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6, 2025

[박예나 풀영상 2부]국정원에서 간첩으로 오해받은 북한아내 거짓말 탐지기에 그만!


[박예나 풀영상 2부]국정원에서 간첩으로 오해받은 북한아내 거짓말 탐지기에 그만!

강은정TV
273K subscribers

Subscribed

1.6K


Share

Download

Clip

Save

37,380 views  Mar 24, 2025  #강은정 #강사 #가수
간증, 강의, 공연, 강은정TV 출연 문의: 
kang22tv@gmail.com

#강은정#한국#가족#가수#강사#MC
Transcript
Follow along using the transcript.


Show transcript

강은정TV
273K subscribers
Videos
About

강은정의 인스타그램
67 Comments
Sejin Lifeforce 生命
Add a comment...

@병현최-j6s
1 month ago
예나씨 참이쁘고 선한 여성같아요 참 잘오셨네요 행복한 삶 즐겁게 사세요

13


Reply


@한중진-p3c
10 days ago
박예나씨 참 현명한 여성 같습니다.  낯선 곳에 와서 적응해나가는 
과정이 다른 탈북자들의 적응 과정에 모범 사례가 되겠네요. 
강은정씨와 나누는 대담 기술도 아주 좋아서 재미있게 영상 감상했습니다. 
남편을 비롯해 가족들 모두와 함께 부디 행복하게 잘 사시기 바랍니다.

2


Reply


@김병두-o8j
7 days ago
북한 세계1위  인권말살의 나라죠 사실나라도아니죠 오로지개인 위상주의 이제는 벗어났으니 자유 많이느끼시고 행복하세요

2


Reply


@창일고
1 month ago
박예나씨 축하드립니다 한국에서 남편과 딸을 만나고 참 행복하세요

8


Reply


@최범순-r6l
1 month ago
예나님 영상을 또 잘보았습니다 예나님 현모양처 이시네요 남편분과 따님 세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고 하시고자하는 모든 일들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7


Reply


1 reply

@무궁화-s9b
2 weeks ago
공짜는없어요 다 국민세금으로 하는 거여요 잘 정착해서 세금도 잘내고     열심히 살아가세요

2


Reply


@정해은.혜은
2 weeks ago
그렇게 조시해도 간첩이나왔으니  조사한분들의 심정도 이해해주시기바랍니다.  ㅗ늘의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하게된것오  그분들의 피땀의결과 랍니다. ㅇ앞으로온가ㅏ족이행복하게 사시기바랍니다

3


Reply


@정진호-h4z6e
3 weeks ago
부군 얘기부터 잼나게 들었습니다.  말씀 너무 잘하시고 책임감도 있으시고... 꼭 건강하고 화목하게 성공한가정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5


Reply


@이현덕-l7u
1 month ago
강은정님 박예나님 이방송 하루종일보게해주세요
두분의 말씀이 귀에쏙쏙 들어옵니다 너무 재밋어요 ^^

6


Reply


1 reply

@근수구
1 month ago
조예나 박예나 은정님의 예나님들은 어찌그리  말씀을 잘하시는지요

6


Reply


@김종묵-w8k
1 month ago
예나씨.
예나씨,첫 인상은  대한민국의 여느집 친근한
누나,또는 엄마의 전형적인 모습이고 참하고
수수한 ,착한 그런 우리민족의 피가 흐르는
멋진 분입니다.
정착 초기에는 어려웠 겠지만,지금 모습은 아주 친근한 우리이웃집 누나,여동생,엄마의 모습입니다.
늘 응원 할께요.
행복을 만배,천배 누리며 살아가요

1


Reply


@진리는뉴스TV
1 month ago
강은정님 저녁이라 잠을 자야하는데 언제 끝나요 ㅠ졸려서 자야합니다. 박예나님 한국에 오신것 대환영합니다. 
정치에는 중립하세요, 투표로 결정하며는 되지요, ㅎㅎ

6


Reply


@김원식-p7u
10 days ago
참 대단 하십니다.
여기서 생활한 사람도 어려웠을 꺼예요.
종류도 엄청 많잖아요.
처음부터 어려운 직장을 선택하셨네요.
가족 건강 잘 챙기시고 행복하게 살길바래요.

1


Reply


@duckhooh4360
4 weeks ago
많이 배우고 똑똑해 보이는 사람만 선별해서 조사를 심도있게 하는가 보네요. 아는게 많은 사람은 눈빛이 다르죠. 깊이가 있다고 해야할까?

3


Reply


@이지훈-s6w4d
2 weeks ago
게스트 말 정말 잘 하시네요 북한사람은 말읗 너무잘해요 생활총화 를 많이해서 그런지.....

2


Reply


@prcjhk
2 weeks ago
너무 참하십니다~ ^^ 남편분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네요

2


Reply


@gugolfer
4 weeks ago
예나씨, 정말 현명하게 남한에 적응 하셨네요 .똑똑하십니다 , 앞으로 스스로 잘 하셔서 꼭 성공하세요 , 그래야 목숨걸고 탈북한 댓가를 보상받잖아요 , 꼭 그렇게 될것으로 믿읍니다 , 예나씨 화이띵 !

