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8, 2019

08 정은미. 북한 협동농장 운영과 농민 사경제 실태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북한 협동농장 운영과 농민 사경제 실태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자료실




북한 협동농장 운영과 농민 사경제 실태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3-22 16:12
조회
330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평화나눔센터 제35회 정책포럼 발제문

-일시 및 장소: 2008년 6월 10일 저녁 7시-9시 30분,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회의실
-주제: 북한 협동농장 운영과 농민 사경제 실태
-발제자: 정은미 서울대 통일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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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평화나눔센터 제35회 정책포럼







북한 협동농장 운영과 농민 사경제 실태








1.  
: 2008 6 10() 오후 7 : 00 ~ 9 : 30
2.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회의실
3. 발표자 : 정은미 서울대 통일연구소 선임연구원(사회학박사)
4.  
: 7 : 00 ~ 7 : 30  다과
            7 : 30 ~ 8 : 30  발표
            8 : 30 ~ 9 : 30  질의 및 토론           













121-050 서울시 마포구
마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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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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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협동농장 운영과 농민 사경제의 실태

정은미(서울대 통일연구소 선임연구원·사회학박사)

I. 서론

이제 고난의 행군, 식량난, 7.1조치 등의 단어들은 북한에 관한 주요 검색어가 되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사회는 1990년대 중반 시기에 대기근을 경험하였고,
자력 생존이 요구되는 가운데 사경제가 급속히 확대되었다. 그러나 아직 북한 농촌에서는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이 앞서 보여주었던 탈집단화로의 농업 개혁의 모습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 오히려
북한 당국은 점차 경제가 회복되어감에 따라 집단농업 체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 2000년대인
현재 여전히 식량의 자급자족 정책이 강조되고 있다
. 현재 북한 당국은 소위 고난의 행군  발생 원인을 식량부족에 있다고 평가하고[1], 농업생산 정상화를 위해 국가 차원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다.
매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제시되는 과제들 중 농업부문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사회에서 농업부문의 비중과
식량문제의 해결에 대한 당국의 절박성을 알 수 있다
.
동시에 북한농업은 식량난을 계기로 자본주의세계로로부터
개발지원
, 교역, 합작사업 등 대외개방의 시대를 맞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 북한의 농업은 냉전기에 확립된 하드웨어와 탈냉전기에 밀고 들어오는
혹은 불가피하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소프트웨어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환경과 과제에 놓여있다
.
북한의 공식 문헌에 따르면, 북한은 1984 <농촌테제>
20주년에 때를 맞춰 연간 1,000만톤 곡물 생산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2004년 국제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의 발표에 따르면 2004/05년 곡물 생산량은 506만톤에 불과한 수준이다.[2] 전성기 시기의 생산량에 비해 현재는 거의 절반 가까이로 줄어든
셈이다
. 많은 연구자들이 오늘날 북한이 겪고 있는 극심한 식량 부족의 주요 원인을 주체농법과 집단농장의 비효율성에 돌리고 있다. 그러나 주체농법이 전면적으로 도입되고 집단농업체계가 매우 안정적이었던 1970년대 중후반 시기에
북한의 농업생산력이 최고의 수준에 올랐다는 점에서 식량위기의 발생 원인에 대한 분석은 좀더 다각적인 측면에서 접근될 필요가 있다
.
 북한의 공업화와 도시화가 일찍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은 틀림없지만, 국내총생산에서 농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30%에 이르고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36%에 달할 정도로 여전히 북한사회에서 농촌의 비중은 매우 크다.[3] 북한에서 농업부문의 특별한 중요성은 비농업부문의 인구 즉,
전체 인구의 70% 이상의 식량을 국가가 공공배급제(Public
Distribution System)를 통해서 공급하고 있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1990년대 이후 시장이 활성화되기 이전에는 농민들을 제외한 북한 주민들은 국가 배급창구 외에 다른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식량을 구할 수
없을 만큼 식량자원은 철저하게 국가의 통제 하에 있었다
. 심지어 2003년 유통개혁 이전에는 공식적으로는 농민시장에서조차도 식량의 거래가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배급제는 북한의
 · 국가(party-state)가 사회를 통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의 하나였다
.
그러나 1990년대 들어와서 대내외적인 여러 요인들로 인해 북한농업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집단농업의
농업생산력이 급격히 하락하자 국가의 공공배급제는 심각하게 타격을 입었다
. 그리고 급기야 대규모 기아 사태가
초래되었다
. 이에 북한 당국은 고난의 행군을 선포하였고
주민들에게 자력갱생을 요구하였다
. 또 북한당국은 1995년에 이례적으로
국제사회에 식량원조 및 영농자재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현재까지도 한국을 비롯하여 국제사회부터 끊임없이 인도적 지원을 받고 있다
. 하지만 10여년 넘게 계속되고 있는 대규모 대북식량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식량부족은 만성적이며
구조적이다
. 따라서 최근에는 단순한 긴급구호의 지원방식에서 탈피하여 북한농업의 자립성을 높이기 위한 개발지원
방식으로 전환되고 있다
.
이 글은 협동농장의 운영과 농민 사경제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 북한의 협동농장은 비록 협동적 소유의 물질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국가의 중앙집권적 지배하에
놓여 있으며 협동농장의 고정재산의
66.4%는 국가소유이며, 평안남도
숙천군을 비롯한 일부 군들의 경우에는
80% 이상이 국가소유인 독특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김승준, 1988: l 380). 또 전체 경작지에서 협동농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90%, 국영농장의 비중은 10% 정도이며, 이러한 집단농업의 구조는 지난 1958년에 확립된 이후 2008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독특한 구조의 집단농업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던 내부
동학을 필자는 협동농장의 운영과 농민 사경제 간의 관계를 통해 규명하고자 한다
.

II. 협동농장 체계의 확립 과정

1. 농업협동조합화

북한 농민은 1946 3 5일 토지개혁을 통해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받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북한농촌은 과거와 전혀 다른 물적 토대의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규모
노동력의 상실과 농촌 생산기반의 철저한 파괴라는 위기에 직면한 북한 공산당 세력은 농업협동화를 추진하였다
. 1953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농업협동화 방침이 결정된 이후 5년만인 1958 8월에 북한의 모든 경작지와 농민들은
협동조합에 가입하였다
. 또 북한의 협동조합은 공동토지소유,  공동경영, 노동점수에
따른 분배 등 가장 높은 사회주의형태를 선택했다
. 이러한 결과를 낳기까지 과정상에서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 조합에 가입하지 않고 끝까지 개인농을 고수하려는 현상, 조합에
가입한 후 탈퇴하는 현상
, 경제이해관계가 비슷한 농가끼리만 조합을 조직하려는 현상, 규정 이상으로 개인텃밭을 남겨두려는 현상 등 다양한 형태의 행위들이 나타났다.
농업협동화를 거부하는 현상들을 시정하기 위해 북한
당국은 조합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여 농업생산 인프라를 확충하고 우선적으로 영농물자 및 농업서비스를 제공하고
, 영농자금 및 종곡 대여, 세금 삭감 및 대부금 상환 면제 등 물질적 유인을 확대하여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동조합에 가입하도록 유도하였다
. 이밖에도 북한의 농업협동화가 짧은 기간 내에 달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 토지개혁의 결과 지주계급이 청산되어 농업협동화 반대세력이 미약했으며, 둘째, 전쟁으로 대다수 농민들의 생산기반이 심각하게 파괴되어 개별 농민의 노력만으로는 복구가
힘들었다는 점
, 셋째, 토지개혁 후 농민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 영세적이고
균등하여 토지를 통합하는데 농민들의 이해관계 차이가 적었으며
, 토지의 매매 · 저당 · 임대차 등이 금지되어 개인농으로의 부활이 원천 봉쇄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 결론적으로 농업협동화의 완성을 통해 북한당국은 농업부문에 대한 철저한 국가통제를 통해
계획경제와 산업화에 필요한 물적 토대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북한의 농업 집단화 과정은
소콜로브스키
(J. Sokolovsky, 1990)가 제시한 세 가지 유형의 모델-계급투쟁,  농촌경제자원
통제
, 국가형성-모두의 성격을 지닌다. 빈농 중심의 집단화가 추진되었으며 집단화를 통해 농촌지역에 당과 국가의 조직이 강하게 침투하여 기존의 농촌 지배 권력구조를 파괴하고
새로 수립된 중앙 정부와 생산자 사이를 직접 연결하는 체계를 구축하였다
. 또한 농업 집단화가 완료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북한의 당
 · 국가는
농촌의 경제자원에 대한 국가 통제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집단농업 체계가 개편되었다
.

2. 농업
규모화를 위한 리 단위의 통합

농업협동화 이후에는 농업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농업의 규모화가 추진되었다
. 이에 1958 10 29일 내각결정으로 한 개의 리 안에 있던 2~3개의
조합들
(평균 20~30호의 농가들로 구성)이 통합되면서 농업협동조합의 평균규모는 농호수 80호가 300호로, 경지면적은 130정보에서 500정보로 커지게 되었다. 그 결과 전국의 농업협동조합 수는 3,800여개로 기존의 1/5 수준으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현재
북한의 집단농 형태는 협동농장이
3,800여개, 국영농목장은
190여개이며, 전체 경작지에서 협동농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90%,
국영농장의 비중은 10%로 협동농장의 형태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4].
리 단위 통합조치로 인해 경지면적과 조합의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조직체계도 대폭 개편되었다
. 먼저, 리 행정기구가 개편되었다. 농업 생산지도의 권한을 각 농업협동조합이 갖게 됨으로써 기존의 리인민위원회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졌다
. 따라서 통합 후 리인민위원장이 농업협동조합 관리위원장을 겸임하는 리인민위원회 기구체계로
개편되었다
. 이것은 생산조직과 행정조직의 일원화를 의미한다. 또한 리
안에서 별도로 운영되던 농촌소비조합상점과 신용협동조합이 농업협동조합에 병합되었다
. 이로써 농업협동조합은 생산에서
분배
, 교환, 소비에 이르는 일체의 경제활동을 단일한 계획 하에서 수행하게
됨으로써 재생산과정을 촉진하고 조합원들의 복지를 더욱 증진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 마지막으로
농업협동조합은 경제부문 뿐만 아니라 아래의
<-1>에서
보이듯이 교육
 · 문화 · 보건 · 상업 · 공공서비스 문화후생부문까지 포괄함으로써 농민들의 생활
전반을 책임지는 조직이 되었다
.

