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26, 2025

[김현숙 풀영상]한국 간 가족에게 북한 가족들이 가장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김현숙 풀영상]한국 간 가족에게 북한 가족들이 가장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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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51 views  May 21, 2024  #강은정 #탈북 #북한
간증, 강의,
강은정 텔레비전 출연 문의: 
kang22tv@gmail.com

#행복한대한민국#강은정#북한#가족#탈북#난민#효녀#Korean_refug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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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 Castles
The Green Or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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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 Comments
Sejin Lifeforce 生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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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웅-r1m
8 months ago (edited)
한국애들도 힘들다고... 당신도 이제 대한민국 국민 입니다. 힘내시고 화이팅 하세요. 지금 대한민국이 그냥 만들어진게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된 것 입니다. 힘드시더라도 화이팅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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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j1i
11 months ago
어린 현숙씨는 대학생이라니 놀랍고 이쁘고  말도 잘하시네~
한국에 잘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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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새-o6r
11 months ago
오빠도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분이군요...
현숙님도 똘똘하고 밝으니 잘 적응해서 행복하게 사시기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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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kim-rx7bx
11 months ago
현숙씨 똑순이 네요. 앞날이 행복으로 가득하시고 한국에서 성공할것으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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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lv8bq
11 months ago
보통 북한이탈 주민들이 대학을 선택할 때 이공계를 회피하고 조금 쉬운 인문계열을 많이 지원하는데(물론 쉬운공 부는 아니지만)... 현숙씨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런 분은 특별히 나라에서 장학금을 줘야 하고 사회에서 특별한 지원이 필요해 보입니다. 은정님! 댓글 고정해서 현숙씨 계좌 올려주세요. 많은 분들이 관심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하고 싶어 하는 공부인데, 성적이 안 나오면 장학금을 못 받고, 그러면 알바를 해야 하고 그러면 공부할 시간이 없고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당찬 모습,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멋진 앞날을 응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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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j2273
11 months ago
북한에 어린아이들이 많이 넘어와서 좋은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한반도에 희망은 아이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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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규-o1e
11 months ago
김현숙씨 가정에 항상 신의 가호가 있길 기원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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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doelec
11 months ago
또 한가족이 탈북해서 행복하고 꿈을 꾸며 사는 모습에 저도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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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문-i8e
11 months ago
힘들게 제2의 조국에 오신걸 환영하고 현실에 잘 적응하여 모든 분들이 행복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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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
4 months ago (edited)
현숙씨 우리한국에 잘  오셧습니다  아직익숙한게 없어서 어렵게습니다   이곳은  경쟁사회 랍니다  열심히 사는사람 만이 성공한답니다  현숙님도 열심히 해야성공한답니다   그러나 여기는  아무리높은사람 자녀라해도  특혜란게 없어요
누구든지 노력만하면 성공할수있거든요   북에서와서 도  서울대학교가요  서울시장딸은 떨어져도 북에서온 학생은 열심히공부해서 합격했어요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졌어요   
현숙씨도 열심히하면  대통령도할수있어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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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오근-f9n
11 months ago
현숙씨 애기들으니 눈물이 앞을가리네요 엄마잘간호하시고 엄마랑오빠랑 행복하게사시고 앞으로진로도 잘풀려서 잘됬으면 좋겠습니다 잘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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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12080
11 months ago
은정님 아버님은 잘계신가요? 방송에 가끔이라도 부모님 소식 전해주세요. 화이팅!!! 현숙님은 밝은세상에 오셔서 엄청 밝아지신것 같네요. 그 미소 잃지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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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dy-bm8ny
11 months ago (edited)
얖으로 대한민국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할 진정한 새세대 귀염둥이 김현숙!
몽땅 몰아보기로 화끈한 영상을 준비한 애교쟁이 은정언니처럼 잘먹고 사람들과의 경험적 교류를 많이 해야합니다! 
남친과 사이좋게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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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송이-d1k
11 months ago
현숙씨 크리스찬 친구 만난것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훌륭한  대한민국 국민되어서  나라위해 큰일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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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석-u8i