1


Reply


@ertqw387
1 month ago
예나씨 아름답고 선하게 보입니다 

5


Reply


@백승국-s9w
1 month ago
영상 잘 보고 갑니다 
늘 행복하세요

11


Reply


@서성용-r1o
1 month ago
ㅎㅎ 두분의 야무진 대화 ...넘넘 좋아요

7


Reply

    
Transcript


왜 차가 지금 몇대 들어오고 몇대 나가는지 해보고 있어 어 어떤 차가
들어가고 어떤 차가 나오는지 보고 있어 솔직히 말하래요 북한에서 무슨 인무 받고 왔냐고 임무라니 무슨
인무인데요 저는 임무 바고 온게 없습니다 한쪽으로 울고불그 하다가 또 덜져서 또 자들을 와
시간에 뭐 면에 정해진 시간내 먹어야 되니까 자도 먹고 또어진 거 찢어
먹고 하다가네 [음악]
아주 우리음 예나 언니 와 인기가 버통이 아니에요
그런가요?네 네 저번 시간에 막 울면서 아버지에 대한 얘기하시면서 예
어 영상을 마무리했다가 오늘 다시 이렇게 또 촬영을 하게 되었는데요 어
근데 댓글 보니까 너무 신기한게 두 부부가 말을 다 재밌게 하는데 한쪽은
사트리가 너무 심하고 한쪽은 서울 여자래요 봤죠 댓글 봤죠 간혹 보는데
이게 좀 미망해 가지고 좀 쓱 제가 부끄러움을 좀 많이 타요 타는데 진짜
좋은 댓글들 다 남겨 주시고 또 영상도 잘 챙겨봐 주셔 가지고 너무 감사하죠 네 예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자 그러면은 언니 국정원에 이제
도착하셨잖아요 거기서는 어떤 인상을 받았어요 아
국정원에 도착을 했을 때는 저는 처음에 그리고 보이브 같은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맨 처음에 그런
생각을 갖고 들어갔죠 북한에서 그러잖아요 뭐 남산 지하실이 또 어떻고 안기부가 어떻고 이런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그래서 아 여기 들어가면은 우리가 북한처럼 가둬놓고
이게 신문하고 또 다 자기들이 원하는 답을들을 때까지 하는데 시설도 너무
좋은 거예요 그다음에 들어가자마자 단체복 다 주는데 단체복도 질이 얼마나 좋아요 그래 음 저희가 입어
보지 못한 것도 옷도 주지 제가 원래 고기를 안 좋아하는데 제육볶음도
맛있어 가지고 그 아가씨들은 다이어트 한다고 밥을 안 먹잖아요 근데 저는 그 거기까지 다 먹었어 그래서 국정원
나올 때는 제가 그 북한에서 감옥을 갔다 와 가지고 이게이 야인 상태에서
그때가 막 한 43km 44km대 왔었어요 어 지금도 말랐는데 더
말랐어요 네 네 그니까 거의 뭐 나와가지고 영양실적 걸려가지고 그
간호를 잘 못 받은 상태에서 또 재탈복을 하다 보니까또 오면서 저희 중국 라우스 걸치면서 밥을 많이 못
먹잖아요 못 먹고 고생을 하다 보니까 네 그다음에 기마다 맛있는 밥 하루
새끼 맛있게 주지 시설도 너무나 깨끗하고 서은 거예요 드디어 내가 대한민국당에 밟았고는 그거를 매 순간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데도 그 순간마다 계속 느꼈던 거 같아요 이게 실감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드라마나 이렇게
영화 같은 거 보여지면 우리가 딱 정해진 시간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때 되면 아 조금 한 시간만 좀 더
보여주지 그런 아쉬움도 있었는데 뭐 지금은 또 대한민국에서 워낙 이게 뭐 원없이
보니까 맞아요 북한 감옥을 생각을 하고 갔는데 아우 세상에 이런 데라면은 뭐
그냥 숙박을 해도 그냥 장기 숙박을 해도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아 여기는 참
이게 대한민국이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틀렸는데 진짜 너무 북한이랑 틀리구나
어 거기는 그런게 없잖아요 제가 또 교어받고 그러다 보니까 국정원 생활을 했는데
한 가지는 조금 그때 힘들었던 게 정은 지금 와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그러니까 저희 같은 경우는 남편하고 딸이 먼저 탈북을 했고 저희가 또 북송이 됐다가 왔잖아요
근데 북송이 돼서부터 대한민국으로 오기까지 너무 단기간에 빨리 돌아서서
대한민국으로 왔나 봐요 그러니까 보통 보면은 그 북한 보위브에서 풀려하는 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고 그리고
또 다시 나오는 것도 탈북이 우리가 말처럼 쉽지가 않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그게 바로
탈북에서 나오니까 좀 집중적으로 조사를 좀 더 빡세게 했던 거 같아요
음 제가 사실을 얘기했는데도 어떤 때는
아니라고 막 얘기를 하고 하니까 어떤 때는 뭐 조사 설문지 쓰다가 막 눈물을 뚝뚝 떨고
분명히 나는 그게 솔직히 저희가 살면서 하도 험란한 일 많은 일들을
겪었다 보니까 어렸을 적부터고 저희가 그 태어나서부터 부모님 때부터
살아왔던 거를 다 쓰잖아요 기억이 안 나는데이 희한하게도 저 사실 저희 1인실이잖아요 들어가면 다 기억이
나는 거예요 기억을 살려 가지고 손가락으로 몇 년도 입학을 하고 몇 년도 몇 년도 졸업을 하고 반 선생님
이름은 누구고 우리 반 친구들 해서 나름 성실하게 다 적고 조사도 받고 했는데 나중에는 그 거짓말 탐지기까지
하더라고요 저희 기수에 그때 100명이 됐었는데 거짓말 탐지기 한
사람이 한 세 명 정도 됐어요 근데 그때 저희 그 하셨던 분이 되게 저를
깐깐하게 깐깐하게 하시더니 오늘날 제가 창문에 내가 내려다보고 있는데 하필이면 창문 밑에 차들이 이렇게
주차가 돼 있는 주차장이었어요 그래서 저사받다가 모래 아프니까 창문을 내다
보면서 아 여기는 참 차도 좋은게 많고 차자리도 좋게 라인을 딱 이게
해가지고 너무 좋네요 딱쳐가지고네 그리고 시간이 되면은 어김없이 주차를
하고 차 뺑 누르고 들어오고 너무 부러운 거예요 그래서 저는 지금
하영없이 차구경을 이렇게 하고 있는데 조사관 샘이 오더니 말투가 딱 이래요
왜 차가 지금 몇대 들어오고 몇대 나가는지 해보고 있어 어 어떤 차가
들어가고 어떤 차가 나오는지 보고 있어 거 본 거야 올려다봤나 cctv 있나 cctv가 있었나 봐요 우리
같이 온 사람들끼리는 야 여기가 산지 사방다 cctv래 근데 저희는 안
보이잖아요 여기는 우리가 이렇게 까만색으로 이렇게 동그랗게 보이는데 거기는 보니까 안 보이잖아요 아 저는
아닌데요 그냥 밖에 구경을 했는데 그리고 샘은 나갔는데 그 순간에 그게 그렇게 서럽더라고요 혼자서 펑펑
울었어요 어머 그리고 억울했겠다 억울했죠 저는 전혀 그쪽 관심이
없는데 그리고 그 이후에 더 충격적인 거는 선생님이 그 이후에 저
얘기하는게 그래요 더 솔직히 말하래요 북한에서 무슨 인무 받고 왔냐고
언니가 어 좀 그래 보였나 보다 그랬나 봐요 그래서 임무라니 무슨 임무인데요 저는 임무밖고 온게
없습니다 했더니 아 그러면 임무 말고 하단모해 이제 하나원 나가서 뭐 어떤
거를 알아보라고 하든지 누구를 만나라고 하든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라고 했던지 그런 말을 시킨
사람이 없냐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음 어 저는 그런게 하나도 없잖아요 없는데 이분들이 이렇게까지 얘기를 할
정도면 저를 얼마나 그 속으로 우심을 하고 있었겠어요 그래서 저는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그랬어요 자
선생님들도 아시다시피 여기 우리 남편하고 딸이 있는데 저는 남편하고
딸을 찾아 목숨 걸고 왔습니다 음 선생님들이 생각하시는 그게 간첩 저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겠는데요 음 제가 우리 남편하고 딸 목숨을 걸고 담보를 할게요 저는 그런 일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더 말을 안 하더라고요 저 남편하고 딸 목숨 담보로 걸었거든요 저희 조사 끝나면 1인실에서
나오잖아요 그다음에는 뭐 우리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얘기하고 또 같은
기술 얘기하니까 재밌게 지냈죠 보통 그 간첩으로 파견이 된다 하면은
가족을 보내진 않죠.인지를 인지를 꼭 남겨 둔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분들은 또 그게 직업이고 그렇죠 이해가 되는게 뭐냐면 저도 몰랐는데
간첩이 그렇게 많대요 그렇더라고요 사람들이 넘어와서 탈북민처럼 하는
사람도 있고 실제 북한 간첩들도 있다고 하죠 아 그러니까 그 제가 너무 놀랬던게 우리 캄버디아로 제가
왔거든요 근데 그때 부부가 왔거든요 근데 국정원에서 그 아내가 추방이
돼서 나아갔어요 아 그러니까 탈북민들이 가면 혜택이 있다는 걸 하니까 그걸 공부를 해 가지고 북한
사람을 남편으로 이제 꽃 이렇게 만들어서 위조로 짜고 이제 위장에서 들어왔던 거예요 그러고 나서 그
아저씨가 어 우리가 내가 정착해서 한 1년 만에 네 대출 2천만 원 싹
받아 가지고 북한을 자진해서 갔다는 거야 여기 와서 간첩질을 안 했는지도
의심스럽 그러니까 그러니까 때리면 안 되겠지만 정말 이런 혹독한
치밀한 조사가 이루어지는 거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렇죠
그래서 그때 저는 진짜로 억울했어요 이게 아니 하필이면 이렇게 많고는
사람 중에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하지 음 안 그래도 북에 저희 아빠도 두고 왔고 또 가족이 남겨진 가족은
있잖아요 그니까 내가 여기 대한민국 발을 드러났다는게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실감이 났고 또 아빠랑 이제
다시는 못 보겠구나는 그 서러움과 슬픔이 있는데 자꾸 이렇게
간첩하고 역하되니까 말만 들어도 심장 떨린나 거짓말 탐지기 하는 날
있잖아요 저는 떳떳한데 오늘 거짓말 탐지기 할 겁니다 미리 얘기를 해 주시더라고요 근데 그게 뭐 여기다가
뭐 꽂고 이렇게 하는데 괜히 이게 손에 땀 나는 거 있죠 어떻해 속으로
아 이거 이러다가 이게 저기 기계가 워작떡 나 가지고 아니했는데 예로 이게 판명이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괜히 쫄았던 기억이 나요 참 왜 나만 힘들게 하지 했는데 지금 내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제 정착을 해서 우린 당당한 대한민국이잖아요 그래서 나라의 국가 안보나 또 간첩들 이런
거 봤을 때는 그 당연한 거구나 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래저래 어쨌든 마음 고생을 좀 했네요 아이고
그러면 국정원에서 남편은 안 들어왔어요 아 면를 딱 한 번 했어요 네 남편하고
딸하고 저희 신우하고 신우이 남편이 이렇게 같이 면를 왔더라고요 어머 몇
개월 만에 만난 거예요 거기가 제가 한 1년 한 1 2개월쯤에 만났죠
세상에 네 만났는데 어땠어요 면에도 이렇게 면에 온다는 얘기를 미리 안
해요 밥 먹고 있는데 저기 잠깐 산책 좀 하시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산책을
하는데 운동장이 아닌 그 건물 쪽 방향으로 가더라고요 여기서 아 뭐지
산책을 피고 해도 아직도 나한테도 캐물를게 있나하고 조금 섬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쫄아 가지고
갔는데가 보니까 남편하고 그 면실에 이게 와 있는 거예요 딸이랑 딸내미도 봤죠
딸내이 와가지고 순간에 너무 이게 갑자기 드리치니까 당황해가지고 딸내이
이름 부르면서 엄마야 했는데 딸이 그동안 못 봤다고 멋저게 하더라고요
1년 조금네 엄마하고 한 번은 이렇게 안기는데 저는 이게 진짜이 상황에 너무 이게
막 꿈 같고 실가면 여기 내 딸이 만나고 좀 진짜이 생각이 많은데
애들은 애들이니까 한번 엄마 하더니 옆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막 또 게임을
하더라고요 거 물총 한국이 정착했다고 폰에 맞뜨려 가지고 남편은 반응이
어때요 남편은 야 이게 꿈이나 생신나도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다고
부등한 않고 한참 울었어요 너 둘이 이러고 말 있으면 된다 이러.네 이러고 둘이 부득해갖고 나도 그랬어
하니까 남편은 나는 너 진짜 못 보는 줄 알았어 우리 딸내이 저거 어떻게 키워야 되나 정말 마음 고생 많이
했고 너 다시 못 본 줄 알았어 그리고 자기가 괜히 미안해서 하루하루를 너무 힘들게 살았대요
그냥 막 울면서 부둥 않고 한참라도 시간이 또 짧더라고요 근데 또 그 와중에 제가 좋아하는 건들 다 사
왔어요 뭐 제가 자두를 좋아하는데 자두에다가 그 겨울에 네 야 대한민국
자에다가 오징거에다 아니 그때 놀랐어요 아니이 계절에 자두가 왜
