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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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바로보기]북한 지하교회 실상과 지원방안


북한 지하교회 실상과 지원방안

유석렬
정치학(북한.통일)박사
모퉁이돌선교회 이사장
그루터기 신앙과 지하교회인

1)원산 ? 평양 대부흥운동

1903년 8월 감리교 로버트 하디 선교사의 통절한 회개가 출발점이 되어 원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1월 14일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사경회에서 길선주 목사의 회개의 포문으로 평양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장대현 교회에 성령의 강한 임재와 통회의 역사가 일어났다. 집회 후에도 1,500명중 600여명이 남아 밤이 새도록 기도했다.

장대현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성령의 역사는 평양 전 지역뿐만 아니라 개성, 선천 등 수많은 지역에 부흥의 불길이 퍼졌고 중국과 몽골까지 퍼져 평양대부흥운동의 열매를 맺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불길이 한창 휩쓸고 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감리교 선교사 노블은 “아마도 사도시대 이후 이보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 매 집회에서 주님의 권능이 교회 전체만 아니라 교회 밖에까지 임했다. 남녀의 회개의 역사로 꼬꾸라지고 의식을 잃었다. 전 도시는 마치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는 듯 했다”고 증언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어 전 지역으로 확산된 부흥운동은 1909년부터 소멸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선교사들이 합심해서 당시 20만명이었던 교인들을 ‘백만명’으로 부흥시켜 달라는 전도운동을 펼쳐 부흥의 열기가 다시 살아났다. 이것이 ‘백만명 구령’운동이었다.
그리하여 해방전까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북한교회 재건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북한 전역에 30만 신도에 총 3,022개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찬란한 복음의 꽃을 피웠다. 북한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1950년 이전 북한 기독교는 교회수 약 2,000개, 신자 20만명, 목사 410명, 전도사 498명, 장로 2,142명 등이었다고 한다.

2)기독교 탄압과 그루터기 신앙

1945년 해방이 되자 북한성도 절반정도가 남한으로 내려왔고 그 절반 이상이 김일성 ? 김정일 우상화 1인 독재 체제 밑에서 순교를 당했다. 북한 기독교인들은 해방 당시 30만명에서 1949년까지 20만명으로 감소했고 한국전쟁 이후 10만명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모퉁이돌선교회가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1945년 해방 이후 2006년까지 북한 지하교인들 순교자 수는 16,984명이나 집계되지 않은 순교자도 있어 실제는 이보다 훨씬 많은 북한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1950년부터 1972년까지 10,436명으로 가장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다.
아무리 많은 북한성도들이 순교를 당해 짤리웠어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6:13). 북한 땅에 남아 있는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고 줄기가 커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북한에 수십만이나 되는 지하성도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1946년 평양 장대현 교회는 3.1절 기념행사를 가졌다. 만여명이 모여 기념예배를 보고 있는데 돌연 공산당원들이 교회를 포위하고 예배 중지를 강요했다. 그러나 수천 기독 청년들의 호위밑에 예배는 무사히 끝마쳤고 만 여명의 신도들은 그 자리에 엎드려 조국의 완전 독립을 위한 3일간 금식에 들어갔다. 이날 정오를 기해 평양시 각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다른 교회로부터 5천명 이상의 교인들이 장대현 교회로 모여들었고 곧 시가 행진에 들어갔다. 그 당시 김일성은 그 사태를 당장 수습하지는 못했지만 하나 하나 간첩죄 등을 뒤집어 씌워 결국 주동자들을 무참히 숙청했고 많은 교인들이 순교를 당했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1955년 4월부터 본격적인 기독교인 색출작업에 들어갔다. 북한은 지하에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내기 위해 1955년 ‘중앙당 집중지도’를 시행하여 북한의 모든 주민들을 한 사람씩 그 성분을 분석했다. 그 집중 지도에 의해 많은 지하기독교 단체들이 발각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예가 ‘이만화 목사사건’ 이었다.
이 목사의 열정적인 비밀선교에 따라 많은 지하교인들이 생겨났고 휴전 후 3년 동안에 평북 용천군 내 10여개 협동농장에 비밀조직이 이뤄져 2,000명이 넘는 신도가 조직되었다. 예배는 격식을 차리지 않고 농장에서 일하다가 휴식시간에 삼삼오오로 흩어져 논두렁에서 쉬고 있을 때 행한다. 자연스럽게 성경말씀을 전하고 머리를 숙이지 않고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이만화 목사는 현장에서 발각된 교인들이 고문을 받자 자진출두하여 20여명의 교인들과 함께 순교했다.

김일성은 당초부터 정치? 사상적 목적을 앞세워 기독교를 ‘반동적 세계관’이며 ‘억압착취를 위한 사상적 도구’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적 수구’등으로 규정하면서 ‘막대한 해독’을 끼치는 것으로 보고 무조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기독교를 무조건 탄압할 것이 아니라 북한 경제 위기 상황을 개선시키는 방향에서 기독교를 이용하는 경제적 목적에 관심을 돌렸다. 김정일은 남한 기독교인들의 교회, 병원, 학교, 양로원등 건축물을 유치케 하기 위해 기독교 활동을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그 결과 김정일은 수천억원에 달하는 경제지원을 기독교인들의 손을 통해 얻어냈다.
각주
1.「미래한국」,2007.1.13
2.「기독교연합뉴스」,2007.5.3
3.조선 로동당 출판사,「조선 중앙 련감 1950」,평양:1950.p.365
4.“김정은 시대 이후의 북한 선교 전략” 정세와 선교 100호특집 기념 학술 세미나.2013.1.19.감리교 여선교회관. 모퉁이돌선교회.pp37~39
5.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집,「북한 사회의 이해」,부산대학교 출판부,1995.p.
6.1996년부터 2005년까지 남한 기독교인들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간 돈은 무려 2,700억원에 달한다는 것이다.





*선교타임즈 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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