Text Box: <표-1> 협동농장 내 서비스 내역별 건물 배치


        서비스 범위
서비스 구분

농장 전체

작업반간

작업반

사상문화 교양 건물

<김일성동지혁명사상연구실>, 문화회관, 출판물보급실,
농업과학지식보급실(실험실), 청년학교

농업과학기술지식선전실, 청년학교

농업과학기술지식선전실, 청년학교

보육 및 교육, 보건기관 건물

인민학교, 고등중학교, 진료소, 아동병동

탁아소, 유치원, 인민학교분교

탁아소, 유치원

상업 및 급양 편의봉사기관 건물

상점, 수매소, 합숙소, 식당, 청량음료점, 밥공장, 미용원, 빨래집(세탁소), 양복점, 종합수리소

분상점/위탁매점, 목욕탕, 리발소, 밥공장, 세탁주문소, 종합수리주문소

간이목욕탕

사무, 운수 및 체신 기관 건물

버스정류장, 유선방송극소, 전화교환실, 농장당위원회,
관리위원회, 근로단체사무실

작업반사무실

작업반사무실


출처: 김룡철, 1991, 『농촌부락계획』. 공업종합출판사, pp.21-22.

이상과
같이 농업협동조합의 인위적인 통합과정을 통해서 농촌의 전통적인 촌락 구조는 해체되었고
, 대신 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농촌의 촌락 구조가 형성되게 되었다. 리는 행정단위로서보다는 오히려 생산 단위로서의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으며, 실질적으로 군이 말단
행정 집행기관으로서 농업 생산단위인 리에 대한 농업을 직접 지도하는 단위가 되었다
. 그리고 농민들의 일상생활
역시 협동농장이라는 생산조직의 구조와 운영방식에 맞춰 재구성되었다
.


III. 협동농장의 구조와 운영

1. 조직구성과 분업화

1)
수직적인 농업지도체계
협동농장은
수직지도체계에 따라 상급관리기관인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의 직접적인 통제와 지시에 따라 운영된다
. 다시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는 도농촌경리위원회의 지도를 받는다.
이러한 수직적인 관리지도체계는 1962년에 확립되었다.
도농촌경리위원회는 군에 농기계, 비료, 농약 등의 영농자재를
보장하고 작물배치
, 종자선정, 시비체계 등의 기술 지도를 수행한다.
그리고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는 해당 군에 있는 농기계작업소, 농기계수리소,
관개관리소, 수의방역소, 종자관리소,
토지건설사업소, 종축장 등 농업부문 기업과 기업소를 총망라하고 있으며 군내의 협동농장들을
대상으로 생산 및 기술지도
, 영농자재 공급, 그리고 노동행정 및 재정
사업 등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전문적인 국가 농업지도기관이다
. 협동농장의 생산목표 설정 및 성과의 평가,
주요 영농자재의 공급, 기술지도 등에 대한 직접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군협동농장경영위원회는
협동농장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핵심적인 상급지도기관이다
.

2) 협동농장의 내부구조
협동농장은 <그림-1>
같이 크게 농장관리위원회
, 작업반, 분조로 구성된다. 농장 책임자인 관리위원장과 생산과 기술 지도를 담당하는 기사장, 그리고 농장원의 후생사업을
담당하는 부위원장들
, 그 밖에 노동행정사업과 재정부기사업을 맡는 일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내부생산조직으로 작업 대상과 기능에 따라 여러 개의 작업반들과 분조들이 있다.
북한의 협농농장 작업반은 대체로 옛 자연부락을 단위로 하여 조직되었다. 기존의
1개의 자연부락이 1개의 작업반으로 조직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비교적 큰 규모의
지대에서는
2개 또는 그 이상의 작업반을 조직하였고 산간지대에서는 분산되어 있는 2~3개의 부락을 합하여 1개 작업반을 조직하였다. 이로써
작업반의 규모는 평균
70~80명 정도를 기본으로 하고 크게는 100여명까지도 구성되었다[5]. 이와 같은 작업반 조직 구조는 기존의 자연부락이
1958 10월 리단위 협동조합의 통합과정에서 완전히 해체된 것이 아니라 작업반
형태로 계승되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자연부락의 형태를 완전히 해체하지 않고 내부생산조직으로 포섭함으로써
기존의 촌락 질서가 급격히 파괴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였다
.
일반적으로
협동농장은 최소
4개에서 최대
10개의 작업반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본은 농산반으로 여러 개이고 나머지는 남새반,
과수반, 축산반, 농기계화반,
관개반 등이 대개 하나씩 있다. 특이한 점은
농기계작업반 안에는 수리분조가 별도로 조직되어 있는데 관리위원회 회의가 있을 때에는 농기계작업반장과 수리분조장이 동시에 참석하는
등 수평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6]. 공예작업반, 잠업작업반,
과수작업반, 남새작업반, 축산작업반,
담배작업반 등은 한 가지 생산물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작업반이다. 이외에도 생산수단과
노동의 고정 상태에 따라 고정작업반과 임시작업반 등으로 분류되며
, 협동농장의 후비조직으로서 청년작업반이 별도로
조직 운영된다
. 작업반에는 작업반장, 기술지도원, 통계원이 조직되어 운영된다. 이들은 수확하기 직전에 예상수확량을 측정하는 평뜨기의 직접적인 수행자이다. 평뜨기는 곡식이 완전히 여문상태에서 평당 수확량을 재기 위해 실시하는데 동일한 토지에서 상·· 하 세 부분에서 평뜨기를 한다. 이때 평뜨기팀은 작업반장, 분조장, 분조원
1, 작업반 기술지도원, 통계원으로 구성된다.
보통 1개의
작업반 안에는 최소
11개에서 최대 26개까지의 분조가 조직되어 있다.
분조는 생산 및 노동력의 조직 및 노동평가의 단위로서 생산을 직접 진행하는 기층단위이자 농장원들의 집단생활을 위한 기본조직이다.
분조는 작업대상에 따라 논분조, 밭분조, 담배분조,
채소분조, 잠업분조, 수산분조,
트랙터분조(운수분조), 농기구수리분조,
건설분조 등으로 세분화된다. 이외에도 청년작업반처럼 청년분조가 별도로 운영된다.
한 분조의 규모는 평야지대의 경우 15~20, 중간지대의 경우 12~18, 산간지대의 경우는
8~12명 정도로 보통 구성되지만, 고정된 것이 아니라 내부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다
.
분조는 1년마다
새롭게 편성되며 보통 이듬해
1월에 편성된다. 따라서 매년 분조성원
구성이 바뀌게 된다
. 분조원 편성시 배치 기준은 노동급수와 연령 등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형평성 있는 노동력
배치를 위해 수평적 순위별 배치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예를 들어 1순위에
분조장이 위치하고
, 2순위에 소관리공(A급소와 B급소 배합), 2순위에는 젋은 남자,
3순위에는 미혼 여성이, 4순위에 아줌마(A-자녀를 모두 키우고 농사경험이 많은 40~50대의
아줌마
, B-20~30대 젊은 애기엄마, C-기타)가 배치된다. 일단 분조가 편성되면 중간에 교체가 안되며, 분조 편성에 불만이 있을 경우 이듬해에 의견이
반영되어 교체되기도 한다
.
Text Box: <그림-1> 협동농장관리위원회 및 작업반 체계도




















협동농장
관리위원회















































































관리위원장

























































































































생산
부위원장







업무
부위원장







경리
부위원장



책임기사











































































































































































축산

































































































































































수산분조


자료: 청산협동농장의 구조도 사진자료(월간 『민족21(2006 5)제공)

2. 협동농장 운영과 생활양식

1) 분배방식과 노동평가
협동농장의 경영방식을 살펴보면, 협동농장에서는 수확이 끝난 11~12월경에
1년 동안의 경영활동을 평가하고 수입을 분배하는 결산분배를 진행하며, 여기서 총수입과
지출을 계산하여 농장의 소득을 확정한다
. 협동농장의 순수입은 농산물 생산에 소비된 모든 비용을 공제한 나머지
부분이다
. 농장의 수입은 공동기금과 개인분배몫으로 나뉘며 공동기금은 생산확대와 사회문화사업 등을 비롯하여
농장관리운영에 필요한 기금으로서 공동 기금은 주로 공동축적기금
(농장순수입의 15~30%), 유동기금, 사회문화기금(3~7%), 탁아소,
유치원 운영기금, 원호기금 등으로 사용된다. 협동농장의 총수입에서 국가납부 및 생산비 공제와 공동기금을 공제한 후에 마지막으로 개인분배몫이 결정되며, 개인 분배몫은 1년간 참가한 노력일과 벌어들인 노력점수에 따라 현물과 현금 형식으로 지급된다.
원래의 규정대로라면 농장원은 총 수확량에서 계획된
양의 납품을 완료한 후 개별 농장원에게 분배를 하게 되어있으나
, 식량 사정이 어려워진 이후에는 작업반장의
재량에 의해 농장원 분배를 먼저 한 후 나머지 양을 국가 납품하는 변칙적인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 이로써
납품의 양은 대부분 계획지표에 미치지 못한다
. 계획량을 채우지 못했을 경우 작업반장은 말로 비판을 받을 뿐이지
형사처벌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 농장원 분배를 먼저 하지 않으면 아무도 농장일을 하려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반장은
궁여지책으로 어쩔 수 없이 변칙 분배를 하게 된다
.
모든 농장원들은 작업정량표에 따라 1년 결산 분배를 받게 된다. 1일 평균 1.2(노동점수)으로 290일의 노동일을 채우고 분조계획을 달성하면
330점을 받게 되고 이로 정상 분배를 받게 되어 최소 300kg 최고 500kg까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부류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300kg~260kg의 식량을 받게 된다. 1부류는
현장
, 즉 땅에서 직접 일하는 모든 농장원들이 해당되고, 2부류는 간접
생산자로서 과수반이나 농기계작업반
, 수리반, 관리위원장 및 부기장 등이
해당되며
, 3부류는 이발사, 미용사, 보육원, 통계원, 부기원 등이 해당된다.

