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rch 6, 2019

15 주체농법을 가로채 식량난 주범으로



주체농법을 가로채 식량난 주범으로



주체농법을 가로채 식량난 주범으로
김주원∙ 탈북자
2015-11-03


영농공정들에 주체농법을 적용한다는 북한 황해북도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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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탈북자 김주원입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농사를 ‘천하지 대본(天下之大本)’이라고 했습니다. 하늘 아래서 살아가려면 농사가 근본이라는 뜻으로 그만큼 우리 선조들이 농사를 중시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서 당연히 농사가 근본이 아니겠느냐, 무슨 새삼스런 얘기인가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방목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목민족들이 세상엔 아직 많이 있습니다. 태평양의 섬들과 북극의 에스키모 인들은 사냥과 물고기 잡이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농사는 절대로 ‘천하지 대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하지 대본’이라는 농사는 우리 민족의 소중한 유산이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가장 중요한 생계활동입니다. 이런 농사도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많은 변화를 낳고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농사는 땅을 다루는 농민들의 소유이며 지어놓은 식량도 그들이 마음대로 처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유가 오직 김씨 왕조일가에게만 허용되는 북한에서 협동농장의 한해 농사도 김씨 일가의 독점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보릿고개만 되면 맨 먼저 굶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소위 ‘땅의 주인’이라고 하는 북한의 농민들입니다. 낙후하고 모순투성이의 집단농업체계 탓에 북한은 1990년대부터 배급제마저 중단된 상태입니다.

생전에 김일성은 우리 인민들이 ‘이 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살게 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에서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3대째나 권력이 바뀌었어도 김일성의 ‘이 밥에 고깃국’ 타령은 요원한 꿈으로 남았습니다.

이 밥은커녕 한끼 강냉이 밥을 먹기도 쉽지 않은 게 북한 인민들이 처한 어려운 생활형편입니다. 북한당국은 인민들의 식량난이 뜻하지 않은 자연재해와 제국주의자들의 반 공화국 고립 압살정책 때문이라며 남의 탓을 하고 헐뜯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어려웠던 ‘고난의 행군’ 시기 한국과 일본, 미국은 우리 인민들을 위해 통이 크게 식량을 지원했습니다. 외부세계에서는 해마다 반복되는 북한 식량난의 주범을 ‘주체농법’으로 꼽고 있습니다.

시대를 망각하고 역사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주체농법’을 고집하는 한 북한의 인민들은 절대로 식량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분석입니다. 북한은 자신들의 신념으로 삼는 ‘주체사상’을 항일빨치산 시절 김일성이 창시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김일성이 창시했다는 ‘주체사상’이 사실은 한국에 망명한 황장엽 선생의 철학임을 세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주체농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은 김일성이 텃밭에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구상한 독창적인 농법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주체농법’은 사실 김일성 종합대학 생물학부 농업생물학과의 교수였던 엄녕섭 박사가 정리한 농사방법입니다. ‘주체농법’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이론화하고 체계화 해 북한에 전파한 인물도 사실은 농학박사인 엄녕섭 선생이었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 생물학부 엄녕섭 교수는 ‘6.25 전쟁’시기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치된 남한의 과학자였습니다. 전후에 그는 사리원 농업대학에서 교수로 명망이 높았는데 중앙당의 지시에 의해 김일성 종합대학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엄녕섭 교수가 연구한 ‘주체농법’은 북한의 지리적 환경에 맞게 농사를 적지적작, 적기적작의 원칙에 의존하는 방법론입니다. 이런 방법론을 실현하기 위해 포기농사와 모 기르기, 두벌갈이와 병해충 예방과 같은 농업관리 체계를 표준화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시신이 보관되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은 생전에 김일성의 기본 주거지로 ‘주석궁전’ 혹은 ‘금수산의사당’이라고 불렸습니다. 당시 ‘금수산의사당’에는 규모가 큰 화단들과 자그마한 포전(밭)들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대성산기슭에 자리 잡은 ‘금수산의사당’의 멀지 않은 곳에 중앙식물원이 있었고 주변엔 기상수문대와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 시험농장이 있었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 생물학부 시험농장은 북한의 일반 협동농장들보다 규모가 더 컸습니다.