11 months ago
코로나로 막히기 전에 잘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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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환김-u7m
11 months ago
자유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열심히 노력하면 얻고자 하는 것 이룰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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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곰-o9x
11 months ago
참 똑똑한 아가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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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k6x
11 months ago
아이구 귀여워라 ㅋㅋㅋㅋㅋㅋㅋㅋ 
살짝살짝씩 웃을때 그냥 귀염 뽀짝이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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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yeokstudy
11 months ago
응원합니다...현숙씨도
강은정 샘도...
북한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믿기지 않는 나라예요.어찌 그런 나라가 있는지..끊임없이 감시나 하고. 김정은은 외국에서 공부 해서 좀 나을까 했더니...인민만 불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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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i6w
11 months ago
김현숙님 탈북  후 낯설고 물설은 한국에 적응하고  어려운 공대 진학  하셔서 잘 적응 열심히 하시는 모습 보기 좋아요
지금까지 못누린 삶 응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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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그냥 뭐 애들끼리 몰래 복사를 해서 이제 조그마한 스피커에네 거기에네
USB 넣어서 스피커로 듣죠 지금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숨이 꼭꼭 막혀음네 짜 북한 사람들 너무 불쌍한 거 같아요 뭐
여기서는 내가 열심히 했을 때 얻어지는게 확실히 있으니까 그게 진짜
솔직히 좋은 거죠 그렇죠 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강은정
TV 은장입니다 오늘도 또 새로운 초대손님을 모셔왔어요
정말 어리시고 제가 이나이 때 대한민국에 왔는데 예 큰 박수로 한번 좀 모셔
볼게요 오 어서 오세요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 온지 4년 됐고요 어
지금은 대학교 4학년에 3학년의 학님 그래요 어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성함이네 김현숙입니다 아 그래요 오 그 대한민국에 유명한 트루트 가수
현숙이는 분 알아요네 알아요 오 그래요 고향은
어디실길 꾼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어요 아 그 김일성이 첫 번째 마누라
고양네 그죠 그죠 고은 아니고 그 김종숙 태어난 곳은 회령이라는 곳이고
제가 살던 곳은 원래 신인데 이제 김종숙이가 그 한일 혁명 활동을 할
때 신파를 많이 왔다 갔다 했다고 해가지고 이제 거기에 김정숙
군이라는이 지명을 달아줘 가지고네 그 지명 이름이 바뀌게 됐어요 원래
심파 그랬구나 저 신파에 대해서 조금 낯설어 가지고 아 정말요 어디서
오셨어요 저는 고향은 평안남도 맹산이고 탈북한
데는 양광도 대홍단군 있데 이게 이동의 자유가 없는 북한이다 보니까
내 지역 외에는 잘 모르잖아요 대단 모르죠 대홍단 알아요 같은 도아
가지고 응 무슨 고장에 감자 고장이 거기에는 어떤 것들이 많은지 알아요
거기 감자랑 산이랑 나무가 많겠죠 그리고 거기도 그
부자들이음 무슨 뭐 혁명활동 에서 소위 성지 같이 되어
있어요음 그렇구나 김정수 군 여러분 이해하셨죠 북한은 이렇게 다 모든게
우상화 덩어리예요 그 지금 얘기를 들어 보니까네 한손 한국 소년
소녀인데요에 아직도 좀 많이 바꾸긴 해야 돼요 아니 이제 4년밖에 안 됐잖아요 거기는 어떻게 말을 해요
어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말해요 안녕하 니까 못하는 아닌가요 역시이 어린
친구들은 빠르네요 근데 엄마랑 있으면 잘하는데 또 바에 나오면 잘 안
되더라고요 예 그렇죠 그 확실히 어린 친구들이 정말 빠르다는게 진짜
느껴지면 제가 대한민국에 온지 15년 넘었는데 저는 북한말 안 고쳐져요
잘하시는데요 근데 아 그래요 저도 고마워요 한국말 써 보니까 어때요
그 일단 말 억양은 되게 예쁜 것 같은데 아직도 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많이 노력중에 했어요 말에 어떤 단어들이 예쁜게 많죠음 단어도
예쁘고네 표현이 되게 좀 자연스럽고음 외래어도 많긴 하지만
외려 외래어 안 힘들어요 그냥 외래어는 다 힘들었던 것 같아요 특히
실생활에 자주 안 쓰는 거는 지금도 잘 모르는 게 좀 많기도 하고 계속
배워가는 중에 있습니다 어 그래요 그럼 한국에 친구들 좀 많이 사겠어요 대학교에 가서는 좀
사귀어요음 문화 차이라든가 이런게 달라서 좀 어려움은 없었어요 어
아무래도 이제 저 같은 경우는 제일 어려운 거는 문화에 대한 공유 그런게 안
되잖아요 그래서 막 애들이 아이돌 이야기를 하거나 뭐 어느 연예인 이름
부르면서 막 걔 그 사람 어떻고 막이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이런 어디 놀러 가고 이러면은 그런 케팝
틀어놓고 춤 막 따라추고 그러더라고요네 전는 그런 거에 와서
막 다른 거에 적응하느라 바쁘다 보니까 언제 케이팝을 들어보고 뭐 춤
그걸 보고 한 그런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막 애들이 놀 때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어 그런 부분이 조금
그렇더라고요 그니까 아니면 뭐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제가 주도해 돌린다거나 뭐 그렇게 하는 거 같아요
어 그런 생각도 있었네 아 저도 그걸 많이 느꼈는데
처음에 그 제가 예술단 다닐 때 제가 다녔던 예술단에 한국 친구들
많았거든요 그 친구들이 굉장히 서글서글하고 잘해줬어요 좋테 아네 근데 얘기만 나오면 벽이 딱 세워지는
거예요 내가 못 알아듣는 거라음 뭐 수능 이야기 어떻고 뭐 일타강사 누구
어떻고 이런 거를 이야기하는데 누구지이라고 그냥 듣기만 하죠 초반에 많이
어렵겠어요네 지금도 그런 거는 좀 공감이 안 되기는네 그 어떨 때 잘잘
통해요 대학생이니까 같은 대학교 뭐 교수님 이야기한다거나 뭐 어느 감옥
이야기하고 이런 거가 좀 잘 통하는 거 같아 그래요네 그러면은 케팝
들어보니까 좋아요 제가 좀 좀 신기하게 노래듣는 거를 그렇게
즐기 편이 아니거든요 왜 모르겠어 약간 좀 유전적으로 음악과 거리가 뭔
것 같아요 오 공부하느라 시간도 없기도 하고네 그래 처음에는 발라드만
좀 듣고 했는데 요즘은 조금씩 케이팝이 더 좋아지는 것 같긴네 오
어떤 케이팝 들어요 저는 블랙핑크 뚜띠뚜 이거요 어어
잘하시네요 마지막처럼 마 마지막처럼 엄청 핑크 모르면 안
되지네 님 또 어떤 거 좋아해요 아이브
아이브 아이브 진짜 잘하더라 예쁘죠 그쵸 그죠
북한에서 뭐 19살 때 나왔다고 했잖아요 거기서는 한국 노래
들어봤어요 들어는 봤어요 어 거기도 국경이 그 물 타고 들어오겠죠 그죠
그 많이 들어요 애들이 아 많이 들어요네 어떻게 많이 들어요 그냥 뭐
애들끼리 몰래 복사를 해서 이제 조그마한 스피커에네 거기에네 USB
넣어서 스피커로 듣죠 그 누구 그것도 친한 사람끼리 몰래 들어야 되잖아요
맞아요 맞아요 그럼 어떤 친구들끼리 주로 들어요음 뭐 동네 가까운 친구라던
아니면 반 친구 뭐 그렇게 좀 친구들끼리 잘 공유해서 들어요 와 그
안에 스파이 없어요 모르겠어요 없었나 봐요 아 그 심판은 좀 그 신기한 데구나
아 그래요 그 대부분 다 잘 듣던데 한명은 꼭 스파이가 있어요음 근데 뭐
스파이가 그런 거는 안 잡나 봐요 그러면 다른 큰 걸 잡으려고 애들이
한국 노래들을 때 반응이라 그가 막 그 그런 거 어떻게 표현을 해요
좋아해요네 좀 노는 애들 조금 잘 노는 애들은 한국 노래를 들어놓고 막
춤을 준다던가 한국 노래 듣다가 목한 노래를 들으면은 좀 신나지 않고
재밌지 않다고 그렇게 표현하는 거 같아요 그때는 막 그 노래 들으면서 마음 편하게 들었어요 솔직히 아니요
그 소리 되게 작게 해 놓고 몰래 들었죠 들킬까 봐 들키면 안 되니까네
맞아요 한국에 오니까 뭐 내가 듣고 싶은 노래 다 듣잖아요 심지어여 북한 노래도 듣고 싶으면 유튜브 들어가
듣잖아요 응 그죠 그죠 그 그런 거 볼 때 뭐 표현의 자유가 이런 거구나
좀 느낄 때가 있어요네 많이 느끼죠 영화도 그렇고 북한의 보라는 영화가