2) 농민의 라이프스타일
북한 농민들의 일상은 집단농 체계에 따라 철저하게
획일적으로 재구성되었다
. 아침 식사 후 오전9(여름철-오전8)부터 정오까지 농장에서 공동 노동을 하며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는 점심식사 및 휴식,
그리고 포전학습 또는 포전강연이 이루어진다. 다시 오후2~6/7(여름철-오후8)동안 농장의 공동 노동이 진행되고 작업이 끝나면 작업총화가 진행되는데 주로 하루의 노력점수가
평가된다
. 작업총화가 끝나면 집에 들어와 씻고 저녁식사를 간단히 한 후 월요일, 화요일, 금요일, 토요일에 마을 회관에서 이루어지는 학습
또는 강연에 참여한다
. 이 모든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0~11시가 된다. 그리고 모든 농장원들은 누구나 농근맹,
청년동맹, 여맹 중 어느 조직에서든지 가입되어 조직생활을 해야 한다[7]. 대개 조직 활동은 보통 10일 생활총화가 기본이지만 경우에 따라 1주일 생활총화도 이루어지고 그 외에도 월총화,
분기생활총화(3달에 한번), 연간총화가 있다.


IV. 집단농업과 농민 사경제의 관계

 1. 농민 사경제의 역사와 기능

1) 농민 사경제의 역사적 전개과정
북한 농촌에 국가중심적인 집단농업 체계가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강제력이나 물리력
, 행정적 수단들의 사용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프라이어(F. Pryor, 1992)가 지적한 것처럼 농촌 경제자원에 대한 지나친 국가통제로
인해 발생하는 농민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국가가 지나치게 강제력이나 행정적 수단에만 의존할 경우 결국 그것은 전체적인 농촌경제의 생산력
저하로 나타날 수 있다
. 따라서 농민의 생산의욕을 높이고 농업생산력을 제고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 인센티브의
적절한 사용은 매우 중요하다
. 사회주의 집단농업의 운영에서 농민 사경제 부문은 매우 중요한 경제적 인센티브이다.
대체로 농민 사경제는 텃밭을 포함한 사경지, 가내축산이나 가내수공업과 같은 부업,
그리고 농민시장으로 구성된다. 특히 사경지에는 농가의 자급자족을 위한 곡물과 교환 ·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비곡물류의 재배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여기서 얻은 생산물이 시장에서 자유 처분되어 추가 수입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농민 사경제는
생존 지향적인 성격과 시장 지향적 성격이라는 이중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
1958 8월에 북한 농촌은 100%의 농업협동조합화가 완료됨으로써 집단농업 체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개인생산 부문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대규모 집단농업 부문과 함께
개인생산 부문의 병행적 존속은 농업협동화 과정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 소농기구와 소가축은 개별 농가의 소유로
인정되었다
[8]. 이외에도 텃밭 경작과 가내부업이 장려되었다.
농업협동화 시기 농민의 개인생산 활동이 광범위하게 허용된 것은 조합원들의 현금 수입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59 1 5일 전국농업조합대회에서 채택된 농업협동조합의
새 기준규약에 의해 농민의 개인생산 기반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 텃밭의 경우 이전 기준규약에서는 농가당
70~200평까지 허용되었는데 새 기준규약에서는 30~50평만이[9] 허용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취해진 이유는 농민들이 텃밭 경작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협동농장 출근율이 매우 저조한 폐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10] 개인생산의 물적 토대를 축소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농촌에서 진행해야 할 작업량들이 급격히 증대됨에 따라
조합원 농민들이 개인경리에만 매달리는 경향을 통제하고 공동 경리에 몰두하게
[11] 하기 위함이었다. 농민의
소규모 사경지는
1977 4 29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된 <토지법>에 의해
법적으로 제약되었다
. <토지법> 제정을 통해 국가는 모든
토지에 대한 영구적 지배의 법적 기반을 획득하였고
, 반면 협동농장은 토지에 대한 이용권만을 갖게 되었으며,
농장원은 20~30평만의 텃밭 소유가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한편 사회주의 새 정권은 해방 후 상업의 사회주의적
개조 과정에서 농민 상업을 개인 상업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상품 매매에서 농민과 노동자
, 사무원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1950 1월 내각결정 제9호에 의하여 이전의 재래시장인 인민시장을 농촌시장으로
개편하였다
. 정부는 개인 상업을 통제하고 농산물을 집중 동원하기 위해 농촌시장을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정부는 많은 재정을 들여 농촌시장을 건설하였고, 농민들을 유인하기 위해 농촌시장에
농산물과 부산물을 판 농민들에게는 공업품을 특별히 싼값으로 제공하였다
. 당시 농촌시장에서 주목할 점은
1958년에 창설된 농민시장과 달리 쌀과 같은 식량 거래가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58 8월 내각 결정 140호에 의해 기존의 농촌시장은
농민시장으로 바뀌었다
. 농민시장은 협동농장들의 공동경리와 협동농민들의 개인부업경리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축산물의 일부를 농민들이 일정한 장소를 통하여 주민들에게 직접
파는 상업의 한 형태
[12]로 규정되었다. 농민시장의
거래품목은 잉여 농산물로 매우 엄격하게 제한받았으며
, 특히 식량 자원의 거래 금지 조치는 농촌의 식량자원이
시장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국가로 집중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정부가 저가의 식량가격정책을 장기간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국가의 엄격한 통제 하에 포섭되어 운영되게 된 농민시장은 1959년부터는 전체 소매상품유통액
중에서 겨우
1% 미만을 차지할 만큼 크게 위축되었다[13].
유통부문에 대한 국가의 완전한 지배체제가 확립된 이후에도
농민시장의 존폐 여부를 둘러싸고 당내에서 논쟁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 특히 논쟁은
1960년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급진주의적인 입장에서는 농민시장이 자본주의의
잔재로서 그것이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운영을 방해하고 자본주의의 부활을 물적 토대가 된다고 하면서 농민시장의 폐지를 주장했고
, 온건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생산력 수준이 높지 못한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오히려 농민시장의 긍정적인 기능이 더 많다며 존속을 주장하였다.
온건주의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대표적인 경제학자인
김원삼은 농민시장이 협동농장의 생산력을 높이는 물질적 자극의 수단으로 된다고 주장했다
. 그 이유는 농장원들이
협동농장의 공동노동을 열심히 하여 분배받은 여유 농산물이 많아지면 그것을 농민시장에 내다 팔아 많은 화폐 수입을 얻게 되고 결국에는 더 많은 공업품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14]. 그의 논리대로라면 농민시장의 잔존은 협동농장의 생산의욕을
높이고
, 농가에 화폐수입을 추가적으로 창출해주며, 공업품에 대한 구매력을
높여 결국 공업 발전에도 도움을 주는 그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갖는 것이었다
.
당내 논쟁에서 김일성은 농민들이 닭 몇마리를 좀 비싸게 판다고 하여 그들이 자본가로
되는것도 아니며 텃밭에 담배를 몇포기 심는다고 하여 그것이 자본주의적경영으로 되는것도 아닙니다
. 사회주의사회에서
부업생산이나 농민시장이 남아있는것은 나쁠것이 없으며 오히려 좋은것입니다
[15]라며 농민시장의 잔존을 주장하는 온건주의적 입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또 그는 농민시장을 법으로 없애게 되면 장마당은 없어질지라도 암거래는 성행하게 될 것이라며, 국가가 인민들에게 소비품을 충분히 공급해 주지 못하는 조건에서 조급하게 농민시장을 없애려는 것은 좌경적 편향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농민시장의 순기능에 대한 김일성의 인정 때문에 농민시장은 1960년대 후반 당을 휩쓸고
반수정주의투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흥미로운 점은 소토지,
뙈기밭, 부대기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비합법적 사경지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정부의 규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반면에 텃밭은 언제나 국가권력으로부터 일종의
성역과 같은 매우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문헌이나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 후술하겠지만 2002
7.1경제관리개선조치가 실시된 후 농촌에 토지사용료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에 농가의 텃밭(30평 기준)은 토지사용료 부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2) 농민 사경제의 기능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농업생산력은 크게 발전하였으나
생산력 발전이 곧 농민의 윤택한 삶으로 직결된 것은 아니었다
. 농민들의 생계보장은 농장의 공동노동 참여 이외에도
사경제 활동을 병행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 특히, 농장의 경지가
대부분 식량 작물 재배에 이용되기 때문에 농장원들은 부식물을 자체 해결해야 했다
. 국가는 농장원들의 부식물
해결을 위해 개별 농가에 소규모의 텃밭 경작을 허용하였으며
, 이는 농장의 채소주의라고 불렸다. 농장에서
기르는 채소는 주로 인근 공장과 기업소의 노동자나 탁아소 등에 공급되며
, 농장원들이 소비하는 채소는 모두
개인 농가의 텃밭에서 공급된다
. 따라서 텃밭의 1차적인 목적은 농장원의
채소 공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
원칙적으로 텃밭이나 사경지에 옥수수와 같은 식량작물
재배는 금지되었으며
, 대체로 농민들은 주로 시장에서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마늘과 고추와 같은 환금성
작물을 재배하였다
. 이밖에 농가의 축산활동은 농가의 수입 증대, 부식물
해결
, 그리고 거름 생산 등의 다목적인 의의를 지닌다.[16] 특히 농촌에서 공산품을 구입하거나 혼수 준비에 필요한 현금을
마련하는데 곡식
, 밀주, 가축이 주요 수단이다.
이밖에도 농민 사경제는 도시와 농촌 간의 사적인 소비연계를
담당하였다
. 도시민에게 국가 배급제를 통한 소비재 공급은 충분치 않았으며 도시민들은 시장에서 부족한 소비재를
구매함으로써 보충하였다
. 또한 농촌의 사경지는 도시에 거주하는 일부 가족성원들이나 친인척에게 부족한 식량과
부식물을 지원해주는 중요한 공급원이 된다
. 특히 농민의 사경제 부문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도시 거주민들이 생존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7] 농촌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도시민은 그렇지 못한 도시민에
비해 생존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
마지막으로 농민 사경제는 국가가 개별 농가에 부여하는
각종 의무수매를 채우는 주요한 원천이기도 하다
. 농촌의 모든 농가는 해마다 콩, 고추, 토끼가죽, 돼지 등 여러 품목별 의무수매를 수행해야
한다
. 평남 개천시의 한 협동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J(, 40)에 의하면 이 수매계획을 완수하지 못할 경우
결산분배에서 공제된다
. 각 농가는 텃밭이나 가내축산에서 나오는 생산물의 일부를 의무수매용으로 납부하거나 부족한
경우에는 시장에 가서 자비로 구입하여 계획지표를 채워야 한다
. 이렇듯 북한 당국은 의무수매 제도를 통해 개별
농가의 사경제로부터 나오는 수확물의 일부를 국가의 수중으로 거둬들였다
.
텃밭이나 소토지 경작은 주로 아침 작업 전인 새벽시간이나
오후 작업이 끝난 저녁시간
, 그리고 10일에 한번씩 있는 농장휴식일에
이루어진다
. 농민시장은 농장휴식일에 주로 이용된다. 특히,
농민 사경제는 주로 여성이나 노인, 어린이 등에 수행되는데, 이런 측면에서 사경제는 유휴노동력을 활용하는 사회경제적 기능을 지닌다. 때로 북한 문헌은 텃밭을
열심히 가꾸는 것은 이기적인 농민의 행위가 아니라 부지런한 알뜰한
실농군의 행위로
이미지화되기도 하였다
.[18]
농민시장의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은
1965년에 이후에야 나왔다. 당시 지침에 따르면 농민시장은 한 개 군에
2곳 정도를 설치하되 군소재지에 설치하며 군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중심이 되는 리에 하나 더 추가로 설치되었다.
그리고 개장 날짜는 협동농장이 쉬는 날로 정하여 농장원이 자유롭게 시장을 이용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농장원이 평소에
시장을 다니는 것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 마지막으로 농민시장 안에 공업품상점의 분점을 설치하여 농민에게 공업품
구매의 편의를 돕고 시장에서 획득한 화폐 수입을 신속하게 국가에 인입시켰다
.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종합해 보면 농민 사경제는 농가와
인근 도시에 부족한 부식물을 제공하고
, 시장을 통해 추가 현금수입을 마련해줌으로써 공업품을 구매를 촉진시켜
농촌의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며
, 결과적으로 도농 간의 소득 및 생활수준 격차를 줄이고 유휴노동력이나 농촌의
예비자원을 동원케 함으로써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기능을 수행한다
.[19]

