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8, 2019

남북·해외동포 의학자 한마당…평양의학과학 토론회 2011년 8월호 | 통일한국



[IPA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캠페인 | 남북·해외동포 의학자 한마당…평양의학과학 토론회 2011년 8월호 | 통일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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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A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캠페인 | 남북·해외동포 의학자 한마당…평양의학과학 토론회 2011년 8월호
2011년 8월 1일

[IPA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캠페인 | 남북·해외동포 의학자 한마당…평양의학과학 토론회 2011년 8월호

남북·해외동포 의학자 한마당…평양의학과학 토론회


북측이 제작한 평양의학과학 토론회 리플렛




난 15년 동안 미국과 북한 간의 학술 및 인적 교류에 대한 자세한 기록물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북한과의 교류가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오히려 교류 프로그램 진행에 악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는 프로그램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미북한협의회(The National Committee on North Korea) 상임이사 카린 리(Karin Lee)의 말이다.

이는 민간차원에서 북한과 이루어지는 학술 및 인적 교류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한과의 민간 학술 교류는 그간 민간차원의 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의 축으로서 일정부분 성과 있게 진행되어 왔다.

2000년 이후 남북 학술교류 활성화


남북 간 학술 및 인적 교류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물론 1999년 남북한 컴퓨터용어 통일을 위한 ‘국제표준정보기술사전’ 편찬 등과 같은 남북 간 학술 교류는 2000년 이전에도 있어 왔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7년 말까지 남북 간 학술 교류는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면서 질적·양적으로 상당한 진전을 이루게 된다.

굵직한 남북 간 학술 교류 협력 사업들을 살펴보면 정상회담 이듬해인 2001년부터 ‘일제 강제병합 남북공동 자료전시회 및 학술토론회’가 평양에서 개최되었고, 중국 연길과 영국 런던에서 문학·실학·고고학 분야에 대한 남북 학술 교류가 있었다. 2002년에는 평양과학기술대학의 착공식과 함께 평양에서 대북 IT교육도 이루어졌다. 물론 중국 등 제3국에서의 지속적인 학술 교류도 병행되었다.

이후 2003년에는 남과 북이 ‘민족어의 통일적 발전과 방언 조사’를 위해 머리를 마주했고, 중국 연변에서는 ‘해방전 대중가요 연구’로 남과 북이 함께 함으로써 남북 공동 학술 교류 분야도 보다 다양화 된다.

2004년에는 철도, 고구려유적, 항일민족운동과 같은 다양한 주제로 교류가 더욱 확대·발전되었으며, 2005년에 이르러서는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사업,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과 북관대첩비 반환사업에 대한 남북 간 교류가 진행된다.

그러나 2007년 정상회담 전후로 정점에 달했던 남북 학술 교류는 2008년부터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 등 극히 일부사업을 제외하고는 남북 간 정치·군사적 긴장관계로 축소 또는 중단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예의 잘 알려진 대표적인 학술 및 인적 교류사업 이외에 앞서 서두에서 밝힌 전미북한협의회 카린 리 상임이사의 언급내용처럼 여러 가지 다양한 이유로 소수의 관계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학술 교류도 상당수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대한의사협회가 공동으로 참여한 평양의학과학토론회도 그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평양의학과학토론회는 ‘조선민족’의 의학과학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1999년 5월부터 해마다 국내외 동포 의학자 250여 명이 참석해 평양에서 진행하고 있는 학술토론회이다. 북측에서는 평양을 비롯해 양강도, 자강도 등 북한 전역에서 200여 명의 의학자가 참석한다. 남측에서는 2003년과 2004년, 2006년, 2007년까지 4회에 걸쳐 참석한 바 있다.



