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16, 2026
평화병에 걸린 박한식의 삶 ―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구와 실천 - 이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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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호 돋봄) 평화병에 걸린 박한식의 삶 ―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구와 실천 - 이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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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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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봄
평화병에 걸린 박한식의 삶
―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연구와 실천 ―
이재봉
원광대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재미동포 정치학자 겸 평화활동가 박한식 선생(조지아대 명예교수)이 2026년 1월 별세했다.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나 평양, 대구, 서울을 거쳐 1965년 미국에 건너가 87년의 생을 마쳤다. 평화에 미쳐 살아온 그의 위대한 삶을 기린다.
그는 유년기에 중국 국공내전에서 힘겹게 살아남고, 소년기에 한국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겪은 뒤, 한평생 지독한 ‘평화병’에 걸려 살았다. 우리가 왜 서로를 죽이지 않고는 함께 살 수 없는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했다. 당연히 평생의 연구주제이자 삶의 화두는 평화와 통일이었다.
박한식 선생은 학문의 목적을 사회문제 해결에 두었고, 문제를 발견해 그 원인을 찾아 처방을 제시하는 게 학자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반도 분단과 군사적 긴장이었고, 통일 방안을 제시하며 평화로운 사회를 도안하고 설계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이자 책무라 믿었다. 그의 연구와 제언 가운데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위한 기본적이고 핵심적 내용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본다.
사고의 틀 또는 인식 체계의 전환―안보에서 평화로
선생은 2019년부터 2020년까지 《한겨레》에 연재한 글을 묶어 펴낸 회고록 《평화에 미치다》(삼인, 2010)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는 ‘안보 패러다임’이 아닌 ‘평화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진행한 ‘박한식 사랑방’ 첫 강의 제목이 〈안보 패러다임에서 평화 패러다임으로〉였다. 20개 강의 내용을 묶어 펴낸 책도 《안보에서 평화로》(열린서원, 2022)였다.
그는 우리 모두 ‘안보병’에 걸려 있다고 질타하며, “안보는 한쪽만 살고 다른 한쪽은 죽게 되지만, 평화는 양쪽 다 살게 되어 있다.”라고 강조했다.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사상과 제도·체제를 갖고 있는데, 다른 하나를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게 아니라 서로를 조화시키자는 것이었다. 2000년 ‘6·15 공동선언’과 2018년 ‘4·27 판문점선언’을 사례로 들었다.
조선 이해의 핵심―김일성과 주체사상
선생은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일성을 알고 주체사상을 이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나 역시 조선이 김일성에 의해 세워지고 주체사상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모르면 북한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해 왔는데, 선생은 “조선을 이해하는 것이 조선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른바 ‘친북’이나 ‘종북’으로 매도되며, 대구의 고등학교 동창회 명부에서 삭제당하는 수모까지 당한 경험을 의식했을 것이다. 1959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정치사상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1965년 아메리칸대학 석사과정에서 정치사상을 전공한 선생이 주체사상을 연구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1970년 조지아대 교수로 부임한 뒤부터 조선의 주체사상 대표 연구자 황장엽과 편지 교류를 시작하고 1981년부터 수십 번 평양을 방문한 배경이다.
그는 “주체사상이란 김일성 생애의 의미를 후대 연구자가 개념적으로 정리한 것”이라며, “조선은 한 마디로 ‘주체사상의 나라’”라고 단언했다. 주체사상은 ‘당과 국가의 지도적 지침’이기에, “조선을 움직이는 것이 주체사상”이라고도 했다. 조선의 통일정책엔 ‘정치에서 자주’라는 주체사상의 지도적 원칙이 녹아 있고, 조선이 경제적 어려움에도 자본주의적 개혁과 개방을 꺼리는 이유는 ‘경제에서 자립’을 중시하는 주체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세상의 온갖 비난에도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국방에서 자위’라는 주체사상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미국에 대한 인식―미국의 ‘전쟁병’과 ‘원죄’ 그리고 한미동맹
선생은 ‘평화를 공부하러’ 1965년 미국에 갔다. 그러나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베트남전쟁을 체험하고, 대학도서관을 아무리 뒤져도 평화 연구서는 보이지 않고 전쟁 연구서만 가득했다.” 미국의 역사를 공부해보니 온통 ‘전쟁의 역사’였다. 오랜 연구 끝에 미국 ‘전쟁병’의 궁극적 원인이 미국의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한 ‘원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첫 번째 원죄인 노예제도는 작금의 인종주의를 파생시키고, 두 번째 원죄인 원주민(인디언) 정복은 작금의 군사주의를 파생시켰는데, 이 두 가지 원죄가 결합해 미국의 전쟁을 끊임없이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그가 1994년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주선했는데, 카터는 2019년 당시 트럼프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242년 역사에서 오직 16년 동안만 평화를 즐기며 ‘세계 역사상 가장 호전적 국가(the most warlike nation in the history of the world)’가 되었습니다.” 박한식 선생과 카터 대통령의 말을 따라 나 역시 다음과 같이 즐겨 써왔다. “이 세상에 미국처럼 호전적 국가 없다. 미국처럼 전쟁 많이 해본 나라 없고, 좋아하는 나라 없으며, 잘하는 나라 없다. 전쟁을 통해 나라를 세웠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전쟁을 통해 초강대국이 되었고, 세계패권을 유지해왔다. 전쟁을 통해 먹고 살아온 것이다.”