 2. 집단농업과 농민 사경제의 관계

사회주의 집단농업 체제에서 사적 생산부문이 갖는 근본적인
딜레마는 한편으로는 사회화 부문을 보조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지만
,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농업부문을 쇠퇴시키기도
한다는 데 있다
. 이와 같은 딜레마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들은 시기와 국면에 따라 개인생산 부문에 대한 규제
강화 또는 완화라는 상반된 두 태도를 변칙적으로 보여주었다
. 일반적으로 침체된 농업생산력을 회복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될 때에는 사적 부문에 대한 규제가 대폭 완화되었다
. 이것은 개인생산 부문의 자율성이 집단 생산부문의
생산력의 변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
농민들의 입장에서 개인생산 부문에는 협동농장이 붕괴되거나
혹은 기대했던 것보다 수확이 덜 수행되었을 경우에 일종의 보험
(insurance)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20]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회주의 계획경제가 내포하고 있는 불완전성
또는 결핍의 항상성과 무관치 않다
. 따라서 개인생산 부문은 전체적으로 농업 발전에서의 불행한 결과에 대한
차선책이자 동시에 집단생산 부문의 발전의 브레이크
(brake)로 기능한다.[21]
사경지에 필요한 생산요소는 대체로 소농기구의 경우에는
농장원이 개별적으로 시장에서 장만하기도 하지만
, 화학비료나 농업용 비닐, 제초제 등은 국가가 독점하고 있어 시장에서 개별적으로 구입할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협동농장에 의존하게 된다. 함북 새별군의 한 협동농장에서 농장원이었던 B(,
30)에 의하면 비료의 경우 시장에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주로 농장에서 몰래
가져와서 텃밭에 뿌리는데 많은 양이 아니기 때문에 분조장이나 작업반장이 보더라도 대체로 눈감아 주는 편이라고 한다
. 이외에도 농민들은 종종  파종시기에 맞춰 농장의 종자나 묘종을 가져다가 자기 텃밭에 심는 경우가 있다. 이밖에 열흘에
한번씩 있는 농장휴일은 농민들이 마음 놓고 텃밭을 가꾸거나 시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시간을 제공한다
.
농업 생산요소에 대한 국가의 독점과 투입재 시장의
미발달은 농장원이 사경제 활동을 제한적으로 수행하면서 집단농장에 계속 참여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본적인 구조적 이유로 작용한다
.
농민 사경제 부문에 필요한 투입재의 상당량은 집단농장으로부터 획득된다. 이것은
1990년대 이후에도 농장원들이 집단농업에는 참여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경제 활동에만 종사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농업 생산요소시장의 개방은 집단농업의 운명과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밖에 살림집에 딸린 사경지는 이용뿐만 아니라 상속 및 매매도 가능한 중요한 개인소유의 재산이다. 따라서 농민은 농장을 탈퇴하지 않는 한 영구적으로 일정 정도의 개인 땅을 소유할 수 있다. 이점은 농민이 농촌을 이탈할 수 없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상의 농촌 실태는 집단농업과 농민 사경제 사이의
상호의존성 또는 상보성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 소련의 농촌 사경제를 분석한 헤드룬드(Hedlund,
1989)는 농민들이 집단 부문에 노동참여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사적 부문의 생산요소의 상당부분을 집단 부문에 의존한다는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 또 그는 농장원은 수많은 필요한 투입재를 집단 부문의 지배인들의 선의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 반대로 농장의 지배인들은 농장원의 노동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의 생산 방식은 분리하여 취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 , 집단농업 부문과 개인생산 부문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


V. 식량난 이후의 협동농장과 농민 사경제의 변화

1. 협동농장의 분권화와 물질적 인센티브의 확대

1) 분권화와 실리주의
1990년대 식량위기 발생 후 나타난 농업정책의 변화는
농업생산에서 일부 의사결정권이 협동농장과 농민에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 이것은 집권적 의사결정구조에서 분권적
의사결정구조로의 변화를 내포한다
(양문수, 2006: 70). 그동안
협동농장의 모든 의사결정은 실제 농업위원회
-도농촌경리위원회- · 군협동농장경위원회의 수직적인 농업지도체계에 따라 중앙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따라서 생산주체인 협동농장과 농민은 자기 농장에 어떤 작물을 심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조차 전혀 없었다
. 그러나 식량위기가 닥치자 북한당국은 농민의 생산의욕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작물선택권을 협동농장에게 이양하였다
.

농사의 주인은 농민들이며 농사일을 잘 아는것도 농민들입니다. 농사는 구체적인 실정을 잘 아는 농민들이
주인이 되여 책임적으로 하게 하여야지 아래실정도 잘 모르는 일군들이 이것을 심으라 저것을 심으라 하여서는 잘될수 없습니다
. 농업과학자들이 연구한것도 내리 먹이려 하지 말고 협동농장 일반포전에 심고 가꾸면서 농민들자신이 스스로 받아 들이게 하여야 합니다.
종자뿐아니라 농사방법도 일률적으로 내리 먹이지 말아야 합니다.[22]

