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26, 2019

09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평화의 농학자 김필주 박사 - 인터뷰365



남북을 자유롭게 오가는 평화의 농학자 김필주 박사 - 인터뷰365

김두호
승인 2009.11.16
-----------

황해도에 대단위 농장 운영하며 20년간 왕래 / 김두호



[인터뷰365 김두호] 베를린의 장벽은 무너진 지 올해로 만 20주년이 되지만 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우리의 장벽은 세월이 흘러도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동포 농학자 김필주 박사(72)에게만은 남북 사이에 벽이 없다. 남과 북을 자유롭게 왕래한지 올해로 20년째인 김 박사는 지금 황해도에 2천970만㎡(9백만여 평) 규모의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작물생리학과 종자학을 연구한 그에게 이념과 체제는 언제나 관심 밖의 세계다. 그동안 북쪽의 농토에 씨를 가져가 뿌리고 가꾸며 농장의 작물 개량과 증산에 심신을 바쳐온 것은 그곳에도 우리 동포 농부들이 살고 있고, 그들도 잘살게 되기를 바라는 농학자의 순수한 배려와 사명의식에서 비롯됐다.

현재의 직함은 미국에 본부를 둔 NGO(비행정기구) 지구촌농업협력 및 식량나누기운동협회(Agglobe Services International. Inc) 회장, 미네소타대학 초빙 객원교수와 서울에 사무소를 둔 평양과학기술대학 설립위원회의 농업생명대학 설립학장 등이다. 가장 큰 사업은 역시 황해남북도 4개 지역에 대단위 농장을 운영한다는 점이다. 황해도 농장을 다녀온 지 며칠 후인 11월 중순 서울 강남에 있는 사무실에서 김필주 박사를 만났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말씨에 따뜻한 모정을 느끼게 하는 그는 연세보다 훨씬 젊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얼마동안 체류하셨습니까?

일주일 묵고 왔어요. 며칠 후 또 미국으로 갑니다.


그동안 북에는 몇 번이나 다녀오셨어요?

20년 됐으니 백번도 훨씬 넘을 겁니다. 초기에는 기록을 했는데 지금은 안합니다. 나이가 들어 잊어 먹기도 하고 자주 다녀서 수를 세는 것도 무의미해요.

서울서 가시면 주로 어느 길로 가세요?

베이징이나 선양을 통해 평양 순안공항으로 들어갑니다. 베이징에서는 1시간30분이 걸리지만 선양에서는 50분 거리지요. 선양이 지금은 더 편리해요. 이번에도 선양에서 갔어요.

황해도 농장을 다녀오신 건가요?

가는 목적이 언제나 농업문제나 농장일 때문입니다. 두 개 농장이 평양에서 자동차로 50분 거리의 개성 가는 고속도로변에 있어요. 황해북도 봉산군 천덕리와 구연리, 황해남도 삼천군 련평리와 도봉리 농장까지 4개 지역에 모두 합쳐 면적이 2천970㎡(9백만 평) 쯤 됩니다.

엄청나게 방대한 땅입니다. 어떤 형태로 운영되는지요? 농장이 있는 곳에 주민은 모두 어느 정도나 살고 있습니까?

임대해서 합작회사 형태로 운영하고 있어요. 4개 지역에 1만5천여 명인데 그중 노동인구는 6천5백여 명 되고 어린이와 학생층이 5천7백 명쯤 됩니다. 북쪽은 면(面)단위가 없고 군(郡) 다음이 리(里)입니다. 농장의 크기는 다양한데 저희가 맡은 4개 농장은 대략 7백 세대가 넘고 동네 안에 병원 탁아소 편의점 우체국 학교 등 공공시설들이 있어서 하나의 지역사회를 이루고 삽니다.

생산하는 작물은요?