보지 말 영화보다 더 적잖아요 거의 다 보지 말라고 하는 거 같아요 뭐 여기서는 다 볼 수
있고 되게 너무 자유롭죠 지금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숨이 꼭꼭 막혀음네 짜 무한 사람들 너무 불쌍한 거 같아요 삶의
질이 어때요 뭐 삶의 질은 진짜 좋긴 하죠 근데 또 어떤
면에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하고 그 어떤 면이 어떤 면이에요 그러니까
공부하는 거 아 북한에서는 경쟁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경쟁 사이가
아니니까 옆에 사람이 잘되든 잘 안 되든 거기에 나를 막 비추어서 더
잘해야 된다 내가 일 1등을 해야 된다 이런게 별로 없고 솔직히 그냥 잘 나가는 간부들이 좀 돈 많이 벌고
서민 들은 거의 다 뭐 똑같이 살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 같은데
여기서는 무조건 잘해야 되니까 그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런게 좀 강하잖아요
사회적으로음 그래서 좀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이제
북한에서 기초가 부족한데 대학을 다니다 보니까 좀 많이 힘들고 따라가기 힘드니까 또 남들보다 열심히
해야 되는데 그것도 힘들고 하니까 좀 그런 스트레스가 많은 것 같아음
빼고는 다 너무 좋아요 막네 자유롭고 외국도 다녀오고 어
그래요네 현숙 씨가 말한게 북한이 좋다이 얘기로 오해를 하시면 안
되는게 그 사회에서 이미 체질적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경쟁 사회잖아요
그 경쟁 속에서 오는 보람이 있잖아요 그거 너무 행복하죠 그렇죠 또 다른
면에서 보면은 힘들지만은 내가 열심히 하면 열심히 한 것만큼 성가를 얻을
수 있다는게 그게 또 엄청난 큰 거죠 진짜 그죠네 노력을 해도
북한에서는 뭐 무보수 노동을 해야 되고 공부를 해도 돈이 없으면 대학을
못 가고 뭐 돈이 있다고 해도 대학을 졸업해서 내가 뭐 특별히 나한테
얻어지는 이익이 없으니까 대학에 안 가거나 하는데 뭐 여기서는 내가
열심히 했을 때 얻어지는게 확실히 있으니까음 그게 진짜 솔직히 좋은
거죠 그렇죠 와 진짜 거 4년 사이에 정말 빨리 터득을 하셨네요 아 그래요
얘기 전에 뭐 했었지요 얘기 전에 아 어떡하지요 비디 님
뭐였어요 아 그죠 그죠 그럼 넘어갑시다 그래요 그 어디 계세요
피디님이 아니 아니 우리 영상으로 이제 편집해 주시는데 제가 그냥 한 얘기예요 아
그래요 아 너무 귀엽다 어디 귀에 뭐 인어라도 끼고 있는 줄
알았어요 아 아해요 어디서 막 보고서 알려 주시는 줄 알았네 아 그러면은
우리 현숙 씨 참 이렇게 깨달은게 어린나이 지구는 너무 더 성숙한 그
알바는 어떤 거 해 봤어요 서빙이 편의점 해봤어요 편의점네 편의점
알바하면서 어려운 건 없었어요 편의점 알았는 식품들 이름 암기하는 거 그게
이제 사라면 하면은 한국 사람들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 저는
삼양라면을 편의점 가서 처음 본 거예요 근데 이제 점장님이 오셔 가지고 삼양라면이 어디 있어 이렇게
이제 물어보시는데 그게 어떤 라면이지만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장님이 아니 사라를 왜 모르냐고 진짜 아까 어이없다는 식으로 그러시더라고요
그런 부분에서 좀 알바할 때 힘든 거 같아 그분이 몰랐던 거예요 알기는
알지만 너 한 걸 모르니까 대상해 봤던 적도 없고 이런 것까지 모를까
이런 거는 뭐 모를 수 있잖아요 그렇지 알 수가 없지 못 먹어 봤으니까 북한에 라면 있어요 라면
있기는 해요 근데 어디 라면이 나와요 뭐 평양 대동강 라면 뭐 이런 거였던
거 같아 아니면 대부분 저희는 중국 라면을 많이 먹었어요 중국 라면 대동강 라면이라는게 나오긴 나오는구나
편의점 알바를 그렇게 참 고생스럽게 했는데 그래 도 또 돈을 거기서 받아 가지고 그걸 가지고 또 대학교 공부
금 용돈 쓰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맞아 맞아 장학금제도 그런 것들 많잖아요 장학금 좀 받고 있어요 제가
공대를 다니거든요 전자공학과를 다니고 있는데
그게 좀 한국 애들도 공부하기 힘든 진짜 어려운 학가 든요 아 거기가
군대가요 그니까 공대 중에서도 학과가 다양한데 전자공학과 하면은 또 제가 다니는
대학교도 되게 실력이 있는 대학교라고 한국 학생들이 거의 뭐
학년에서 1 2등 하던 애들이 이제 모인 그런 대학교다 보니까 어
공부하는게 너무 힘들어요 근데 이제 대부분이 장학금이 성적 제한이
있거든요 예 저는 공개다 보니까 성적이 너무 안 나오거든요 그막 아
진짜 성적이 너무 안 나와서 장학금 잘 못 받고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괜찮아 그래도 참 대단하다 그 길을 가고 있는게가 좀 악순환인 것 같아요
장학금 못 받으니까 또 알바 해야 되고 그러면 또 공부할 시간이 줄어들고 해가지고 그니까 그 과를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음 제가 어릴 때부터 수학이랑 물리 같은 거를 너무 좋아했어 가지고
그 저는 무조건 공대를 가야겠다 싶어서 이과 쪽을 선택을
했는데 사실 그렇게 힘든 줄 모 그 그냥 갔다가 지금 고생하고 있어요 그
공부하다 보면은 이게 공부 질일 수준이 높죠네 수준도 뭐가 특성상 원래 높고 뭐
저희 전자과에서 대부분 4차산업 혁명에 들어갔는 그 아이 말이 틀렸어요 여기 편집해 주세요
귀여워 아무튼 현대 기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기술을 배우는 학문이어야
되게 발전된 기술을 다루는 그런 걸 배우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음 북한에서 뭐 저희 때에도 그랬지만 한문네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어 그다음에 영어 배웠는데 비중이 영어가 제일 작았 그든음 우리 현수 씨 때도 그랬어요 되게 많이
배우셨네요 저는 중국 한자랑 영어만 배웠어요 근데 영어를 배워 주기는 한데 이제제
배워 주는 질 자체가 선생님들 뭐 발음은 그냥 영국식 발음인데 거의
지금 내가 하는 영어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정도로 배워주고 근데 잘 배워 준다
해도 아마 못 했을 거예요 학교에서 배운 영어로만 영어를 잘하는 북한학생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그렇지 거기 또 영국식 용어를 가르키아요
맞아 참 대한민국에 와서 이렇게 열심히 지금 공부도 하고 이렇게
했는데 북한에서는 학교 생활을 좀 했어요 그래도음 저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네 왔어요 부모님이 뭐 하셨어요 어릴 적에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고 엄마는 그냥 응 부양이 하죠 북한에서 부양으로 주를 양이라고
하죠네 주부로 계속 계셨어요 그러면 엄마가 벌어서 먹여서음네 공부하고 그랬던 거예요네네
근데 오빠가 있는데 여섯 살 위거데 어릴
때 되게 가난해져 가지고 오빠는 그때부터 거의 학교를 못 갔고 그
저는 어리니까 뭐 집일 도와줄 그런 형편이 안 됐어서 저는 그냥 학교를
계속 잘 다녔어요 아 그랬구나 어머니가 부양하면서 장사 같은 걸
하셨어요음네 어릴 때는 하셨는데 좀 중학교 쯤인가 그때부터 엄마가 좀
많이 아프셔 가지고 그때부터는 거의 친척들이 좀 도움을 주거나음 그
살다가 오빠가 먼저 한국에 와서 그때부터 오빠가 돈을 보내줘서 그 오빠가 보내준 돈으로 또 살았어요 아
그러면 오빠가 먼저 탈북을 네네 한 거군요 몇 살 때 탈북한 거예요
오빠가 제가 제가 15살 때 했어요 아 그러면 3년 먼저 온 것 같아 그
3년 만에 오빠가 엄마랑 동생을 데려온 거예요 네네네 그 오빠 참 대단하네요 보통 여러분 다
들어보셔서 아시겠지만 딸들이 부모님을 구출하고 가족을 데려온 경우는 많지만
아들들이 그렇게 한 건 많지 않았거든요 맞아요 저희 오빠가 어릴
때부터 집이 가난해지면 또 거의 가장처럼 집일 하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되게 일찍 철 들었거든요 아 그래서 좀 그 가장 같은 그런
부담감을 되게 많이 가지고 컸는데 여기 와서도 다른
사람들을 와서 대부분 대학 라 공부하고 그렇게 하잖아요 근데 오빠는 하나 나와서부터 집에 돈을 보내줘야
되니까 나와서부터 노가다를 했대요 그래서 속 그때부터 일을 해서 집에
돈 보내주고 또 모으고 해서 이제 저희를 데려온 거죠 그랬구나 이게요
여러분 그런 거 같아요 가정이라는게 굉장히 어렵고 고생을 한
그 가족의 자녀들이나 이런 식구들을 보면은 같이 고생했던게 있어 가지고
가족을 끔찍하게 좀 챙기는 그런게 있는 거 같아요 북한 사람들이음 맞아요 그렇죠네 북한 사람도 좀 특히 그런
거 같아요 맞아요 정이 막 많잖아요 원래 그러면은 오빠가 한국에 갔다는
걸 알았어요 응 갈 때도네 알았어요 오빠가 한국 간다고 말했어요 다른
친척들이 좀 많이 왔거든요 옛날부터 헐 정말요네네 그까 외삼촌 한분이
2008년도 99년도 그때 와가지고 이제 다른 친척들 다
데려가다가네 이제 오빠 데려갈 때 다른 친척분들도 같이 오는데 이제
오빠가 같이 왔어요 그 그 이후에 오빠가 저희 데려고 그니까 외삼촌이 먼저 와 가지고 가족에 한 명씩
데려와서 이제 너네 와서 자리 잡아서 남은 가족들 자기 가족들을 다 데려오라 이렇게 이제 한 집에서
이렇게 와 외삼촌이 진짜 똑똑하시네요 그럼 여기기 한국에온 친척들이 그럼
모이면 굉장하게 대가족 이겠어요 다 해서 온 사람만
한 12명 정도이 제 정말 절친 중에 고모 한
명이 탈북해서 30명을 그다음에 두 번째인 거 같아 지금네 뭐 어디 뭐 탈북민 모임