위의 인용문은 농업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획일적이고
관료주의적인 농업생산의 의사결정 구조에 있음을 시사한다
. 이것은 우리식 사회주의의 실패가 외인(外因)뿐만 아니라 내인(內因)에도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이다. 농업부문에서의 분권화는 농업지도기관들과 계획기관들이 지역별로 자기의 지대적 특성에
맞게 작물을 심는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아야
[23] 하며, 강냉이 농사가
잘 안되는 고산 지대에서는 강냉이를 획일적으로 심지 않고 대신 감자를 많이 심는 등 농민들의 의사와 요구를 존중하여 자체실정에 맞게 농사를 짓도록
하는 것이었다
.
그러나 작물선택권을 농장과 농장원에게 이양한 분권화
조치가 순기능만 한 것은 아니었다
. 김정일은 농사의 주인인 농민들의 의사와 요구대로 지으라고 하였더니 거기에
등을 대고 제멋대로 아무 종자나 망탕 심는 것 같습니다
[24]라며 분권화의 부작용을 언급했다. 이러한 현상은 일부 농장에서 수익성에 집착하여 식량작물 보다 환금성이 높은 공예작물 재배에 더 관심을 보이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25] 이것은 바로 실리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한계이다. 농업부문에서도 경제적 효율성이 강조되면서 알곡작물이 잘 되지 않는 지대에서 그 지대에 맞는 약초나 뽕나무와 같이 외화원천으로서 가치 있는 작물을 배치하여 외화를 벌어 식량을
사오는 것
[26]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 경제적 효율성은 곧
수익본위주의의 비판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한편 분권화는 농업생산뿐만 아니라 경영에 대한 책임을
농장에 이양하였다
. 농장 운영에서 실리가 강조되면서 생긴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세금의 부활이다.
공식적으로는 북한 농촌에는 1966년 이후 농업현물세가 완전히 폐지되고
1974 3월에는 농민지방자치세마저도 폐지되면서 세금이 없는 것으로 선전되어왔다.
그렇다고 하여 농장경영비까지 폐지된 것은 아니다. 그동안 농장은 전기사용료,
관개사용료, 농기계작업료, 종자사용료,
수의방역치료비 등 국가로부터 받는 농업서비스에 대한 비용을 비록 생산원가에 비해 턱없이 저렴한 가격이지만 국가에 납부하고
있었다
. 그런데 2002 7.1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농장경영비는 이제 제값 지불을
요구받게 되었다
. 변경된 농장경영비 지불 방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필지가 인터뷰한 황해북도 수안군의 한
협동농장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했던
J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J씨의
설명에 의하면
, 토지사용료는 토지를 1~8등급으로 나눈 후 예를 들어
1등급은 평당 강냉이 1kg, 8등급은 300g 씩 납부하게 된다. 관개사용료는 1정미(町米)[27]=3000립방미터=3000톤의 계산단위로 리 차원에서 계산하여 납부하며, 비료사용료는 당해 연도의 비료값에 비례하여
예를 들어 비료
1kg 당 강냉이 2kg씩 계산하여 납부한다.
또 농기계사용료는 작업량에 따라서 리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계산하여 납부하며, 전기사용료는
주로 탈곡
, 양수기 등에 사용하는데 이것 역시 리에서 총체적으로 계산하여 납부한다. 개별 농가의 경우 주택사용료로 집 평수에 따라(예를 들어, 60평 기준으로 매달 100원씩) 납부하게 되었다.
또한 주택 전기사용료의 경우, 집집마다 보유하고 있는 전기제품의 품목을 확인하여
거기에 준하여 전기사용료가 부과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검사하러 나오면 대체로 전기제품들을 숨겨놓기 때문에 대부분의 농가는 매달
50원씩 정도의 전기사용료를 납부하고 있다.
다른 한편 농업부문에서의 의사결정구조의 변화는 농촌간부의
민주적인 선출을 포함하고 있다
. 1999 2 24 <사회주의농촌테제> 발표
35돌 기념 중앙보고회에서는 이례적으로 농민들의 농업관리자 선출권 부여와 분조관리제 등의 일련의 농업제도 개선 조치들이
언급되었다
. 이 조치들은 협동농장의 관리운영에서 물질적 인센티브와 민주적 참여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농장원들의
집단농에 대한 참여를 유도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
좋은벗들(2000) 1990년대 후반부터 북한의 협동농장에서는 관리위원장, 작업반장, 분조장 등이 기존에 당이 임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민주적인 자유선거를 통해 선출됐다는
한 탈북자의 증언을 소개하였다
. 이 사실은 필자가 만난 황해북도 수안군 협동농장의 작업반장 출신인
J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기존에는 리당비서가 작업반장을 선출하고 작업반장이 분조장을 선출하였는데, 1998년에서
2000년 시기에 민주선거가 실시되어 작업반원들이 모여 작업반장을 선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이러한 선출방식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돌연 중단되었다고 한다. 농촌간부를 직접 선거로 뽑는 방식을 처음 도입한 시기는 탈북자들의 증언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선거 분위기가 2~3년 후에는 시들해졌다는 의견에는 대체로 일치한다.[28]

2) 새로운 분조관리제의 도입
대규모 기아가 발생할 만큼 식량부족이 심각해지자 북한당국은
1996년 기존과 다른 새로운 분조관리제를 도입하였다. 북한 문헌이나 국내 북한연구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명칭은 새로운 분조관리제
이나 일부 농장원 출신 탈북자들은 분조생산평가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 이전의 분조관리제는 1965년에 처음 도입되었다.
이 시기는 제1 5개년경제계획의 결과 도시와
농촌
, 공업과 농업 간의 불균형이 심각하여 농촌과 농업에 대한 투자 증대와 물질적 인센티브의 확대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이다
.
분조관리제가 처음 명칭은 분조도급제였다.
분조도급제는 강원도 회양군 포천협동농장에서 처음 구상되었다. 당시 협동농장의 한개
작업반은
140여명, 분조는 27명으로 조직되어 있어 노동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고 농민들의 주인의식도 현저히 부족한 현상들이 만연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본 생산단위를 종래의 작업반에서 분조로 낮추는 분조도급제가 도입된 것이다. 포천협동농장 등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해본 결과 그 성과가 좋게 나오자 1965
11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공식적으로 모든 협동농장들에 분조도급제를 도입하는 방침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966년부터 전국적으로 분조도급제가 실시되었다.
분조도급제에 대한 상세한 이론적 설명은 경제전문 학술지『경제연구』(1966 2)에 실린 논문「분조 도급제의 도입과 협동 농장
관리 운영의 개선」에 잘 나타나있다
. 이 논문은 분조도급제의 본질적인 필요성이 분조 단위로 토지와 로력을 고착시키고 분배를 그 토지에서의
생산 결과와 직접 결부시키는 데 있다
[29]고 언급되어 있다. 초기
도입된 분조도급제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바로 생산 및 분배 단위를 소규모화해 공동노동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확대하여 생산의욕을 높이는데 있었다
.
당시 언론 매체에서도 농장원들이 분조도급제에 고무되어 높은 수확고를 올렸다는 소식들을 보도하곤 하였다. 한 예로, 함경남도 북청군의 한 협동농장에서는 분조도급제가 도입된 이후 농장원의 생산의욕이
크게 높아져 벼와 옥수수 모두 단위평균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고 보도되었다
[30].
그런데 분조도급제 용어는 1968년경에 갑자기 분조관리제로 바뀌게 되었다. 1968 2월에 개최된 전국농업일군대회의 연설에서 김일성은 분조관리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1967 1 21일자 신문기사에서 여전히
분조도급제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분조관리제로의 명칭 변경은
1968 2월 전국농업대회가 개최되기 이전에 당 내부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단순히 명칭만
변경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도 변화가 있었다
. 농업대회에서 김일성은 1967년도 농업생산 증대에 크게 만족하면서 농사가 잘 될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로서 분조관리제를 실시한 결과라고 언급하면서도 분조관리제에
대한 간부들의 잘못된 인식을 지적했다
.

무엇보다도먼저 분조관리제의 우월성에 대한 똑똑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동무들은 분조관리제를 받아들이니 농장원들의 사업분공이 명백하여 일에서
책임성이 높아지고 건달군이 없어져서 좋다고 하는데 그렇게 단순하계 보아서는 안됩니다
. 또 어떤 동무들은 분조관리제를
물질적자극을 강화하는 수단으로만 보고있는데 그것도 잘못입니다
. 분조관리제의 중요한 우월성은 그것이 농장원들을
공산주의사상으로 교양하며 그들속에서 집단주의정신을 키우는 훌륭한 형태라는데 있습니다
. (중략)
물론 분조관리제가 생산에 대한 물질적관심을 높이는 역할도 일정하게 놀지마는 그의 보다 본질적인 역할은 농민들의 집단생활을
강화할수 있게 하는것입니다
.[31]

위 인용문에서 김일성은 분조관리제가 분명히 농장원의
생산의욕을 높이고 건달군 즉 무임승차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효과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농장원이 공동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여
결과적으로 집단주의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 결국 김일성은 분조관리제의 경제적 기능보다 정치적
기능을 강화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
농업대회에서 김일성이 언급한 분조관리제 운영에서의
개선점은 첫째 분조 규모를
15~20명 정도로 적정화고, 둘째,
분조장의 선발에서 계급성 기준을 강화하며, 셋째, 분조원들의 유일사상교양사업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래의 설명과 달리 분조관리제의 계급성과
사상성 문제 강조된 데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1967 5월 제4기 제15차 전원회의 사건을 계기로 수정주의 노선은
전면적으로 폐기되고 대신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이 강조되었다
. 이러한 정세 변화로 인해 물질적 유인을
강조하는 종래의 분조도급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 그리하여 정신적 요인을 강조하는 분조관리제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분조관리제로 변경된
1968년 이후 농업생산력 수준이 다시 저하되기 시작했으며, 이에 김일성은 오히려
물질적 자극의 이용에 대해 간부들이 너무 경직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 김일성은
1973 9월 당중앙위 제5기 제7차 전원회의에서 간부들에게 물질적 자극을 좀 더 활용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는 한동안 가치법칙을 잘못 적용하기 때문에 되게 비판하였더니
독립채산제
, 작업반도급제, 분조도급제가 다 없어졌다[32](강조-필자)고 언급하면서 물질적 자극을 무시하는 분배 관행을 지적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 역사는 분조관리제가
분명히 집단농업에서 농장원의 중요한 물질적 유인제의 하나로서 단순히 분조가 노동단위로서가 아니라 생산과 분배의 기본단위로서의 기능이 모두 보장됐을
때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다
.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1996년 이후 새롭게
도입된 분조관리제에서 다시 확인해주었다
.
 1996년에 수정된 분조관리제는 첫째, 분조의 규모를 종래의 10~25명에서 7~8명으로 축소하고,
둘째, 분조의 생산계획 목표를 농민들이 현실적으로 초과달성할 수 있도록 낮추며[33], 셋째, 초과한 몫은
분조성원들이 직접 나누거나 팔거나 하는 등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농민의 생산의욕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 수정된 분조관리제에서 분조는 농장의 기본 생산단위이자 분배단위이며 내부경영단위로 규정되었다. , 분조는 계획, 생산, 분배의 재량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는 작업반이 농업경영비용(토지사용료, 비료, 디젤유, 농약, 종자 등으로 지출되는 비용)을 책임졌지만 이제
분조로 이행된 것이다
.[34] 그리고 1968년경에
폐기되었던
분조도급제의 명칭도 부활되었다.[35] 그리고 분조가 내부경영단위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작업반의 기능은
이전에 비해 크게 위축되고 결국
1998년에 제정된 농업법에서는 작업반우대제가 폐지되었다.[36]
그러나 농민들은 처음에는 새로운 분조관리제를 환영했다가
나중에는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 그 이유는 첫째, 생산계획이 지나치게
높아서 초과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 둘째, 땅을 제외한 모든 영농물자를
국가가 독점하고 있고 사적 시장도 발달하지 않아 분조가 원활하게 영농물자를 조달할 수 없었다
. 셋째,
농장에서 분배받는 수입보다 사경제 활동을 통해 얻는 수입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분조의 노동 부담이 커지면서 사경제 부문에 투여할 노동시간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독립경영의 경험 미숙에서 오는 분조 내 갈등의 증가 때문이다.
이외에도 새로운 분조관리제는 포전담당제라는 변형된 형태로 운영되기도 한다. 북측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포전담당제가 1994년부터
일부 협동농장에서 시범적으로 도입되고 있는데
, 협동농장에 분조를 더 작은 단위(가족이나 친척 등으로 구성 가능)로 분할하여 더 적은 인원들에게 포전을 맡아 생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포전담당제는 과거에도
실시 된 적이 있었지만 분조의 책임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현실 실정에 맞게 변화된 형태로 최근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
.[37]

