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농장 농장의 실체 (1)
홈페이지 | 주간프로 | 김씨일가의 숨겨진 진실
아미산농장 농장의 실체 (1)
김주원∙ 탈북자
2017-06-27
KBS가 단독 입수한 김정일 특각(별장)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K062717CO-SU.mp3
00:00/00:00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들은 북한에 김일성 일가의 호화생활과 건강장수를 위한 만수무강연구소 말고도 아직 실체가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가지 형태의 특수목장들과 농장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리라 봅니다.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를 위해 설립된 만수무강연구소와 산하 8호 농장, 운곡특수 목장과 같은 시설들에 대해서는 그동안 제가 자세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북한의 최고특권층들을 위해 만들어진 아미산총국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아미산이라고 하면 북한의 간부들은 먼저 호위사령부를 떠올릴 것입니다. 북한에는 황해북도 곡산군 송림리의 해발 320m 야산과 황해남도 강령군 쌍교리에 해발 221m의 높지 않은 봉우리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름은 모두 아미산입니다. 이 외에도 평안북도 구성시 성안동 남문 서쪽에 위치한 봉우리, 황해북도 은파군 묵천리와 갈현리 경계에 있는 야산과 평안남도 신양군 백석리, 그리고 양강도 삼수군 삼수읍에 있는 높지 않은 산들도 모두 아미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미산이라는 이름은 북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한에도 아미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봉우리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중에서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아미산은 평양시 대성구역에 위치해 있는 해발 156m의 높지 않은 한 봉우리입니다. 대성구역에 있는 아미산 주변은 평양시 시민들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지역입니다. 아미산을 중심으로 북한의 최고 권력기관들이 밀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해발고는 낮지만 평양의 아미산은 북한 권력기관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미산은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과 서성구역 와산동에 인접해 있는데 이곳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인민보안성이 있고 서쪽에는 국가안전보위성이, 남쪽으로는 호위사령부와 금수산태양궁전이 있어 북한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기관들의 본거지입니다. 그런 원인으로 이 일대에는 북한의 핵심 고위층들의 주택들이 많으며 일반주민들의 출입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곳엔 평양 지하철 광명역이 있는데 유사시에 대비해 건설된 것으로 특별한 이유 없이는 평소에는 운영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미산의 북쪽 산기슭에는 김정일이 사용하던 특각인 ‘55호 관저’가 있고 아미산 동쪽으로 흐르는 대동강 지류의 건너편에는 아미산총국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변엔 아미산총국이 관리하는 약 250여 정보에 이르는 아미산 농장도 있습니다. 아미산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금수산기념궁전이 자리 잡고 있는데 금수산기념궁전은 1973년 3월 김정일의 지시로 건설이 시작됐습니다. 원래 이름은 금수산의사당으로 김일성의 생일 65돌에 맞춰 1977년 4월 15일에 준공되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완공된 금수산의사당에서 숙식과 사무를 보게 되면서 금수산의사당은 주석궁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일성이 금수산의사당에 머물게 되자 평양시 중구역에 있던 호위사령부의 경호 인력과 핵심부서들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때 자리를 옮긴 호위사령부 핵심부서들 중엔 제2총국 산하 농장지도부도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던 농장지도부는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 주변 봉우리의 이름을 본 따 아미산총국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 만청산연구원에서 근무할 때 전해 들은데 의하면 김정일은 완성된 김일성의 전용별장에 “아미산의사당이라는 이름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며 인상을 찌푸렸다고 합니다. 가까이에 있는 아미산은 이름이 촌스러워 보인다는 것이었는데 김정일의 지적을 듣고 난 간부들이 무게 있는 이름을 찾느라 머리를 맞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유로 새로 고친 명칭이 그곳으로부터 3km나 떨어져 있는 모란봉의 이름이었습니다.
금수산은 예로부터 불리던 모란봉의 또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산새와 짐승들이 많다는 의미에서 금수산(禽獸山)이라고 불렀는데 김정일은 김일성의 별장에 ‘금수산의사당’이라는 이름이 더 좋은 것 같다고 매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금수산기념궁전과 가까운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1동과 미산2동에는 호위사령부 고위 간부들이 사는 고급독립주택들이 위치해 있습니다. 미산1동과 미산2동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길게 놓인 도로를 평양시민들은 아미산 도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미산 도로를 따라 국가보위부, 호위사령부, 중앙당 재정경리부 산하 기초과학원, 평양 제2병원, 인민군 보위부 등이 위치해 있고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호위사령부 산하 지휘관들이 평양에 오면 숙식을 하는 출장소도 따로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학급에서 공부하던 리기호의 누님이 이 출장소의 식당에서 일했는데 1985년 8월 15일 조국해방 40돌 경축열병식에 동원되었을 때 리기호는 누님이 일하는 호위사령부 출장소에서 국수를 가져다 우리에게 나눠 준 적이 있었습니다.