우리 농장의 주작물은 목화입니다. 그리고 벼, 옥수수와 감자를 비롯해 각종 채소를 생산하는데 본격적으로 지정된 농장을 시작한 지는 5년 됩니다. 목화는 그곳에서 다른 곡식보다 단위당 수익성이 매우 높아요. 솜을 주로 중국에서 수입하였는데 2002년에 1톤당 1천60달러였던 수입 가격이 이듬해부터 1천5백, 1천8백 달러까지 치솟아 영농시험도 못하고 목화 농사를 시작했어요. 첫해는 1톤도 수확을 못했으나 2년째는 1.2톤. 3년째는 2.3톤, 4년째는 3톤을 예상했으나 홍수로 60%의 수확량이 줄어들어 1.6톤, 작년에 2.8톤, 올해에 3톤을 넘었어요.

농장을 시작한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식량 지원은 한계가 있어요.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종자 보급이나 농업 기술 지원 등을 통해 농촌의 자급자족을 실현하는 일이므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특히 그곳에서 고소득 농산물로 목화 재배의 필요성이 정책적으로 대두되어 내가 시작을 했어요.

김필주 박사는 서울농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1962년 9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장학금 혜택을 받아 미시시피주립대에서 종자학으로 대학원을 졸업했다. 뉴욕 코넬대에서 작물생리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고 전공분야와 관련된 세계적인 기업인 노트럽 킹사의 종자학연구실장으로 활동했다. 1985년 역시 세계 굴지의 옥수수종자회사로서 종자개발연구에 선두를 달리는 국제기업인 파이어니어 하이브레드 인터내셔널사로 옮겨 미국 국내와 캐나다를 제외한 국제 종자기술 보급 업무를 주도했다. 그 무렵 공산국가였던 동구권 나라의 종자생산기술보급 일도 김 박사의 소관업무였다.

처음 평양을 방문한 때가 언제입니까?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평양을 처음 간 날이 1989년 3월 17일입니다. 1986년 미국에서 활동하는 장로교회 원로이신 이승만 목사(현재 리치몬드 거주)께서 북한의 종자 보급에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제안해 왔어요. 그 뒤 1988년에 초청비자가 왔지만 무서워서 못갔어요.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도 들어가며 1년을 두고 고민하다가 이듬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홍콩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먼저 중국 입국 비자를 받아 베이징으로 가서 북한대사관을 찾아갔지만 문안으로 들어가는 데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가족에게 유서까지 써놓고 갔으니까 비장한 각오를 하며 한편은 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무엇인가를 도울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어요.

알 수 없는 운명에 그냥 주사위를 던지듯이 북한대사관에 들어서자 김필주 선생이 왜 이제 왔느냐, 이름만 알고 남자인줄 알았다는 등의 인사를 하며 반겼어요. 또 마음을 놓게 만든 것은 대사관 영사부 앞에 서 있는 무궁화나무였습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의 첫 느낌을 아직도 기억하시는지요?

비행기에 내리기 전 그곳 사람들이 대부분 투박하고 거친 인상일거라는 염려를 했어요. 그런데 큰 키의 선량한 인상의 청년이 얼굴에 함박웃음을 피우며 비행기 날개 밑까지 달려와 김필주 선생을 큰소리로 찾아요. 나는 외국보다 더 낯설게 생각했던 그곳에서 우리말을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 반가웠고 또 나를 맞이한 안내원이 불안감을 순식간에 씻어주더군요. 나는 20년이 된 지금도 평양에서 간혹 그 청년의 안부를 물어요.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소속으로 재미동포를 담당하다가 지금은 중국동포담당을 하는 공무원입니다. 첫 방문 때 농촌 지역을 두루 보여주었어요. 그때 나의 농업지식과 지원업무가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알았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도우셨어요?

토질은 아주 척박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그때는 옥수수가 벼농사와 함께 가장 많아서 벼와 옥수수가 각각 60만 정보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옥수수는 암수가 같은 꽃에 달린 콩과 달리 열매의 수염달린 부분이 암술이고 수술은 한포기마다 꼭대기 머리부분에 달려 있어요. 종자 생산을 위해 많은 기술이 필요한데 종자생산 기술은 굉장히 앞서 있었지만 유전자원이 부족한 것이 흠이었어요. 다행히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시장 개척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옥수수종자 1.5톤을 미국으로부터 직접 핸드캐리하도록 했어요. 나는 업무의 연장선에서 옥수수 종자시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평양을 다닐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2년 회사 경영진이 바뀌면서 더 이상 지원을 할 수 없게 되어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왔고 곧 국제 봉사단체를 통해 일을 계속하다가 뒤에 내 스스로 미국정부의 공인과정을 거쳐 지구촌농업협력 및 식량나누기운동 단체를 창립했습니다.