또한 카터가 1976년 대통령선거에 나서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1977년 주한미군 단계적 철수와 한국에 배치된 핵무기 철수 계획을 세운 것은 박한식 선생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나아가 선생은 한미동맹은 동맹이 아니고 ‘속국 관계’나 ‘식민 관계’라 규정하고, 미국은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변증법적 통일론―한 민족 두 국가 세 정부
선생은 ‘한민족 통일의 청사진’으로 ‘변증법적 통일론’을 제안했다. 플라톤이 기원전 4세기에 만들고 헤겔이 18세기에 철학적·이론적으로 정리한 변증법을 이용해 남북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든 조선이든 내재적 모순이 적지 않은데, 남북 간의 특수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남과 북 사이의 현격한 이질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게 통일의 출발이라고 했다. 서로의 모순 또는 이질성을 찾아 극복하고 동질성을 발견해 평화롭게 공존하는 노력이 통일의 바람직한 길이라고도 했다. 남과 북의 이질성이 ‘정(正)’과 ‘반(反)’처럼 몹시 첨예하게 돼 있는데, 이 모순을 해결해 조화시키고 평화협력 관계로 만들며 ‘합(合)’으로 나아가는 게 통일이라는 것이다.
이 새로운 ‘합(合)’이 새로운 이상적 정부로서 제3의 정부 또는 통일연방국가의 정부가 된다고 했다. 우리 민족은 같은 핏줄로 하나이고, 국가는 한국과 조선으로 둘이며, 정부는 한국 정부와 조선 정부 그리고 새로운 통일연방국가의 정부로 셋이 된다는 뜻이다.
통일 이념―인권주의
선생의 대표적 영문 저서는 2016년 출판된 Globalization: Blessing or Curse?다. 2022년 수정판이 나왔는데, 선생은 이 책의 주요 내용을 2022년부터 제2차 ‘박한식 사랑방’에서 강의하고, 그것을 정리해 《인권과 통일》(열린서원, 2024)이란 책으로 펴냈다. 책의 부제가 ‘통일을 위한 인권 이념’이다. 나와 동료 학자들은 앞의 영문 저서를 2024년 한국어로 번역해 《정치발전 담론》으로 펴냈다.
영문 저서의 핵심 주제가 ‘발전(development)’인데, 이는 ‘양적 성장(growth)’이 아니라 질적 향상을 뜻한다. 발전의 목적은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요 그게 바로 인권 증진이라고 했다. 선생이 발전과 인권에 관해 연구하고 강의해 온 것은 무엇보다 남북 평화통일을 머릿속과 마음속에 두었기 때문이다. 통일을 이루려면 이질성을 줄이고 동질성을 늘려야 하는데, 남북 사이에 가장 큰 이질성은 이념이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든 조선의 인민민주주의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목표는 사람이 잘살기 위한 것으로 발전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만, 그 목표를 추구하는 방향과 방법이 너무 다르다. 학자로서 통일을 위해 상식적이고 설득력 있으며 남북 양쪽이 받아들일 수 있고 정책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찾아야겠다는 사명감 또는 소명의식으로 평생 고민하며 연구해 온 것이 ‘인권주의’다.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에 이은 ‘제3의 이념’인데, 바로 이 인권 이념으로 통일을 추구하자고 호소했다.
그런데 남과 북 서로의 인권 기준이 다른 게 문제다. 자본주의에서는 자유를 내세우고 사회주의에서는 평등을 앞세우기 마련이지만, 인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권도 아니고 평등권도 아닌 생명권 또는 생존권(life right)이다. 유엔 헌장에도 명시돼 있고 인권 공부하는 사람들 모두 인정한다. 따라서 선생은 생명권·생존권을 핵심으로 삼고 자유권, 평등권, 선택권, 정체성의 권리, 사랑의 권리 등을 아우르는 인권을 통일 정부의 이념으로 삼자고 제안했다.