같은데 혹시 갈 수 있잖아요 그 저희는 친척들이 다 같이 가면은 거기 가면 한 절반이 다 해서 막 20명
된다면 절반이 저희 친척 그러니까이 집안은 못 들겠다 컨 들면 와 갈라 붙어 가지고
이게데 거기다 이제 사촌들 다 30 이상이거나 그러면 다 여자친구
남자친구 있어 가지고 나 시 또 데려오면 진짜 막 또 뿌러 하잖아데
흐뭇 하겠어요 외롭지 않겠다 그죠 명절에 막 모여서 집에서 그런 게임
같은 것도 하고 하면서 놀아요 어 세상에 사이도 좋네 응 엄마의
형제들이 되게 사이가 엄청 좋아요 음 사이도 좋고 좀 정이 많고 잘
나누면서 사는 거 같아 제가 보 어 너무 좋다 정말 듣는데 행복해요 엄마는 안 말렸어요 한국 가는 거
엄마는 이제 오빠를 가라고 했어요데 집이 사는 것도 어렵고 또 오빠가
북한에서 너무 고생하면서 살고 하니까 엄마가 여기서 이렇게 고생할 바에는
좀 한국 가서 그래도 일하고 좀 돈을 많이 받으면서 또 본돈 집에도 보내주고
하면은 그게 오히려 낫지 않겠냐고 기본은 오빠가 좀 너무 북한에서
고생을 많이 하니까 한국 가서 잘되라는 그런 마음이 좀 커 가지고 엄마가 오빠를 계속네 가라고 했어요
엄마가 아이고 어머니도 현명하시네요 이제 외삼촌이 되게 일찍 오셨으니까
좀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큰 것 같아요네 한국에 대한 거 계속 듣고 이러니까 어떤 얘기 들었어요 뭐 외식
맨날 하고 뭐 일하면 돈 받을 수 있고 아니면 대중교통 지하철 한문에
한 번씩 온다 막 이런 거 들고 승용차 타고 다닌다 이러 거기서
들었을 때 너무 환상적이 아아 황당했다 그니까 진짜 진짜 환상 꿈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너무 좋아 보이고 그래서 그냥 한국이 좋다는 거 내가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르고 너네 와서 직접 봐야 어느만큼 좋은지 알 수 있다고 그때만 해도
북한에서 산 사람이 바로 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근데 아무런 그런 것도 없이 자기가 직접 예
개척해서 오신 거 같아 아 삼촌님 그 몇 년도에 삼촌은 나오셨죠 그
2009년인가 8년인가 어 아 그때만 해도 때가 이제 탈북의 황금 기기는
했는데네음 그때도 생소하기는 했어요 제가 2008년도 나왔거든요 어 그래요 어 비슷하네 2008년도에
나올 때 우리 현숙씨 나이였다 그러셨구나
사실 언제든 오라고 맨날 언제든 오라고 했는데 그 또 북한에서 나오는
것도 기회를 잡기 싶지 않잖아요 너무 위험하고 하니까 그고 또 조금
개인적인 사정 집안 사정도 있고 해서 엄마가 당장 못 나올 그런 사정도
있고 했어 가지고 그냥 기다리다가 그때 기회가 어떻게 돼서 그냥 항상
언제 가지 언제가지 하고 있다가 이제 그때 딱 나오게 됐어요 그런데 코로나
딱 직전에 왔어요네 맞아요 그 와서 7월에 나오늘 나오고 12월인 되니까
코로나가 터져 지더라고요 야 운이 좋았네요 완전 좋았대 그때 못 았으면
아무 못 왔을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였다 되게 그죠 지금 아예
막혔어요 그러게 막혔다 하더라고 13명도 못 나와요 지금 한 달 졸
졸업하 하나원 수가 거의 다 러시아에 있던 탈북
근로자들이 그런 사람들이 었거든요 없어요 지금 진짜 운이 너무 좋았네요
그 올 때 엄마랑 같이 떠난 거잖아요네 어머니는 반응이 어땠어요
이거는 엄마한테서 들으면 되게 재밌을 것 같은데 엄마가 좀 많이 아프셨어요
그래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이 아파 가지고 1년 동안 진짜 집중 치료를
해서 겨우 나다닐 수 있게 몸이 좀 회복이 됐거든요 근데 그때 당시 좀 집이
아무래도 가족 뭐 친척 다 한국에 받다 보니까 보위부 그 감시가 엄청
심했고 주위에 있는 사람이 다 스파이다 할 정도로 감시가 심했었어요 그러니까 좀 사는게 되게 불안하고
항상 공포스 럽지 불안하고 이렇게 두렵게 살다가 좀 엄마 병이
나아져서음 떠났는데 그때 또 집에 이제 엄마가 딱 그때 못 올 만한
그런 사정이 또 있었어요음 그래서 엄마는 안 가겠다고 계속 그 사정이 뭐예요 그런 거 아니고 돈을 빌려주고
못 받은 거예요 뭐 돈 빌려주 못 받은 거는 그냥 다 두고 왔어요 아 그래요 진짜구나
그거는 사정의 이유는 아닌데 그때 저희 외할머니가 계셨거든요음 그 되게
외할머니가 좀 장수하신 외할머니가 계셨는데 친족들이 나 한국 오다 보니까 자식이 엄마밖에 안 남은
거예요 그래서 엄마는 엄마의 엄마니까 나 나는 할머니 돌아오면 가겠다
이렇게 하는데 아 그 이구나 응 제가 보기에는 또 그러면 엄마가 기다리다
먼저 돌아가실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엄마는 계속 안 오겠다 하는 걸 제가 엄청 설복을 해 가지고 이제 같이
떠나게 됐어요 떠난 날까지 엄마는 저만 먼저 보내고 혼자서 집 가겠다고 그랬었어요 그거 이제 그냥 데리고
떠놨는데 이제 보위부 꼬리가 달려 가지고 딱 강을 건너는데 이제 한 그
보위부 한 30명이 중국에서 봤는데 북한강 쪽에 막 불빛이 보이는 거예요 엄머나 명 이 추격한 거예요네 그
정도 되는 거 같아요 그 산에서 이렇게 딱 봤는데 중국 땅까지 넘어온
거예요 한 명이 잡으려고네 근데 이제 남미나라 땅에 왔으니까 좀 조용조용
응 막 비치면서 도로를 찾고 있더라고 다행히 이제 산에 좀 눈 이렇게 발자국 덮고서 조금 올라와서 이제 한
한 뭐 2 3m 되는데 이렇게 숨어 가지고 내려다보는데 막 왔다 갔다
하다가서 가더라고요 한 30분 찾다가 중국 건 면 브로커가 오기를 기다려야
되잖아요 그 너무 추운데 한 다시간 됐는데 안 오 놓은 거예요 막 그다음부터는 얼어 죽겠는 거예요 손발
다 울고 막 추워서 그렇게 기다리는데 왔는데 중국 그 브로커가 운전한
사람이지가 덥다고 뭐 난방을 안 틀어 준 거예요 그 너무 추운데 차에 탄데
난방을 안 틀어주 말도 안 통하고 그 엄청 추운데 또 가다가 몸이 다 녹았는데 자기가 춥다고 난방을 엄청
들어가지고 막 덮게 간다
아무튼 그렇게 오게 됐어요 진짜 고생했네요 그러면 그 왜 할머니는
어떻게 됐어요 그냥 흘러 두고 그거는 아니고 이제
조카가 그 돌아가신 외삼촌 그니까 자녀분 자녀 있는데 엄마랑 열살
차이밖에 안 나는 저한테는 언니이기도 뭐 되게 위인
그런 조카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할머 머니 마지막까지 돌보고 와서 1년
있다가 돌아가셨다고어요 머가 아고 어머니가 많이 마음이 아프셨다 엄마를
두고 오는 그 마음네 그래서 그 언니한테 지금도 계속 돈 보내주고
있고네 고마워서 오면서 힘든 건 없었어요 오면서 다
힘들고 되게 사건이 많긴 했는데 어떤 사건들이 있었어요 그 북한에서 떠날
때 저랑 엄마랑 또 어떤 는 언니 해가지고 세 명이 떠났거든요 근데 그
중국 브로커가 이제 봤는데 중국에서 좀 여자를 잘 팔잖아요 북한 여자들을
근데 저희 뭐 거기서 폰을 보자마자 다 뺐더라고요 핸드폰을네 뺐고 이제 북한에서 떠날
때 그 중국폰 하나 가지고 떠나잖아 연락을 해야 되니까네 근데 아예 연락을 못 하게 핸드폰을 뺐더니
저희를 어떤 집에 데려다 주고 여기서 며칠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이제 며칠 있다 데려다 준다고 근데 다음 날에
와 가지 우리가 가족 도주를 했기 때문에 북한에서 우리 잡으려고 뭐 중국의 공안을 다 풀어서 우리 뭐
사진이 막 붙어 있고 그래서 우리 다 잡으려고 해서 우리 나가면 안 된다고 그냥이 집에만 있으라 그러는 거예요데
떠나자마자 그런 이야기 들으니까 너무 겁이 나죠 얼마 진짜 무섭더라고요
근데 중국이 제일 위험하잖아요 그래서 막 무섭게 있는데 그래도 2 3일인가 있다가 뭐
위험하지만 그래도 저쪽에서 가족분들이 계속 그냥 보내라고 하니까 보내는
들릴 거다라고 해서 다른 브로커에 넘기는데 이제 옆에서 딱 보다 보니까
이렇게 돈이 딱 은행 계좌 입금이 되는 걸 확인하고 보내더라 그요음데 그때는 몰랐죠 그냥 근데
너무 좋게 말해 가지고 진짜 착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그 진짜 감동받아 가지고 막
왔었는데 후에 알고 보니까 저희를 팔아먹으려고 이렇게 붙잡고 돈 달라고
안나 주겠다고 아니 팔아 먹겠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 찍힌 돈이 그
협박으로 받아낸 돈이 거 응 그래서 한국에서 또네 한국에서 몇 백만을 그
여자한테 오빠가 입금을 해주고 저희를 데리고 왔다 엄마 브로크 비용 비용대로지 하고 엄마나 이런 참
아 막혔다 또 태국에서 산을 걸어서 넘잖아요 한 다섯 시간인가 우리
브로커 따라 막 밤에 가는데 한 8시간 는 산을 걷는데 계속계속 가도
산 계속 올라가는 거예요 그 원래 이런가 하고 따라가 그래서 원래 좀 많이 걷는다고 들었으니까 근데 너무
뭐 산 같은데 어르고 벼락도 어르고 막 그런 뭐지 이런 순 같은 밧줄처럼
해 가지고 벼랑 타 가지고 러고 그렇게 해서 가니까 너무 높아서 나중에 저
위에 보이던 달이 거의 이렇게 막 눈 앞에 보일 정도로 그렇게 높은 데까지 올라갔더라면 음 근데 갑자기 가다가
앞에서 그 브로커들이 무슨 자기네끼리 신호를 하더니 싹 다 사라지고 다 뛰었더니 어 다른 사람들이 지금
나타났는데 자기네가 폴리스라는 경찰이라고 하는 거예요 어 그 너
저희는 너무 무서워 가지고 다 막 숲속에 그냥 이리들이 흩어져 가지고
다 뛰었죠 근데 저희 그 일량 속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계셨는데 산을
가는데 너무 힘드셔서 뒤쪽에서 오니까 이제 저 또 젊고 했으니까 그 할머니
무 조여 가지고 같이 가느라 앞에서 그런 상황이 있었는지 몰랐거든요음 일행이 많았나 봐요네 다들 사라지고
없는 거예요 근데 막 앞에서 막 와야 막 이렇게 하면서 막 소리 지르는 거예요 그
경찰인가 보다 하고 막 숨었는데 뭐 그 순간에 어디 숨을 때도 없고 그냥
막 머리만 이렇게 안 보이게 막 불 밭에 숨기고 아 그렇게 숨어 있는데
이제 와가지고 일어나 일어나 뭐이 뭐뭐 하는 거 같아요 그리 일어났는데