시원한 육수에 계란과 소고기를 고명으로 올린 국수는 참 별맛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이 그때 놀랐던 것은 국수를 담은 그릇과 수저가 1회용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국수를 먹고 난 후 그릇들과 수저를 버려도 된다는 말이 잘 믿기지 않았습니다. 열병식이 끝난 후에도 저희들은 리기호를 통해 호위사령부 출장소의 국수를 몇 차례 더 얻어먹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호위국 출장소에서 만드는 그 국수를 김정일도 드문이 찾곤 하는데 김정일은 흔히 ‘아미산국수’라고 불렀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김정일에게 올릴 준비가 되어야 해서 그런지 1회용이라는 그릇과 수저는 일반 가정들에서 대를 넘기며 써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질이 좋았습니다. 이렇듯 아미산은 김일성과 북한을 떠받드는 핵심 권력층들의 사연이 깊은 곳이었습니다. 훗날 만청산연구원에서 근무하며 알게 된 일이지만 호위사령부 출장소에서 사용하는 음식재료들은 아미산총국이 주변 아미산농장을 통해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미산농장엔 유리온실과 비닐박막으로 지은 온실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철 푸르른 채소들을 재배해 호위사령부 간부들은 물론 중앙당 정치국 위원들과 후보위원들에게도 정상적으로 공급하고 있었습니다. 호위사령부 2총국 산하 농장지도부였던 아미산총국은 김일성 일가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습니다. 운곡특수목장과 8호농장들이 설립되기 이전인 1960년대 초까지 김일성은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식생활도 지정된 협동농장들에서 생산한 친환경 식량과 채소를 사용했는데 이런 농장들을 호위사령부 2총국 농장관리부가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만수무강연구소가 설립돼 김일성 일가의 건강을 과학적으로 관리하는 체계가 수립되면서 운곡특수목장과 8호농장들이 조직됐습니다. 대신 호위사령부 2총국 농장관리부였던 아미산총국은 북한 핵심간부들의 후방공급 기지로 전락했습니다. 핵심 간부들을 위한 후방공급기지로 탈바꿈을 하면서 아미산총국은 오히려 그 규모는 예전과 비할 바 없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건강관리를 유지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려는 욕심은 김일성 일가나 측근 간부들이나 다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몇몇 협동농장들을 지정해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던 범위를 벗어나 1970년대 후반부터 전국에 노동당 고위 간부들을 위한 전문 농장들이 만들어졌는데 이런 농장들을 아미산총국이 관리하고 있어 이름도 아미산농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습니다. 김일성 일가의 특권과 비상식적인 호화생활은 측근 간부들의 본보기였습니다. 측근 간부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수단이 바로 아미산농장입니다, 아미산 농장의 실체를 앞으로 계속 밝힐 것이라 약속하면서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아미산농장 농장의 실체 (2)
김주원∙ 탈북자
2017-07-04
평안남도 운곡지구종합목장을 시찰하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k070417co-su.mp3
00:00/00:00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에 저는 김일성 일가와 북한 고위층 간부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존재하는 아미산농장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전 시간에 이어 아미산농장의 실체를 계속 파헤치려 합니다. 전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과 평양시 서성구역 와산동에 인접해 있는 아미산 주변은 일반 주민들이 드나들 수 없는 통제구역입니다. 아미산 주변엔 북한을 통치하는 권력기구들이 모두 모여있습니다.
1970년대 김일성이 거주하는 ‘금수산의사당’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북한에서 아미산이 별 관심을 끌지 못하던 장소였습니다. 김일성이 생존해 있을 때 거주공간이었던 ‘금수산의사당’은 북한 주민들 속에서 ‘주석궁전’ 혹은 ‘주석부’라고도 불리었습니다. 1970년대에 건설된 ‘금수산의사당’의 초기 이름은 ‘아미산의사당’이었으나 김정일이 “촌스럽다”며 이름을 바꾸도록 해 오늘날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되었습니다. 북한에 ‘아미산 줄기’라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이곳은 김일성 일가와 연관이 깊습니다.