1995년에는 대홍수가 났던 해인데 평안남도 평원군에 있는 원화농장을 맡아 심혈을 쏟았습니다. 비료에서 농약 분무기 트랙터 등 농기구에서 옥수수 종자 1.5톤을 미국으로 부터 직접 가져갔어요. 그 무렵 서울에서 대표적인 종자회사인 흥농종묘를 세우시고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육종전문 종묘회사로 키우셨던 이춘섭 회장님의 지원도 큰 힘이 됐습니다. IMF때 회사가 외국으로 넘어가고 그분도 돌아가셨지만 고추 무 배추 씨에서 꽃종자까지 지원해 주셨지요. 당국에서도 종자지원은 인정을 했어요. 고향이 북한 사리원이기 때문에 그곳을 돕는데 각별하셨어요.

부군(고 주영돈 박사)께서도 지원 사업을 함께 해 오셨지요?

축산학을 전공하고 젖소 등 동물 영양학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역시 축산 농업개발에 남편의 도움이 필요했어요. 2000년 1월 3일 별세하시면서 그동안 해온 지원 사업들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힘든 일들이니 이제 그만 두고 글이나 쓰며 여행을 다니며 안식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기셨지만... 그 한해 전에 평양을 떠나면서 심한 기침을 하고 피곤해 하셨는데 이미 수술이 불가능한 폐암 말기셨지요.

두 분의 전공이 같은 농학분야인데 그래서 인연이 된 거군요.

축산학을 전공한 남편이 농과대학의 2년 선배입니다. 미국에 유학간 미시시피대학 시절에 결혼했어요. 30명을 초대했는데 딘 번치 지도교수 부부를 비롯해 150여 명의 하객이 몰려와 축복해 주셨어요. 아내를 나의 여자라는 생각보다 동지로 생각하며 믿어주고 밀어주며 평생을 좋은 친구로 동반해주셨지요.

자녀분들도 훌륭하게 키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성을 다해 열심히 키웠지만 그들도 부모가 바라는 대로 자라주었어요. 큰아들 마이클 주(43 한국명 주우정)는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워싱턴대와 예일대를 나와 뉴욕에서 조각가로 활동하며 2006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은바 있고, 둘째 토마스 주(42 한국명 주우일)는 하버드 학부와 하바드법대를 졸업하고 월가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지금은 UC데이비스대에서 법대교수로 후진양성에 이바지 하고, 막내 딸 주은지(40)는 버클리대에서 동양소수민족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뉴욕 뉴뮤지움에서 큐레이터로 있는데 금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관장을 맡았어요. 세 아이를 낳으면서 박사학위를 하고 워킹맘으로 하루 3시간씩 잠을 자며 살았습니다.

소녀시절에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 채영신을 동경하셨다던데 평생 그 꿈을 실현하시는 거군요. 어린 시절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사춘기 학창시절에 누구나 동경하는 사람이 채영신 아닌가요? 아버님(김명련)의 고향은 평안남도 강서지만 나는 아버님이 광산소장으로 근무하셨던 함경도에서 출생했어요. 아버님은 일찌기 떠나셨지만 로스앤젤레스에 사시는 어머님(주옥진)은 금년에 백수를 맞으시는데 매주 교회에 나가며 건강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1991년 방북하여 임종을 못 지켜드린 외할머님 묘소에서 통곡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에이는 듯합니다. 우리 어머니 같은 많은 어르신들에게 더 늦기 전에 고향에 가실 수 있는 기회가 오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겠습니다. 아버님은 서울공대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어머님은 원산 루씨여고 출신입니다. 1945년 해방되면서 서울로 이주했고 내가 경기여중 1학년 때 6.25가 일어났어요. 양평으로 피난 가 가난한 농촌에서 살며 농촌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게 농대로 이어진 것이지요. 서울 농대 졸업 후 유학 떠나기 전에 농촌진흥청의 지도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요. 이곳도 보릿고개가 있던 힘든 시절이었지요.