있어 이때요 와 자두도 있단 말하는게 있더라고 세상에 북한은 자두가
탈만하잖아요 영 그도 자기 철에 뭐 자기 철에 먹고 그다음에 가실에 이게
벌레가 껴 가지고 한 열을 사면은 거의 절반은 보여야 되잖아요 벌레 먹고 썩고 그지 근데 그 겨울철에
싱싱한 차도 이런 거를 사 갖고 왔더라고 와 못 먹자 먹 깎고 들어가잖아요
그래요?네 네 음식물 반입이 안 돼요 아 한쪽으로 울고불그 하다가 또 덜서
또 자두를 하고 시간에 뭐 면에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되니까 자도 먹고 또어진 거 찢어 먹고 하다가 그러다 보니까 한시간 넘게 한시 그때
며느 시간에 한시간 던 거 같아요 한시간이 똑딱 지나가지고 구석에서 먹겠다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근데
너무나 꿈만 같아서 진짜 지금도 그날에 그거는 생생이 기억나인데
꿈인지 생신인지 진짜 헛갈릴 정도로 야 애초가라고 이제 또 바꿔야 되겠다
뭐 지금도 한결 같죠 뭐 가끔 네 가끔 가끔 생각하고 네
어떡해 야 진짜 그날은 인생에서 제 절대 지을 수 없는 날이겠어요 네
우리 김철 우리 남편분께서는 네 얼굴이 좋아지셨던가요 그때 삐쪽
말랐더라고요 자살하려고 했잖아 한강에 가서 마누라 못 만나는 줄 알고 강다리에서 빠져 죽겠다 그래도
한강다리가 보지도 못했어요 근데 한강다리는 알아서 한강다리에서 빠져 죽겠다고 말 뉴스에서 한강다리에서
자살한 사람들이 많다는 건 그때 들었으니까 그러니까 저랑 있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볼살이 있고 푸단한 남자였는데 아니 대한민국 가서이 벌이 쏙
들어갔다 속으로 뭐 뭐야 대한민국 먹고 살기 좋다더니 저 사람 왜 말가지 밥 뭐도 먹고
살았잖 어 우리 아파했더니 아프지는 않대요 그만큼 마음 고생을 많이 했나 봐요 그렇지 들어보니까 많이
힘들었겠더라고요 딸 하나 데리고 네 아까 항상 저희 그 있을 때 제가
북한에서 중국 손전하기 해 가지고 오기 전까지 남편이랑 전화 통화를 했었거든요 했는데 항상 하는 말이고
나는 소문이 하나 있다고 뭔데 했더니 야 여기 밤에이 길거리에 불빛이
얼마나 밝은줄 알아 나는 네가 한국에 오면은 밤에네 손 잡고 여기 한번
걸어보는게 서운이래요 어머나 아 그래가지고 나는 그게 이게 대한민국 밤거리를 잘 모르잖아요 아니 그게
무슨 소원인데 아니 뭐 하다못해 뭐 뭐 큰 집에서 살고 싶다던가 아니면 차 타고 어디
간다던가 이것도 아니고 그게 아마 소박한 소원이었나 봐요 그냥 밤거리게 가로동 불빛 밑에서네 손 한번 잡고
걸어보는게 소원이라고 그니까 그 소리를 듣고 더구나 이게 재탈북을 저
솔직히 한 번에 겪었으니까 두 번은 좀 힘들잖아요 근데 그렇지 무서워서 네 그래서 더 연기가 나고 결심이
섰던 거 같아요 야 진짜 사랑은 정말 북한의 어떤 공포와 철저망도 못
막네요 어쨌든 상봉한 거 축하해요 세상에
[음악] 국정원에서 그 시내 구경 안 시켜져요
아 육산빌딩 갔어요 그때는 육산빌딩이 제일 높아 가지고 육산빌딩게 뭔지 뭐 아무 정보가 없잖아요 그래서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를 이렇게 지나가는데 너무 멋있는 거예요 이야 이게 진짜
드라마에서 보던가랑이 뉴스에서 봤던게 진짜 많네 오기를 잘했다 중국에서
봤던 그러면 정말 잘했다 했는데 조금 놀랐던 거는 건물마다 간판이 너무
타닥 붙어 있는 거예요 근데 북한은 그런게 없잖아요 그냥 뭐 아파트 3 4층짜리 딸랑 하나 있고 게이지들이
헤행한데 이거는 건물 하나에 요만한 간판 요만한 간판 있으니까 적응이 안 되다고 대체 저 간판은 몇 층이고 몇
토실이라는 거예 아니면 저기 사는 사람들이 거주를 하느라고 붙여 놓은 거야
그 3빌딩을 갔는데 또 사람들이 어디서들은 정보는 있어 가지고 그 가면 맛있는 음식이 많대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끝도 없이 올려가는 거예요 귀가 멍해지는데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 봤잖아 그 높은 거충 그러니까 너무 올라가니까 키도
멍하지 처음에는 이게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 밥 먹는 그 허실에 딱 들어갔는데 미리 테이블이
다 이게 세팅이 되어 있더라고요 진짜 기빈으로 대섭받는 느낌 그런 장면은
우리가 저거 북한의 TV에서 볼 때 뭐 김혜성이 저 다른 나라 그
대통령들이 왔을 때 연애 만찬상 그 그런 거 그때 북한 뉴스 뉴스에서
그거 봤잖아요 뭐 외국나라 오늘 대통령이 오셨습니다 하면 이게 테이블이 쫙 있고 컵이 있고 이런 걸
봤는데 우리가 지금 그걸 받아보는 거 야 이거 김일성 김종일이야 부럽지
않네 우리도 이런 날이 있는데 그다음부터 음식을 먹으라고 하는데 피를가 봤어야죠 지금 두리 이거를
지금 어떻게 먹나 싶어 가지고 음식 나오기를 앉아 기다렸어요 그랬더니 선생님들이 여기는 기다리는게 아니고
가서 드셔야 됩니다 얘기를 하더라고요 서서 먹어야 네 근데 몰랐어요 저는 그냥 이게 다 갖다 주는 줄 알았어요
부패를 경험을 못 해 봤어요 네 그래서 접시를 가지고 갔는데 어머 세상에 음식까지가 몇 시가지가 되는데
너무 한거하니까 이거 뭐를 집어야 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서 아 이거 눈치를 보다가이 저희
말고도 그때 한국 사람들 많이 이용을 하더라고 그 사람 보다가 그 사람들이 집으면
따라가서 하나씩 집었어요 근데 이게 또 패는 우리가 하나씩 집어다가 여러
번을 먹는 걸 또 모르잖아요 어 그러니까 지금 어느 사람이 집면 저게 맛있겠다 싶으면 그것만 또 한 이만큼
담고 이만큼 담고 해서 결국은 한 접시에네 가진가 다섯 가진가밖에 못 담았어요 자리가
없더라고요 눈이 음식은 많은데 이게 여러 개를 담다 보니까 아 이게
아쉽네 일단 먹어 보자 했는데 그게 욕심이지 이게 위가 작잖아요 칼국민들이 워낙 그 땅에서 못 먹고
하니까 이게 위가 다 작아졌잖아요 응 그렇지 그래서 그거를 먹고 그 이후부터는 맛있는 걸 하나씩 하나씩
가져면 끝내 거기 있는 음식을 다 못 먹어 봤어요 근데 그때 그 경험이 지금도 아직 제가 육산빌딩된 그
이유를 못가 봤거든요 너무 비싸서 그래서 그때 아 그 음식도 지금도
눈앞에 오른거리는 게 아 한번은 꼭 가족들이랑 가보고 싶다 예 저는
그때가 진짜 신세계였어요 아 그죠 거기 육산 빌딩에 올라가면은
정말 또 다 내려다 보이고 그러잖아요 한각 내려다 봤어요 안각만 보다가 못
봤어요 못 봤어요 너무 이게 쫄아 가지고 멀리는 못 보겠더라고요 네.이
이 차하고 사람이 보인다고 거짓말하는 요만큼 보이는 거예요 진짜 떨어지면은 뾰도 못 추를 것 같은 거 아 무서워
그래가지고 밥 먹을 땐 좋아 맛있는 놈 많이 먹고 그리고 내려다 보라고 해서 내려봤는데 순간 이게 심장이 확
쪽으로 들더라고요 여기 사람들은 이렇게 높은 데서 무슨에 살고 여기를 왜 살지 했는데 여기 정착을 해서
보니까 아파트도 요즘은 거충 사는게 로얄층이고 그 뷰 좋은게 다 좋은 거더라고요 그러니까 너무 감사하죠
솔직히빌딩에 가서 이게 식사 한번 하고 이런 것도 대한민국분들 중에서도
정말 특별한 날이거나 비즈니스로 가지 않는 한 그런 데를 많이 가는 분들은
없는 걸로 제가 나중에 알았는데 그래도 탈부인들 왔다고 그 귀한 데를
대접해 준게 지금 생각해 보면 눈물나게 감사한 거 같아요 맞아요 그때는 진짜
어리둥절해가지고 그냥 얼떨결에 가서 진짜 대접받고 갔다 이런 느낌 정도했는데 제가 이젠 여기 와서
10년 넘게 저희도 맛벌이 하면서 사는데 진짜 내돈 갖고는 손도 못 가겠더라고요 그러 보니까 아
대한민국에서 그만큼 우리 탈북민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주고 그만큼 많은
지원을 해줬구나 이게 세삼 느껴지는 거 같아요 맞아요 어쨌든 또 하나의 좋은 경험을 했네요 그러면 하나원은
어땠어요 어 하나원에 오니까 하나원은 그나마 또 거 저희가 한국 생활에 관해서 정착 내용 교육 같은 걸 많이
하잖아요 그게 그 일단은 컴퓨터로 이거 타자 배우고 한글 배우고 이메일
만드는 방법 배우고 이게 너무 신기했어요 이게 언제부턴가 그걸 하고 싶었었거든요 tv나 드라마에서 보던
걸 내가 직접 다치고 이메일 주소라게 있어 가지고 그쪽으로 원하는 서류나
사진이나 보낸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음침에 교육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국정원에서는 환자들이 별로 없는데 하나 가니까 대발수 한 8,9%가 다 환자들이더라고요
사람 머리 아픈 사람 그 근데 그 좋은게 시스템이 무료로 저희가 이빨
없는 사람들은 치아 치료 다 해주고네 한약이 비싸더라고 여기 와서 보니까
위병 있는 사람들은 한약 다 치료해 주고 그 하나 시스템이 진짜 이게
우리 탈북민들이 너무나도 이게 많은 고생을 했잖아요 북한에서부터 했었고 중국에서도 했었고 그러니까 그 병든
마음과 몸을 치유해 주고네 그런 곳이더라고요 하나 그러니까 한마디로
여약해서 말한다면 그냥 신정집 같은 자원은 우리가 대한민국에 와서 부모가
살던 뭐 친정집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진짜집처럼 우리가 이제 앞으로
살아가야 될 것들 해야 될 것들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다 가르쳐주고 배워주고 정착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다 가르쳐 주잖아요 또 병치를 해 주고 그죠 진짜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또나 저는 감동받은게 나올 때 다 주잖아요
이부자리 주지 그다음에 옷도 또 주잖아요 일체 다 주는 거야 신발도
주지 그다음에 동복 패딩주지 그다음에 벨트부터 지갑까지 다 주는 거예요
그렇지 어 북한에서는 솔직히 정부나 이웃들한테 우리가 신발 하나 옷 하나
선물을 못 받잖아요 거기 시스템이 너무 열락하니까 말로는 다 해 대한민국은 실천으로 한단 말이야
맞아요 진짜 한두 사람도 다니 그 많은 사람들을 속옷부터 시작해서 다
주는 거예요 그것도 옷을 거르잖아요 본인들이 마음에 드는 옷도 자기 스타일이나 컬러도 거르고 공짜로 주는
거.음 만 해도 감사한데 그거를 그렇게 무료로 주는 거예요 진짜 와 대한민국 최고다 빨리 나가서 열심히
살아야지 그 하나원 안에서 저녁만 되면 그저 그 공동 전학기 줄을
서잖아요 어떻게 매번 통화를 했어요 남편분이랑 그렇죠 그냥 일요일 되고
저녁에도 하고 짠만 하면 했죠 아어 근데 남편이 그때는 이사침 일을 할 텐데 제 전화는 일하다가도 받고 짐
옆으로 밀어놓고 받았대요 아이고 항상 기다려요 그러니까 한 번씩 전화할
때는 몇 시쯤 하자 이렇게 약속을 하거든요 가끔은 제가 약속을 안 하거든 막 어떨 때 번호를 눌러요
배번 봤더라고서 되게 달달하게 연애를 했네 대한민국에 와서 네
그러니까 다시 북한에서도 그런 연애 못 해보지 전화로 그죠 네 북한에서
연애를 해도 실제 만나서 이게 사전에 우리가 뭐 전화 갖고 연락 체계가 있어 가지고 뭐 어디에서 만나자
공원에서 만나지는 데이트 장소나 약속이 없잖아요 근데 하나만 해서
신적집 같은 데서 전화를 해 가지고 남편하고 몇 만나면 또 만나면 달콤한
얘기를 주고 받아요 그때가 제 2에 연애를 또 했던 거 같아요 와 진짜
막 설레기 설레하고 빨리 나가고 싶고네 이제부터야 진짜 이제부터이 대한민국
사회 뚜껑을 딱 연 거예요 맞아요 집을 갔을 거 아니에요 맞아요 어땠어요 그날 남편이 집부터 먼저 안
가고 주민 센터에 저 데리러 왔더라고요 차 타고 그리고 집으로 안 가고 시어머니가 살아가지고 그쪽에
가서 뭐 축하 파티겸 뭐 밥 함께 맛있는 거 먹고 시어머니 생사고라
같이 했잖아요 한국에서 상봉했을 거 아니야 신의 분들이랑 어땠어요
상봉하고서 시험 또 부둥한 울어요 야 그때 우리 그니까 그 부둥한 울면서
내가이 대한민국당에 먼저 오긴 왔지만 네가 빨리 따라 못 쏘면은 또 그
길이 막히면 너 못 보고 살까 봐 엄청 시어머니해도 마음을 많이 졸렸대요 괜히 내가 먼저 와 가지고
내가 따라가지 못하면 또 아들이 내회를 또 갈라 놓은 거 같고 우리 딸내이 또 엄마 없는 자식 만들 거
같고 해가지고 마음 저리시고 울고 계셨대요 아이고 그니까 그 어머님 보시기엔 얼마나 짠했겠어요 아들이
자기 배우자 없이 또 딸내이 됐고 살고 하는게 어머니 입장에서는 너무
짜는데 진짜 부둥한고 울었어 그니까 옛날 북한 보위부에서 생겼던 것 완전히 혁명 동지잖아 전우예 전우
그다음에 또 집결소에서 고생했던 거 나와서도 같이 했던 거 밤새 어머니
우리 그때 그랬었죠 그랬지 음 그렇지
밤새 잠을 못 자고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야 감격스럽네요 근데 어머니가 참 똑똑하신 분이요
되게 유식하세요 야 정말 조금이라도 이런 약 나약하신 분이면 두 분이 그
북한 보위부에서 살아나오셨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맞아요 그러니까 저희 두 명 중 진짜 한 명만
