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March 8, 2019
[01-정책]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의 성격과 전개과정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01-정책]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의 성격과 전개과정 –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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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정책]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의 성격과 전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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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17-03-2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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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의 성격과 전개과정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기획조정실
Ⅰ. 들어가는 말
1995년에 북한의 식량난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6년이 넘게 국제사회가 대규모 지원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식량위기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1999년 이후 최근 2년 간 북한 경제가 플러스 성장을 기록하였다는 발표가 있었다.1) 또한 북한 상주 유엔기구 직원들의 활동과 국내 지원 단체들의 모니터링 방북과정에서 보고 듣게 된 정보들은 북한의 식량난이 완화되고 있다는 판단을 뒷받침해 주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6년, 1997년의 심각한 위기는 일단 벗어난 것으로 평가되었고, 지원 단체들은 북한이 2000년을 경과하면서 식량난을 벗어날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들을 하였다.
그러나 2000년 10월에 FAO와 WFP가 조사한 북한의 작황평가는 이러한 전망들을 무색하게 하였다. 이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1997년 이후 최대의 식량 부족 상황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2) 북한의 작년 농업생산은 유례 없는 가뭄과 두 차례의 태풍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소 위안이 되는 것은 북한이 이미 상당량의 국제 원조를 약속 받았고, 북한과 서방국가와의 국교 수립이 본격화되면서 개별국의 대북 지원도 활발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남한은 작년 겨울에 이미 쌀 30만 톤을 차관 지원하였고, 금년 상반기 중에도 차관 방식의 옥수수 20만 톤, 무상지원 옥수수 10만 톤을 지원하였다. 일본도 금년 중에 50만 톤의 쌀을 지원하며, 이미 지난 1월 말에 1만톤의 쌀을 실은 선박이 북한으로 출발하였다.
그 동안 북한에 지원을 해온 유엔기구 및 국제 NGO, 그리고 남한의 민간단체들은 인도적 지원이 장기화되면서 긴급 구호 차원의 식량지원과 함께, 보다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북한의 역량 구축을 위한 지원사업을 병행 추진하는 것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역량구축 지원사업은 주로 농업 및 보건의료 분야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Ⅱ.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의 성격
분단 50년간 남북관계는 당국간 대화와 접촉만 존재했고, 그마저도 정치․군사적 대립을 계속해왔다. 반면 민간 차원의 대화와 교류는 남북 당국의 통제 아래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졌고, 이를 벗어난 대북 접촉은 실정법 위반으로 처벌되었다. 남북의 군사적 대치상황에서 북한은 단일 민족국가를 이루는데 협력해야 할 상대방이면서 또한 주적인 것이다. 일반 국민의 안보 불안감, 낮은 대북 관용도, 북한에 대한 불신은 남북관계의 모든 영역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판단하게 만든다. 남북관계의 지나친, 아니 절대적일 정도로 정치화되어 있는 상황이 대북 인도적 지원문제에 대한 첨예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초기에 정부는 대북지원을 정치적 영역에서 고도의 정책적 판단이 요구되는 사안으로 인식하였고, 이 문제에 대한 민간의 개입은 정부가 허용하는 범주 내에 머무르기를 원했다. 남한 사회의 일부 계층에게는 인도적인 차원일지라도 북한을 돕는 활동은 이적행위, 무책임한 행위, 철없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반해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을 전개해 온 주체들은 이 활동을 인도주의 운동인 동시에 평화운동이고 통일운동으로 인식하였는 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
첫째,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인도주의 운동이라는 것이다.
대북지원은 기아와 질병, 추위에 고통받으며 죽어 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인간의 양심에 기초한 문제라는 것이다. 종교계가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의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는 것은 대북지원이 인도주의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또한 운동의 참여자들은 이념적 잣대에 의해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이 용공운동이나 반공운동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하고, 인도주의의 원칙인 정치적 중립성, 형평성, 독립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인도주의를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이 중심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첨예한 남북대치 상황에서도 운동이 발전할 수 있었다.
둘째,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평화운동이라는 것이다.
