다. 북한TV서 비쳐주지 않는 일반 인민들의 진솔한 생활모습은 탈북민들의 증언이 가장 정확하다. 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도 알아야 하지만 그보다 우선은 인민을 잘 아는 것이다.



- 탈북 유튜브의 특성은.

종편TV 방송에서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 ‘모란봉클럽’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북한의 실정을 알려주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본다. 북한을 전혀 모르는 많은 국민들이 탈북민들이 출연하는 TV방송을 보면서 ‘북한에 비해 우리가 사는 남한이 좋구나!’ 하는 생각은 분명하게 가질 것이다.

종편에서 못 다하는 탈북민들의 생동한 증언과 남한 정착 생활토크를 탈북민 유튜브가 대신한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탈북민 유튜브가 너무 많아져서 치열한 경쟁 속에 있거나 식상한 것도 단점이기는 하다.



- 탈북민 유튜버는 대략 몇 명인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약 200명 안팎이 아닐까 한다. 자고 깨나면 하나씩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웃음). 내가 시작할 때 5개 정도였는데 현재 수백 개 있다.
꾸준한 유튜버는 10여 명, 나머지는 1개 영상이라도 올린 유튜브다. 이 분야도 경쟁이 치열하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이 탈북만큼이나 힘들다(웃음). 최근 후원계좌 공지를 내렸다. 시청자들의 꾸준한 사랑과 구독으로 승부하겠다는 마음에서다.



- 고향은 어디인가.

1987년 평안남도 맹산군서 태어났다. 2004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양강도 대홍단군 기동예술선전대에 편입되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공연소품, 음악·방송설비 등을 승합차에 싣고 다니며 근로현장을 찾아가 경제선동을 하는 활동이다.

공연은 각종 경제건설 현장에서 거의 매일 오전·오후 각각 2시간 정도 진행하였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선전대 문화회관에서 연습을 가열하게 한다. 1년에 한 번씩 당국이 주는 선물은 중국제 이불이나 사탕1kg 정도. 내가 선전대에서 받은 월급은 800원 가량인데 그 돈으로 장마당(시장)에서 쌀 500g 사면 끝이다.



- 또 다른 경력은 무엇이 있나.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원’이 되려고 선전대 활동을 2년간 마치고 이후 대홍단군 발전소건설대에 입대하여 천수발전소 건설현장에 투입되었다. 작업은 산과 산을 뚫는 갱도 굴착, 광차를 동원하여 돌과 흙을 운반하는 것이다. 저녁 8시에 일이 끝나면 또 ‘충성의 작업’(야근)을 하니 그야말로 몸은 파김치가 된다.

산 속에 지은 숙소는 흙집으로 항상 춥다. 유리창이 없어 비닐로 창문을 했다. 세끼 식사배급은 언 감자 삶은 것 2~3개, 소금 넣은 시래기 국이 있으면 고급이다. 돌격대원 옷은 3년에 한 번 지급되는데 개인 부담으로 구입한다.



- 탈북동기를 말해 달라.

사회생활 5년간 북한주민들의 밑바닥 체험을 생동하게 했다. 중국에 가면 돈을 벌수 있다는 생각이 불같이 들었다. 중국에서 딱 6개월만 고생해서 돈을 벌면 고향에서 생활이 나아질 거라고 판단하여 2008년 1월 두만강을 건넜다. 정작 중국에 와보니 중국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남조선(한국)임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북한에서 너무나 세상을 모르고 살았음을 깨달고 사람답게 살고파 그해 12월 남한으로 왔다.



- 처음에 어떤 일을 하였나.

우선 돈이 필요했다. 이유는 고향에 남겨진 부모형제를 데리고 오겠다는 결심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하여 식당서빙을 했다. 그 일을 하면서 한 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가족을 데려 올 수 있었다. 처음 아버지가 무척 놀라며 거절했는데 끈질긴 설득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돌렸고 2011년 12월 온 가족이 무사히 한국으로 왔다.



- 정착생활 초기 어떻게 보냈는가.

전문 탈북예술단체서 한동안 활동을 하다가 어젠가부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15년간 각종 문화예술 공연 행사에서 수 백회의 사회(MC)를 맡아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다. TV와 라디오에 출연한 회수는 수백여 회. 이 지면을 빌어 저를 섭외해주시는 많은 행사 관계자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여러 분야서 통일안보 교육을 수 백회 했으며 종교단체 신앙 간증 등 다양한 분야서 꾸준하게 활동하고 있다. 많은 사회활동과 교육을 하면서 유용한 통일교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고마운 분이 있다면.

경기도 이천에서 ‘이천쌀 정미소’를 운영하시는 모 사장님이다. 지난 2021년 가을 코로나가 한창 왕성하던 시기, 유튜브 영상을 찍으려 현장을 갔었다. 초면인 나와 가족(부모)을 따뜻이 맞아주었고 촬영의 편의를 위해 농기계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북에서 온 ‘우리 동포’라며 살뜰하게 맞아 혈육 이상의 마음으로 대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 지금도 친척처럼 서로를 오고 가며 가까이 지내고 있다.



- 예비 유튜버들에게 하고픈 말은.

유튜브가 크게 자본(돈)이 들지 않고 쉽게 시작하는 장점은 있다. 돈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하면 나중에 실망이 클 것이다. 대중에게 공감을 주면서 그들과 한 식구가 되어 편안하게 소풍을 하듯 즐겁게 방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튜브는 보기와 다르다. 시청자들은 편하게 보는 그 영상은 제작자들이 꾸준한 창작의 결과이다. 촬영, 편집, 콘텐츠 개발, 제목설정 등 독한 연구의 노력을 기울이는 분야다. 그런 수고가 없다면 결코 대중의 신뢰를 받는 유튜브는 어렵다. 세상사는 사람의 진솔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생활유튜브의 생명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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