이제 딱 보니까 자기네가 경찰이라고 하는데 제가 딱 보니까 그 브로커
들하고 옷 입은 것도 비슷하고 봤을 때 그냥 사기 치는 것 같더라고요 그
그 두 브로커가 좀 사전에 약속하고 저희한테 돈 뺏으려고서 그랬던 거
같아요 그 저희 다 무서워서 지금 모였는데 저를 안 보내는 거예요 그래
산에서 저희 무서워서 막 앉아서 빨리 보 보내 달라고 막 빌고 한 울면서 사람들이 막 빌고 하는데 진에 앉아서
마약하고 있는 거예요 어 그러니까 너무 무서운 거예요 아 수요 무서워서
막 앉아서 한 울면서 사람들이 막 빌고 하는데지네 앉아서 마약하고 있는
거예요 오마갓 그니까 너무 무서운 거예요 아 수요 그 저희 일행 중에
남자가 딱 한 명밖에 없었어요 그것도 좀 어린 남자 그 다 여자들이 그
사람들은 마약을 했으니까 밤에 잠 앉자고 막 날아다니고 엄청 힘이 막
좋은게 느껴지는 거예요 보기 그 너무 무서워서 막 엄마들이 막 안고 막
울면서 그 아기도 있었거든요 아기 보라고 우리 보내 달라고 하면서 막 사정 사정하고 그랬는데 결국에는 있는
돈을 다 주니까 보내 주더라고요 야 세상에 그 거기서 그렇게 모아서
밤새고 보내줘서 그냥 저쪽으로 가라 하고 길을 알려줘서 그냥 길도 모르고
내려 다 어떤 분한테 다행히 폰이 있어 가지고 한국이랑 연락해서 이제
브로커가 또 저인데 찾아와서 그렇게 왔어요 야 고생 많이 했구나 그때
[음악] 진짜데 그때 산에 있을 때 그렇게 밤새고 8시간은 산 오르고 또
다음날까지 브로크 올 때까지 할 종일 기다리고 산 내려가고 하다 보니까
거의 산에 이박 3이 있은 거예요 근데 산을 8시간 오르다 보니까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그 짐을 다 버렸거든요 어차피 거기만 넘으면 태국
갈 수 있으니까 너무 배고픈 거예요 물도 없고 먹을 것도 없고 그냥 이박 3을 굶으면서 그렇게 했는데 저
태국에 왔는데 예전에 뭐 태국까지 오면 이제 안전해서 만세 불러도 된다 뭐 이런 말이 있잖아요 공강을 건너서
그 땅을 올라서는데 만난 모래 이렇게 언덕 같은게 턱 같은게 있더라고요
거기를 올라가야 되는데 거기 올라갈 힘이 없는 거예요 그 너무 배고파 벌을
힘들고 진짜 그래도 태국 감옥에 가면은 밥을 줄 줄 알았는데 폴
폴리스 찾아서 이제 갔는데 내일 아침 내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돈을 내면 사 먹을 수 있다고 밤에 도착했으니까 그 너무 배고파서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응 그래 밤새 너무 배고파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가 어찌됐든 또 다음 날에 밥을 먹게
됐던 거 같아요 또 태국에서도 일이 있었는데 태국에서 산에서 저희 오다가
돈을 다 주고 왔다고 했잖아요 근데 태국에서 재판을 받아야 이제 대사관으로 넘겨질 수 있는데 근데 그
재판을 받으려면 중국돈으로 한 명도 500원씩 돈을 내야 받을 수 있다고
떠날 때 그 돈을 좀 남겨두라고 했었거든요 근데 저희가 돈을 다 주다 보니까 돈이 없는 거예요 아이고요 그
재판을 못 받으면은 이제 감옥에 가야 된다 해가지고 갑자기 어디 간대 막
팔날에 독재를 막 뭐고 죄수들이 몇 년 동안 갇히는 그런 감옥 수영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3박 4일 정도가 더 있었나 뭐 한 5일 정도
있었던 거 같아 있다 보니까 한국이랑 어떻게 우리가 사우스코리아 가고 싶다고 막 영원로 그냥 계속 사우스
코레아 막 이렇게 하니까 연락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거기서 그만큼 지내다 다시
태국 남민 수용소로 가게 됐어요 근데 그때 그 수영 수영 그 감옥 갔을 때
산 넘을 때 너무 고생해 가지고 다음날 일어났는데 걷지 못하게 했 거예요 다 알배겨서 그 일어서지도
못하게 했는 거예요 너무 다리가 알여 가지고 그 다들 다리가 빠져 막 귀어
다니고 막 사람들 어른들 다리가 데다 막 맛 이렇게 부딪쳐서 다 파랗게
물고 진짜 성한데가 하나도 없이 그렇게 됐더라고 아이고 엄마는요
그래도 엄마는 엄마가 간경 하거든요 변명이 아이고 그래가지고 그때 이제 북한에서
많이 아프다가 간경화에 마지막에 식도정맥 출혈을 하는데 엄마가 두 번 식도정맥
출혈을 했거든요 북한에서 때 그 의사들도 이제 못 산다 하고 진짜 사람게 기적이라 할 정도로 한국에서도
식도정맥 출혈만 하면 열 명 중에 한 명 살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걸 이제 두 번 피를
또하고 상에 어떻게 잘 살아서 이제 오다 보니까 진짜 정신력으로
와가지고네 태국 감옥에 딱 딱 도착해서 이제 그 긴장이 풀리니까 배에 바로 복수가 차
가지고 복수가 엄청 빵빵 해서 저희가 태국에서 다른 같이 들어온 사람들보다
좀 일찍 왔어요 그래 좀 일찍 보내 주더라고요 한국으로 그 한 한 달 정도 있다 한국 와서 국 그
비행기에서 딱 내려서 국정원 갈 때 휠체어에 실려서 갔어네 그리 엄마는
조사도 거의 못 받고 오자마자 바로 대학교 병원 입 해서 가서 위내시경을
하려고 그걸 딱 넣는 순간에 이제 식도 정맥류가 터지려고 막 이렇게 부풀어 오은 걸 확인을 한 거예요
그래서 바로 그 위내시경 못 하고 빼고 거기서 바로 시술 받고 계속 여러 차례 전기적으로 계속 핏줄이
터지려면 시술 받고 시술 받고 해서 다행히 한국에 와서는 지금 많이
그래도 괜찮아 지셨어요 어 세상에 어머니가 그 아픈 몸을 가지고 온갖
정신적 그 압박과 그 브로들 시달리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 그러게 그때 올 때는 그냥 무섭던 어찌든 일단 떠 남기니까
다시 갈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렇게 정신력으로 다들 오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다들 와서 돌이켜 보면은
너무 진짜 어떻게 왔냐 싶을 정도로 공포스럽다아요 사실 그렇지 그때는 모르지 순간을 이겨내야 너무
긴장했으나 그냥 내가 가야 된다는 그 한 가지가 딱 몸에 이제 그래가지고
그렇죠 진짜 어머니는 북한에 그대로 있었으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겠네요
아마 그 해 그냥 돌아가셨을 수도 있어요 북한은 집에서 주사 놓고 뭐
다 할 수 있잖아요 약을 사다가죠 근데 제가 엄마가 어릴 때부터
아파셔서 어릴 때부터 주사 놓고 이렇게 했거든요 엄마를 간호 했군요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간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고 그 엄마가 많이 아플
때 제일 간 치료를 잘한다는 의사를 찾아가서 그 처방을 받아 와서 그 또
엄마가 많이 아프다 하니까 한국에서 친척들이 이제 다 돈을 보내 주셔 가지고음 또 그 덕분에 돈이
있었으니까 살았지네 그냥간에 좋하는 약은 돈을 안 가리고 집 한채 살
돈도 더 되게 약을 사서 이제 썼거든요 그래서 시간 다 체하고 약
가져다가 제가 매일 이제 옆에서 지켜서 약 놓고 주사 놓고 이렇게
니까 두 달만에 조금 회복이 돼 가지고 그 진짜 지금도 엄마가 혼자
있으면 좀 트라우마가 저는 많이 남은 거 같아요 엄마 혼자 있으면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언제 또 아프지 않냐
이런 걱정이 되는네 근데 제가 있을 때 같이 있을 때 출혈을 했는데 그때 옆에 저밖에
없었으니까음 그니까 출혈 하기 전에 사람이 의식을 잃더라도 그 의식을 잃으니까 을까음 막 손이 다 떨리고
해서 두 살을 나야 되는데 이렇게 손이 떨려서 이렇게 주사 약을 넣지
못하겠더라고요이 앰풀 까는 것도 뭐 할 세 없잖아요 입 이러 이렇게까 가지고서 그냥 막 했었던 거 같아
근데 또 다행히 운이 좋은 건지 혈관을 찌르는데 엄마가 피를 토해서
혈관이 하나도 안 알리는데 단번에 딱딱 들어가더라고 그땐 어떻게 너무
초집중을 해서 그런가 단번에 들아가 가지고 그 지혈제를 완전 좋은 걸
세게 놓 좀 그런 걸 두 번 북한에서 겪다 보니까 그런 거의 반 주치가 됐네 응
그 트라우마도 많이 생기고 엄마를 가장 잘하는 딸이 된
거잖아요 엄마 병을 그냥 그렇다고 말했죠 와 북한에 병원이 정상적이면
의사가 해야 될 역할들은이 어린 딸이 혼자서 엄마가
아프면 의사한테 찾아가서 증상을 말하고 처방 뭐 약 적어 가지고
어떻게 해라 듣고 와서 그거를 한 거잖아요네 그 엄마가 출혈을 했을 때
저희 집에서 5분 걸어가면 병원이 있었거든요 군병원 제일 큰게 있었는데
밤에 이제 엄마가 출연해서 제가 집에서 미리 준비해 줬던 의사가 이제 출을 한번 또 할 거라고 두 번째
출할 때 이미 말을 해줘서 제가 지혈제를 주사에 항상 이렇게 재워
놓고 있었거든요 아 그래서 이미 와 그 출을 하자마자 그걸 간에
놓고 그렇게 하고 이제 옆집 막 두드려 가지고 의사 좀 데려다 달라고
해서 의사가 왔거든요 아 1일도 없으니까 없죠 없 근데 웃기 의사가
출혈을 해서 왔는데 구간과 의사가 온 거예요 그니까 그날 당직이 구간과
의사였던 것 같아요 근데 그게 밤이었거든 그 와서 보더니 뭐 뭐 이미 할 건 나 했네 하고 그냥 경과
지켜보면 보면서 있어라 이렇게 하고서 가더라고 응 그래서 그냥 밤에 혼자서
막 그 다행히 또 주의 그 친족 조카 그 언니 주에서 살고 있어 언니도
오고 뭐 삼촌 네도 오고 해가지고 그래도 친척들이 많은 더움을 줬네요
한국에서도 돈 모아서 보내주고 남은 친척들은 또 거기서 같이 돌보고 그러면은 한국의 병원에서
어머니가 치료 받으면서 그걸 또 옆에서 보면서 느낀게 많겠어요 여기 와서 우리 현숙 씨가 주사할 일은 없
어 놓으면 안 되죠 그지 불법이 그 되게 감사한게 엄마가 한국
와서 그렇게 많이 아프니까 대학교 병원이 엄마 이름을 넣어 줘 가지고 정기적으로 이제 치료를 받게 다
국가에서 지원을 해 주더라고요 그래 와서부터 엄마는 한 원에서도 아프니까