분단 50년간 상대방을 증오하고 원수로 생각해 온 남과 북이 도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지난날의 대립과 증오를 청산하고 민족화해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보았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공존을 이루기 위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이 시대 평화운동의 중심적 실천과제이며,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화약고인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시켜 동북아시아의 평화 증진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셋째,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통일운동이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분단을 극복하여 단일민족 국가로 통일하는 과정은 남북간의 합의에 의해야 하며, 북한의 급작스런 붕괴나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남북합의에 의한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 꼭 있어야 할 운동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성장 발전하면서 민족운동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되었다. 통일운동을 중심으로 했던 민족운동의 외연이 인도주의 운동과 평화운동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그리고 이 두 운동을 아우르면서 민족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다. 지난 5년간 수백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은 비록 모금규모에 한계가 있어 적시, 적재의 지원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결과 반목으로 얼룩진 분단사에서 보기 드문 민족화해의 큰 물줄기를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다. 이로 인해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Ⅲ.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의 변천과정
북한의 식량난은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인 90년대 들어 악화일로를 걸어왔고, 일부 지역에서는 92년 이전부터 정기적인 식량배급이 중단되었다.4) 북한의 식량위기는 핵 개발 의혹과 관련된 한반도의 긴장고조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이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를 타결하면서 국제적 관심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1995년 9월 북한의 수재로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북한에 대한 국제적인 구호사업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유엔아동기금(UNICEF)은 1990년부터 5년간 매년 100만불의 지원을 실시한 바 있다. 남한 정부도 남북 당국 사이의 합의로 1995년 6월부터 10월까지 총 28차에 걸쳐서 쌀 15만톤을 북한에 무상 지원한 바 있다. 민간에서도 1990년대 초부터 종교계를 중심으로 소규모이지만 북한에 식량지원을 해왔다. 특히 1995년은 어느 때보다도 종교계의 통일운동이 활성화된 시기였고, 남북간 종교계의 교류와 접촉이 활발히 이뤄졌다.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1995년에 북한에서 수재가 일어나자 종교계가 곧바로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내외적으로 북한에 대한 지원활동이 소규모적이고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의 시점은 첫째, 북한이 국제사회에 공식적인 지원을 요청하였고, 둘째, 국제사회가 대북 인도적 지원문제를 공동의 문제로 인식하고 다루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1995년 9월부터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1995년 9월 이후 남한에서 전개된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을 시기적으로 구분할 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기준을 중심으로 하였다. 하나는 이 운동이 국민적 운동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국민적 참여의 정도이고, 다른 하나는 이 운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 사회적 환경, 정책 및 제도의 변화이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의 시기는 (1) 태동기(1995.9~1997.2), (2) 국민적 참여기(1997.3~1998.2), (3) 모색기(1998.3~2000.5) (4) 전환기(2000.6~현재)로 구분할 수 있다.
1. 태동기 (1995.9~1997.2)
이 시기 운동의 주요한 동력은 종교계에서 나왔다.5)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1995년 9월부터 연말까지 교구 산하 175개 본당별로 북한돕기 헌미헌금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로 하였고, 원불교는 9월 11일 북한 수해 구호금 모금을 위한 은행 계좌를 개설하여 국내외 5백여개 교당과 신도들로부터 구호금 접수에 나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9월 14일부터 산하 6개 교단에서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으며, 불교 조계종은 9월 16일 남북 수재민돕기 모금본부를 설치하였다. 10월 20일에는 북한동포돕기를 위한 6대 종단의 연대기구로 「범종단 북한수재민돕기 추진위원회」(이하 범종추)가 결성되었고, 이후에는 범종추를 중심으로 모금캠페인에 들어갔다. 종교계가 활발한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 시기 모금액은 소액에 그쳤다.6)
초기에는 정부의 대북지원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일반 국민의 참여가 매우 저조하였다. 특히 적십자사로의 창구 단일화, 모금운동의 규제 등 여러 장벽을 설치하여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을 전개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은 1996년 9월 18일 발생한 북한의 강릉 잠수함침투사건이다. 이 사건은 북한이 우리의 동포로 도와줘야 한다는 점보다 적인 점을 부각시켜 모금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7) 정부도 잠수함침투사건에 대해 북한의 사과가 없는 한 대북 지원을 중단한다는 강경방침을 발표했다. 1996년 12월 29일 북한 외교부 대변인의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한 사과성명이 발표되기 전까지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꽁꽁 얼어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종교계를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진행되었을 뿐이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각도의 모색이 이뤄졌다.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를 통한 범국민운동 추진의 필요성이 강력하게 제기되면서 제2기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2. 국민적 참여기 (1997.3~1998.2)
민간 차원에서는 강릉 잠수함침투사건 이후 침체되었던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었다. 1997년 3월 10일~12일에 각계 인사 및 해외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북한 식량난에 관한 국제협의회가 개최되어 북한 식량난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연대 필요성 속에서 지원단체간의 협력체계 구축 등이 논의되었다.