김일성이 ‘금수산의사당’에 거주하면서 김정일의 거주공간인 21호 초대소도 이곳에 지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김일성 일가의 경호임무를 맡고 있던 호위사령부 제1국과 후방공급을 책임지고 있던 호위사령부 제2국도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또 북한의 인민보안성, 국가안전보위성, 인민군 보위사령부를 비롯한 권력기관들도 모두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김일성의 정치적 기반은 빨치산 출신들인 ‘백두산 줄기’였는데 김정일의 정치적 기반은 ‘김일성종합대학’ 출신들인 ‘룡남산 줄기’였습니다.
오늘날 김정은은 북한의 고위층 자녀들인 ‘아미산 줄기’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북한의 권력기관들과 함께 최고위층들을 위한 주택들도 주로 아미산에 지어졌는데 김정은의 거주공간인 55호 관저도 아미산 주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렇게 북한에서 부모들로부터 권력과 부를 대물림한 세습집단을 ‘아미산 줄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북한의 최고위층을 이루는 세대가 대부분 아미산에서 태어났고 아미산을 중심으로 성장해 온 세대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아미산 주변에는 ‘금성거리’라고 하는 8차선으로 된 넓은 도로가 있는데 이 거리를 일명 ‘1호도로’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미산 도로’는 1호도로와 함께 평행으로 나있는 도로입니다. 아미산 도로는 일반 차량의 통행이 금지돼 있는데 도로의 한쪽엔 금수산 기념궁전이 있고 반대편엔 오늘 이야기하는 아미산 총국이 있습니다.
1970년대 초 김일성 일가의 후방사업과 건강관리를 노동당 조직지도부 간부 5과에서 관리하는 ‘만수무강 연구소’가 책임을 지게 되면서 호위사령부 제2국 산하에 소속돼 김일성 일가의 후방사업을 맡았던 아미산총국은 존폐기로에 놓였습니다. 만수무강연구소 산하엔 노동당 재정경리부가 관리하는 ‘기초과학연구원’과 금수산의사당 경리부가 관리하는 ‘만청산 연구원’이 있었는데 호위총국도 이에 질세라 북한의 우수한 의료진과 연구사들로 제2국 산하에 ‘청암산 연구소’를 내왔습니다.
다행이도 호위사령부 제2국 산하에 있던 ‘아미산 총국’은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해체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일가의 먹을거리와 건강관리를 만수무강연구소에 통째로 넘겼다고 해서 아미산 총국의 위상이 결코 낮아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미산 총국은 김일성 일가의 먹을거리를 생산할 때보다 훨씬 규모가 방대해지고 권력도 더 막강해졌습니다. 이는 김정일의 지시로 아미산 총국이 조선노동당 비서국과 정치국 간부들의 후방사업을 맡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미산 총국으로선 기존보다 규모가 늘게 된 것도 큰 이득이었는데 김일성 일가의 후방사업을 책임졌을 때와는 달리 북한 특권층들의 후방사업을 맡게 된 것 또한 이득이었습니다. 그만큼 북한의 특권층을 상대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수무강연구소 산하인 ‘청암산 연구소’에는 호위총국 군인들을 상대로 각종 임상실험을 할 수 있는 ‘청암산 진료소’가 있었고 김일성 일가에 특화된 기호성 건강보약재들을 생산하기 위해 ‘만년제약공장’의 주요 연구실도 소속돼 있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아미산 총국은 전문연구기관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인간의 건강장수와 관련된 자료들은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었습니다. 김일성 일가의 후방공급을 책임져야 할 때 인원은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노동당 비서국과 정치국 위원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게 되면서 아미산 총국이 책임져야 할 인원은 수천 명도 넘게 늘었습니다. 기존에 몇 개 농장들을 지정해 김일성 일가의 먹을거리들을 마련하던 방식과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당장 수천 명이 넘는 노동당 비서국과 정치국 위원 가족들에게 최고의 먹을거리와 생활편의를 보장하자니 아미산 총국이 전문 관리하는 농장과 목장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1970년대 말부터 북한 전역에 수많은 농장과 목장들이 생겨났습니다. 