교육을 거의 못 듣고 거의 병원만 왔다 갔다 하시고 그때부터 이제 계속 정기적으로 가서 검사받고 또 안
좋으면은 또 추가 시술 도 하고 뭐 정기적으로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이런
거 다 해주고 약도 한 번에 가면 막 2 3개월 분씩 때우고 이렇게 해서
치료를 계속 받고 있는데 뭐 그렇게 병원에서 계속 알아서 검사를 해 주고 이렇게 해 주니까 너무 좋은 것 같고
진짜 감사한 거 같아 아 제가 다 너무 감사하다 생각요 진짜 아 진짜
북한은 너무 한심한 거 같아 한국에서 보내준 돈이라도
있으니까 그렇게 했지 다른 엄마 같으면 죽었어요 데 주위에 간이 나빠서 죽는 사람들이 되게 많았거든요
그리고 또 엄마가 간이 나쁘니까 간이 나쁜 사람들에 대한 그런 것만 계속
들리고 관심이 가는 거예요 근데 보면은 다 죽었어요음 그저 외삼촌 한
분도 북한에 계셨는데 엄마가 저희 오기 1년 전엔가 간으로
돌아가셨거든요 그리고 또 많은 사람들이 간으로 다 돌아가셨는데 이제
엄마는 그래도 진짜 천만 다행으로
정 그게 좋은 치료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지난번에 검사를 했는데 더
진행이 안 됐다라는 결과가 나왔대요 그래서 엄마가 되게 너무 좋아하더라고
축하해요 정말 대한민국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 북한 사람들 이렇게
고생 많이 한 사람들 한국에 올 때는 정말 몸에 가진게 없잖아요 중국에서
떠돌다가 상처 받고 진짜 상처 투성이로 여기 와
가지고 그나마 이제 집도 배정받고 어떤 지원들이 있어서 지금 살아갈 수
있는데 이런 나라를 참 북한에서는 너무 악의적으로 교육을 시키니까 살다
보면은 열받을 때가 이제 가끔 있죠 뭐 많이 열받지만 표현을 못하니까음 교육 체세 자체가 그럼 표
의 자유를 그냥 아예 살해 버리니까 맞아 그 어머니는 지금 밥도 잘
드세요네 밥도 잘 드시고 그래도 간이 나쁘니까 항상 소화가 안 되고 뭐
소화재 계속 드시고 이런 거는 있지만 그래도 북한에서는 거의 몇 년 동안 계속 복수가 차 가지고 계속 배가
나와 있고 그고 항상 부어 있고 그랬는데 최근에 거의 그래도 복수는
한국가 한번도 안 찾고 또 붙지도 않고 하니까음 피부색도 좀 많이 좋아지시는
거 같더라고 여기 약도 좋죠 너무 좋잖아요 그 저 한 북한은 간 나쁘다
하면은 무조건 죽는 병으로 알잖아요 근데 여기서는 간은 치료할 수 있다
북한처럼 큰 병으로 보는 것 같지 않더라고 의력 기술이 또 발전되고
약도 좋고음 병원 가면은 또 번호표는 걸 항상 뽑아야 되고 그러니까 힘과
권력에 의해서 들어가고 이런게 없으니까 또 그나마 좋은 거 같아요 그 북한에 있을 때 돈이 없다든가
어떤 권력이 없다든가 하면 병원 문턱 넘어서는 것도 힘들잖아요 솔직히 그죠
그 의사들도 뭔가 무 무상치료 무상
치료라고 하지만 뭐 검사를 해도 담배 뭐 한 각 줘야 되고 아니면 뭐 돈
얼마 져야 되고 그런게 아니면은 뭐 사람 취급도 안 하는 거 같아 맞아요 그러면은 오빠는 어때요 오빠 오빠가
제일 큰 한 거잖아요 오빠도 엄마를 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겠어요 오빠
오빠도 이제 엄마가 많이 아플 때 소식을 들으면서 진짜 엄마 다시 못
보는 줄 알았대요 그냥음 그래서 더 빨리 데려와야 되겠다 싶기도 했나 보다 응 그래서 제가 더 엄마를 설복
왔던 거고음 그 오빠는 항상 잘할 때부터
그냥 효자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엄마한테 잘하고 저도 엄청 예뻐해 주고 그냥
남매가 그렇게 사이 안 좋아요 저 우리 오빠랑 많이 싸웠거든요데 대단한 오빠를 뒀네요 그냥 나이 차이 많은
것도 있긴 한데 뭔가 모르겠어요 어릴 때부터 오빠가 저를 엄청 예뻐해 주고
항상 데리고 놀고 막 세상 지금도 뭐 어디 어디 뭐 여행 갈 일이 생긴
생겼는데 전 대학생이니까 돈이 없잖아요 그러면 오빠가 다 다 해서 우와 그런 오빠가 있어 우리 우리
오빠 좀 들어주세요 우 친오 당신은 말이 내가 여기
데려왔 근데 우리 친오빠는 내가 데려왔다고 고마워 가지고 해마다
대게를 박스로 얼려 보내요 박 솔직히 나는 그거 한 박스 받으면
다 먹을 줄 알았어요 근데 먹을게 워낙 많으니까 한 끼 먹고 다음 귀는
안 먹고 싶더라고 그래서 되게 그비싼 거 맞아요 좋겠다 어제 먹으러 와요
정하려 아 우리 오빠도 참 여기 와 가지고 저랑 많이 사이도 더 좋아지고
그렇게 됐거든요 근데 그 오빠는 좀 특별한 오빠네 그 오빠는 지금 무슨 일이에요
오빠는 그냥 건설직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데려올 때랑 지금까지 동일한
한 가지 일을 쭉 하는 거예요 그 그때랑 지금 하는 일은 좀 다른 거 같아요 지금은 조금 기술을 좀 배워
가지고네 무슨 기술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가보 오빠가 야무진 오빠 같은데
그러면 오빠를 하나원에서 처음 만났을 거잖아요네 그때 오빠가 면회를 오잖아
응 그때 오빠를 온 가족이 이제 만나서 상봉을 했을 때 그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오빠가 원래도 마른 형이거나 마른 거요 더 말랐어 근데
그때 봤을 때 오빠가 엄청 혼자서 알았다 하더라고요 감기가 가 걸려서 아이고 근데 또 머리도 못 자르고
어고 해가지고음 되게 말랐는데 너무 머리도 길고 하니까 그리고 이제 머리
스타일도 바뀌고 했잖아요 오빠를 봤는데 오빠가 맞는 데는 아닌 거
같은 약간 좀 알아보기 힘들더라고요 아무래도 3년 지났으니까음
그지네 그래서 봤 봤는데 어쨌든 근데 오빠가 먼저 현수가 해 가지고 이제
봤는데 막 울었죠 그냥 응 그래 그래 울고 저녁에 그리고 이제 헤어지고
저는 또 한나에서 들어가 자잖아요 근데 막 밤에 잠이 안 웃는 거야 너무 좋아
가지고 막 너무 감정적이고 막 진짜 3년 동안 보고 싶었는데 막 보게
됐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혼자서 막 이불킥하고 웃었다 울었다 하면서 난리
불었 그래 오빠가 또 예뻐 했으니까 엄마는 더 말할 거 없었겠네요 그죠
근데 어릴 때는 오히려 엄마보다 오빠가 저랑 더 잘 놀아주고 음 아무래도 매 남매니까 엄마하고 있는
시간보다네 오빠랑 항상 더 잘 놀고 해서음 근데 오빠가 저를 예뻐했던
예뻐 했어이 그니까 커서는 엄마랑 더 잘
통하는데 어릴 때는 오빠랑 더 잘 통했던 거 같아요음 그래서 많이 보고
싶었고 오빠 없어서 되게 심심했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일찍 여유 있었잖아요 그래서 오빠가 어찌하면
아버지의 역할까지 해주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은 그렇게 만나고
이제 한 집을 배정받고 나오잖아요 집 어디 받았어요 저희는 서울 금천구에
받았어요 그 원래는 오빠가 먼저 왔는데 결혼을 안 해서 집을 못 봤고
그냥 나왔거든요 그러다 이제 나올 때 엄마가 계속 아픈데 병원이 서울에
있어 가지고 하나 재단에서 이미 다 우리 사정을 아니까 병원 근처에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신정을 이제 서울에 받게 됐어요 아
엄청 배려를 해신 거네요네데 엄마가 그만큼 많이 좀 미독 하니까 그 그래
사람 살려야 되니까네 서울에 집 들어갔을 때 어땠어요 북한에 살던
집은 단충 집이었죠 맞아요음 아파트 처음 살아 보는 거잖아요네 처음에는
이제 집이 바로 나오지 않아서 오빠 집에서 한 달 살았거든요 기다리는 동안 따뜻함을 나오고 뭐 나 냉장고
있고 난방 대고 에어컨 돌아가고 하니까 너무 신기하고 그냥 너무 좋더라고요 그냥 가서 막 오빠 혼자
살았으니까 먼지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엄마랑 이틀 동안 온 집을 청소하고
되게 신났었어요 그냥 우리 엄마도 제가 모셔 왔거든요 그 현숙씨
오빠처럼 저는 4년 만에 모셔왔어요 탈국 해가지고 근데 그 오빠 참
대단한 그 저 멋지 않은 효남 있 거 같아요 효자 근데
저는 부모님 처음 만났을 때 엄마가 해줬던 음식이 너무 그리워 가지고 그거부터 해달라고 했어요 감자반찬
혹시 오빠는 엄마한테 뭐 해 달라고 그랬던 거 없어요데 오빠는 그 가지반찬 된장 녹화하는 가지반찬
북한식 이잖아요 그걸 해달라 해서 엄마가 열심히 해졌는데 3년 동안
한국 음식에 길들여져 가지고 그 그리고 또 가지랑 뭐 된장 자체가
북한 거랑 다르잖아요네 솔직히 북한 가지 가 직접 농사를 해서 따서 먹으니까
얼마나 맛있어요 그니까 맛차이는 좀 있죠네 그리고 된장도 북한에서 집쪽
집에서 담고서 막 몇 년시 먹여서 이렇게 하니까 좀 그 진한 맛이 있잖아요 그 그게 아니고 한국 거로
이렇게 다 했는데 오빠가 딱 먹어 봤는데 자기가 먹던 그 맛이 아닌 거예요 그니까 막 우 맛있다 오
맛이다 그간 그 가식적인 맛이다 가식적인 리액션
하는게 다 보이는거 근데 그 저희가 처음 집에 나왔는데 오빠가 너무 좋아 가지고 밥을 못
먹더라고요 첫날 저녁에 이렇게 마음이 막 들떠서 밥을 잘못 먹고 그냥 신나서 막어 오빠가 얼마나
외롭겠지 혼자서 되 아프면은 막 하나고 이럴 때 이불을 더 덮고
싶은데 그거 덮어줄 삶이 없는게 너무 슬펐다고 하더라고 맞아 아플 때 혼자
사는 사람들은 그게 외롭거든 슬프고네 좀 높이지 못해요 더워요 더워요
대한민국죠 더우면 이렇게 온도도더라고네 자 요거 좀 높히고
가겠습니다 오 열정적으로 얘기해 주니까 난 안 덥거든요 지금 아주 제가 너무 열심히 해가지고 더 참
고마워요 됐을까 이제는네음 대한민국이고 요래서
좋습니다 아 이런 거 뭐 언제 우리가 이러고 살았어 그죠 상상도 지금 계속
여름에 어 가는 없이 어떻게 지데 아무리 여기보다 좀 덜 덥다고
해도 여름에 그 비친 햇빛이 한낮에 딱 그 따은 햇빛은 거의 똑같잖아요
그 근데 항상 에어컨이 없이 저희는 또 집이 가난하니까 어느 때까지
선풍기도 없었거든요 뭐 아무런 것도 없이 그냥 더우면 그 온돌 바닥에
그냥 누워서 키고 하다 그러면은 참 그 오빠가 더욱더