2. 농민 사경제의 제도화와 농촌 권력관계의 변화

1) 농민 사경제의 확대와 합법화
1990년대 이후 농장의 식량분배량이 급격히 줄어들어지자
사경지의 규모가 크게 늘었다
. 여기에는 개인부업지, 뙈기밭, 부대기, 소토지 등의
용어들로 불리는 불법적으로 개인이 개간한 경지들이 포함된다
[38]. 이 경지들은 대체로 집근처의 야산이나 빈땅을 일군 것이다.
필자가 만난 농장원 출신의 탈북자들은 그들이 일반 농장원이든 간부이든 모두 규정된 규모 이외에 별도의 사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 함경북도 새별군의 한 협동농장 농장원이었던 K씨의 경우 텃밭과
야산의 뙈기밭
, 농장에서 떼어준 소토지를 모두 합하여 120평 정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 청진시 청암구역의 한 협동농장 농장원 출신인 L씨의
경우에는
300평을, 함경북도 온성군의 한 협동농장에서 농장원었던
A씨의 경우도 200평의 사경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 북한 당국은 2004년에는 식량난 해소를 위해 사경지를 400평까지 허용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한국농촌공사, 2006: 51). 이렇게 농촌에 사경지가 확대된 것은 식량난에 직면하여 농민들이 식량자원을 자구적으로 조달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개간했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 역시 늘어나는 농민들의 사경지에 대해 강력하게 규제하지 않았다. 식량부족으로
고조된 불만을 달래고 체제 위기의 관리 차원에서 용인하였던 것이다
.
그럼 사경지에서 획득되는 생산물의 양은 어느 정도나
될까
. 함경북도 온성군의 한 협동농장의 농장원이었던 C씨는
25평 정도의 텃밭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감자, 강냉이, 줄당콩, 호박, 마늘, , 고추 등을 심었고 일년 식량을 대부분 텃밭의
생산물로 충당했다고 한다
. 이렇게 텃밭에서 얻은 농산물의 생산량은 동일 면적에서 집체농업보다
10배 가까이 많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C씨는
국가 소속의 소
1마리, 돼지 2마리(1마리는 의무수매용, 다른 1마리는 시장 판매용), 1마리(새끼 7마리 추가 포함), 20마리(닭알 획득용), 1마리(이불재료로 양털 획득 목적), 토끼
30마리(주로 토끼털 가죽 수매용으로 기르며 수매된 토끼가죽들은 군복 제작에 쓰이기
때문에 대부분 군부대로 보내진다
), 염소 1마리(염소젖 조달용) 등을 키웠다. 농가의 축산은 자가 소비와
현금획득을 위한 시장 판매
, 그리고 국가 의무수매과제 수행 등의 다목적 기능을 수행한다.
위와 같은 탈북자 C씨의 증언 내용은 이 시기의 북한의 문헌에서 묘사된 사경지 실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아래의 인용문에서 묘사된
1990년대의 텃밭 경작 실태는 지난 1960년대의 경우와 큰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텃밭에 강냉이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원래 텃밭에는 강냉이와 같은 식량작물을 심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서 식량부족이 심각해지자 북한당국도 텃밭에 강냉이를 심을 수 있게 허용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북한 문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삼십평되는 텃밭이지만 갖가지 남새가 강냉이대들을
위장병처럼 세우고 제딴의 모습을 활짝 드러내고 있었다
. 덩실한 오간집 둘레를 돌아가면서 빈땅이 있을세라 일년초도 심었고 줄당콩도 박아넣었다. 벌방인 마을주변엔 어느곳 할것없이 낟알종자를 받았다.
이젠 집마당도 사람 다닐 길에 구멍탄 잡을 자리나 내놓고는 고추대를 빼곡히 들여세웠다. 그래서 염소들을 먹이는 일도 집집에서 다 먹이자면 풀판이 모자랐다.[39](강조-필자)

한편 북한 당국은 사경지의 확대를 금지 또는 억압하는
대신 제도화하여 관리하는 쪽을 선택하였다
. 2002 7월에 나온 당의
53호 문헌으로 불리는 토지사용료납부규정은 국가 토지를 가지고 생산한 농업생산물의 일부를 사용료
형식으로 국가에 의무 납부하도록 할 것
(1), 농업생산물의 일부를 현금으로 국가에 납부하도록 할 것(2), 토지를 이용하여 농산물을 생산하는 모든 기관, 기업소, 단체, 군부대, 개인에게 적용하는
(3)으로 되어 있다.
이 규정에 적용되는 토지에는 개인이 경작하는 텃밭과 부대기밭 등도 포함되어 있다. 단 농민세대의 30평까지의 텃밭, 농민세대를 제외한 세대의
주택 주변에 있는
10평의 텃밭 등에 대해서는 사용료를 적용하지 않고 초과분에 한해서 토지사용료를 부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광민, 2005: 253-4).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980년대 말경에 북한 당국이 대대적으로 농촌의 텃밭 측정을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필자가 인터뷰한
함경북도 길주군의 한 협동농장의 분조장 출신인
L씨에 설명에 의하면, 이 시기 정부는 30평을 기준으로 미만인 농가에는 더 많은 텃밭을 확보해주고,
30평을 초과한 농가는 식량분배에서 초과면적의 생산량만큼을 공제하는 방법과 울타리를 줄이는 방법 중에서 택일을 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 대부분의 농가는 울타리를 줄이는 쪽을 선택하였다. 이 시기에
텃밭 조정을 한 이유는 공식적인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으며 이 시기부터 이미 농촌의 식량사정이 어려워져 농민에게 식량을 보충해주기 위함과 새로
농촌에 전입해 온 인구나 신혼집 등에 텃밭을 확보해 주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L씨는 해석했다.
그렇다면 현재 농촌에서 사경지가 농업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일까
? 김완배(2001)는 공식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
집단농업을 벗어난 경작형태로 연간 수십만톤에 달하는 곡물이 생산되고 있으며
, 비공식적 경작형태의 규모는
1995년말에 총10만정보(전체 경작지의
5%)에 달하였으며, 여기서 수확하는 곡물량이 적게는 30만톤에서 많게는 100만톤까지 가능하다고 추정했다.
정정길
·전창곤(1999)은 비공식 농업생산이 가능한 경작지 면적을 약7~75,000ha
정도로 추정했으며, 이는 북한 전체 옥수수 식부면적의 약 15%가 되는 면적에 해당한다고 분석했다. 남성욱(2004)과 정광민(2005)은 북한농업위원회가 FAO에 제출한
자료에 근거하여 북한의 식량총생산에서 사적 생산량의 비중이
1996 200만톤 중 44만톤(22.0%), 1997
214만톤 중 68만톤(31.8%)에 이르렀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
하지만 사경지의 규모나 생산량의 비중이 얼마를 차지하던
간에 사경제의 실태가 집단농업 체제를 해체시키거나 다른 구조로 변형시킬 만큼 도전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아직 어렵다
.
농민 사경제의 합법화와 시장에서의 잉여농산물에 대한 규제 완화 등은 식량난과 생활고에 대한 농민의 불만을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농촌의 유휴자원과 유휴노동력을 동원하는 사회경제적 기능과 집단농업으로부터의 이탈 방지에 유인
(incentive)으로 작용한다.

2) 농촌 권력관계의 변화
식량난의 발생과 사경제의 발달은 농촌의 권력관계를
변화시키고 있다
. 작업반장은 농촌간부 중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곡물처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리위원장은 형식적으로는 작업반장보다
높은 지위에 있지만 실권은 없어
, 식량부족이 심할 때는 관리위원장마저 작업반장의 눈치를 보게 된다.
또 농촌 간부는 국가에 납부해야 할 세금의 일부 자금을 장사 수완이 좋은 농장원들로부터 장사의 여건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조달받기도 한다
. 여기서 장사의 여건이란 농장일에 참여하지 않고도 장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는 것이다.
농촌 간부는 국가로부터 농장의 생산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동시에 농민으로부터
관료주의적 간부라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농민대중과 인격적
관계를 적절하게 형성
 · 활용해야
한다
[40]. 농촌 간부와 농민 간에 공모 관계는 작업반장이나 분조장이
부족한 영농물자를 구입하고
, 모내기철·가을철에 나온 노력지원자에게 간식이나 술 등을 대접하며, 모내기·가을·풀베기 등 일이 고된 시기에 농장원들의 친목과 결속을
다지기 위한 자리에 쓸 음식과 술 등을 마련하는데 사용하기 위해 농장의 수확물 일부를 숨겨놓는 것을 농장원들이 암묵적으로 용인하는데서 발생한다
[41].
또 농촌의 초급간부는 농장원들이 장사를 하거나 텃밭이나
뙈기밭을 경작할 기회를 얻는 데 협조하며
, 그들이 농장의 영농물자를 조금씩 빼내는 행위에도 눈감아 준다.
작업반장과 분조장은 그들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라는 의식이 더 강하다. , 농촌간부와 농장원 간에
생존의 도덕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농촌의 초급간부와 농민 간의 인격적 관계는 간부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농사를 망쳤을지라도 농장원들은 자신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초급 간부들이 교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한편 식량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똑같은 작업반장과 분조장이라 할지라도 지역마다 그 권력의 크기가 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평남 문덕군 출신이며 남포시에서 동의사(한의사)로 근무했던 C(, 30대중반)에 의하면, 함경도, 양강도, 자강도와 같이 식량 자원이 적은 곳에서는 작업반장이나 분조장은 간부로서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 그러나 평남도와 황해도와 같이 곡물이 많이 나오는 지역에서는 생산물을 직접 다루는 작업반장과 분조장의
힘이 막강하다는 것이다
. 또한 분조장과 반장이 공모하면 생산된 수확물을 얼마든지 빼 돌릴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C씨는 농촌의 작업반장은 거의 지주나 다름없다고 표현하였다. 심지어 직급상으로는 상급 간부인 리의 농근맹위원장조차도 먹을 게 없어서 일개 분조장에게 찾아가 쌀을 꾸어달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42].