흔들렸어도 저희는 벌죠 와 결국에는 이렇게 다 성공을 해서 네 신우이
분들은 어떻게 어떻게 알아보겠던가요 대한민국 물을 너무 많이 먹어 갖고
뭐 알아보겠더라고요 너무 이뻐져 가지고 그다음에 옷도 세련되게 입고 하니까 못 알아보겠더라고요 그분들이
노력을 안 하고 또 뭔가를 안 했으면은 저희 삶이 달라진게 없었겠죠
그렇죠 집으로 왔는데 아이 밑에 1층에서 딱 엘베를 누르니까 집까지 그냥 바로 한
번에 쉬고 올라가는 거예요 엘리베이터 와 진짜 신기했거든 북한에서 엘리베이터 좀 못 타 봤거든
평양에머니가 살아가지고 평양에 갔는데 전기가 안 와가지고 엘리베이터가
거장나면은 걸어다니기 힘들다고 큰어머니가 어에 집을 잡았었거든요 맨날 걸어다녔던 기억밖에 없어요
평행에 가면은 근데 우리 대한민국 오니까 아니 우리 집도 엘리베이터 그냥 충만 딱 누르면 순간에 <샥
올라가 버리는 거예요 순간에
들어갔는데 그거도 남편이 저 온다고 나름 이게 가정 가정 제품들 뭐 TV
다 있고 냉장고 사 놓고 뭐파 사 놓고 있을 건 다 있더라고요 가스
레지 있고 전기밥솥 있고 와 와 이거 자기다 산 거했다네 그래
내가 샀지 너 온다고 제가 살 만한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니까 들어가서
그냥 진짜 밥만 해 먹고 살 정도로 다가져 있더라고요 너무 행복한 거예요 와 내가 이게 진짜 이게 꿈이 꿈
꾸는 거 아니지 했더니 무슨 꿈은 무슨 꿈 이제부터 우리 둘이 여기서 살면은 되지 그니까 이게 머릿속에
그냥 집 있고 뭐 있고 살 정도는 되겠지 했는데 너무 상상 그 이상인 거예요 뜨밥을 보냈
[웃음] 기억이 안 나요 [음악] 아 기억이 왜 안 나지
너무 뜨거웠을까요 아이고 귀여워 가지고 기억이 안 나나 봐요 저 뭐 얼마나 행복한 첫
대한민국에서 첫날 밤이었겠어요 예 그죠 우리다 딸내 버병이 있었으니까
어땠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때 구로부터는 진짜 달콤하게 꿈
같은 생각 보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부러운게 없더라고요 내가 지금 제일 부자고 내가 제일 행복하네 맞아요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진짜 대한민국에 와서물참물 설거지하기 좋지 빨래도
세탁기가 다 알아서 해 주지 겨울에도 이게 꼬무장갑이나 있어요 없으면 그냥
맨손에 손 호호 불러가면서 빨래 방망해로 손빨래.음 아 어떻게 살았을까 너무 감사한 거 같아요 아
세상에 가끔은 저는 그래요 응 아 지금 내 동창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내가 거기 살았다고 하면은 지금쯤 어떤 모양으로 살고 있을까 아니면
살아나 있을까 그렇지 그런 생각을 되게 많이 해요 맞아요 야 진짜
어쨌든 너무너무 축하해요 응 어쨌든 이제부터 정말 대한민국에서 진짜이
드라마 같은 두 부부의 아름다운 생활이 시작이 됩니다
그 두 선잡고 가로등을 걸어봤어요 대한민국 걸어 네 네 그냥 공원도
아니 그냥 아파트 아파트 밑에만 가도 이게 가로등이 멋있게 이렇게 켜져 있는 거예요 공매를 한 세 네밖에
돌았던 거 같아요 그 그 남편이 내가 이걸 얼마나 하고 싶은지 아냐 응
왜 했더니 밤이면은 혼자서 이게 외로움과 또 걱정과 잠이 잘 안 올
거잖아요 그래서 밖에 나와서 이렇게 속상하게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있다 보면 뭐 연애하는 사람 부부리 이렇게
막 손 잡고 가면서 얘기하고 하는게 그게 그렇게 부럽더래요 다른 건 다 안 부러운데
그래서 진짜 그걸 꼭 해 보고 싶었대요 그렇게 하더니 나 이젠 원이 없다 어 나 나 진짜 너 안 하면
한강이나 진짜 빠져 죽으려고 했어 세상에 정말로 했더니 진짜야 나
왔으니까 하는 얘기지 솔직히 말해 봐 딴 여자 손을 받아 가지고 세장을 가려고 했지 그렇게 찔렀는데 안
넘어가더라고 찔렀는데 아니야 난 너밖에 없어
이러고 그 이유를 그렇게 참 모든게 대한민국에 발 들르는 순간부터 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던 거 같아 예 그죠 음 참 그러면 나오셔 가지고 이제
일을 해야 되잖아요 그렇죠 북한에서 하고 싶었던게 제가 직접 옷을 재단을
하고 봉제하고 해계 쪽이 제 꿈이었었거든요 그래가지고 바로 그냥
꿈을 찾아서 예 해계 쪽 배우고 컴퓨터 배우고 뭐 한글 파워포인트
엑셀 이거를 배우고 한쪽으로 컴퓨터도 배웠어요 그때 제가 3월 말에 나와서 7월부터 8월까지는 그 취업 성공
패키지에서 교육을 받고 8월 달부터 바로 학원을 들어갔어요 6개월짜리 직업 전문학교 네 거기 들어가서
했는데 그래서 거기서 공부를 해서 어 핵계 자격증 따고 예 그리고 PC도
또 마스터 자격증이라고 해가지고 또 주는게 있더라고요 그거 따 가지고 졸업을 하니까 2월이더라고요 8월
달에 들어가서 그 2월에 나오자마자 또 자동차를 로망의 차를 몰아야 되지
않습니까 네 필기 보고 도로쟁하고 운전면을 땄어요 운전면 따고 근데
이게 생각보다이 탈복민들이 좀 취업에 문턱이 나아요 취업을 하기 전에 이게
좀 알바를 해 보려고 동네 마트에 갔어요 동네 사장님이 제 말투를 딱
들어보더니 중국인이세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 아니요 저 탈범민인데요 아
저 여기서 열심히 일할 건데 사장님 받아 주시면 안 됩니까 했더니음 어신지 얼마나 됐어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 지금 한 3 4개월 차인데요 했더니 조금만 더 생활하시다가 나중에 오세요 그러니까
그냥 좋게 거절을 한 건데 우리가 대한민국에 접했으면 어렸을 적부터 모든 생필품이나 먹는게 익숙해졌을
텐데 저희 크게 없잖아요 마트에 가면 얼마나 다양하게 많아요 그죠 아우 세지 못하지 네 네 근데 그거를
모르는 상태에서 마트에서 일을 하겠다고 했으니 사장님 입장에서 얼마나 항당하셨겠어요 근데 좋은 말로
그냥 조금만 더 적응하다고 오세요 돌아서면서 아 잘렸구나 나 그냥 면접
면접도 보기 전에 잘렸네 그니까 그때 그렇게 하고서 할 수
있는게 그나마 공부시켜 주겠다고 할 때 자격증 따 가지고 내가 할 수데
그게 제가 자격증을 가져도 이게 또 이력서 쓰고 뭐 입사지원서 쓰고 이게 되게 어렵잖아요 그니까 하나원에서
우리가 결국을 그 미리 연습 같은 거 하잖아요 근데 연습을 해도 저희가 이게 솔직히 뭐 경력 같은 것도 없고
뭐 스펙 같은 것도 없고 아 뭐 그냥 간단한 자기 속에서도 뭐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취업 성공 패키지 직업 알전해졌던 거기 가서 저 취업을
할테니까 그냥 좀 소개시켜 주십시오 해서 거기서 이게 이력서가 다 써 가지고 그쪽에서 연계해 주는 업체로
취직을 했어요 그래서 3월 달에 어 근데 그 업체에서 얘기하시는게 자격증 뭐 있어 해서 아 저 PC 컴퓨터도
다 자격증 닦고요 그리고 저희 해계 쪽 있습니다 했더니 운전할 줄 알아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제가 운전할
줄는 모르는데요 일단 면허는 다음 주에 이제 면허증 나옵니다 그 미리 안 나오고 지금
시험 결과가 나올 때 저 시험 매느증이 있습니다 일단 그래요 이게 해계 쪽이 하다 보면 이게 다닐 일이
많으니까 운전은 대한민국에서 필습니다 얘기를 하더라고요 예 그래서 네 저 무조건 운전하고 다닐 겁니다 그리고
첫 직장을 취직을 했죠 아 거기가 뭐 하는 직장이었어 생활용품 도선의 업체 아 진짜요
그 첫 첫 직장에서 제가 거의 한 5 6년을 일했죠 5 6년을 일하고 근데
저는 입사를 처음 해봤잖아요 근데 드라마랑 보면은 그 회식되는 막
상사들이 막 술 주면 다 먹어야 되고 막 취해 가지고 막 이런 거를 드라마에서 많이 봤어요 근데 입사에서
두 번째 날에 회사 해식을 갔는데 아예 못 하거든요 하는데 맥주를
이만한 컵에 두 잔을 주더라고요 처음에 사양을 못 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한 잔을네 번인가 다섯
번인가 꽂어서 한 잔을 딱 먹었어요 두 번째 잔은 끝내 못 먹고 근데 저희 회사하고 집거리가 해식 장소하고
한 300m 300m 거리였는데 제가 그 한 잔을 먹고 한시간만을 집에 간
거 같아요.는데 저는 제 몸이 그렇게까지 말을 안들을 줄 몰랐어요 한 1m 가다가는
땅바닥에이고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어떻게 몸이 그냥 이렇게 흔들흔들 거려요 그랬다 이래서 또 1m 가고
1m 가고 해서 거의 한시간 넘게 갔어요 세상에 그래서 술을 먹고 놓고
다음날 또 집에 가서는 이거 다 오바이트 하고 오바이트 근데 너무 힘든 거예요 아 이게 회사라는게
이게해진 분화가 이런 건가 저회사 자꾸 술 먹을 하면 해야 되는 거야
진짜 고민을 많이 해서 사장님이 다음에 가시더니 얘기를 하더라고요 술 못 먹는 거 같은데 괜찮았어요
하더라고서 근데 저 한시간 반 갔습니다 했더니 그다음부터 회사에 소문이 나 버린 거예요 그니까 회식 자르면은 당연히 술을 안 건너더라고요
사이단 콜라를 줘요 그래서 그 그 점이 마음에 들었던 거 같아요 그니까 강제로 뭐 술 먹이고 윗사람들이 막
뭐 이런게 없었어요 네 드라마는 또 다양한 그냥 하나의 그냥 드라마일
뿐이니까 예 그렇죠 아 자 그래도 언니 잘 버티고 참 잘 해내셨네요
큰게 있어요 어머 음 근데 직장도 너무 힘들어 가지고 제가 이게 적응을
하는데 이게 한계가 있잖아요 그 금방 나와서 딸내미도 또 유치원 보내야 되는데 유치원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직장 가야지 집을 챙겨야지 이게 사람이 한개점이 오더라고요 지금 우리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뭐 다운니 패브리즈 오랄비 질레트 그 건전지도
뭐 에너사이저 로켓트 뭐 겁나 많아요 지금 보면은 제가 아데 그때는
생소하고 나서 거잖아요 이게 용도 잘 모르겠고 솔직히 이게 제품은 이렇게 보는데 이게 정확히 어떤 용도로
쓰는지 그리고 이름도 이게 뭐 우리는 그냥 칫솔 하면 칫솔인데 북한은
대한민국은 칫솔도 뭐 푸류가 많잖아요 뭐 입세효 칫솔 무슨 칫솔 무슨 칫솔
무슨 칫솔 브랜드도 다 틀려요 그니까 처음에는 아 내가 이거 직장을 잘못 걸렸나 음 무슨 제품이 이렇게 많고
무슨 일꼬리가 이렇게 많지 때려쳐야 되나 음 진짜 고민을 여러 번 했어요
근데 그렇게 하면서 제가 진짜 처음에는 이게 수첩에다가 다 일일이 적었어요 박스를 보면은 어 건전지도
한 박스에 몇 개고이 지금 생각을 해 보면 저희 권전지 종류가 뭐 애니자이저 백셀
두라셀 로켓트 이게 있거든요 건전지가 그 건전지를 부르는 사람들이 틀려요
이게 보면 우리가 큰 전지 작은 전지가 있잖아요 근데 AA 주세요 어떤 사람들은 또 쓰레이 주세요 또
어떤 사람들은 대자 주세요 소자 주세요 그니까 같은 건전지인데 부르는 사람들이 뭐 대자 주세요 쓰레 주세요
a 해 주세요 근데 투에 해 주세요 하면 또 뭐야 영어 영어가
깜깜이잖아요.이 대한민국에 와서 살 줄 알았으면 학교 때 영어 공부 열심히 해 놨죠 근데 북한은 영어를
배워봤자 매인 생각하고는 너무 무한하다고 생각 그렇죠 그죠 아 내가
어차피 나중에 영어 교사가 안 되고 내가 백이 있어 가지고 뭐 세관 같은데 통역관으로 안 들어갈 건데
영어는 해서 뭐 하게 여기 오니까 전체 다 외려오고 아 2에 달라지 쓰
달라지 이건 대참 무슨 말이야 들어놓고 보면 같은 말이에요 진짜 눈물을 뚝뚝 떨그면 aa aa는 각기
2 a 세기는 3a 그렇게 해가지고 하나하나 다
적었어요 지금 이게 제가 요즘 그 유튜브 보면서 사람 많은 분들이 뭐
사트리가 얼마 없다 이런 거를 많이 말씀을 해 주시더라고요 제가 그때
취직을 해서 제가 발주 같은 것도 받았었거든요 하고 거래처 전화하면 전화받고 했는데
제일 충격이었던게 전화를 하면 말투가 저희가 아무리 뭐 여기 말을 흉내를
낸다고 해도 억양하고 특히 단어들 같은게 머릿속에서 나도 모르게 북한
사투리 단어들이 탁딱 튀어 나와요 진짜 어떤 사람들 대놓고 물어봐요
조선적이세요 아닌데요 하면 그럼요 저 탈복민인데요 아 네 하고 가요 음 또
가끔은 이렇게 전화를 하면은 또 어떤 분들은 우리 사장님한테 뒤에다 또 전화를 건대요 사장님 저 직원분이
이게 소통이 잘 안 되니까 직원분 혹시 저적이세요 사장님한테 전화를 건대요 왜요 하면 아니 말이 첫은게
이게 뭐를 알 거 같지가 않고 자기네하고 이게 영업 거래처 영업을 못 하겠다고 사장님이 직접 해 주시면
안 돼요 이렇게 전화를 한대요 근데 사장님은 또 그거를 제가 빨리 성장하기를 바라니까 그걸 또 숨기지
않고 얘기를 해 주세요 그때마다 내가 받았던게 뭐지 저 사람들이 내 말이
조선적 같아 보였나 이 말투가 그니까 내가 완전한
대한민국 사람이구나 하는 거를 자꾸 느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나중에는 전화면 제가 피했어야죠 이거 전화 안
받고 좀 대신 전화 받아 주셔 가지고 저한테 그냥 발주서만 주시면 안 돼요 했더니 안 그래래요.이 사회에서