저는 궁금해지거든요 예 오빠랑 그렇게 제일 먼저 생일을
다든가 명절을 생게 뭐예요음 어 엄마가 7월에 생일이 가지고 그
친척들 다 어라 해서 같이 식당에 가서 먹고 막 노래방도
가고 처음으로 그때 노래빵 갔던 거 같아 신기했고 근데 한 원에도 노래빵
있었죠 그렇게 처 나서 재 께 친척들 와셔 놀고네 되게 재밌었어요 그 뭐
이런 전철이 그가 이런 걸 이용하면서 못 찾아서 막 오리보리얼 아 제가
금방 나왔던 다음 날에 이제 동네를 좀 구경하고
싶더라고요데 그지 그거 제일 먼저 하지네 오빠는 일하로 출근을 했고
엄마랑 있다가 나 좀 나가 보고 올게 했는데 그때 폰도 제대로 사용도 잘
배우는 다음 날에 니까 뭘 알겠어요 그 딱 나갔는데 그 좀 돌아다니다가
핸드폰 충전이 다 나갔더라 그요 그 집 가는 버스 정장 이름만 집 앞에
정장 이름만 알아 놓고 막 돌아다니다 버스를 탔는데 뭔가 탔는데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중에서 내렸거든요 그 그 또 카드도 없으니까 현금을 들고 나갔었어요 현금
1,000원짜리 몇 개 들고 나갔는데 그것도 없고 해서 다른 버스를 또 탔는데 또 지나가 가지고
멀리 가버리 금 없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 그래서 어떡 그러고 한 몇 시간 돌아다니다가 그 아 이제 안 되겠다
해가지고 택시 아무거나 잡아 탔어요 응 어이구 야 똑똑하네 그래도 택시탈
생각을 했어요 그러게요 지금 생각 보 되게 똑똑했던 거 같아요 뭐 택시도
처음 타 보니까 바로 그 조수석에 탁 앉아가지고 뒤에 타는데 보통은네
조수석에 앉아가지고 일 전화를 좀 빌러 주면은 이제 오빠한테
전화해가지고 알려 드리겠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전화했는데 이제 오빠가 그 기사님이랑
바꿔 가지고 뭐 주소를 알려줘서 거기까지만 데려다 달라 한 거예요
제가 말을 딱 완 다음 날이니까 엄청 무한 말을 했을 거잖아요 한국말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그 어디서 왔냐
해가지고 북한에서 왔는데 어제 뭐 이렇게 왔다 하니까 오빠가 막 감사합니다 하고 택시비 좀 많이 나온
거 같아요 주고서 이제 딱 갔는데 보고 어디 있었냐 이러는 거예 그래서 뭐 어떤 어떤 건물 보이던데 하니까
그 집 근처인데 걸어오면 됐네 이러는 거야 그 알고 보니까 택시 기사가 제가 뭘 모르니까 막 태우고 언제
돌아다니 온 거예요이야 그런 택시 기사도 있었구나 어 그 그렇게 집에 왔던
적이 있어요 그 아 그지 처음 이제 동네를 접하다 보니까 잃어버리는 건
필수죠 그 때 진짜 좀 겁이 너무 너무 겁 없었던 것 같아요 뭐 길
찾는 거 배우지도 않고 그냥 막 나가가지고 그렇지 호기심이 많은
나이에 대한민국을 왔잖아요 한국에 와서 어떤게 가장 호기심이 갔어요 그
저는 그니까 옷 스타일에 되게 관심이 많 지금도 그렇고 좀 대부분 이제
온라인 쇼핑몰에서 어떤옷 요즘 올라오나 막 이렇게 찾아보고 그러기도 하고 바닷가 가봤어요네 친구들이랑
네네비 입어봤어요 입어 봤죠 그냥 뭐 다 자유롭고 좋고 응음 막 머리도
북한에서 단발 밖에 못 하잖아요 그래서 와서 바로 머리 기르고이 머리도
예쁘네요음 머리 기른 것도 되게 좋았고 그 처음으로 머리를 길러
봤어요 초 초등학교 때 자른 이후로 항상 단발로 살다가 한국이야 처음 길러 봤구나 머리를네 좀 몰이 긴데
모습은 어떨까 막 궁금해서 또 길러보고 별 모리 기루는 내 모습은
어떨까 가장 한국에서 일상적인게 너무도 호기심의 대상이었는데 길러
보니까 어떻던가 예뻤어요 본인이네 다들 긴머리가 더 잘 어린다 워낙 귀엽고 생글생글 예쁜
얼굴이여 가지고 모에도 다 있는 거 같아요 남자 친구 있어요네 아이고야
남조선 북조선 남조선 누가 먼저
대시했다 친구가요 오 그래요 응 어떻해 아 제가 작년에 유럽 갔다고
했잖아요 대학생들이 그때 갔을 때 남자 친구가 이제 대시를 해 가지고 거기서 이제
썸 타다가 와서 좀 썸 타다가 사게 됐어요 어 그래 남자 친구
잘해줘요네 여기는 막 되게 살들 하잖아 그러니깐요 그 제가 아 이것도 저
전남친이 들으면 기분이 나플 수이지만 괜찮아요 전남친 이거 안 봐
전남친 어디 사람이에요 북한 사람 어 안 봐요 안 봐 그니까 그 전남친이
나쁘다는게 아니고 그냥 북한 사람이랑 남은 사람을 이렇게 두 번 다 사귀 봤는데 그 달라요 문화가 그 좀 뭐라
하지네 여자를 되게 존중해 주고 막 다 챙겨 주고 이렇게 하는게 확실히
다른 거 같아요음 북한 남자분은 그런게 좀 부족했나요 북한 남자는
조금 침대의 스타일이잖아 약간 챙겨다 앞에서는 오글거려서 못 하고 막 어 뒤에서 그냥 야 어 하나 주었다
입으라 어 아까 그런 느낌 이런 식이고 한국은 자기야 자기야 이거 내가 샀는데 입어
볼래 오 괜찮다 잘 어울린다 뭐 이런 어 최고 막 이러면서 아 나도 그런
거는 사 그 저도 그런 거 좀 적응이 잘 안 되는 거 같아 근데 좋아하는데
지금 근데 또 여자들 그런 거 싫어하면서 약간 좋아져요 속으로 나 엄청 좋아하잖아 그렇지 그렇지 그니까
이게 우리 북한 남성분들 혹시 보시면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요 이게 표현의
방식이거든요 대신 북한 남자분들 굉장히 진해요 진실해 그리고 여자를
믿는다면 통장까지 다 갖다 막혀 버립니다 그렇죠 맞죠 북한 사람들이
특징인 거 같아 결혼 그래 결혼도 안 했는데도 연애하는 입장에서이 사람이 내 전부라고 생각을 해 연애를 해도
그냥 가족이라 생각을 하고 막 바끼는 경우가 많더라고 너 깜짝 놀랐어요 그것도 그렇고 되게 그런게 있어요
북한 남자들은 연애를 하면 데이트 비용을 거의 그냥 내가 내야 된다는 이런 생각이 있는 거 같아요 맞아요
맞아요네 그런 부분에서는 어 장단점이 다 있군요 대한민국은 연애를 해도
이제 비슷한 뭐 대학생 나이 때라든가 하면은 같이 더치페이도 하고 뭐 대부분 더치페이 하죠 한국에서는
그렇게 해요 더치페이 해요 뭐 더 집회도 하고데 남자 친구가 돈을 좀 보니까 좀 많이 내주는 거 같아요
지금은 그렇구나 사랑을 좀 많이 받아 가지고 좋은 결실이 있으면 좋겠어요
예 북한에서 연애해 봤어요 언제 받겠어 엄마 병관 하느라고 맞아
그렇게 연애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거기서는 맞아요 아유 참
대한민국에서 아기자기하게 행복하게 잘 사네요 그 뭐 남자친구랑 이렇게 사귀면서 문화 때문에 좀 어렵거나
그런 충돌 이런 건 없어요 북한 얘기 나면 아 그거는 이제 남자 친구
자체가 북한에 좀 관심이 많던 사람이어 가지고 크리스찬 친구인데음
북한 기도해라 대학교에 그런게 있어요 근데 거기에서 북한 기도에 그런 걸
참여하다가 이제 좀 북한이랑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아니면 뭐 그냥 좋은 사람일까 저를
이해해주는 더긴 하겠지만 제가 막 편하니까 같이을 때는 북한말을 막
하는게 더 편할 때도 있거든요 그러면 뭐 북한 말도 하고 사투리도 마음대로 막 하고 하는데 그냥 귀엽다고 봐주고
그냥 그렇게 하더라고요음 근데 이제 아무래도 문화 차이가 있으니까 안 맞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
때문에 좀 싸웠던 부분이 있거든요 초반에 뭐예요 이게 언어를 사용할 때
북한 사람들 표현이 좀 직설적이지 아요요네 근데 한국 사람들은 그 직설적 표현에 상대방이 마음이 상할까
봐 되게 좀 안 좋은 것도 돌려서 돌려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북한
사람 뭐가 기분 나쁘면 바로 그거 기분 나빠 그 이런 식으로 말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면에서 좀 그 친구는
뭐 예를 들면은 카톡을 할 때 막 무슨 뒤에다가 뭐 이응 붙이고 이런
거 저는 오글거려서 잘 못 하겠더라고요 북한에서 그런 거 언제 해봤어요 사랑해 하면 사랑해용 맞아
맞아 그런 거를 해줬으면 하는데 이제 어 현숙 씨한테 그런 걸 원했는데네
그것도 있고 저는 그냥 대화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뭐 그런 걸 안 붙이면 그 카톡이 문자가 표정을
못 보잖아요 그러니까 딱 보기에 되게 화났나 이런 느낌을 계속 봤는데요 제 문자를 보면은 그러니까 어 왜 하나나
내가 뭘 잘못했나 약간 이런 생각을 한대요 저는 그냥 대화하는 것처럼 하고 있는데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네
그 그것 때문에 좀 막 많이 충돌이 있었어요 아 그래서 누가 고쳤어요
제가 고쳤죠데 아무래도 한국에 와서 이제 살아야 되고 적응을 해야 되니까 또 사회생활할 때는 그런 걸 고치는게
확실이 필요하다고 많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다행히 한국 지구를 만나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그래 그거는 참 좋다네 여기 대한민국의 어떤 그런 것도
우리는 알아야 되는데 가장 옆에서 자연스럽게 잘 가르쳐 주수 있는게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뭐 남자 친구가 음아 저는 또 카톡을 할 때 아무래도
북한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을 했으니까 문자를 쓸 때 북한식으로 쓸 때가
있잖아요 뭔가 그런 표현을 북한식으로 쓴다던가 하면은 저한테 직접 말은 안
해 주고 그 북한 식으로는 어떻게 써요 나도 다 까먹어서 그래요 한번 썼던 걸 얘기해 줘 봐요 궁금해하실
거 같아 아 그데 북한식 하기보다는 그냥 어떤 때 막 철자 틀릴 때도
있잖아요 뭔 그어 같은거 제가 어 들었으니까
들으면 뭔 의미인지 아 내가 집 말을 하려면 정확히 글자 글자 하나를 모를 때 있잖아요 그러면 뭐 예를 들면
제가 미국 갔을 때 나 네트에 왔서 한 하려고 쓰려고 했는데 나 뭐
맨하트 왔으 이렇게 이상하게 써서 보내면은 그걸 맨하트 아니고 뭐 맨트