아미산 총국 산하 농장과 목장의 간부들은 민간인들과 꼭 같은 사복차림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호위총국 군인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때문에 아미산 총국 산하 각 단위의 간부들은 따로 군사칭호가 지정돼 있었고 거기에 따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아미산 총국이 관리하는 목장과 농장들은 지역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호위총국의 관례대로 11호 농장, 21호 목장, 30호 수산사업소 등 숫자로 된 대호로 불렸습니다. 각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의 직원들도 모르게 철저한 비밀로 붙여졌습니다. 해당 직원들마저 정확한 대호를 모르다나니 아미산 총국 산하라는 의미에서 자신들이 일하는 곳이 농장이면 ‘아미산 농장’, 목장이면 ‘아미산 목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북한에 수천 개도 넘는 아미산 농장과 목장들은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북한에 아미산 농장과 목장이 도대체 몇 개나 되는지 알려진 자료는 없습니다. 아미산 농장의 경우 북한의 거의 모든 시, 군들에 있었습니다. 지방에 있는 아미산 농장의 특징은 규모가 일반 협동농장 한 개 작업반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인원도 적게는 80명, 많으면 120명 정도였는데 아미산 농장에 들어가려면 무엇보다 출신성분이 좋아야 하고 건강이 필수였습니다. 먼저 지방 당위원회 간부부에서 인원을 선출하는데 선출된 인원들은 따로 도 종합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습니다.
이 외에도 석 달에 한 번씩 받는 정기검진이 있는데 약간의 감기증세만 보여도 보름동안 출근이 정지되리만큼 건강관리를 철저히 감시당해야 했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은 해당 지역 인민보안부 경비과에서 선발한 보위대원들이 맡았습니다. 그러다나니 지방 농장들은 만수무강연구소 산하 농장이나 목장들처럼 비밀이 보장되지 못했습니다. 지방에 있는 아미산 농장들은 그 지방의 농업특산물을 생산하는데 여름에 농사를 짓는 일반포전(밭)과 겨울에 농사를 짓는 온실포전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이곳 아미산 농장 종업원들에겐 식량공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필요에 따라 만수무강연구소 연구원들도 아미산 농장에 파견돼 영농방법을 비교하는 실험을 자주 진행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3대 째 이어오는 봉건적 세습권력은 북한 특권층 간부들에게도 꼭 같이 어어 지며 과거 우리 조상들의 신분제도처럼 작용하고 있습니다. 아미산 총국에서 생산된 먹을거리로 살쪄 온 세대들이 오늘날 김정은 정권을 받드는 ‘아미산 줄기’입니다. 김정은 정권에 기생하는 ‘아미산 줄기’들에게 오늘도 북한의 인민들은 피땀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아미산농장의 실체 (3)
김주원∙ 탈북자
2017-07-11
평양남새(채소)과학연구소를 방문한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K071117CO-SU.mp3
00:00/00:00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 저는 김일성 일가와 특권고위층 간부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평양시 대성구역에 위치하고 있던 아미산총국이 존폐의 위기를 극복하고 호위사령부 제2총국에서 부활하던 과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아미산총국이 북한 전역으로 확장되던 과정에 대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 아미산 일대는 김정은의 신변을 보위하는 호위사령부와 인민군보위부, 국가보위성과 인민보안성이 들어앉은 곳입니다.
평양시민들도 발을 들이밀지 못할 만큼 살벌한 곳이지만 정작 이곳에서 살고 있는 특권층들은 북한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호위사령부 간부들과 중앙당 정치국 위원들을 위한 아미산농장이 있습니다. 노동당 비서국과 정치국 위원의 가정들엔 매일 아미산총국의 냉동차들이 돌면서 싱싱한 남새와 육류, 살아있는 해산물을 공급했습니다. 북한은 김일성시대부터 간부들을 직급에 따라 8호 공급대상, 4호 공급대상, 65호 공급대상으로 분류했습니다.
8호 공급대상은 노동당 비서국과 정치국위원의 가족들로 이들에겐 남새와 과일, 육류가 매일 정상적으로 공급됐습니다. 이들보다 급이 낮은 노동당 과장들, 도당 부장들과 시, 군당 비서들은 주에 한 번씩 공급을 받는 4호 공급대상이었습니다. 만청산연구원시절 저도 4호 공급대상이었는데 같은 4호 공급대상자라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건강장수를 직접 연구하던 저희들에겐 일반 4호 공급대상자들보다 훨씬 질이 좋은 맥주와 당과류, 육류와 식자재 등의 소비품들이 공급되었습니다.