살려면 자꾸 부데껴 보고 경험을 해 봐야 된다고 네가 잘하든 못하든
알아서 해하고 맡겨 버리시더라고 음맡은 책임감 있잖아요 그죠 그러면
말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온 신경이 머리카락까지 쭈이 서요 사투리 안 쓰려고 말 실수 안 하려고
그러니까 초반에 한 4년까지는 계속 조선적이세요 뭐 북한 사람이세요 이렇게 하는데 근데 그게 지금 보면은
당연한 건데 그때는 상처 아닌 상처가 돼 버렸던 거 같아요 왜 사람들이 나를 세관경을 끼고 보지 음 사투리
쓴다고 왜 나를 부족한 사람처럼 보지 그고 또 일을 잘 못면 또 욕먹어서
깨지기도 하고 그럼 또 그런 날은 또 집에 와서 혼자서 펑펑 울어요 펑펑 울어가지고 또 남편한테 다 이실 찍고
울면서 내가 오늘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나 나 힘들어 하면은 그때 남편이 그래요 그래 너 그냥 때려
때려쳐 응 그렇게 가감하게 얘기를 해요 때려치지 않을 거 아니고
그러니깐요 야 그래서 참고 해야지 하면 제가 더 힘들어 가지고 진짜
얘기한데 가감하게 그냥 너 때려쳐 어차피 내가 너 벌어 먹고 살리니까 우리 새시고 뭐라든 못 먹고 살겠냐
대한민국에 쌀이고 고추장만 있으면 되는데 김치고 고추장 있으면 되는데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쿨쩍 울다가
그래 근데 우리가 지금 내가 목숨 걸고 대한민국에 와 가지고 뭘 겁내는 거야 때려칠하면 먹고 살릴 남편도
있는데 갈 때까지가 보는 거지고 또처럼 또 이어서게지는 거야 멋있다
응네 그냥 때려쳐도 너무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니까 그냥 때려쳐 때렸죠 그니까 주변에서 얘기를 하면 기담아
들어요 아 내가 아는 북한다는 이건데 나만에서 저렇게 얘기를 하네 그리고 또 여럴 때는 넘낮지를 살짝 조절을
해가지고 이렇게 얘기를 하네 그까 항상 보면 말을 하는 것보다 경청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아 요럴 땐
요렇게 얘기를 하고 요단나는 여단어구나 이게 외려가 많은데다가 이게 나만은 또 엄청 많이 북한보다는
이게 단어가 많이 풍부하잖아요 수법이죠 이렇게 적응을 하다 보니까 그다음부터
나중에 뭐 전표도 찍고 또 출고 오면 출고도 하고 또 지계차 배워 가지고
지계차 오면 또 물건 상하차도 하고 또 실료를 올 때면 까데기 해가지고 물건도 또 실어주고 전전지 한 박스가
무거워요 물건 업체에 나갈 거 있으면 그거를 다 날라서 피킹을 하고 다방면적으로 일을 했던 거 같아요 그
모든 관리를 해 가면서 뭔가를 하나씩 할 때마다 힘 들지만 성취감 같은 거
있잖아요 음 그죠 제품을 익히고 나니까 욕심의 그 제품에 출거표를
찍고 싶고 출고전표 찍으니까 나중에 이제 물건 실으로 하면 지깃해서 물건
실어주고 싶고 또 제바로 차에 실 거 보면 뿌듯한 그 뭔가가 있더라고 주인 의식이 생긴 거네 네 주인 의식과
함께 타서한 거라도 내가 하나하나씩 내가 이가고 있고 성장하고 있구나
이런 기쁨이 있더라고 힘은 들지만 그렇게 해서 한 거의 진짜 한 1년은
진짜 힘들면서도 성장을 했던 거 같아요 야 그래도 월급날은 날아갈 거 같지 않습니까 그렇죠 월급날은 날아갈
거 같아가지고 딱 통장에 돈이 찍히면 진짜 일이 힘들어서 그다음날은 아침에
출근을 하면서도 야 내가 이거 오늘 또 회사를 가 때려쳐가 마음에
갈등이 엄청 많아요 근데 한 달씩 일을 하고 월급이 딱 찍히잖아요
야 그래 가야지 아니
무북한은 일이잖아요 일요일도 격주로 뭐 나무심기 간다 뭐 밭 벌어
정리한다 이게 하잖아요 맞아요 근데 대한민국은 이게 주 어일 국무제인데 그것도 나가면 따박따박 돈 주는데 야
이거를 때려치면 안 되지 이러고 또 아침이면 또 가요 그때는 또 차가 없었어요
아침에는 자전거를 타고서 출근을 하는데 나가서는 일단 힘들어도 출근
시간은 또 즐겁더라고요 일단 나가면 즐거워요 자전거 타고 콧에 부르고
코너를 부르고 또 회사 출근을 해 가지고 신나게 하다가 또 실수해서 또 용암 바탕 먹으면 또 기분이 또 저기
앞으로 쑥 내려가요 내려갔다가 또 남편이 어떤 땐 자전거
새우두고 차 끌고 또 데리러 피고 와요 그러면 그때 기분이 다 쏙 없대요 그렇게 해 가지고 한 1년 반
2년이니까 이제 나름 살겠더라고요 근데 그때 그게 지금 생각을 해 보면
제가 성장하는 가정이라서 당연한 건데 그때는 제가 진짜 많이 부족하고 못
알아 보이고 상패해 보이고 막 그렇더라고요 그렇게 긴장하게 긴장하게 살다가 한 3년 4년째 되니까 신규
거래처들도 전화가 오면은 이렇게 앞에서 물어보거나 사장님한테 뒤로 물어본 사람들이 없어지더라고요 어 네
저도 많이 울었던 거 같아요 진짜 그 언어가 제일 힘들었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그래도 5년을 잘 버티셨고
5년을 기다려 준 사장님도 참 감사하네요 그렇죠 많이 부 지금도 연락해요 그렇죠 야 무슨 사님 너무
감사하다 네 아 나중에 나도 창업을 해 가지고 나 회사를 키워 가지고
통일되면은 우리 북한에는 배달 시스템이 없잖아요 그죠 여기는 음식도
배달 시스템이 잘 돼 있고 모든 물류가 진짜 2 3일이면 여기서 부산까지도 더착게 됐는데 북한은 그게
없잖아요 근데 3년 차부터 꿈이 생기기 시작을 하는 거예요 아 나도 나중에 온라인 소핑을 해 가지고 어
한국에서 좀 많이 배워서 자리 잡아 가지고 통일되면은 우리 해산당에 가서
물리센터 하나 차려 가지고 배달을 제일 먼저 해 줘야 되겠다 이런 꿈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5년을 있다가 그
회사를 나와서 별더로 또 창업을 했지 어 잘했어요 그래서 좀 잘 돼요 창업
하면 힘들어요 힘들어요 지금도 하고 있어요 네 지금도 하고 있는데 요즘 같아서는 이렇게 접어야 되나 아
그래요 네 한번 놀러 가도 돼요 그러면 언제 회사에 가면 그 다 벌 수 있어요
제품들이랑 너무 궁금하다 5년을 버티고 창업을 한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 예 이 여러분 기다려 주세요 제 갈게요
회사 일이라는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각자의 역할이고 분담이 있잖아요 뭐 전표 치는 사람은 전표만 하고 회개한
사람 회개하고 또 물류는 물류쪽만 하고데 저는 그걸 다 했었거든요 그때 직원도 더 많지 않았고 음 근데 이게
물건이 또 다음날 나갈 거를 뭐 입고가 늦게 되면 피킹을 해놔야 다음날 물건 출고가 첫 시간이 되는데
위에 사장님들이랑 뭐 부장님들이 막 피킹을 해요 퇴근 시간 지났는데도 또 그러면 저는 또 퇴근을 못 해요
나오려고 하다가 가방 내려놓고 또 같이 하고 같이 피킹 다 해서 랩 다 작업해서 나갈 준비 다 되고 같이
퇴근을 하고 그런게 있었거든요 일 있으면 또 토요일 날도 나오고 음 그니까 네
근더라 그런 것도 저는 없고 네 그냥
당연히 회사에 일 있으면 내가 할 일이구나 그렇게 했으니까 아마 이게 또 좋게 봐 주시지 않았나 싶어요
그러네요 아 어쨌든 적응 잘하셨고이 진짜 북한에서 같으면 여자가
운전한다는 건 꿈도 먹고잖아요 그렇죠 운전은 그러면 언제부터 했어요 저는
그때 회사 들어갈 때 사장님한테 회사를 골랐던 목적이 그때 딸내미가
유치원 때라서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하잖아요 또 이게 혼자서 남편이 벌어 가지고 새 식구가 살기에는
부족하진 않지만 미래를 꿈꿔 봤을 때 좀 내가 그냥 집에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서 제가 회사를 취직할 때 첫 번째가 그거였어요 이제 딸내미가
아프거나 딸내미 가난한 일이 있을 때면 한시간 정도 먼저 퇴근을 할 수 있고 또 언제든지 이게 비상 상황이
생기면 저 회사 좀 저태에서 한시간 두시간 나갔다 오기 해 주십시오 그 조건이었었거든요 우리 회사에서 또
집하고 거리도 많이 제가 봤었고요 근데 그때 회사가 또 멀리 좀 이사를 갈 예정이었어요 제가 얘기를 했어요
저는이 회사 들어올 때 집하고 가까운 회사였고 또 편의를 봐줘 가지고 입사를 했다 돈은 저희 안 따졌거든요
멀리 돼서 저는 아무래도 퇴사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했더니 회사에서 중고차 하나 사주더라고요
어 네 면허를 땄으니 그거를 갖고 출퇴근을 하래요 중고차 하나 샀어요
그 엠파고 수출단지에서 차를 하나 샀는데 아 타보더니 이거 타고 가래요
가는데면 면은 실기했다고 직접 더어주행하고서 거의 뭐 한 7
8개월을 썼잖아요 오늘 저녁부터이 차 몰고 가지 해서 대답은 냉 했어요
하고서 회사 앞마당을 저녁에 두 바퀴 세 바퀴를 돌았어요 못 나가겠는
거예요 아니 나가려고 하니까 차들이 그냥 씨 가다가 하는데 제가 꼈다가는
제 차랑 저랑 튕겨져 나갈 것 같은 아 이게 운전이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첫 번째 날은 포기하고 또 자전거 타고 집으로 갔어요 내가 두
번째 날은 무조건 운전을 해야지 공장을 일단 두 바퀴 돌았어요 회사 앞을 또 나가니까 못 가겠는 거예요
또 갈등이 많이 생기더요 내가 괜히 문조면을 땄다고 해가지고 회사에서 이거 내가 차를 못 보는 거를 괜히
또 차를 사게 만들었나이 생각이 들어가지고 괜히 미안해지더라고요 때가 저 차를 못 끌고 가면은 우리
사장님들은 저 돈 해 가지고 차를 샀는데 어떡하지 가 물릴 수도 없고
큰일인 거예요 세 번째 날에는 우리 회사 직원한테 부탁을 했어요 우리 정심 시간에 그냥 우리 집까지만 한
번만 나 에스코트 해 가지고 이렇게 가면 내가 쫄쫄 따라갈테니까 그냥 깜빡이는 미리 자회전이면 자회전 켜
우측일 때 미리 우측해 가지고 신호만 주면은 그대로 따라한다고 그래서 집까지 한번 갔다 왔어요 갔다 오니까
조금 자신감 생기더라고요 근데 옆에 앉아서 탈 때랑 틀리더라고요
차선이 이렇게 있으면이 저희가 자전 같은데 할 때 크게 돌아야 욕주행을 안 하잖아요 근데이 욕주행을 해서
하마트면 사고날뻔한 적도 있었거든 근데 이렇게 보니까 차들을 나고 같이 이렇게 마주서 있는 거예요 뭐 이게
뭐야고 핸들을 그냥 급하게 돌려 가지고 했는데 그 다음날 저녁이니까
또 못 가겠는 거예요 무서워서 또 한번 부탁을 했어요 저녁까지만 아이고 참 조다
강아지 마냥 쫄쫄쫄쫄 따라갔어요 깜빡이 켜면 바로 깜빡이 켜고 뒤에 차가 오는지 옆에 차가 붙는지 개이치
않고 그냥 깜빡이 켜는 듯 차 휙 바꿔 가지고 그렇게 해서 가고 그다음날 아침에는 어떻게 또 끌고
혼자서 갔어요 그 이후로 운전을 쭉 해봤어요 야 언제부터 운전 나
뻗대난다 아우 이거 분위기이 기분 느끼면서 노래도 들으면서 할 수
있었어요.네 한 달 동안은 거짓말 아니고 그때가 10월 달이면 어둡잖아요 10월 달
되는 이게 뭐 내비게이션도 눈에 안 보여 그거 사이드 미러를 이렇게 뺑어랑 사이드 미러 버는데 지금 안
보여요 이게 운전대로 그 버는 순간 운전대가 돌아갈 거 같고 그다음에 이게 차문을 썬팅을 안 했는데
삑미로가 다 안 보이는 거예요 사이드 미로가 그리고 눈눈개이 막이고 비오가 문을 창문을 다 열어 놓고 다녔어요
열어 놓으면 그나마 좀 어두운게 좀 어두운게 조금 밝아져요 집에 들어가면 옷이 눈개 다
맞아고 저금 남편이 그래 너 걸어왔네서 아니 했더니 아니 차 타고다는 사람들이 맨날 왜 그렇게
젖어다녀요 그래서 그럴 일이 있어 창피니까 남편한테도 말을 못 하겠더라고 창문 열어 놓고 다녀 말을
못 하겠는 거예요 그게 한 달이 지나고 국도는 그나마야 좀 다녔어요
다녔는데 그 속도를 더 타 봐야 되잖아요 제 로망이 아 내가 이제
운전을 배와서 차 끌면은 내가 뽀대나게 그냥이 내 차 끌고서 한번 동생네 집에 놀러 간다 해가지고 한
1년을 별었어요 내가 이번 주는 가야지 이번 달은 가야지 다음 달은
가야지하고 1년을 고속도로 못 나갔어요 기본 이게 시내 도로도 겨우
지금 그때면은 겨우 끼어들어서 진짜 깜빡이를 켜가 3분씩 5분씩 기다려서 겨 차봤고는데 고속도로는 말도 못
하잖아요 속도가 너무 많아 가지고 그래서 그때 또 남편한테 그랬어요 내가 이제 고속도로 갈 거니까 자기가
한번 운전해서 가자 지켜요 그래서 다른 때는 그냥 운전을
안 할 때는 그냥 잡생각하고 수다 떨고 했는데 진짜 그 안양까지 가는 동안 말 한 마디도 없이 갔던 거
같아요 그래서 남편이 깜빡이를 켜고 들어서면 아 이때는 숨 죽이고서 갔어요 그래서 남편이 운전을 해서 한
번을 갔다 오고 두 번째는 남편이 야 그럼 내가 네가 운전을 해 내가 옆에 앉아 있을게 그럼 싸우나 이제 그렇죠
응 그래가지고 그럴까 하고 차를 탔는데 고속도로고 아이씨 딱
들어가니까 못 가겠는 거예요 이게 손발이 후덜덜덜덜덜덜 떨리고 들어서는 순간 그냥 차들이 와가지고 제 차
빨아버릴 것 같은 거예요 자기야 나 안 되겠다 오늘만 자기 운전 또 해 줘야 잘 봐 하고 지금 자 이럴 때는
미리 깜빡이 켜고 바로 들지 말고 백미러 사이드 미러 다 보고 이렇게
가고 다시 빠질 때는 너 급하다고 밥 이렇게 끼워들고 빠지면 무조건 살아나니까 아이씨 잘못 빠져도
한 바퀴 그냥 드라이브 했다 생각을 하고 돌면은 된다고 알려 주더라고요