VI. 결론: 몇 가지의 논쟁점

다른 현실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은 사회주의 초기 산업화 발전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농촌에 대한 적극적인 개조작업을 착수하였다
. 농업집단화에 앞서 실시된 토지개혁을 통해 당과 국가는 농촌지역에서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농업협동화는 농촌경제를 계획경제로 포섭할 수 있게 하였으며, 산업화의 초기자본을
확보하고
, 당과 국가의 통제가 농촌사회의 기층에까지 관철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농업생산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추진된 국가 주도의 농업기술 근대화 사업은 한편으로 농업생산력을 크게 제고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농업 생산요소를 독점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정부 이외에
농업의 주요 생산요소를 획득할 수 있는 경로는 거의 발달하지 못했으며
, 이는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농업개혁을
이끌 수 없는 구조적 한계와도 연결된다
.
북한은 농장의 규모
확대
, 농업부문 조직과 기구의 중앙집권화, 농업기술의 근대화,
농업투입재의 국가 독점공급, 농촌인프라 구축에 대한 국가투자 확대 등을 통해 국가중심적
집단농업 체계의 확립과 농업생산력의 빠른 성장을 이루어냈다
. 하지만 이러한 성과의 이면에는 농민 사경제가
활용되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 농민 사경제는
집단농업과 대립적인 관계라기보다는 상보적 또는 상호의존적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 과거와 마찬가지로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에도 이 관계 성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농민 사경제의 허용은 집단농장에 대한 농민의 노동참여를 이끌어내고 농민의 농촌이탈을 막는
주요 수단으로 작용한다
. 또 농장원은 사경제에
필요한 농업생산요소의 일부분을 농장에서 얻으며
, 농장에서 탈퇴하지 않는 한 비록 소규모이지만 이용
·매매·상속이 모두
가능한 개인소유의 땅을 보유할 수 있다
. 이밖에도 사경제부문은 농가의 부식물 자체해결, 유휴노동력 활용,  도농 간의 소득차이 조정, 불안정한 집단농업 생산의 위기 완충이라는 측면에서 사회적 ·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북한 당국은 사경제부문을 의도적으로 활용하였다.
마지막으로 사경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논쟁이 될 수
있는 점을 제시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첫 번째의 논쟁점은 식량난 이후 북한의 농촌 소득 수준이
도시 주민의 소득 수준보다 높을 뿐만 아니라 도시에 비해 식량난에 덜 시달리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 기근 초기에는 농촌이 더 유리한 식량 인타이틀먼트(entitlement)를 가질 수 있지만
기근이 만성적이고 농업생산 여건이 개선되지 않은 상태에서 식량의 유통에서 시장의 비중이 커질수록 식량 인타이틀먼트는 시장접근성이 좋은 도시민에게
유리하게 된다
. 농민은 도시민에 비해 훨씬 높은 강도의 노동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 참여할 기회를
제한받는다
. 그러나 도시민은 공장의 가동률이 낮기 때문에 쉽게 시장에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시장에 대한 접근성의 차이 때문에 소득 면에서도 도시민은 농민보다 더 유리한 지위에 있다.
두 번째 논쟁점은 첫 번째 논쟁점과도 연결되는데 북한
민둥산의 주요 범인은 농민이 아니라 도시민이라는 점이다
. 물론 농민들도 땔감이나 농자재(특히, 후림채)를 마련하기 위해 산림훼손을 하고 있지만
대대적으로 산을 밭으로 만들어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민이 아니라 인근 도시민들이다
. 공장이 멈춘 이후 공장
노동자들 또는 도시민들은 개인적으로 식량을 확보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할 수 있게 되었다
. 도시민들은
개별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인근 또는 멀리 있는 야산에까지 진출하여 적극적으로 농사를 짓는다
. 반면,
농민들은 농장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에 야산을 개간할 시간이 없다. 때로 일부 농장원들은
오히려 도시민들에게 곡식을 빌려오기까지 한다
. 농민들 중에서 야산이나 소토지 농사를 하는 사람은 주로 국가보상
대상자나 연로보장자들로 농장일에 제외된 인구이다
. 도시민들은 수확 시기가 되면 야산에 장기간 직접 거주하면서
자기가 가꾼 농산물을 지키기도 한다
.
마지막 논쟁점은 사경제에 획득된 농산물의 주요 소비처가
시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 시장에서 거래되는 곡식의 공급원 구성은 농장에서 나온 것이 50% 정도이고, 나머지 50%는 중국 수입 곡물,
군대에서 나온 곡물, 국외 지원물자 등이다. 농장에서 나온 곡물의 경우 대부분은 농장에서 비자금 조성을 위해 몰래 내다 파는 곡물이거나 대여해줬다가 상환된 잉여곡물이거나 결혼
준비를 위해 많은 현금이 필요한 농장원이 어쩔 수 없이 시장에 내놓은 곡물 등이 주요 출처이다
. 개별 주민들이
텃밭이나 야산
, 소토지 등 사경지에서 생산한 곡물은 대부분이 자가소비용이고 시장에는 매우 적은 부분만이 유통된다.
이미 북한의 식량부족은 구조적인 요인으로 인해 만성화되어
있으며 전반적인 경제회복이 없이는 앞으로도 장기간 식량의 대외의존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 향후 북한경제의
회복 속도와 경제계획은 외부의 자본과 기술의 유입에 따라 상당히 영향을 받을 것이다
. 이 점은 농업부문에서도
마찬가지이며
, 징후는 이미 지난 10여 년 동안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북한의 농업은 점차 외부로부터 많은 양의 생산요소를 공급받고 있으며, 농업개발지원
및 농업교류협력을 계기로 개방화에 직면해 있다
. 따라서 변화된 환경 속에서 사회주의 집단농업체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가 현재 북한농업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고민이자 넘어야할 과제일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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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웅전의 소설『열매는 봄날에』에서는 총체적인 사회적 위기로 나타난 고난의 행군이 발생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으로서 식량 부족으로
제기하고 있다
. ...사실 지금 우리는 식량 때문에 고난의 행군을 합니다.
식량 때문에 로동자, 사무원들이 난관을 겪는 것은 말할것두 없구 어떤 가정엔 가슴
아픈 상실도 있단 말입니다
. 어떻게 하나 농사를 잘 지어서 하루빨리 고난의 행군을 끝내야지 이 간고한 행군을 계속 끌고 갈수야 없지
않습니까
박웅전,
2003,『열매는 봄날에』, 문학예술출판사, p.90.

[2]  506만톤의 수치는 조곡 단위이며, 정곡으로 환산할 때 423만톤이다. 506만톤에는 집단농업의
곡물생산량
495만톤 외에도 텃밭이나 비탈지(sloping land) 등 사경지에서 생산된 약 10만톤의 곡물생산량이 포함된 것이다.
FAO/WFP, 2004, "Special Report: FAO/WFP Crop and Food Supply Assessment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p.2.

[3]
2007년 미국 CIA의 발표에 의하면 2005년 현재 북한의 GNP에서 농업부문의 비중은 30%, 농업부문의 노동력 비중은 36%를 차지하였다. CIA, "The
World Factbook 2007", KDI 북한경제리뷰』(2007.2),
p.26.

[4]
『조선중앙년감』(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65), p.479.

[5]
오대호, 1989, 『협동농장관리운영경험』, 사회과학출판사,  p.21-23.

[6]
재미있는 사실은 연료가 정상적으로 공급되던 1980년대까지는 모든 농기계가 리에
직속되어 있었으나
, 1990년대 들어 연료가 부족해지면서 리에는 보통 2대의 트랙터와 1대의 화물차만이 직속되어 있고, 나머지
트랙터들은 작업반에
1대씩 직속되어 연료와 부품을 자체로 조달하게 되었다. 따라서 협동농장의 농기계작업반은 유명무실화되고 수리분조는 오히려 기능이 강화되었다.

[7]
대개 남자의 경우 35세 이전까지는 청년동맹에서 조직활동을 하다가 이후에는 농근맹에서
활동하게 되며 여자의 경우도 젊었을 때는 청년동맹 활동을 하다가 결혼 후에는 농근맹으로
전맹된다. 농장원이 아닌
농촌 여성
(흔히 가두여성, 노인,
보육원 등이 포함)의 경우는 여맹에 소속되어 활동을 하기도 하나 소수에 불과하다.
당원인 경우는 별도의 당조직 활동을 하게 된다. 각 조직에서는 주로 생활총화와 수령의
교시와 말씀 등의 강연과 학습
, 그리고 당정책의 해설선전 등이 진행되며, 때로는 갖가지 캠페인이나 동원사업에 대한 선전과 참여 독려가 이루어진다.

[8]
1959 1 5일 전국농업조합대회에서 농업협동조합의
새 기준규약이 채택되기 이전의 규약에서는 농촌의 중요한 생산수단의 하나인 소의 개인 사육이 허용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 홍달선, 「협동적 소유의 전 인민적 소유에로의 줄기찬 지향」, 『경제연구』, 1959 1,
p.78.

[9]
공식적으로 30평은 일반 지대의 농가에 허용된 규모이고, 50평은 산간지대의 농가에 허용된 규모이다. 이처럼 북한당국은 지대간 발생하는 농가의 소득차이를
해소하는데 사경지를 활용하고 있다
. 최창진, 1993,『농촌조세문제의
빛나는 해결』
, 사회과학출판사, p.334.

[10]
김성보, 2000,『남북한 경제구조의 기원과 전개』, 역사비평사, p.331.

[11]
홍달선, 1959, 앞의 글, p.78.