이보다 낮은 시, 군당 부장급, 인민위원회 부위원장급 간부들에 해당되는 65호 공급체계가 있었는데 이들에겐 보름에 한 번씩 담배 한 보루(10곽)와 술 두병, 육류와 식용유를 공급했을 뿐 남새와 해산물과 같은 식자재는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호위사령부 제2국 산하 아미산총국에 소속된 아미산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와 가구공장들은 8호 공급대상자들을 위한 먹을거리와 소비품들을 전담하고 있었습니다. 공급대상자가 많다보니 만수무강연구소 산하 농장과 목장들보다 규모가 컸습니다.
아미산농장들에서 생산된 남새는 김일성이 금수산의사당에서 크게 차린 연회석상에도 공급되었습니다. 더욱이 아미산총국 산하 약초농장에서 재배되는 장뇌삼은 대형 목재화분에 담겨 주요 명절이 되면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바쳐졌습니다. 북한은 1970년대 미국을 고립시키고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이룬다는 야망아래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관계 수립에 몰두하였습니다. 1970년 5차당대회와 1980년 6차당대회까지 10년 사이 북한은 66개 나라들과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했습니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업적 만들기에 급급했던 김정일은 아프리카 나라들과 발전도상에 있는 신생독립국가 대통령들과 정부대표단을 자주 초청했습니다. 아프리카와 발전도상에 있는 국가대표단들의 북한방문은 주로 구걸행각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제공할 고급 식재료 생산을 늘리기 위해 결국 아미산총국 산하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를 지방까지 확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의 곳곳에 김일성을 위한 별장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던 시기였습니다.
별장들은 많이 지어 놓았지만 새로 설립된 만수무강연구소가 8호 농장들을 거느리고 김일성이 가는 곳마다 현지에서 먹을거리들을 충분히 보장할 만큼 몸집을 키우지 못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연히 아미산총국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김일성의 별장들엔 호위사령부가 붙여놓은 대호가 있었는데 현지주민들과 간부들은 대호를 알 수 없다나니 해당지역의 이름에 초대소라고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평양의 22호 특각을 강동초대소라고 부르던 것이 그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평양의 대동강초대소, 평안남도 자모산초대소, 양강도의 삼지연군 포태리에 있는 삼지연초대소와 못가초대소도 다 지역의 이름에서 유래됐습니다. 나중엔 김정일 전용의 초대소들까지 북한의 곳곳에 들어서며 호위사령부가 할 일이 많아졌습니다. 특각을 관리하는 인원과 현지 경비를 책임진 지휘관들의 가족들에겐 김일성이 현지에 머물 때 먹을 수 있는 남새나 육류를 생산하게 했는데 이렇게 지방마다 새로 조직된 남새농장이나 목장을 호위사령부 2국 산하 아미산총국이 관리했습니다.
아미산총국 산하라는 의미로 해당지역의 이름에 아미산이라는 꼬리표가 붙여졌습니다. 양강도 삼지연군 중흥분장에 있는 록수리 사슴목장을 록수리 아미산목장, 보천군 내곡리 온수평의 남새농장을 온수아미산농장이라고 부르는 식이었습니다. 오늘날 북한주민들이 아미산이라고 하면 김정은이나 고위층 간부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농장부터 떠올리는 이유가 평양시 대성구역 아미산 주변에 위치한 호위사령부 제2국 산하 아미산총국과 각 지방들로 확대된 아미산농장들 때문입니다.
북한의 지방들에 산재해 있는 아미산 남새농장이나 약초농장, 목장과 수산사업소가 모두 몇 개에 이르는지 구분이 안 되는 원인도 일반 주민들은 물론 지방의 간부들도 출입이 통제되는 아미산 농장들이 너무도 많이 널려있기 때문입니다. 아미산총국 산하 지방의 아미산 농장과 목장들에서 무엇을 키우는지는 김일성의 생전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미산농장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 일부 폐기된 특각들을 관리하던 사람들을 통해서였습니다.