이 시기 운동은 두 개의 축이 상호 보완하면서 커다란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전개되었다.
1996년 6월 21일에 종교․시민․사회단체의 지도자들이 참여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6대 종단과 시민․사회단체의 힘을 결집해서 북한동포돕기 범국민캠페인을 추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이후 성장한 노동․청년․여성, 지역 등의 각 사회운동 조직이 결집해서 1997년 4월 10일 창립한 「겨레사랑 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이 벌인 부문별, 지역별 모금운동이다.
먼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중심으로 한 종교계와 시민․사회단체가 1997년 3월 27일 북한동포돕기 옥수수 1만톤 보내기 범국민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이 성공적으로 완료됨에 따라 북한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여름까지 옥수수 10만톤 지원을 목표로 4월 9일에 북한동포돕기 옥수수 10만톤 보내기 범국민 캠페인에 들어갔다. 이 시기 국민의 참여 열기가 얼마나 높았는지는 7월 5일에 시작된 민족화해를 위한 북한동포돕기 서명운동이 40일만에 100만명을 넘어섰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겨레사랑 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은 민주노총 등 부문운동의 조직적 모금과 지역별 운동조직의 결성을 통한 지역모금운동8)을 통해 이 시기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하는데 한 축을 이루었다. 하루 한끼 굶기운동 등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을 부문별, 지역별로 전개하여 단기간에 많은 모금을 해냈다.
특히 <한겨레신문>은 조중 국경지역의 식량난민과 조선족동포를 통해 취재한 굶주리는 북한 시리즈를 기획하여 북한의 참혹한 실상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또한 북한동포돕기 모금운동의 진행과정을 상세히 보도하여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이 전국민, 각계각층으로 확산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9)
이 시기에 들어 1997년 5월 26일 「남북적십자 사이의 구호물자 전달 절차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어 남북간 직접전달 창구가 만들어지고 지정기탁이 가능해졌다. 남북적십자간의 직접 전달 합의로 지원단체들의 활동은 더욱 활력을 얻게 되었다.
3. 모색기 (1998.3~2000.5)
1998년 3월 18일 정부의 대북지원 활성화 조치로 ① 대북지원 협의 및 모니터링 목적의 방북 허용 ② 협력사업 방식의 대북지원 허용 ③ 기업 및 언론사의 모금행사 참여, 이벤트성 행사 등이 허용되었고, 4월 25일부터는 ARS 모금방송도 가능해졌다. 그리고 1999년 2월 10일에는 민간단체 대북지원 창구다원화 조치를 통해 민간단체 명의의 독자적인 대북 직접지원이 허용되었다.