그래서 두 번째까지 하고 세 번째 만에 세 번째 만에 제가 운전을 해서 고속돌아 탔어요 진짜 이게 어깨를 못
펴고 너무 이게 강직이 된 상태에서 운전대를 이렇게 잡고 갔더니 한 10분이 되니까 여기가 막 저려오는
거예요 아 어떻게 남편은 옆에서 야 이거 어깨이 힘 빼 빼는데 힘이 안
빼져요 이게 핸들을 또 지고서 지금 안만 이렇게 거고 보이 이러고 지금 가는데 또 잔소리가 또 나오죠 그때는
그지 야 이럴 때는 굿브레이크 밟으면 안 되지 속도 줄여야지 또 또 천천히
가니까 고속도로는 또 이렇게 가면은 순차들이 와서 잡아 고 달리는 속도가
있 너처럼 이렇게 가면 뒷차들이 다 난리야 또 밟으면 밟는다지 브레이크
잘못 밟으면 밟는다지 화가 이렇게 나는데 그 싸우는 것도 경황에서야 싸우지 제가 여유가 없는데 이게 말을
맞아치고 경황도 없는 거야 죽었쓰다고냥 다 그 잔소리 다 듣고 갔어요 자기가 운전에 잔소리한 거
듣기 싫으니까 했더니 너 지금 포기하면 고속도로 나중에 진짜 뭐다 내가 잔 소리 안 할 테니까 가자 응
두 번째는 그나마 첫 번째보다 좀 자신감이 있더라고요 그래 동생 집에서 또 바로 집으로 왔어요 그렇게 하고서
그다음부터는 저 혼자서 또 잔소리 하는 사람은 뒤로 떨궈두고 혼자 다녔던 거 같아요 진짜 운전 차 같이
타도 잘 싸워요 맞아요 근데 배울 때보다 지금이 가끔 차를 타면은 제가
데려 잔소리를 해요 왜 급브레이크를 받고 급백세를 받아 가지고 멀미난다고
아이고 대한민국에서이 북한 순진한 안악내가 운전하기가 참 하늘이 별딱이
많고 힘들었네요 운전도 진짜 이게 사회 적응을 해서 일하는 것만큼 힘들더라고요 그렇죠 네 어느게 하나
쉬운 건 없었어 솔직히 말하면 워낙 발전된 사회고 하기 때문에 더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네 드라마에서 봤던 것랑 똑같은가요 똑같더라고요 도어에
어떻게 쓰레기 하나가 없어요 와 그 심지어 뭐 큰 대도로가 아니
아파트 작은 단지에 있는 도로 큰 대도로 그러니까 시민식이 높아 가지고
누구 하나 쓰레기를 길바닥에 버리는 사람이 없고 매일 아침이면 또 미아원들이 청소를 하잖아요 정말
깨끗하더라고요 그런 거 보고 진짜 놀랐어요 우리는 북한에서 새벽마다 아침에 나와서 도어 청소하고 보수
작업을 해도 쓰레기똥이잖아요 그 개똥 섰던 그냥
거기다가 사람들이 쓰레기는 그냥 길 가다가도 벌리고 휙버리고 하는데 대한민국 돌아가 너무 깨끗해 가지고
야 내가 그 드라마서 보던 현실을 내가 꿈이 아니고 내가 그 현실에 살고 있구나 아까 이게 대한민국에
와서 도로 하나 보고 엘리베이터 하나 보고 또 새로운 장소를 가고 공원
같은데 가고 해도 실감이 다 났던 거 같아 그렇죠 공원도 잘해 놨잖아요
엄청 잘죠 휴계의 공간부터 시작해서 먹을거리 볼거리 너무나도 예쁘게
꾸며 놓고 처음에는 엄청 좀 다녔어요 보는 곳마다 희원하고 새로 보고 새로
꽃이면 꽃세도 가고 또 가을이면은 또 갈 때 같은 거 벌어 다니고 처음에는
저 이해가 안 갔어요 아니 저 사람들이 이곳을 보려고 지방에서 일산으로 하고 또 일산 사람들이 또
부산에도 가고 다니잖아요 그죠 와 참 시간도 많고 참 관심도 많다 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게 다 문화 생활이고 즐거움이고 네 스트레스를 풀고 좋은
거더라고 그래서 그런 거를 세삼스럽게 생각을 할 때마다 나도 점점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가는구나 이런 느낌을 받아요 그래요 맞아요 우리 뭐 북한에서 꽃 하면은 김일성와 김정일와
그렇지 네맞아 그런
것들이키에 갖다놓는 거 알았지 언제 우리가 꽃구경하러 다녔냐고요 그렇죠
나는 놀랐던게 그 김정희라는 여기에서 많이 못 봤는데 그 김일성아 그거는
우리가 뉴스에서 엄청 뭐 인도네시아 누가 이거를 해가지고 수령님께 선물로
뭐 받치고 맞아요 우리가 한번 만져 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잖아요 여기 오니까 웬만한 꽃집은 그거다
팔더라고요 화분을이야 이거 아무것도 아니고 김일성이는 지름 갖다 붙여 놔 갖고 진짜 할짓이 없다
별걸 다 무상화를 해 놨어 여기꽃집에서는 아무것도 아닌가 차를
때 박남에 갔들 차 있어서이 모델처 거 있잖아요
저 사람들이 그러면 차파는 사람들인가 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사람들이 차 보러 왔는데 그 아가씨들 옆에서 사진을
남성분들이 다 찍더라 남편분 같이 갔어요 같이 갔죠 근데 눈이 절은
차를 보고 절은 딴 방향을 보고 있어요 이렇게 따라가서 눈동자를 봤더니 차랑 아가씨랑 반반으로 보는
거 같았어 그러면 일부러 가서 욕걸리 쿡 찔러
가지고 차가 저게 백미러 사이드 미러가 잘생겼네 자 앞에 라이트가 멋있게 생겼네.음 그렇지 영혼 없는
대답을 하더라고요 진짜로 이게 사람들이 너무 분비고 또 물어보면 또
설명도 잘해 북한 같은 경우 시장에 가서도 물건을 우리가 안 사는 사람이면 설명을 잘 안 해 주잖아요
사겠어 아니 사겠으면 아이 말하겠어 이따라 대놓고 맞아요 그리고 대놓고 이거 어차림 세보고 돈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가리고 근데맞는 다 설명을 해 주고 너무 서비스가 좋잖아요
안 사도 내가 뭔가를 문의를 하고 질문을 했을 때 다 대답해 주고 공산하게 한 거 보면 뭔가가 내가
대접받는 느낌 그렇지 네 번호 안 써도 이게 사람 차별이 없이 대주는
그게 너무 좋았던 거 같아요 그니까 이게 뭐 우리가 눈으로 보는 뭐 욕심이나 이게 부보다는 뭔가가 자꾸
새롭게 새로운 것들이 열리고 보이고 끼고 북한 속담에도 그런 말 있잖아요
집안에는 똑똑보다 나다내는 모저리가 낫다 맞아 맞아 맞아 그런 속담이
있잖아요 여기서 아 이게 대한민국에도 통하는 말이구나.이 아,이 그런 속담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성을
알고 또 사람들하고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이 사회가 어떤지도 잘
알고 그서 우리 말 못 하고 살았잖아 맞아요 말하고 싶어도 꼭 참아야 되고 하고 싶은 말 하면은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 말을 뱉고 싶어도 옆에 눈치 한번
썩으로 중얼거리고 그니까요 대중 앞에 나서 봤자 자체 비판하고 그다음에
애매한 사람들 싸잡아 가지고 허상 비판이나 하고 그런 거밖에 없어 가지고 그래도 온라인상에서 댓글 남겨
주신 분들한테 너무 감사하고 고맙더라고요 이게 진짜 마주보면 인사를 하고 싶더라고요 마지볼 날에
올 거예요 진짜 여기 오면은이 말할 거리들이
정말 다양해 맞아요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우리가 말하고 싶은 자유도
빼앗겼을 뿐더로 또 말하고 살 여유가 없었던 거 같아 그렇죠 뭐가 즐거워서
그리고 무슨 얘기를 하겠어 깔끔 말한마디 잘못하면 잡아가는데 그렇죠 그니까 정부 비난을 하고 살기 힘든
신세 타령 하면은 잡아가고 그렇죠 그렇다고 뭐 상대방한테 막 해봤자
똑같이 힘들거나 더 힘든 사람들한테 뭐를 토놓고 의지를 하고 그렇죠 그니까 그 환경 자체가 안 됐던 거
같아요 맞아요 근데 지금은 제가 이렇게 회사분들도 가끔 이렇게 얘기를
하면은 저는 보면 소통도 잘하고 제가 필요한 정보도 아 그런게 있었어 아
이것도 좋은 거네 에게 새로운 정보도 얻어듣고 또 제 속상한 거 하면은 안 해요 하고 또 위로도 받고 이게
소통을 많이 하는데 너무 즐거운 거예요 그러니까 북한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위로와 소통 이게 이게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는 거 같아요 아우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좋은 말 막
엄마가 이제 고민형이랑까 사 갖고 올게 하고 나왔다 그랬잖아요 근데
딸이 괜찮았어요 엄마한테 어떤 그런 약속을 안 지켰다는 실망이라든가 이런게 없었어요 다른 거는 괜찮았는데
딸내미가 딱 그것만 기억하더라고 엄마 나쁜 엄마 까하고 이거 사 갖고
온다고 해 가지고 영육 안 온다고 애가 한 일곱살 때까지도 외우더라고요 엄마 엄마가 그때 나 까가랑 사 주고
뭐 해 준다고 이모한테 두고 갔잖아 그 말을들을 때마다 얘기 자꾸 가슴
후에 파는 거예요 나는 사실 그러고 싶지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애한테 상처를 준 거잖아요 그러니까 어린
애가 그 마음을 다 표현을 못 했어도 얼마나 엄마가 그립다 못해 아 그게
그림이 쌓였으면 엄마를 저렇게 음 예 그렇게 생각을 할까 엄마를 버리고
생을 하는 거 같더라고요 그 아기가 이제 여기 어릴 때 왔잖아요 그러면
유치원 보냈잖아요 어떤 차이를 느꼈어요네 그니까 제일 이게 힘들었던게 어린이 집 다니면서 이게
다른 건도 말 몰라도 하나원에서 이렇게 애들 육가에 대해서는 안 가르쳐졌잖아요 음 아 그건 없다 이제
보니까 애 애들을 어떤 방식으로 키우고 육관은 어떻게 하고 유치원은 어떻고 이런 거는 없었어요 음
했는데 저도 또 애가 뭐 두 명도 아니고 한 명을 처음 키워보는 거고 또 어린이 집게 보냈는데 일단은
예쁘게 애를 아침마다 꾸며서 어린이 집 손 잡고 가는 것까진 했는데 애가
어떻게 애들하고 소통을 하고 놀아야 되는지를 제가 어른으로서 엄마로서도
그 방법을 딱히 몰랐고 그다음에 또 어린이 집에 대한 정보라든지 또 뭐
애들 부모님들하고 소통음 이런게 없었던 거 같아요 왜냐면 저도 그때는
이게 한국 생활 한창 적응을 할 때잖아요 그러니까 제 적응하기가 바빠 가지고 그냥 애는 어린이 집에 맡겨
넣는 거로 안심을 하고 신경을 덜 썼던 거 같아요 항상 갔다 오면은 그런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엄마
친구들이 나랑 잘 안 놀려고 해 음 음 그게 애가 어려서 와가지고
사투리는 없었는데 이게 어울려서는 방법을 몰랐던 거 같아요 그니까 여기
애들은 뭐 두 세 살 때부터 같이 이게 뭐 문화센터도 다니고 또 엄마들끼리 커피에서 수다 떨고
애들끼리 같이 뭐 장난감 같은 정보라든지 우리는 뭐 장난감도 어려서부터 많이 못 가져 놀고 그니까
모든 정보가 다 뒤쳐져 있었던 거 같아요 뭔가 우리 어른들이 이게 대화
코드가 맞아야 대화를 해가지고 즐겁게 이야기를 해서 같이 놀고 말을 하는 것처럼 애들도 마찬가지인가 봐요 뭔가
그 딱히 저희 애를 싫어하는 것보다는 소통이 안 되니까 친구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했던 거 같아요 어 마음
아팠겠다 네 네 그니까 그때는 그냥 아 저러다가 나중에 조금 크면은 본인
스스로 애들 사귀고 하는 방법을 알아 가겠지 했는데 초등학교 한
2학년까지도 힘들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이렇게 바뀔 때마다 얘기는 했어요 어
저희 애가 북한에서 와 가지고 학교 생활을 잘 적응을 못 하면 님 한 번만 동안 저의 두 번 세 번만 좀
잘 지켜 봐 주십시오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을 주십시오 했더니 아마
안심시키느라고 그랬는지 잘했는지 몰라도 그래도 그만하면 활발하게 애들하고 잘 놀고 있어요 항상이
대답을 해 주셔 가지고 했는데 지금 보니까 이렇게 학부모 총회 같은 거
한 번씩 가면은 또 나서기 좋아하는 어머니들 있잖아요 학부모 청에 끝나면
아 저희 어머님들 커피 한 잔씩 하고 가시죠 하는데 저는 일을 하다 보니까
학부모 총회도 이렇게 일하다가 중간에 시간을 내서 오는 거잖아요 그냥 아 저는 일이 바빠서 이만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갔던게 이게 애한테는 많은 도움을 못 줬죠 이게 또 대한민국
하면은 엄마들 또 애들 누가 심바람 장난 아니잖아요 요즘은 산우 저령부터
이게 산우저리온 동기부터 시작되더라고 애들이 세장에 태어나서부터 그요 네
같은 애 대해서는 그런 정보나기 효류가 없이 했던 거 같아 근데 다행히도 내가 그늘이 안지게 지금은
잘 커져서 스스로 잘 컸으니까 애한테 고마할 뿐이죠 아 다행이네요 그래도이
시스템적으로 너무 더 부모로서 감사하고 좀 편한 것들이 있죠 그렇죠
이게 북한은 그게 있잖아요 일단 유치원부터 뇌물 공세가 들어가잖아요 아 진짜 명절면은 이게 이게 돈이라도
찔러주고 쌀이라도 갖고 가서 우리 딸내 잘 봐 주세요 거의 일주일이면 어느 날은 토끼 가죽을 내라 파동
내라 공병 유리를 내라 폐지를 내라 굉장했지 틀들 볶꾸잖아요 그니까요
근데 여기는 그게 없더라고요 그게 없이 공평하게 애들을 키울 수 있는
그러니까 저 같이 맞벌이를 하고 초등학교 다 무료지 중학교도 겨복 다
무료진 급식 무료지 그다음에 애들 내라는 거 진짜 눈꽃만큼도 없잖아요
웬만한 체험 학습 같은 것도 다가고 가끔 가다가 뭐 보스비 교통비 그런 거 근데 여기는 교육 시스템은 하나인
거 같아요 아 진짜 수준도 높고 대한민국은 진짜 네 어 선생님들한테