통일국가를 위한 준비―통일평화대학
선생은 이상적 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게 앞에서 얘기한 인권이며, 다양한 인권을 중시하는 통일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게 통일평화대학이라고 주장했다. 대학의 목적이 문제 해결에 있는데, 문제 해결을 위한 이론을 만드는 곳이 대학이라며, 대학에서 이상적 사회의 그림을 그리자는 것이다. ‘인류를 살리는 통일평화대학’을 주제로 ‘박한식 사랑방’에서 4회 연속 강의를 통해 구체적 내용을 밝히고, 곧 펴낸 《안보에서 평화로》에 잘 정리해 실었다.
대학을 세울 장소는 개성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라 했다. “이미 공업단지를 만들어 통일된 지역”으로, “남과 북이 협력해 서로 승리하는(win-win) 관계를 만든 지 벌써 십수 년 되었고, 개성이 수도였던 고려가 통일된 나라로서 국력도 대단했으며, 우리가 긍지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이유였다. 주요 단과대학으로는 남쪽 서양의학과 북쪽 고려의학이 조화를 이루는 건강대학,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농업과 생태를 결합한 농업생태대학, 제도와 정책을 다듬을 정치경제대학, 민족 정서를 함양할 예술대학, 이론과 이념을 만드는 인문사회과학대학 등을 필수적으로 꼽았다.
박한식 선생은 학자로서 연구에만 매진한 게 아니라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운동에도 힘썼다. 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 대표적 사례 여섯 가지만 밝힌다.
첫째, 1994년 미국이 이른바 ‘북핵 문제’로 조선을 폭격하려고 할 때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주선해 한반도전쟁 위기를 해소하도록 이끌었다. 둘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정부가 선생에게 조선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애틀랜타의 대기업 델타항공과 코카콜라의 협찬으로 조선 선수단 수십 명이 참가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셋째, 조선이 1990년대 후반부터 극심한 식량난에 빠지자 농업 분야의 생산성을 높여 북녘 동포의 기아를 해결하기 위해 1997년부터 조선과 미국 농업대표단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넷째, 2002년 이른바 ‘제2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이를 해소하고 조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2003년 워싱턴-평양 포럼을 주선했다. 다섯째, 2009년 미국 언론인 2명이 조선에 구금됐을 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도록 주선해 북미 갈등을 해결하도록 이끌었다. 여섯째, 한국-조선-미국 정부 간 소통 창구가 막혀 있던 2011년엔 세 나라 전·현직 관료, 학자, 언론인들을 자택과 대학으로 초청해 이른바 ‘트랙2 회담’을 열기도 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선생은 2010년 〈간디·킹·이케다 평화상〉을 받았다. 2001년 제정된 이 상을 받은 사람 중 8명이나 노벨평화상을 받았기에 ‘예비 노벨평화상’이라 평가받는 큰 상이다. 2021년엔 ‘한국의 노벨평화상’이라 불리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다. 2022년엔 조지아대가 선생의 학문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박한식 평화학 교수직(Han S. Park Professorship of Peace Studies)’을 신설하기로 했다.
참고로, 선생이 앞에서 말한 통일평화대학 설립을 제안하기 시작한 때가 아마 2020년이었을 텐데, 2021년엔가 조선 당국이 긍정적으로 검토한다고 나에게 귀띔해줬다. 2022년 한국에서 윤석열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전혀 진전을 이룰 수 없었다. 2025년 윤석열이 탄핵당하고 이재명이 대통령이 됐어도 남북관계는 적대적 대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나는 통일평화대학 설립이라는 선생의 평생 소원을 생전에 이루기 위해서라도 남북관계 진전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으로 선생에게 남북 정부 간 대화를 주선해달라고 은밀하게 부탁했다. 그가 흔쾌히 동의하며 주선해보겠다고 했는데 2026년 1월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났다.
이 글이 《씨ᄋᆞᆯ의소리>에 실리기에 한 가지만 더 밝힌다. 회고록 《평화에 미치다》에 썼듯, 선생은 “평생토록 정신적 스승으로 모신 함석헌 선생”을 대학 시절 만나고, 내가 2010년대 말 〈함석헌학회〉 회장을 지낸 걸 알고 몹시 반가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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