이 시기에 정부 정책이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에 유리하게 변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IMF 경제관리체제 아래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IMF 외환위기는 연쇄부도와 대량 실직 사태로 이어졌고, 실업자와 노숙자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급부상하였다. 이전 시기에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단체와 종교계, 언론사들이 대북 지원에서 실업기금의 모금과 실업자 지원활동으로 돌아섰다. 이에 따라 대북 인도적 지원활동은 20여 개의 전문적인 지원단체들에 의해서만 수행되었고, 자체 모금력이 취약한 단체들은 사실상 활동을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기 위해 대북 인도적 지원단체들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모색은 1회성의 긴급 구호사업으로는 더 이상 국민들을 모금운동에 참여시키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출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농업, 보건의료 등의 분야에서 특정 지원 대상을 구체화 시켜 지속적인 지원사업을 전개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는 후원자들에게 자신들이 지원한 물자들이 수혜대상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줌으로서 지속적인 참여를 유도한다는 방향성을 명확히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국제옥수수재단의 북한옥수수심기 사업 한국JTS의 나진․선봉 영양식 공급사업, 월드비전의 수경재배농장, 조국평화통일불교협회의 국수공장, 한국이웃사랑회의 젖소목장,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북한 10개 군과의 자매결연 지원사업 및 젖염소목장, 남북농업발전협력민간연대의 씨감자지원사업, 한민족복지재단과 유진벨재단의 보건의료 지원사업 등이 이 시기에 구체화되었다.
4. 전환기 (2000.6~현재)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 장관급 회담, 경제회담 등 각종 회담이 개최되었고, 이산가족 상봉이 수 차례 진행되었다. 물론 현재는 남북 당국간 회담이 교착 상태에 빠져 있고, 제2차 정상회담의 개최 여부도 매우 불투명한 상황에 있다. 그렇지만 남북관계가 정상회담 이전의 대결과 긴장상태로 돌아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볼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변화된 남북관계는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의 비료, 식량 지원이 이뤄지면서 민간단체의 지원물자 중 식량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낮아졌다. 또한 남북교류 및 협력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고조되면서 지방자치단체 및 기업들을 대북 지원단체들의 주요한 후원자로 나서게 하였고, 각 지방의 특산물과 잉여 농수산물의 지원이 이뤄지면서 대북 지원 규모가 급증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반도 문제 해결에 있어 남북 당사자의 역할이 커지면서 국제사회의 대북 인도적 지원사업에서도 남한이 주요한 후원자로 나설 것을 요청 받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은 다음과 같은 전환기적인 과제를 안게 되었다.
첫째, 대북 인도적 지원을 위한 마스터플랜을 작성하고, 이에 따른 체계적 지원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북한의 인도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구조적이고 중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농업 및 보건의료 분야에서 사업목표의 설정, 사업의 우선순위, 역할분담, 사업방식 등에 대한 결정 등을 포함한 포괄적인 마스터 플랜을 마련해야 한다.
둘째, 대북 지원사업의 수혜기관과 수혜자를 구체화시키고, 그들과의 협력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원사업의 북측 대상기관은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농업성, 민족화해협의회 등의 중앙기관이거나 정치적 기관이었고, 이들은 현장에서의 구체적 요구보다는 정치적 판단을 우선하기 때문에 지원효과를 높이는데 장애가 되는 점이 적지 않았다. 현재 추진되고 있는 농업 및 보건의료 분야의 지원 사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수혜기관을 얼마나 세부화 시켜 타겟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그들과 얼마나 공동 협력이 가능한가에 달려있다.
셋째, 교육, 환경, 여성 등 지원활동이 매우 취약한 분야에 대한 지원사업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이 기울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의 인도적 상황에 대한 남한 사회의 관심은 식량난에 초점이 맞혀져 왔고, 최근 지원단체의 사업도 농업 복구 및 보건의료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북한의 위기는 사회 전반의 모든 영역에 걸쳐져 있다. 남한 사회에서 별다른 관심을 받지는 못하지만, 중장기적으로 볼 때 교육, 환경, 여성 등의 분야에 대한 지원사업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 인식되어야 한다.
넷째, 유엔기구 등 대북 지원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강화시켜 공동의 대북 지원사업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지원활동은 국제사회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장기적 지원이 되고 있다. 이에 따라 대북 지원에 대한 관심이 저하되고, 지원재원 모금에 어려움을 겪는 등 장기적 지원에 따른 피로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기구들이 그동안 대북지원을 전개하면서 갖게 된 경험과 축적된 역량은 북한의 인도적 상황을 개선해 나가는 데 매우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대북 지원 국제사회와의 공동 사업을 통해 그들이 추진해왔던 각종 사업들이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남한의 대북 인도적 지원운동이 이러한 전환기적 과제를 올바르게 해결해 나갈 때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Ⅳ. 맺는 말
그동안의 대북 인도적 지원활동을 수혜자에게로의 접근성, 모니터링, 소요 산정 등 지원의 기술적 측면으로만 한정하면 대북 지원활동에 대한 평가가 올바르게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즉 인도적 지원이 지녀야 할 일반적 원칙에서 평가한다면 대북 지원활동은 부정적으로 평가되기 쉽다. 반면 남북한 관계 및 북한의 특수성을 인정한다면 많은 점들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해진다.