생전에 김일성은 양강도 강구특각과 소백산특각, 남포시 와우도특각을 비롯해 중국과 가깝거나 주민지구와 가깝다는 구실로 일부 특각들을 해체하도록 했습니다.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용하던 특각들을 모조리 허물어버렸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김일성의 특각을 관리하던 사람들이 속속 사회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그동안 아미산농장과 목장이라고 부르던 곳들이 무슨 목적으로 조직됐고 그 속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도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김일성 사망 후 북한을 덮친 ‘고난의 행군’으로 굶주린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아미산 농장과 목장들을 습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되었고 그 후과로 일부 관리와 경비가 어려웠던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김일성이 평소 개고기를 즐겨 먹었고 김일성을 위해 전문적으로 개만 키우던 아미산 목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고난의 행군’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규모가 크지 않고 특정된 몇 가지 채소만 전문적으로 키웠습니다.
특히 아미산 농장들은 해당 지역의 최저 해발고에 위치해 있는 지방의 기상수문관리소들로부터 3백~4백미터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내용들도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김일성의 특각들이 모조리 해체된 후에 외부세계에 알려진 사실들입니다. 만수무강연구소와 산하 수많은 목장과 농장들에 더해 북한의 특권고위층들을 위해 평양과 지방에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일떠섰던 아미산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와 가구공장들, 비록 규모는 줄었으나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수시로 해외에서 사들이는 고급 사치품들도 아미산총국을 거쳐 고위간부들에게 선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아미산농장들에서 생산된 고급 식자재들을 매일 공급받으며 살쪄 온 북한의 고위간부들이 과연 그 모든 특권을 내려놓고 김정은을 등질 수 있겠는지 저는 지금도 여전히 의문입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아미산농장의 실체 (4)
김주원∙ 탈북자
2017-07-18
평양시 교외에 있는 타조목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00:00/00:00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시간 저는 아미산총국이 존폐위기를 극복하고 북한전역으로 확대되던 과정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북한 전역으로 확대된 아미산농장들의 규모와 생산되는 제품 등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1970년대부터 김정일은 북한의 곳곳에 자신과 김일성을 위한 별장들을 세웠습니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노동당 내부의 여러 파벌들이었던 남노당파와 연안파, 소련파, 국내파들과 싸움으로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습니다. 종파라고 불리던 노동당 내부 파벌들은 1967년 노동당 제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갑산파’ 숙청을 끝으로 괴멸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북한에서 김일성의 유일적 통치가 시작됐습니다. 갑산파의 숙청은 김정일의 후계과정과 연관돼 있었습니다.
당시 빨치산 출신들을 앞세워 갑산파를 숙청한 인물은 김정일이었습니다. 1960년대 노동당에 입성해 선전선동부를 책임졌던 김정일은 김일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북한의 매 가정세대들에 의무적으로 김일성의 초상화를 걸도록 지시했습니다. 하지만 박금철을 우두머리로 한 갑산파는 김일성의 우상화를 당내 민주주의 파괴행위로 규정짓고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에 김일성은 크게 분노했고 그런 틈을 노리던 김정일은 일격에 갑산파를 제거함으로서 후계자의 입지를 든든히 다졌습니다.
갑산파 숙청 과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부상한 김정일이 제일먼저 내놓은 것이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였습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이 내놓은 사상을 김정일이 직접 집행한다는 것이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영도체계의 골자였습니다. 이후 김정일은 북한의 경치 좋은 곳마다 김일성의 별장들을 크게 건설했는데 이를 ‘만수무강’ 사업이라고 불렀습니다. 김일성의 만년장수를 기원한다며 ‘만수무강’이라는 구호를 들었지만 그 배후에서 김정일은 제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때부터 김일성과 김정일은 계절에 따라 이곳저곳의 별장들을 돌며 살았는데 삼복더위가 시작될 무렵이면 백두산 일대의 포태특각, 가을서리가 날릴 때면 연풍호 특각, 겨울철이면 구월산 특각에서 업무를 보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정상이었습니다. 북한이 평양에만 한정돼 있던 아미산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들을 전국으로 확대한 이면에는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별장들을 옮겨 다니며 생활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현지에서 싱싱한 먹을거리들을 긴급 보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북한은 여러 지방들에 김일성, 김정일의 건강장수를 위한 ‘9호 농장’들을 따로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9호 농장’들은 지정된 한 가지 종류의 농산물에만 집중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치품 생산을 위해 지방들엔 ‘8호 작업반’도 있었습니다. 반면 지방에 있는 아미산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들은 모두 평양시 대성구역 미산동에 위치한 아미산총국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지방들에 있는 아미산총국 산하 농장과 목장, 수산사업소들은 따로 대호가 정해져 있지만 비밀에 속해 있었습니다.