아무것도 진짜 선물 하나 안 건녀도 이게 대한민국도 법이 김용남법이랑 나와 있잖아요 맞아요 네 그런 거
없이도 애들 키우기에는 너무나 시스템이 잘 돼 있는 거 같더라고 그래서 지금은 어찌 보면 이렇게 어디
뭐 여행 갔다 오거나 뭐 해도 딸한테 물어봐요 선생님한테 이거 간식이라도 갖다 드리고 뭐 립스틱 하나라도 갖다
들려야 되지 않냐 하면 딸내미가 그래요 엄마 그거 김영남법에 걸려 애들이 우리 선생님 욕 먹을 일 있어
아 요즘은 애들이 이게 학교 교육을 잘 받아 가지고 네 그니까 이게
모든게 살면서 여유가 있어야 주변을 돌아보고 또 나 자신을 돌아보고
챙기고 이런 여유가 있는 거 같아요 그렇죠 걱정 없이 애를 잘 키울 수 있어서 이게 참 너무 나도 우리
애한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아닌가 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제 딸이 많이 컸지 언니맞은 고등학교 1학년이에요 사춘 왜 애들이 사춘이 있대 그니까 저 북한은 그런게
없잖아요 우리 뭐 사춘기가 있고 경년기가 어디 있어요 사기 팍팍한데
여기는 그런 말이 있더라고요 사춘기하고 갱년기 싸우면 갱년기가 이기네 사춘기가 이기네 그니까 저는
진짜 겁났어 이게 주변에서 부모들이 그러더라고 이제 조금만 커 봐라 자식들 때문에 눈물콧물 쏙 빼고
키운대요 그래서 엄청 진짜 걱정을 했어요 눈치도 많이 보고 이제 늦게
오는 사춘기가 더 무섭다고 하는데 나중에 올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 아직 두 분 다 사춘기 갱년 다
나왔죠 그렇죠 다행이네요 근데 가끔은 지금 보면은
몰랐게 아마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살짝 사춘기가 지나갔는지는 모르겠는데
한동안 논쟁 걸 뜯던 적이 있어요 그 중학교 2학년 때가 아 어 그때가
살짝 사춘기지 않았나 싶어요 대한민국 하면도 우리 탈북민들 가장 많은
감동을 받는게 우려지 않습니까 맞아요 병원 가봤어요 자주 다니죠 이게
북한에 가면은 의사한테 진료를 받지만 약은 나중에 본인들 부담이잖아요
그렇죠 근데 여기 병원에 가면은 아픈 것을 저희가 살짝 설명만 해도 알아서
어느가에 가세요 어느가에 가세요 상세하게 다 설명을 해 주고 또 거기에서도 뭐가 안 나왔다면은 정밀
시스템들 뭐 초음파 MRI CT 다 해 가지고 진짜 우리가 스쳐 지나가고
몰랐던 병들까지 다 잡아내 가지고 검진을 해서고 결과를 알려 주잖아요
북한 같으면 그 병원비가 어마어마하죠 온 집안이 진짜 품비 박산 날 정도로 하는데 여기는 그게 또 우리가 실비를
조금만 들면은 실비에서도 다 보충이 되잖아요 우려 보험도 잘 돼 있죠 네 그러니까 그 우료 보험 체계부터
시작해서 병원 시스템이 너무나 잘 됐어요 그러니까 저희가 북한에서 교육을 받았을 때는 병원비가 비싸
가지고 병원에 못 가하고 죽는 사람들 많다고 교육을 받았잖아요 근데 지금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니까 기초
생활 하시는 분들은 의료 수급 1급으로 해 가지고 다 치료받을 수 있고 저희처럼 건강보험 내고 또
아니면 지역보험으로 내고 우려보험이 시스템이 너무 잘 돼 있어 가지고 진짜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은 세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맞아요 뭐 검진할게 있다면은 집에 앉아서 그 인터넷으로 다 검색을 해서 최고의이
경력이 있는 의사를 우리가 골라서 가잖아 맞아요 병원 병원도 골라서 가잖아 네 병원 선택하고 의사를
선택을 하고 이거는 북한에 같으면 우리 문전 박대 당하지 맨날 맞아요
솔직히 북한은 혈액형도 모르는 사람이 많잖아요 형원을 못가 보니까 내 형
내 혈액형이 뭐 A형인지 B형인지 아까 우리 딸내미가 아파 칼 때마다 우사 선생님들한테 뇌물 거여 가지고
안 봐 주겠다는 거 좀 봐 주세요 하고 봐주면은 본인들이 가서 알아서 어디 가서 약 사 갖고 오세요 우리가
약을 사 갖고 가잖아요 그죠 그니까 진짜 그 땅에서는 이게 병을 발견할
수도 없을 뿐더로 병을 발견을 했다고 해도 진짜 한자 한 명만 생기면 죽을
병이 아니더라도 그 집이 품미박 나는 그런 데잖아요 먹고 살기가 힘든데
언제 병치료 해 가지고 병원비 나가고 우리가 대려 우리가 병에 대해서 좀
자만하고 있으면 병원에서 또 권장을 하잖아요 빨리 가서 보이셔야 됩니다 치료받아야 됩니다 다 알려주잖아요
공검진 때면 또 문자가 와서 기일 전에 공간 검진 받으셔야 합니다 또
예약 일자 되면은 언제 매시 예약이 되어 있으니까 와서 받으세요.이 시스템 하나가 너무 감사하고 그래서
한국분들이 오래 사시는 거래요 북한이랑 수명이 15년에서 20년
차이 나잖아요 이제는 지금은 아마 더 줄었을 것 같아요 아 그까 여기는 진짜 내가 아무리 못 먹고 못 살아도
쌀에 김치에 장 있고 아니 수시로 더물 찬물 나오지 집이 있지 나가서
일한 것만큼 돈 주지 아프면은 병원에 다가 보일 수 있지 이런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가 어디 있어요 북한에서 그
사람퍼대 살려면은 한 달 내내 나가 일하면 1kg를 주는데 그리고 장사를
한다고 해도 언제 사람퍼대로 쌓아 놓고 먹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요 대한민국은 이게 생선류가 많고 밀키트
있지 과일도 사시장처 보관하고 먹지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누릴 거 다 누리잖아요 북한은 어디 가서 제철
과일 먹고 그래도 국경 지역은 중국에서 좀 나오지 않았어요 나와도 엄청 비싸죠 우리 딸내미가 수박을
좋아했어요 이게 이렇게 요만큼 이렇게 자는 수박 한 조각이 쌀 500g 통을 해놔 쪼개 가지고 여름 같은 때
파는데 눈으로 이렇게 보는데 딸내미가 하도 좋아하니까 어른들은 못 먹고 한 조각만 해다가 딸내미한테 주면
딸내미가 그렇게 맛있게 먹었어요 수박을 우박우박하면서 먹었는데
그 귤 하나도 요렇게 한알리 이렇게 귤 중국 귤 이렇게 나오는데 엄청 비싸잖아요 그러면은 진짜로 세알
네알씩만 사다가 애들을까 까서 먹여 주고 조카이해하고 우리 딸내미만 주고 못 먹었어요 근데 여기 오니까
겨울에는 귤을 박스채 까나서 미쳐 못 먹어 가지고 귤이 막 썩어 나가지
여름 같은 때도 수막 한 통을 다 사놓면 못 먹어요 제가 좀 과일을 좋아하는 편인데 사실상처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게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나는 저 진짜 놀랐던 얘기 한 겨울에
딸기를 팔아요 어머 딸기는 우리가 북한의 범철에 한 5월부터 오고 5월
중순부터 말까지 잠깐 먹잖아요 하우스 딸기 갖고 야산 그 야생 딸기 아
여긴 한 이만한 딸기가 나오는데 그것도 빨간 딸기 있고 흰 딸기 있고
뭐 백서양이 있고 이름이 엄청 많잖아요 이름도 왜 그렇게 이뻐 그러니깐요 첫에는 겨울 내내 딸기 사
먹었던 거 같아 그 남편이 야 그만 먹어라 이다 우리 집에 내가 벌어 가지고 너 딸기 사 먹는 돈 다
나가겠다 저는 귤을 처음 맨 처음에 먹어봐이 할아버지 7순대 7순 단치
8순 단체 할 때 만 상에다가 만치단 요만큼 이렇게 탑을 쌓아서 놓으면은
그것도 또 각 친척들이 한 차리면은 그 상을 호물자마자이 곡감 같은 데다가 넣어 놓고 자물쇠를 잠가
버려요 어머 뭐 먹게 어 그래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저희 아빠가 자물쇠를 어떻게 손에 넣었어요
그래가지고 제가 그때 일곱살 때데 야 오라오라 해서 갔더니 왜요 아버지
왜요 했더니 너 이거 먹어 봐라고 저 이렇게 주는데 그때는 그 귤인줄도 몰랐어요 향내가 엄청 싱그럽게 나는
거예요 귤향 아버지 이거 뭔데요 그니까 이건 맛있는 건데 먹어 보라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해가지고 입에
덥썩 놀라고 하니까 아빠가 야 그건 그렇게 먹는 거 아니야 서 이미 전에 깨물었는데 그 귤향 껍질 쓴게 입에
쑥 올라가 인상 찌불고 아버지 이거 못 먹겠어요 그렇게 먹는 거 아니야 해서
그건 뭔데요 했더니 질을까 가지고 입에 넣는데이야 그 달콤함과이 신 물이 탁 나오는 거
가즙이 나오는 데다가 달콤하고 새콤하고 진짜 먹다가 아까워서 나중에
한 두 조각은 손에 이렇게지고 다니면 냄새를 맡았어요 어 맞아 먹기가 아까운 거예요 처음에는 못고 먹었는데
먹다 버리니까 조각이 한두 개 남았는데 다 먹어 버리면 그 락을 못 먹겠는 거예요 그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나요 그러니까 난 귤만 보면 그 생각나 우리 다 귤 이렇게까 가지고 진짜 요만한 거 한 쪽씩 진
정말 피 나눠도듯이 나눠 먹고는 그 껍질이 너무 그 향이 좋아 가지고
그거를 부툼하게다 놓고 말렸다가 우리 아버지 술 드시는 날 술에다 넣어서
우려 가지고 그 귤향이랑 같이 먹겠다 그렇게 먹었던 기억도 있어요 그렇죠
북한에서 또 귤껍질을 진피라고 해가지고 한약재료로도 쓰잖아요 어 그래요 어이 대한민국에 훈한 식재료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먹을 수 있고 이런 것들을 말하자면 오늘 날밤새야 돼 부부싸움을 그 하면서 이원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아 그 남편분이 얘기를 하셨어요 서문이 났죠 근데
댓글에 뭐라고 있는지 알아요 역시 양적 말을 다 들어봐야 된다 왜 그
부부싸움 거기까지 갔다 왔는지를 말해 달래요 아 우리 우리 여보가 이것다 들으면은 긴장하게 있어야 될 거
같은데 [음악]
부부싸움을 그 하면서 이연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아 그 남편분이 얘기를
하셨어요 서문이 났죠 근데 댓글에 뭐라고 있는지 알아 역시 양적 말을
다 들어봐야 된다 왜 그 부부싸움 거기까지 갔다 왔는지를 말해 달래요 아 우리 우리 여보가 이것도 들으면은
긴장하게 있어야 될 거 같은데 그게 전 한 17년도
18년도쯤이었어요 그니까 그 공장 다니던 사장님한테 2천 3천만 원
사기 당해 가지고 네 실적으로 많이 있을 때 공장애를 알았었는데 저는
공황장애라는 걸 제가 알아보지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공감이 안 갔던 거예요 공감이 안 갔는데다가 또 저도
이게 사회생활을 적응을 하면서 이게 육가와 함께 또 집안일도
하고에 케어는 제가 다 했었거든요 남편이 정이 많고 자상한 건데 자상은
한데 의외로 또 이렇게 챙기는 거를 잘 못 해요 마음은 안 그런데 표현을 잘 못 하고 제가 말로만
잘하시는구나 나 너무 많이 있으면 돼 그렇게 해석이 되나요 그니까 저는 웬만하면 이렇게
제가 참자 이런게 해가지고 제가 생각보다 엄살이 없어요 그래서 뭐
아파도 아 나 아파 나 아파 막 이러고 막 말하고 다니거나 막 저 혼자서 막 약 챙겨 먹고 이런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냥 아 내가 좀 아프네 좀 있따 괜찮아지겠지 혼자서 끙끙 알는 스타일이거든요 저는 그니까
모든 것들이 저한테는 이게 누적이 돼 가지고 제가 저도 그니까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 있었던 상태였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부부가 살다 보면
가도이가 있잖아요 그니까 그때가 아마 저희 부부의 가독이었던 거 같아요 음
뭐 남편은 그러더라고 자기 저번에 인터뷰 보니까 자기 일 안 한다고 내가 여기저기
일자리 알아서 수송을 해 가지고 그게 조금 와전이 된게 뭐냐면 남편이 딱
1년 정도를 놀았어요 집에서 일을 했는데 그니까 저녁에 들어가면 하던 못해 뭐 잘하든 못 하든 밥이라도 해
놓고 얼굴고 마누랑 고생했서 온 반복자 이게 있어야 되는데 전화하면은 누구 만나러 가고 누구 만나러 가고
한량처럼 다니는 거예요 그니까 속이 부글부글부글 하는 거예요 그니까 근데 초반에 한 몇
개월 정도는 그냥 그래 이때까지 힘들게 일을 했으니까 열심히 이사찜 일도 하고 나름 회사 생활 했잖아요
그러니까 남편도 쉬어가는 시간을 주자 음 몇 개월은 그렇게 냅뒀어요 냅두고
했는데 이제는 또 주말도 나가요 이게 평일 시간이 모자라 가지고 그니까 남편은 그때 이게 대한민국 자본주의
자유의 맛을 느낀 거 같아요 아오자마자는네 회사일하고 이사찜
열심히 하느라고 뭐 문화생활 뭐 이런 주변 생활을 느끼지도 못하고 접하지도
못하고 그냥 회사 나갔다가 집이 오고 나갔다 집이 오고 이거를 했는데
놀면서 친구 만나고 그다음에 또 이게 듣는 소리 있고 보는게 있잖아요 나서
그때 눈을 뜬 거 같아요 찾고 나가고 싶었겠죠 그다 또 공장에다가 실적으로
힘들었으니까 나가서 술한잔하면서 또 힘든 것도 소통도 하고 털어놓고 그까
그거를 남편 나름의 방법으로 또 스트레스 해서도 하고 그랬던 거