민간단체들이 진행해 온 대북 인도지원 사업은 다양한 소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민족화해와 남북교류를 증대시켰다는 점, 이러한 민간단체의 프로젝트들은 정부와 기업의 남북교류와 협력을 준비하는 시범적 사업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북한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남한 및 국제사회의 지원은 북한 스스로의 경제개혁과 정책 전환을 측면 지원하는 의미가 있으며, 인도지원 창구는 1995년 이후 북한과 외부세계를 연결시키는 관문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정부와 기업이 북한과의 다양한 교류와 협력을 진전시키고 있지만, 이들 사업은 정치 군사적 상황에 매우 민감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사업은 이와 반대로 남북관계의 긴장과 대립을 완화시키는 안전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상호 지원하고 협력하는 상생적 남북관계의 형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1) 한국은행에 따르면 1999년에 북한 경제는 6.2% 성장하였고, 농업의 경우 양호한 기상여건과 외국의 비료지원으로 10.1% 증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 북한의 2000/01 양곡년도에 필요한 식량 소요량은 479만톤인데 반해 생산량은 292만톤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따라 올해에도 약 187만톤 정도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Special Report : FAO/WFP Crop and Food Supply Assessment Mission to the D.P.R of Korea. 2000.11.16.
3) 이 운동이 갖는 의미에 대해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본부는 ① 인도주의 실천운동 ② 남북화해 실천운동 ③ 민족자존심 회복운동 ④ 진정한 평화운동 ⑤ 한국경제 회생운동 ⑥ 통일운동으로 정리하고 있다. 『민족돕기와 통일』, (서울,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본부, 1998), 573~577쪽. 또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① 민족운동 ② 통일운동 ③ 평화운동 ④ 인도주의운동으로 정리하고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창립 2주년 활동자료집』, (서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1998), 76~77쪽.
4)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불교운동본부가 조사한 북한 식량난민 실태에 따르면 정기적인 식량배급이 중단된 시점이 1992년 이전 14.5%., 1993년 14.4%, 1994년 34.9%, 1995년 30.4%, 1996년 이후 5..8%로 나타났다. 특히 지역별로는 함경남북도의 식량배급 중단시기가 타 지역보다 앞서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불교운동본부, 『북한 식량난의 실태 - 북한 식량난민 1,019명 면담조사 결과 보고서』, 1998, 16쪽. 이 조사결과는 표본이 모집단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북한 식량난 실상을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냈다는데 의미가 있다.
5) 이 시기 종교계의 북한동포돕기운동 현황에 대해서는 『통일한국』, 1997년 5월호, 45~49쪽. 참조.
6) 1996년 5월 현재 대한적십자사에 기탁된 성금은 6억 2천만여원이었다. 『한겨레신문』, 1996년 5월 27일.
7) 북한이 모금운동의 가장 큰 장애물인데 구체적으로 ① 북한의 남한에 대한 안보 위협 ② 김일성․김정일의 우상화 체제 유지에 자원 낭비, ③ 남한과의 대화거부, ④ 개혁 개방의 기피, ⑤ 심각한 인권상황이다. 서경석, 남북한 민간교류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북한 식량난에 관한 국제협의회(Musgrove Ⅱ)』, 1997년.
8) 『한겨레신문』, 1997년 4월 11일, 4월 17일.
9) 임을출, 대북 식량지원 시민․사회단체의 실태와 효율성, 『통일한국』, 1997년 5월호, 41쪽. 『한겨레신문』, 1997년 4월 14일.
등록일 : 200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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