지금 독일은 통일 20주년 기념 축제가 한창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 1989년 11월입니다. 김 박사께서 처음 평양을 방문하신 것이 바로 그해였군요. 우린 근본적인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과 평양을 오가려면 쉽지가 않고 더욱이 평양과 가까운 사람은 서울 쪽에서 곱게 보아줄 수 없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동안 마음고생이나 제약도 따랐을 것 같습니다.

오해도 많았고 모함도 많았지요. 공산당도 되고 사기꾼도 되고, 외롭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협조해주신 좋은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멈추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거지요.







어떤 분들의 도움이 컸습니까?

1997년에는 멀시코 인터내셔널, 월드비젼, 아미고 인터내셔널. 카나디안 푸드프로듀서스, 처치 오버 브레드렌, 아메리칸 프렌드십 서비스 등 미국 NGO의 애드버킷 그룹(Advocate group)인 인터렉션(Interaction)이 북한 농업지원을 위하여 시작한 어그리컬처럴 워킹 그룹(Agricultural Working Group)의 코디네이터로 선정되었습니다. 내가 당시 NGO 코디네이터로 사업계획을 맡아 봄보리 종자 지원을 받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미국에서는 120톤밖에 못구했어요. 그해 유럽에서는 6천600톤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1998년에는 본격적으로 봄보리 이모작을 실시하여 957.5톤의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개발한 보리종자로 3만여톤의 봄보리를 수확하는 성과를 이루어 북측 땅에 봄보리 이모작을 정착시킬 수 있었습니다.

2001년에 직접 사회단체를 창립하셨지요?

동포 목사님의 아들인 뉴욕의 타이거매니저먼트사 빌 황(Bill Hwang 한국명 황성국) 부사장이 주선해 그 회사 로버슨 회장님으로부터 25만달러를 기부받았어요. 염소와 젖소 등을 가져가려다가 정책적 밑받침이 안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그것을 계기로 내 힘으로 NGO인 지구촌농업협력 및 식량나누기운동 단체를 출범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연방정부가 임시 승인을 해 준 것이 2002년 5월이었어요. 연방정부는 세금공제를 허용한 후에도 5년 이상 관찰 유예기간이 필요하다면서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결국 임시허가를 받고 활동하던 중 2006년에 마침내 공식으로 미 연방정부가 승인(501/C3)한 인도지원단체가 되었습니다.

남과 북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고 느껴집니다. 서로 다른 점, 서로 생각해야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나는 9살까지 북에서 살고 다시 남으로 내려와 살다가 47년이 넘도록 이 땅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분단이 없을 때 태어났던 마지막 세대랍니다.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내가 언제나 생각하는 것은 우리 세대가 아닌, 나 혼자만이라도 남과 북을 똑같이 생각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지요. 간혹 중국에서 남북의 사람들이 만나면 허물없이 자리를 함께해요. 상대적인 면에서 보면 솔직히 북쪽보다 남쪽 사람들이 더 신뢰를 않고 있어요. 통일에 대한 것도 남쪽은 잘살기 때문에 오히려 부담을 느낄 수 있지만 북쪽은 못살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생각보다 한민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통일되어야한다는 생각이 박혀 있어요.

넉넉한 쪽에서의 양보와 배려는 통일이 된 뒤에도 필요해요. 불쌍해서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동포애를 생각하며 밀어주는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정치적인 것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북의 정치 경제 체제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라고 생각해요.