이렇게 보내는게 아니고 아 진짜 네트에 갔어 이렇게 약간 고쳐서 다시 그걸 반복해서 좋겠다 그까 이런
식으로 알려주더라고 상 안 그니까 네가 틀렸어 말을 안 하고 그걸 다시
이렇게 고쳐 가지고 잘 표현을 해주 그 참 좋은 거 같아요 그게네 그런 부분에서 너무 자존심 안상하게
알려줬는데 그래서 어 이거 나 알려주는 거네 하니까 어 그거 눈치 채어 센수 있네 약 이런 달컴
달콤하네요 아주 그냥 그 그분이랑 사귄지 얼마나 됐어요 1년 좀 더
됐어요 어 그렇구나 그 자기 말은 안 해도 진짜 나랑 사귈 때 신기한게
너무 많다고 배울 점이 너무 많고 거의 사생활 그런 부분에서는 진짜 많이 배워요음 생각이 한국 사람
사귀겠다고 생각을 했거든요지 그래요네 항상 한국 사람 사귀어서 많이 그
사람을 통해서 한국을 배우고 싶었어요 그 지금 그 생각대로 되고 있는 거
아 역시 걔네 목적이 들어가긴 했지만음 아니 근데 그거 현명한
거예요네 북한 사람을 사귀면 뭐 좋은 것도 더 많고 하지만은
한국에 대서 배우 데는 확실히 그게 제안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야 우리
현숙 씨 보통분이 아닙니다 네어 그러면 오빠가 이제 해외 여행
갈 때 돈 대줬다 그랬잖아요네 해외 여행은 누구랑 갔어요 어 제가 두 번
가봤는데 다 어 한 번은 대학생들이 갔고 한 번은 이제 교회에서 보내져
가지고 어 네 어느 나라 어느 나라 가봤어요 어 작년에는 유럽 쪽에 가서
어이구야 나도 못가 봤는데 나도 유럽 너무 가고 싶어 진짜 그래서 독일
폴란드 체코 이렇게 세계 나라 가고고 올해는 미국 같았어 오마이갓
아메리카 미국 어디가 봤어요네 워싱턴 디시랑 뉴욕이랑 예
시카고 필라델피아 이렇게 네 도시를 가어 어 참 좋다 정말 한국에 온지
4년밖에 안 됐는데 날아다니네 북한에서는 여권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 사람이 그걸 갖고 해외는 못 나가잖아요 그렇죠 아 뭔가 여권
받았을 때 좀 뽕이 차오라 느낌 어 극복이 그때 올라간다 이거죠 어 뽕이
차올랐어요 나갈 때 이게 여건 가지고 통과할 때 한국 사람은 그 대우
자체가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맞아요 그 그 다른 나라는 뭐 비자가 이런게
있어야 되는데 한국 사람은 무비자로 대부분 나라를 다 다닐 수 있다고 하더라고 너무 신기했어요 외국 나가서
다닌다 자체가 꿈도 못거든 그런 걸 하고 있으니까 막 꿈인지 현실인지 막
헛갈릴 때도 있고 너무 잘 살고 있으니까 진짜 듣는 사람으로서도
흐뭇한데 가족끼리 세 명에서 엄마랑 오빠랑 우리 현숙 씨 셋이서 어디
외식을 갔다가 이렇게 여행을 갔던 적 있어요음네
여행도 다니고 외식도 하고 저희 양광도 바다가 없잖아요 어 그렇지네
바다가 너무 가보고 싶어서 바다를 좀 많이 갔었어요 가족끼리 받아가서
펜션에서 뭐 하루 자면서 해수역 하고 가족끼리 뭐 마시는 것도 먹고 해도
먹고 조개 고도 먹고 하면서네 그렇게 놀았는데 진짜 재밌었어요 정말 드라마
한 장면이네요 음 그렇죠 우리 그 멋진 효자 오라버니는 결혼을
하셨습니까 결혼은 안 했고 여자 친구는 있어요 어 그래요 오빠가 안
봐도 너무 바르고 착하고 성실할 것처럼 느껴져요 엄청
착하고네 되게 말랐어요 말랐구나 아니 북한 남자들이
대부분 한국 어면 다 마르는 거 같아 왜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그래요
여자들은 살리 가지 아 제가는 북한 남자애들 다
한국와서 말라요 왜지 잘 먹는데 딱 잠만 자고 게임해서 런가 아 게임을
많이 하긴 하나보다 그러게요 그렇죠 말 외삼촌 덕분에 또 오빠 덕분에
이렇게 가족이다 한국에 와서 이제 엄마도 지금 건강으로 대부분 거의 찾아가고 있고 우리 현숙 씨도 잘
살아가고 있고 근데 삼촌 지금 대한민국에서 잘 계세요 돌아가셨어요
엄마 왜 그 위함이 걸려 가지고 저는 못 봤어요 제가 오기 전에 돌아가셨어
아이고 그랬구나 외삼촌한테 감사하네요 그죠 응 자 그러면은 현숙 씨 앞으로
꿈이 있어요 꿈이요음 저는 당연히 북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고요음 그 지금은 사실 대학교
가정이 너무 어렵고 졸업을 하는게 일단 목표고음 졸 하면 뭐 어디서
일을 하든 항상 북한 사람들을 겠다는 그런 생각을 항상 가지고 이제 도움이
되면은 좋겠어요 그래서 항상 이제 생각을 하고 또 기도도 하는 내용이
북한 사람에 대한 정체성을 항상 잃지 말게 해달라 그래도 한국 사람도 북한에대한 관심이 많지만 우리
북한에서 살다가 온 고향을 아는 사람이 더 관심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해야 또 한국 사람들도 더 도와주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할 것 같아서 야네 그래서 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엄마나 난 정말 그래요 맞아요 지금 아주 핵심을 얘기해
줬어요네 그러니까 우리가 북한이 잘못된 체제라는 건 진짜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렇지만 저 체제 안에 그 정권과 주민은 이제 우리가
분리해서 봐야 되는데 우리가 챙겨야 될 사람들은 저 땅에서 속고 사는
주민들이 아아 그들을 돕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말 대한민국에 와서 먼저이
멋있는 세상 자유의 맛을 본 사람들 들로서 우리가 더 준비가 돼서 그들을
도울 때 대한민국 분들도 감동이 와서도 함께 동참할 수 있지 않겠나 이런 얘기 같 그리고 또 유튜브를
와서 찍는 것도 저는 되게 의미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북한이 체제가 그렇고 뭐 대충 못 사는 나라는 알지만 북한 주민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는 음 더 모르고 이런 이야기를 하면은
거짓말을 한다는 그런 댓글도 많이 봤거든요 그만큼 이제 북한이 꽉 다친
곳이라 보니까 북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 하다 보니까
이렇게 저를 통해서 직접 살던 사람이 와서 이야기하면서 북한에 대해서 더
많이 알리면 한 명이라도 더 많은 한국 사람이 북한에 관심을 가져 주고
또 마음이 열리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엄마나 어린 친구가 이게 바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아 그래요 오늘 정말
마지막에 렇게 더 알맹이 있는 얘기 해주셔서 고마워요네 그래서 대한민국에 참
이렇게 감사한 땅이 아아 앞으로 이곳에서 대학 생활 4년제 마무리
잘하고 박사 과정도 잘 밟았으면 좋겠고 박사 그러면 해
박사네 중에 박사도 나오고 회장도 나오고 의사도 나오고 검사도 나오고
많이 나와야 돼 변호사도 나오고 그래 이게 왜 나와야 되느냐 그걸 누가 알 수 있어요 청년들이 알 수 있어요 그
청년들은 여기와 적응하는 시기도 빠르잖아요 그렇죠 그렇죠 보이는게 다르죠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이런
것들 어 그것도 그렇고 한해 한해 지나면서 한국에 대해서 알게 되는게 더 많고 내가 성장하는게 좀 많이
느껴지는 거 같아요 확실히 그래서 오히려 엄마한테 가서들은 소리를 계속
제가 오히려 이야기를 해 주는 거 같아 그 엄마는 북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해야 돼 막 이러면서 당당하게
살아야 돼 막 이러면서 엄마한테 예 그죠 그래서 우리 청년들은 여기에
와서 이제 적응하는 속도라 이렇게 바라보는 게네 좀 빨리 바뀌고 그러기
때문에 청년들이 정말 잘돼서네이 남과 북의 균형을 맞춘다고
그러잖아요 균형이 맞춰졌을 때 통일이 된 라 그러잖아요 갑자기 너무 확
열려 가지고 다 쓸어서 이렇게 내려온다가사 올라간다이 혼란이 있으면
안 되니까 그 균형을 맞추시는게 저는 우리 청년들 대한민국에서 잘 정착해서
자기일 열심히 하면서 뭐 의사 변호사 검사 판사 다 돼야 된다고 저 생각을 하거든요 그 중에 한 사람이 우리
현숙 씨예요 그죠 예 정말 오늘 여러분 어 인터뷰는 저 사전에 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 되고 이렇게 좀 편안하게 얘기를 듣고 싶어 가지고요 여러분
이제 어린 꿈나무에 우리 현숙 씨 대한민국에서 년제 대학 공부도 잘
마치고 정말 멋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좋은 댓글 응원의 댓글
부탁드려요 그리고 오빠도 이제 더 잘됐으면 좋겠고 어머니가 완전하게
건강을 회복하시길 바랄게요네 감사합니다네 오늘 시청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여러분들의 그 내주신 세 으로 이렇게 주기 일보 직전에 있었던
사람도 대한민국에 와서 살 수 있고요 저희가 자유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누리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고요 저희 탈북민들 더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 바르게 살아야 되겠다라는 말씀을 대표해서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시청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리고요 항상 행복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수고했어요네 감사합니다감사합니다 a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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