대호를 알 수 없었던 주민들은 지방에 있는 아미산총국 산하의 농장들을 통째로 아미산 농장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불렀습니다. 북한에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고위층 간부들을 위한 아미산 농장이 몇 개나 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살던 양강도만 해도 내부에서 무엇을 재배하는지 알 수 없는 아미산 농장들이 수십 개나 되었습니다. 양강도 삼수군만 해도 고비농장’, 꽃사슴목장, 풍산개농장을 비롯해 아미산총국 산하의 목장과 농장이 세곳이나 되었습니다.
양강도 삼지연군에는 아미산총국 산하로 꽃사슴목장과 말사슴 농장이 따로 있었고 황기농장과 더덕농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개 군에도 2~3개씩 있는 아미산 농장들은 대부분 일반 협동농장의 한 개 작업반 규모 정도라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이 일반 협동농장의 작업반 규모라고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농업수단들은 일반 협동농장들을 능가했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자동차 한 대와 뜨락또르(트랙터) 2대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였습니다. 특이하게도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소를 기르지 못하게 했고 주변 다른 협동농장들에서 소를 빌려서 쓸 수도 없도록 규정돼 있었습니다. 소를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 여러 가지 균에 감염될 수 있다는 구실 때문이었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겨울철에도 얼지 않는 맑은 샘이 항상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 주변의 산골짜기로부터 맑은 시내가 흘러야 합니다. 아미산 농장의 위쪽에는 밭이나 주민들의 생활주거지를 만들지 못하도록 통제했습니다.
개인이나 협동농장 밭이 있으면 비료나 농약을 쓰게 되고 주민들이 거주하면 농작물 재배에 쓸 시냇물이 오염될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농장은 작지만 겨울철에 남새(채소)를 재배할 온실들이 있고 여름철에 채소를 가꾸는 밭이 따로 있었습니다. 아미산 농장과 목장의 종업원들은 북한에서 수십만의 아시자가 발생하던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중앙으로부터 어김없이 배급을 받았습니다. 지방에 있는 아미산 농장 주변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농장 종업원으로 입지하여 배급을 받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미산 농장이나 목장에 취직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 종업원들은 농장장이나 분조장, 그리고 제대군인 남성 종업원들만 가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농장 일을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아미산 농장 종업원들은 선발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가정토대였습니다. 출신성분이 좋아야 아미산 농장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질병이나 전염병이 없어야 했습니다. 3달에 한 번씩 받는 종합검진에서 질병이 발견되면 퇴직시켰습니다.
여기에 남성들의 경우엔 제대군인이고 당원이 돼야만 한다는 까다로운 기준이 적용됐습니다. 아미산 농장에서 일하던 제 친구 한 명은 친동생이 중국과 밀수를 하다가 걸려 2년간의 교화(교도) 형을 받자 도당위원회 간부과에서 퇴직을 시켰습니다.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에 종업원으로 선발되고 퇴직을 하거나 처벌을 받는 등 모든 생활은 각 도당위원회 간부과에서 관리했습니다. 그만큼 아미산 농장에서 일을 하려면 본인관리도 철저해야 하지만 주변의 가족도 특별히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김일성 시대까지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겨울철 농작물 재배를 위해 주로 톱밥난로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각 지역마다 있는 건설사업소와 임산사업소, 목재일용품 공장들에서 톱밥이나 버리게 된 목재 절단품들을 땔감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시기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은 겨울철 온실에서 농작물 재배를 위해 주변의 통나무들을 닥치는 대로 땔감으로 이용했습니다. 임산사업소도, 목재일용품공장도 모두 멎어선 상태여서 땔감을 공급받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이후 제가 북한을 떠나던 당시까지는 지방의 아미산 농장들에 석탄을 공급했습니다. 양강도에 있는 아미산 농장들은 중국에서 수입한 콕스(코크스)탄을 사용했는데 화력조절을 위해 콕스탄을 가루 내어 진흙에 섞어서 사용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북한의 노동당 비서국과 정치국 위원들을 위해 만들어진 아미산 농장, 지금도 북한의 특권층들은 아미산 농장에서 재배되고 사육된 식재료들을 마음대로 소비하며 살 찌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국통일은 아미산 농장과 같이 북한에서 특권층들을 위한 시설들이 없어지는 그날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