농업생물학과 대학생들은 북한에서 새로 연구되거나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농작물 종자들을 이 시험농장에서 키우며 연구했습니다. 그 과정에 좋은 결과가 재확인된 벼나 강냉이, 야채류들은 중앙당을 거쳐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되었습니다.

시험농장을 책임지고 연구를 주도한 인물은 종합대학 농업생물학과 엄녕섭 교수였습니다. 김일성은 엄녕섭 교수에게 새로운 품종의 농산물들을 자주 볼 수 있도록 ‘금수산의사당’ 포전에 옮겨 심을 것을 허락했습니다.

‘금수산의사당’ 주변을 산책하면서 새로운 품종의 농산물들을 자주 접하게 된 김일성은 이런 농작물 종자들과 농사법을 교재로 만들도록 엄녕섭 교수에게 과업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 진 것이 오늘날 북한이 고집하는 ‘주체농법’입니다.

여러 차례의 교정을 거쳐 교재집필이 마감되었을 때 김일성의 후계자로 선정된 김정일은 엄녕섭 박사가 연구한 책을 김일성의 이름으로 바꿔 쳤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책을 ‘주체농법’이라고 이름 짓고 김일성이 직접 연구한 것처럼 포장했습니다.

원래 진취성이 깊었고 정의감이 강했던 엄 교수도 자신의 연구결과를 빼앗긴데 대해 한마디도 언급할 수 없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고 원칙이 되는 북한에서 감히 그들에게 맞설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엄녕섭 교수도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주체농법’과 관련한 불만을 쏟아놓았다고 하는데 결국 그 사건으로 하여 엄 교수는 김일성 종합대학 시험농장에 혁명화로 쫓겨나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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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주체농법’을 적용한 북한의 농업부문에서는 성과가 컸습니다. 사실 이때 거둔 성과는 ‘주체농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화학비료를 대량으로 투여한 고 밀식 재배방법의 요인이라고 지금도 북한의 농업부문 관계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 밀식 재배방법은 1980년대 북한의 논과 밭들을 모조리 산성화 시켜버렸습니다. ‘주체농법’도 기후변화와 농작물의 퇴화, 다락 밭 조성을 통한 치산치수의 파괴, 대홍수에 의한 토지유실 등으로 그 모순점들을 속속 드러냈습니다.

산성화된 토양에서 알곡수확량은 해마다 낮아졌습니다. 북한은 1970년대 초까지는 식량배급도 정상적으로 유지되었고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조와 차관으로 생활수준도 한국보다 더 높았습니다.

1984년에는 한국이 수해피해를 입었을 때 북한은 쌀로 1만톤인 5만석을 포함해 천과 시멘트를 보낼 만큼 여유가 있었습니다. 엄녕섭 박사의 ‘주체농법’에는 다락 밭이나 밀식재배, 환경파괴를 초래하는 치산치수 사업이 없었습니다.

이는 훗날 ‘주체농법’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김일성, 김정일이 보태 넣은 방법들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엄녕섭 박사의 ‘주체농법’이 우리 선조들의 농사방법에 근거하여 ‘삼한사온(三寒四溫)’이라는 기후조건에서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한랭전선이라든지, 지구 온난화와 같은 변화를 양녕섭 박사는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주체농법’을 김일성, 김정일에게 빼앗기지 않았다면 엄녕섭 박사는 자신이 연구한 농사방법을 계속 발전시키고 보완했을 것입니다.

억울하게도 엄녕섭 박사는 자신의 연구와 신념마저 처참히 짓밟히고 더 이상 ‘주체농법’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김정은 정권도 그렇게 꽉 막힌 ‘주체농법’만을 고집하면서 발전하고 변화하는 세계의 농업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체농법’을 버리지 못하는 김정은 정권, 다른 과학자들의 소중한 연구 결과를 빼앗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어 버리는 김씨 봉건왕조 아래에서 인민들의 먹는 문제가 정말로 해결될 수 있겠는지 북한 당국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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