[12]
김일성, 1969,『사회주의경제의 몇 가지 리론문제에 대하여』, 조선로동당출판사, pp.24-25.

[13]
<조선중앙년감>의 통계자료(1964)에 의하면, 소매 상품 유통액에서 농민시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에 0.8%, 1963년에는 0.6%를 차지하였다.

[14]
김원삼, 1961,「현 시기 농민시장의 의의와 역할」, 『경제연구』(1961 2), pp.
56~61.

[15]
김일성, 1982,「당사업을 강화하여 나라의 살림살이를 알뜰하게 꾸릴 데 대하여」,
『김일성저작집』제20, 조선로동당출판사,
pp.129-130.

[16]
텃밭 경작 및 가내축산 등 농민의 개인부업활동은 단속의 대상이 아니라 장려의 대상이고 근면한 농민으로 표상으로서 인식되었다는
사실은 북한문헌에서 종종 발견된다
. 성강군 동산리농근맹위원회 제6분초급단체에는 28세대가
살고있는데
19마리의 부림소와 11마리의 송아지를 젖혀놓고라도 집집마다
평균 돼지는
2.4마리, 닭은 열 마리, 그밖에도 토끼, 염소들을 많이 기르고있다. 년초에 분초급단체에서는
농장원들이 텃밭을 잘 다루어 남새를 사철 푸짐히 먹도록 하는것과 함께 집짐승을 많이 길러 생활을 더욱 유족하게 꾸리도록 하는데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 농업근로자(1966 9 14), 「서로 방법을 대주고 도와주어 집짐승을 많이 기른다-성강군 동산리농근맹위원회 제6분초급단체」

[17]
FAO/WFP의 특별보고서(2004)에서도 농가의 도시 친척에 대한 식량 및 부식물의
지원은 도시민의 생존전략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분석하였다
. 보고서는 면접한 도시 농가의
40% 가량이 농촌의 친척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밝혔으며, 필자가 면접한 도시
거주 탈북자
30명 가운데 10명 정도가 1990년대에 농촌의 친척으로부터 식량과 부식물을 얻었다고 응답한 바 있다.

[18]
농업근로자(1966 7
5일자), 「실농군의 텃밭농사」를 참조.

[19]
1980년대 북한농촌을 방문했던 여러 외국인들을 통해 텃밭이나 농민시장이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대학교의 교수였던 이채진은 1983년 방북 후 보고서에서
1980년 매 농가는 연평균 1,700원을 버는데 당시 사무직 노동자나 공업노동자
등 도시 가구의 연평균소득이 약
2,160원 정도라는 점에서 약간 적지만 사경제를 통해서 얻는 추가 농산물과
현금을 합하면
1,700원보다 더 많아 도-농 간의 소득차이는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주장은 1986년에 방북한 일본인 학자 마츠모또
지로와
1989년에 방북 취재한 뉴욕타임즈의 한동일 기자가 쓴 여행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츠모또는 농가의 연간 총소득 중 1/3 정도를 사경제를 통해서 획득한다고 설명했다.

[20]
Nolan, Peter, The Political Economy of Collective Farms: An Analysis of
China's Post-Mao Rural Reforms
(Cambridge: Polity Press, 1988), p.58.

[21]
Hedlund, Stefan, Private Agriculture in the Soviet Union(London; New
Jersey: Routledge, 1989), p.84.

[22]
김정일, 2000a, 「경제사업을 개선하는데서 나서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김정일 선집』 제13, 조선로동당출판사,
pp.163-4.

[23]
김정일, 2000b, 「자강도의 모범을 따라 경제사업과 인민생활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
, 『김정일 선집』제14, 조선로동당출판사, pp.406-7.

[24]
김정일, 2005,「대규모의 토지정리와 관개건설의 성고에 토대하여 농업생산에서 새로운
앙양을 일으키자」
, 『김정일선집』제15, 조선로동당출판사, p.345.

[25]
서재영 외,  2005,『우리 당의 선군시대 경제사상해설』, 조선로동당출판사, p.128.

[26]
리남선, 2001, 앞의 글, p.37. 실제로
FAO/WFP 보고서에 의하면 1996년부터 1997 5월까지 중앙과 지방정부 차원에서 수입한 곡물의 총규모는 약 33만톤인데, 이 중 중앙정부가 수입한 곡물량은 64천톤인데 비해, 지방정부가 수입한 곡물량은 266천톤에 이른다. 이 상업적인 곡물수입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광물, 폐철, 목재 등의 현물거래로 이루어졌다. FAO/WFP,
"FAO/WFP Crop and Food Supply Assessment Mission to the DPRK,"
Special Alert(No.275, 1997.6.3); 정세진, 2000, 앞의
, p.157. 참조

[27]
정미는 농업분야에서 쓰는 부피의 단위로서 1정미는 논 1정보( 3,000)에 해당하는 넓이에 높이 1미터인 공간에 채울 수 있는 물의 양이다.

[28]
필자가 인터뷰한 함경북도 길주군의 한 협동농장의 분조장 출신 L씨는 민주선거가
1994년에 처음 실시되었다고 증언했다.

[29]
김철제, 1966,「분조 도급제의 도입과 협동 농장 관리 운영의 개선」,
『경제연구』(1966.2), p.1.

[30]
농근맹 중앙위원회 기관지 농업근로자(1967.1.21)에서는 「농사를 잘 지은 <비결>」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북청군
문동협동농장에서는 지난해 분조도급제를 잘 운영하여 논벼 정당평균
1, 옥수수 정당평균 700키로그람씩 더거두었다. 이곳 농장원들의
말에 의하면 알곡소출을 높인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바로 분조도급제 실시에 있다는 것이다
. 실로 분조도급제는
농장원들의 생산의욕을 부쩍 높여주었다
라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사내용에 비추어 봤을 때 당시 분조도급제가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높이는데 크게 효과를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

[31]
김일성, 1983,「분조관리제를 정확히 실시하며 농업생산에서 새로운 앙양을 일으킬데
대하여」
,『김일성저작집』제22, 조선로동당출판사, pp.22-23.

[32]
조선로동당출판사, 1999,『위대한 령도자 김일성동지의 불멸의 혁명업적
15: 사회주의경제관리문제의 빛나는 해결』, 조선로동당출판사,
p.249.

[33]
1996년의 생산목표량은 1993~1995 3년간 평균 수확고와 1993년 이전 10년간 평균 수확고를
합하여 나눈 평균치로 정해졌다
. 이러한 정산 기준은 비정상적인 농업생산 시기와 정상적인 농업생산 시기의 생산목표량을
절충한 것이다
.

[34]
정창현, 2006, 『북한사회 깊이 읽기』, 민속원, p.161.

[35]
박재성, 2004, 「분조가 기본분배단위로 기능하는 것은 현 시기 농업생산을 빨리
발전시키기 위한 중요한 방도」
, 『경제연구』(2004
2), pp.26-28.

[36]
작업반우대제는 1960년에 청산협동농장에 처음 도입되었다. 작업반우대제는 기존의 평균주의적 분배방식의 관행을 없애고 농민의 집단적 생산의욕을 높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큰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우대 생산기준은 국가계획에 비해 10%정도 낮게 설정되며 우대기준을 초과생산한 생산물 전량을 작업반성원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농경제학자인 홍달선은 작업반우대제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작업반독립채산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나 결국 관철되지 못했다.
작업반우대제가 도입될 경우 작업반 간 소득격차로 인해 위화감과 결속력 약화가 발생하여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집단농업제도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구체적인 내용은 정은미, 2007,『북한의 국가중심적 집단농업과 농민 사경제에 관게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p.122-124를 참조할 것

[37]  포전담당제가 과거에도
실시된 적이 있었다는 북측 관계자의 설명은
1990년에 탈북한 북한 농업과학원 연구사 출신인 리민복씨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 리민복씨의 증언에 의하면 1985년에 농장포전담당제가 실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공식적인 지침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일부 당간부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험도입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김일성에 의해 자본주의방식이라는 비판을 받고 무산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강성산, 서관히, 김환 등이 좌천되었다고 리민복씨는 전하고 있다. 리민복, 1996, 「귀순자 쟁점대담(1): 북한의 집단농업
내것도 네것도 아닌 것이 문제」
, 『통일한국』(1996
1월호), pp.39-40.

[38]
이 용어들은 엄밀히 말하면 약간씩 의미가 다르다. 개인 부업지라는
것은 개인집이 소유하고 있는 텃밭을 비롯하여 개인적으로 개간한 토지를 통칭한다
. 뙈기밭과 부대기는 흔히 집
근처의 야산이나 빈땅을 개인이 비공식적으로 개간하여 경작하고 있는 땅을 말하며
, 소토지는 농장 소유의 농경지
일부를 조금 떼어주어 개별 농민들이 경작하도록 한 준
() 공식적 경작지로서
흔히 농장에서 집체노동을 하기에 적합지 않은 규모나 위치에 있는 자투리 땅을 의미한다
.

[39]
박원초, 1998, 「풀향기」,『조선문학』(1998 3), p.58.

[40]
농장의 간부들은 법(원칙)대로만 해나가자면
작업동원이 잘 안되기 때문에 불법으로 농장원들의 부식물들을 어디선가에서 구해 주는 등의 수완이 좋아야 하고
, 원칙대로 하면 융통성이 없다고 작업반원들이 욕을 많이 한다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리민복(前 북한농업과학원 연구원), 1996,「귀순자 쟁점대담(1): 북한의 집단농업 내것도 네것도 아닌 것이 문제」. 『통일한국』(1996.1),
p.74.

[41]
김경일(前 나진 · 선봉시 종합농장 기동예술선전대원),
1999,「북한의 농장실태와 농민생활: 농사를 짓는데 분조장 역할이 크다」,『통일한국』(1999.8), p.54.

[42]
이러한 현상은 상급기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농촌지역이 많은 군에서는 협동농장경영위원장은
공장
 · 기업소를
책임지고 있는 행정위원장보다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된다
. 왜냐하면 경영위원장은 군에 있는 모든 협동농장들의
생산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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