같은데 제 입장에서는 또 안 좋은 거죠 음 아니,이 사람이 일을 안 가고
집에 있으면 하다 못해 내가 저녁 밥 해 놓기는 바라지는 않아도 내가
퇴근에서 들어갔을 때 앉아만 있어도 저는 좋은 거예요 뭐 그 제가 요보 왜 밥을 안 해 놨어 왜 세탁기 안
돌려서 이렇게 잔소리 안 하고 집에만 있어도 좋은데 들어가면 없어요 전화하면은 밥 먹고 있고 술 마시고
있고 뭐 친구 만나고 있고 어 그것까지 이해를 했는데 그때가 이제 막 자유의 맛을 느낄 때
그렇지 그 맥주맛도 알고 술 맛도 알고 저는 또 평일에 일을 하다
보니까 주말에는 그래도 남편이랑 같이 딱히 뭔가를 안 해도 뭐 TV라도
같이 보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아니이 사람이 늦게 배운 바람이 뭐 더 무섭다고 자위의
맛을 들리더니 토요일도 약속 잡고 나가요 오마이갓 문화 생활이 이게 어두운 쪽도 좀 있잖아요 그렇 지하의
세계가 있죠 그렇죠 상상은 여러분들 구독자분들한테
맡기겠습니다 그런 적도 술쩍 빠지는 느낌도 받았고 얘기했어요 자기가 토요일 일요일이면 웬만하면 약속 안
잡으면 안 돼 그리고 평일에도 일주일 내내 나가 있지 말고 그래도 일주일에 한두 번만 나가 음 아 나가니까 누구
만나니까 좋고 또 버리는 막 신나서 얘기를 해요 듣다가 듣다가 1년을 딱
있으니까이 사람 이대로 내가 뜨면 안 되겠다 제가 단호하게 한번 얘기를 했어요 자기 그러지 말고 이제는 슬슬
직장을 알아보자 그만큼 쉬으면 많이 쉬잖아 내가 자기 일 안 한다고 해서
내가 지금 벌어서 우리 새식고 밥은 먹고 살아 근데 사람이 집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안 좋아 그랬더니 알았어
데 그 반응이 그 시큼한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알았어 했는데 그 이유로 여러 번 좋게 얘기한는데 안 돼요
그래서 나는 이제는 당신이랑 못 살겠으니까 응 그만해 칩시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그런 이유가 있을 줄 알았어 딱했는데 처음에는 처음부터
짐을 싸서 안 나갔어요 그니까 한 두 번인가를 내가 진짜 당신하고 안 살 거야 안 살 거야를 했는데 그렇게
하고 알았어 내가 일 나가고 너 하라 하잖아 내가 잘못한게 없잖아요 한 두
번을 넘겼는데 세 번째는 안 되겠더라고 음 그래서 제가 오피스텔 계약을 미리 해놔갖고 어 딱 그
계약서 서류를 선에 지고서 나 이제 더 이상 못 살겠으니까
헤어집시다니까 그때도 아마 제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나 봐요 그 첫 번째 두 번째를 무사히 넘겼으니 세
번째도 설마 네가 아마 이런 마인드였나 봐요 세 번째는 내가 아이
사람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한번 허대게 그래서 거쳐지면은 다행이고 안
거쳐지면은 다른 선택이 없구나 음 그니까 한마음에 그 갈등은 많았어요 이게
우리가 그 탈북 스토리에 있던 것처럼 너무나 힘든 가정을 거쳐서 왔고 또
북한에서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서로 다 힘들 때 만나서 같이 살았고
중간에 애도 생겼고 그 어렵게 산 가정들을 거쳐서 또 다 목숨 걸고
탈북도돼서 왔고 또 떨어졌다가 교 만났잖아요 영영 못 볼뻔하다가
헤어질 마음은 없었어요 왜냐면 왠지 저 사람이 내가 아니면은 또 방을 할
거 같은 거 같고 나 하나만 바라보던 사람인데 내가 또 없어지면은 우리
딸내미는 또 생각이 참 많았어요 그런데 그렇게 크게 한번 결단을 안
내리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세 번째는 진짜 내가 오피스 때 미리 다 계약 보증금 넣고
월세 다 계약 월세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제일 단기간 작은 거를 알아봐
주세요 했는데 한 달로 알아봤거든요 몰라요 한 달짜리는 저희네가 계약을
안 한대요 응 그 그러면 제일 짧은게 얼마래 3개월이래요 3개월짜리 계약을
했어요 제가 그래서 나올 생각나 3개월짜리 계약을 해가지고 짐을 다
옮겼어요 그까 자기는 또 속 탄다고 지금 이게 술 한잔 마시고 어디 또 휙 나가 버렸더라고 그래서 제가 그날
퇴근을 해서 와서 그때는 화가 나니까 저 저밖에 생각을 못 하니까 밤새 그
짐을 제가 제 작은 차에다 싹 다 옮겨 버렸어요 뭐 다 어피스텔에
어차피 뭐 냉장거 있고 TV 있고 세탁기 다 달려 있잖아요 집안에 가전 제품은 다 두고 저 옷이랑 필요한 거
챙겨서 밥 해 먹을 그릇도구 가져 가지고 이게 제일 매일 마지막 짐
실을 때 집에 들어온 거예요 오피스텔 계약서 확 낚고 채더니 제가 사진을 찍어 놨어요 그래서 왜지 그때는
몰랐죠 저 사람이 이걸 왜 사진 찍지 했는데 침 다 옮기고 나니까 그 주소지를 찾아온
거예요 근데 제가 오피스텔도 뭔데를 못 잡았어요 이게음 진짜 갈라지려고
한게 아니니까 그죠 그리고 딸내미가 또 학교를 다니고 있어 가지고 제가 아침에는 픽업을 해 주는데 저녁에 올
때는 픽업을 못 하잖아요 그니까 집 딱 횡단보다 건너서 이렇게 잡았거든요
처음에는 이게 낯설잖아요 대한민국에 와서 맨날 가족이 같이 부데끼고 살고
했는데 이게 살아보니까 뭐 좋은 것만 있는게 아니더라고요 나쁜게 훨씬
많더라고요 그러니까 네 이게 마음은 이게 길을 이잃은 것처럼 마음은
서글퍼지고 걱정도 되고 근데 그렇다고 제가 먼저 뭐 괜찮아 밥은 먹었어 물어볼 수는
없잖아요 한 하루 이틀은 자유를 맞게 하는 거 같더라고 연락도 안 오더라고요 연락도 안 오고 통장에서
뭐 돈듣게 카드 걸 쓰고 다 하더라고 그래서 어 그래 잔소리하는 마누라 없고 살판났다 이거지 응칠 보자했더니
딱 이틀지니까 전화가 오고 문자가 와요
마음 같아서는 받고 싶은데 안부 인사도 전화 오고 하는 거를 일단 전화는 안 받고 문자로만 대화를 하고
했어요 그래서 문자를 조금 하다 보니까 나중에 집을 찾아왔더라고요 집을
찾아와서는 그 얘기한 것처럼 문톡 두드리고 딸내이 엄마 아빠 왔는데 문
열어져 말아 승락을 받고 문 열어주고 해서 참 꾸준하게 와 가지고 그래도
본인이 과거에 대해서도 또 사제할 건 저한테 용서 구할 건 구하고 또
미래에 대해서 또 얘기도 많이 나누고 해 가지고 그 이후로는 없어요 그러면
지하의 세계를 안 갔어요 안 가죠 그때도 그냥 간게 아닌가 한 번인가
노래방 같은데 갔겠지 네 저는 그때 그게 납득이 안 갔거든요 왜 노래방을 가고 그런데 왜 가지 했는데 그게
지금 보면 하나의 문화인데 일단 노래방 하면 안 좋은 인식부터 드리 안 좋은 인식 있고 추을 마셔도
적정한 시간에 11시나 12시 들어왔으면 좋겠다 근데 어떤 때 막 1시 2시도 막 들어오고 하니까 근데
뭐 절대로 술 먹고 술 주정을 하거나 뭐 요거 이건 없어요 그냥 그러면
씻고서 바로 자요 그래요 이래서 양성말을 데려가야 되는 거예요
이후로는 말하면 말한 거대로 지키고 있고 비온 다음에 땅이 굳어진다고 더
굳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거를 겪꾸면서 서로에 대한 존중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애뜻함 그리고 또 가까워지는 거 같아요 음 그 돈을 자꾸 모아놓으면
가져간다고 불평불만을 했더라고요 그렇죠 어디서 투자했던 거예요 그 늦게 배운
도덕질이 아시는 줄 모른다고 그니까 처음에 대한민국에 와서는 북한에서
우리가 그냥 나가서 노동을 착당하고 버는 것만큼 그 대가성이 없었으니까
대한민국에 와서 매달 일고 그 월급 들어오는 거에 너무나 만족하고
감사함에 살았어요 근데 이게 또 자본주에 물다 보니까 이게 살다
보면은 저희가 지금 임대주택 살고 있는데 또 사람의 욕심이 그렇잖아요
그럼 좋은 집에도 가고 싶고 이게 임대주택이 뭐 나쁘다는게 아니라
우리가 빨리 나가야 돼요 그래야 정착도 되고 다음 순서 사람들이 그
저는 임대주택이 저희가 하나원에서 배정을 해서 쉽게 받았잖아요 저 그런 줄 알았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그
청약 대기줄이 엄청나게 길고 우리보다 힘드신 분들이 엄청 줄소서
기다리더라고요 그러니까 저희 같은 사람들이 노동력이 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여건이 되면 집 사 갖고 나가는
것도 물론 우리 환경 주 환경 바꾸고 우리 욕심도 있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 욕심을 가지다 보니까 아 이게 월급을
받아서는 우리가 지금 먹고픈 거 먹고 쓰고픈 거 쓰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데 그러면 계산을 해 보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도 해도 집 살 돈이 안 나오는 거니까 아무리 우리가 쪼개고 쪼개고 해도 계산이 안 나오는
거예요.음 음 근데 어느 순간 그 주식의 눈을 뜬 거예요 음 자유시장에
꽂힌 주식의 눈을 꼭 떴군요 그렇죠 근데 저희 하나원 나올 때 쌤들이
누추히 말하잖아요 다른 건 다 좋은데 도둑질하고 주식하고 도박은 절대 하지
마라 도박하고 주식하다가 폐가 망신한 사람들 많다 음 그니까 제가 하나
나와서부터 한 7년은 그거를 지켰어요 도박는 애처에 뭐 할 줄도 몰랐고
그냥 주식 가면 아 돈을 말아먹는 사람들이 인식이 생겼는데
그 코로나 시기가 딱 시작되면서부터 이게 MG 세대들이랑 이게 제2에 투자 3D잡이 나오면서
그때부터 주식 열풍이 돌기 시작을 했었어요 아 내가 그래도 대한민국가 왔으면 뭔가를 꿈꾸고 그 꿈꾸 거를
해보고 싶은 그런 욕망 같은게 생기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주식 채널도
접하고 유튜브도 듣고 나름 해 가지고 아 집을 좀 사자
음피가 대출을 안 집을 했던 갖고는 부족하니까 대출을 받지
말고 집을 사자 주식 투자를 하느라고 돈다 들어간 거예요 아 좀 건졌어요
뭐 많은 대한민국 많은 분들이 그 어려움을 겪고 계시겠지만요
뭐 같은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양쪽 얘기 다
들어봐야 돼 이렇게 명품이 아니더라도 내가 나갔을 때 시장에 뭐 만 원 2만 원짜리 예쁘고 질 좋고 하면
내가 만족하고 쓰기에 편안하면 그게 다해요 그리고 저는 또 커피도 잘 안 마셔 가지고 뭐 나가서 외식도 잘 안
하고 뭐 나름 그래도 짠순이로 산다고 해서 차곡차곡 모았던 돈을 지금 그냥
주식 쪽에 넣어 놓고 그 외에 가섭비는 없어요 그러니까 뭐 명품 옷을 사 있고 절대 없습니다 솔직히
지금 상황 같으면 웬만한 부부들은 아니 주식에 돈 잠가 놓고 이렇게 하면 12번 이혼을 했죠 했지만
남편도 그걸 탓타하지 않고 또 그게 뭐 아예 말아먹으 갖고 있는 상황이니까 뭐 언제든간에 우리 주식
시장이 좋아지면 경제가 좋아지면 그게 있는데 그냥 믿고 가는 거죠 그렇죠
그 남편도 제 씀이가 뭐 가섭이나 이게 아니까 믿고 가는 거고 그니까
그 순간은 저희가 불편하고 아팠을지라도 나중에 훗날에 생각을 해 보니까
얻는게 훨씬 더 많더라고요 소중함을 느끼고 어 아껴져야겠거나 하는 생각을
했고 야 사람이 살아야 우리가 지금 아무리 100세시대 100세시대 하지만 진짜 운이 좋고 건강이
따라져야 100세이 되고 보통 수명이 한 80년으로 봤을 때 내가이 사람을
만나서 이제 앞으로 살아갈 날이 뭐 길어봤자 한 30년 40년 음 아니
다 사랑하고 살고 좋은 일만 하고 살고 웃기만 해도 모자는 세월인데음
굳이 부부가 살면서 싸워야 되고 짜증을 내야 되고 그렇게 살 필요가
있을까 시간이 그러기에는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너무 많고 또 즐겨야 될
것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죠 그러게도 시간이 부족한데 그 시간대 아옹다옹
싸워 버리고 집을 들락날락하고이 시간이 너무 아까운게 아 나 헛똑이
살았네 이게 그니까 물론 남편이 좀 바뀐 것도 있지만 헛똑이 살았네.이
생각이 들면서 우리 싸우지 말고 하지도 말고 이것이 우리가 뭐 내가
좀 아닌 건 아닌가 바로바로 얘기를 해 주자 이렇게 해가지고 그때부터는 이게 싸움의 방식이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을 해 주는 그걸로 바뀐 거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내가 뭐가 남편이 하는게
마음에 안 들으면 그 순간에 막 뭐라고 해요 음 그 순간 그걸 끝이에요 담아두고 뭐 다음날까지 인상
불키고 뭐 밥을 안 하고 이젠 그런 지금은 밥을 잘해요 그 이후로 제가
밥을 안 해 주는 일은 없어요 네 네 예 알겠어요 그래도 와서 또 이렇게 길잃지 않고
네 음 진리의 길을 의지하면서 잘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음악]
[음악]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