2006년 개관한 김책공업종합대학 전자도서관(좌), 김책공업종합대학 도서관에서 과제 작업에 한창인 학생(우)



“남측 의학자 더 많이 참여해 달라”


평양의학과학토론회에서는 매년 남과 북, 그리고 해외동포 의학자들이 소아과, 내과, 외과, 산부인과, 종양과, 구강학 등 다양한 의학 분야에 대한 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토론을 진행한다. 2007년 토론회를 마치면서 북한 조선의학협회 중앙위원회 조창식 위원장은 남측의 기초의학 및 첨단 의학 기술 관련 논문이 보다 많이 발표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아울러 남측의 임상 경험이 많은 의학자들이 더 많이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김인국 부위원장은 2008년 제10차 토론회의 주제로 결핵, 고혈압과 순환기 계통 질병, 관절경, 고려이론(한의학) 등을 제안하면서, 독일을 비롯해 유럽의 동포 의학자들에 대한 참여도 요청하였다. 그러나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2008년부터는 아쉽게도 남측에서 참석하지 못하고 있으며, 북측과 해외동포 의학자들만으로 진행되고 있다.

북한과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의 학술 교류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남측보다는 자유롭게 진행되었지만, 역시나 정치 역학적 변수에 따라 ‘조용히’ 추진되거나 그나마 2008년부터는 대부분 축소 또는 중단되었다.

북·미 간 학술 및 인적 교류의 경우 1990년대 중반부터 시라큐스, 코넬 등 약 20여 개 미국 대학들이 농업, 의료, 에너지 등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분야에서 북한과 학술교류를 진행해 왔다.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민간단체들의 경우에도 자체 인도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1990년대 중반부터 농업과 축산 분야를 중심으로 학술 및 인적 교류를 추진해 왔다.

최근 발표된 ‘미국과 북한의 학술 교류 평가와 미래전략’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미국과 북한의 학술 교류는 1년에 평균 10건 정도 진행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학술 교류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진행된 미국 시라큐스 대학과 북한 김책공업종합대학 간의 정보기술(IT)교류를 꼽을 수 있다.

이른바 ‘소장 학자 리더십 개발(JFLD)’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이 학술 및 인적교류 프로그램은 김책공대에서 선발된 연구사(석사급 이상)들과 시라큐스대학의 연구원들이 IT관련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한 프로그램으로, 2002년에서 2004년까지 시라큐스대학에서, 2005년에서 2007년까지는 중국 베이징에서 진행되었다.

매회 평균 12명의 북측 사람들이 약 1개월가량 공동 연구를 진행한 후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귀국 후에도 관련 후속 작업에 참여하였고, 2006년 김책공업종합대학내 전자도서관 설립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시라큐스대학과 김책공업종합대학 간의 IT교류는 2005년 북한의 핵무기 보유 발표와 6자회담 결렬 과정, 그리고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속에서도 꾸준히 지속되었으나, 역시 남북 간 학술 교류와 마찬가지로 남북관계가 급격히 악화된 2008년부터 중단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2010년과 2011년 김책공업종합대학 홍서헌 총장의 시라큐스대학 방문을 통해 학술 및 인적 교류의 명맥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남측보다는 상황이 다소 나아 보인다.

북·미, 1990년대 중반부터 비정치적 분야 교류


학술과 인적 교류를 통한 민간차원에서의 대북 교류 확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남북, 북미관계가 경색된 현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북한과의 관계 진전은 대결적 관계 설정의 탈피와 인식의 전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이는 상호간의 신뢰가 형성되었을 때 가능하며, 상호간의 신뢰 구축은 결국 서로에 대한 이해와 소통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북 학술 교류를 비롯한 민간 교류(Track-II)는 북한과의 이해와 소통의 창구역할을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민간차원의 학술 및 인적 교류에 대해 정치적 통일 과정의 이면에서 실질적인 통일 과정의 내용과 방향을 채우는 역할까지도 기대해 볼 수 있다.

모쪼록 정치·군사적인 이유로 연결과 단절을 반복하고 있는 대북 민간 학술 교류가 상호 신뢰 형성을 위한 소통의 통로로서 지속적으로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함께 김책공대와 시라큐스대학의 IT교류를 추진한 시라큐스대학의 한종우 교수가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미국 다츠머스대학은 1960년대부터 소련 지식인들을 불러 30년간 민간 차원의 교류를 했다. 같이 먹고, 자고, 노래 부르고, 술 먹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에서 상호 이해가 높아졌다. 다츠머스 컨퍼런스는 탈냉전 후 미·소가 급속한 관계 개선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자양분이 되었다.”

황재성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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