삶에 영향을 끼친 분들을 꼽는다면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단연 예수님이고요. 피난시절 학생일 때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등이 남긴 명작을 통해 삶의 지혜를 일깨워주신 국어선생님이 떠오릅니다. 인생의 내면 철학에 항상 관심을 가진 계기였어요. 그리고 2학년 말에 북에서 내려와 꼴찌로 학년을 마친 저에게 물자가 귀했던 그 시절 국어와 산수책의 그림까지 그려 넣으며 베껴가지고 가르쳐서 3학년을 1등으로 마치게 도와주신을 친정 아버님과 평생 애정과 우정을 베풀어 준 남편입니다. 아버지는 해방 후 광업진흥공사 간부로 재직하시면서 틈틈이 산수책을 펴놓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습관을 닦아주셨어요. 또 유학직후 혼자 고생할 때 따뜻한 인간애를 베풀어 준 대학의 허즈 박사와 내가 다니던 교회의 월컵 목사,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면서 길잡이가 되어준 하워드 캐라워는 가슴이 큰 전직상관, 종자 보급을 위해 평양에 갈수 있도록 배려한 파이어니어사의 부사장 수리 시걸 박사 등 수없이 많습니다.

언젠가는 남북통일이 될테지요. 통일될 나라의 세대가 될 젊은이들에게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큰 꿈을 가지고 웅지를 펴라는 말부터 하고 싶습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바라보며 통일에 대하여서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미국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떠날 때는 우리도 헐벗고 보릿고개를 못넘겨 생사를 염려하는 가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1962년 9월 1일 새빨간 민둥산을 내려다보며 떠났는데 이제는 새파란 산야에 세계에서 11번, 12번째의 경제강국으로 발전해 한강의 기적을 만든 민족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더한층 우리 민족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구 1억 정도가 되는 인적 자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우수한 두뇌와 아름다움을 누릴 줄 아는 선조들의 문화유산뿐 아니라 그 혜안과 꿈을 이어 받은 민족입니다. 4천8백만 남쪽 인구와 2천3백만 북쪽 인구 그리고 8백만 해외 동포까지 7천9백만 명에 이르는 우리 민족이 뭉치면 또한번 세계의 중심국가로 기적을 이룰 수 있다고 봅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듯이 우리 젊은 세대들이 세계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믿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실 일들이 앞으로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연세를 염두에 두면 부군께서 하신 말씀처럼 지금 하시는 일들이 너무 벅차지 않은지요?

미국으로 떠날 때 주머니에 단돈 100달러였습니다. 47년 전 빈 몸으로 떠나서 한 가정의 어머니와 아내로, 사회적으로 모두 불만 없이 축복만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동안 받은 축복을 내려놓고 가야합니다. 일하다가 떠날 수 있다면 행복합니다. 안그래도 이번 평양 다녀오는 길에는 다리가 불편해 따뜻한 물로 마사지를 받았어요. 점점 체력이 줄어들겠지만 아직은 걱정할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해야할 일은 우리 농장에서 생산하는 목화를 자체 조면공장을 세워 수익을 극대화하는 일입니다. 목화는 솜에서 줄기와 씨가 모두 돈이 됩니다. 기름은 식용뿐만 아니라 화장품과 약재로, 면실박은 사료로 이용해 버릴 것이 없는 식물입니다.




남과 북에서 벽을 느끼지 않고 활동하는 농학자 김필주 박사는 정체성이 모호한 경계인이 아니다. 십자가를 목에 걸고 살아온 독실한 신앙인이며 자신이 배운 지식과 능력을 베풀며 사는 봉사인이며 평화인이다. 책상 하나와 작은 원탁 테이블 하나로 꽉 찬 조그마한 서울 사무실 벽에는 황해도 농장에서 생산한 목화 사진이 걸려 있다. 서울에 온 그의 머릿속에는 농장의 소득 증대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어준다는 농장 주민들은 김 박사가 오면 토종닭을 잡아 주는 정도의 보답밖에 할 수 없지만 김 박사는 농지운영과 물심양면의 지원을 통해 그들이 다른 지역의 주민들보다 더 잘 살 수 있도록 터전을 잡아 가고 있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97아시아태평양영화제 집행위원,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대종상 및 한국방송대상 심사위원,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역임.
보도자료 및 기사제보 interview365@naver.com
- Copyrights © 인터뷰365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