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31, 2020

13 북 장애인 실태 증언, ‘나우’ 지성호 대표



북 장애인 실태 증언, ‘나우’ 지성호 대표



북 장애인 실태 증언, ‘나우’ 지성호 대표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3-09-16



2011년 12월 뉴욕에서 열린 세계북한인권궐기대회에 참가한 지성호 대표.
사진-나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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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초대석,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지난 8월 하순, 서울에서 열린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의 장애인 실태에 대해 증언한 탈북자 지성호씨. 그 자신 고향 회령에서 청소년 때 열차 사고로 한쪽 손과 다리를 잃은 장애인으로 북한 당국의 차별과 멸시, 심지어 고문까지 받아 한국 내 탈북자사회에서는
그 누구보다 북한의 장애인의 어려움과 인권유린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지체장애에도 불구하고 지성호씨는 한국에서 ‘나우’라는 청년들의 단체를 만들어 남한사회와 국제사회에 북한의 참담한 인권실태를 알리고 중국 내 탈북고아를 구출하는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지성호 대표로부터 청문회 증언 내용과 ‘나우’ 활동에 대해 들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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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일: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하셨는데, 북한장애인 인권실태에 대해 설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성호: 그렇습니다. 북한에서는 일반 주민이 살아가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장애인들의 삶은 더욱 어렵습니다. 경제적 능력, 노동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서 북한의 고난의 행군 1990년대 중후반에 많은 장애인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제가 아는 주변의 각종 장애인들도 죽은 걸 압니다. 3-4년간 굶어 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장애인이 되자 저희 가정에서 저를 포기하지 않으면 동생들이 굶어죽게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어려운 생활에서 아버지가 어떻게든 저를 살리시겠다는 의지로 의약품 사서 주사도 놔주시고…… 그 덕에 제가 살아났습니다.

북한의 장애인 종류는 다양합니다. 정신지체장애자로부터 신체장애자, 언어 장애자, 눈이 먼 장애자 등, 그 가운데서도 신체장애자 사정이 제일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국처럼 장애자를 위한 보조기구 쓸 여지가 없습니다. 북한 함경남도 함흥시에 지체 장애자를 위한 교정기구 병원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거기에는 의족 등 보조기구나 자재도 없습니다. 또 그 혜택을 보기위해 기다리는 기간도 엄청 깁니다. 그래서 저는 보조기구 없이 생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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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위원 3분이 지성호씨 증언과정에서 특별히 질문한 것은 어떤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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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이번에 조사위원회는 9가지의 인권 주제에 관해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특히 비인도주의적 고문, 북한 주민의 아사, 장애인들의 생활 등을 주로 질문했습니다.

비인도적 고문과 학대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서는 중국 갔다 와서 고문당한 제 경우를 설명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2천년도에 장애인으로 중국에 다녀온 게 발각돼 목발을 짚고 경찰서 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가 거지꼴로 중국에 식량을 구걸하러 갔다며 다른 일반 주민보다 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는 2천 6년 탈북하다 잡혀 고문 받아 사망한 것도 증언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 90년도 중반 주민들의 아사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저희 할머니는 우리 가정에 먹을 게 없어 굶어 돌아가셨는데 이 얘기와 함께 저희 가족 모두가 아사 직전까지 갔던 얘기도 했습니다.

전: 배고픔을 참지 못해 중국에 갔다고 하셨는데 장애인 상태로 어떻게?

지: 왼쪽 손과 다리가 없지만 먹을 것 구하러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목발에 끈을 매어 신체에 동여매고 갔었습니다. 가서 식량을 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북한 집에 돌아와 구한 쌀로 밥을 끓여 먹으려는데 보위부원이 집에 따라와 저를 체포했습니다. 그때 가져온 물건도 모두 빼앗겼습니다. 조서를 쓰고 취조 과정을 거쳤습니다. 보위부원들도 도강자가 귀환하면 하루 이틀 정도 취조후에 웬만하면 내보내곤 했는데 저는 오래 가둬두고 조사하면서 고문도 했습니다. 그들 말로는 ‘네가 장애인으로 두만강 건너가 공화국의 국격을 떨어뜨렸고 외신 언론이나 기자들이 그걸 알게 되면 북한에는 거지떼 병신들만 있는 줄 알고 보도하면 국제적 망신을 당할 것 아니냐? 국익 해치는 일을 했으니 맞는 줄 알아라’고 하더군요. 그 일을 당하고는 ‘내가 북한에서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없구나’라고 생각해 탈북을 하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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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성호씨가 장애인이 된 사연을 증언한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시죠.

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95년 당시 할머니가 굶어 죽고 우리 가족도 아사 직전이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저희가 살던 곳은 탄광지역이었는데 식량 배급이 끊어졌으니 저희가 할 수 있었던 건 석탄을 팔아 옥수수 가루를 사서 죽을 쒀 먹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군인이 석탄 화물열차를 지키며 무장 호송해서 몰래 훔쳐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당시 석탄을 훔치려면 낮에는 할 수 없고 밤이나 새벽에 열차에 몰래 올라 타서 했습니다. 96년 3월, 석탄을 팔러 가던 중 제가 너무 지쳐 달리는 열차에서 정신을 놓아 떨어졌는데 선로에 몸이 들어가 달리는 열차 바퀴에 치었습니다. 그때가16살이었지만 키가 작았습니다. 130센티 정도였죠. 그때 왼쪽 다리와 손이 잘려서 피범벅이 됐습니다. 우리 부모는 제가 죽는 줄로 알았습니다. 수혈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어쨌든 수술 마취제도 못 맞고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하느님의 보호로 기적적으로 수술을 잘 끝내고 퇴원했지만 집에서10개월 넘게 주사를 맞기도 하며 치료를 했습니다. 하지만 항생제가 없어 염증도 생겨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었습니다. 아버지와 남동생이 고생 많이 했죠. 제 동생이 진짜 고생 많이했습니다. 자기도 굶어서 얼굴이 퉁퉁 부어 아사 직전인데오 먹을 걸 쓰레기통에서 주어다가 내게 먹이고 해서 제가 살았습니다. 지금은 탈북해 한국에 와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 자체가 하느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한국에 들어간 건 지성호씨와 동생 두 명뿐인가요?

지: 이후에 어머니도 남한에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북에서 돌아가고요. 할머니도 돌아가셨고요.

전: 그러니까 형제와 어머니는 한국에 잘 들어 간 것이군요.

지: 네.

전: 회령으로 가던 화물열차였다고 하던데 살던 곳이 함경도 쪽이었습니까?

지: 네. 함경북도 회령시 학포탄광이란 곳이었습니다. 제가 있던 곳은 현재 폐쇄됐다는 22호 정치범수용소 인근이었습니다. 탄광이 많이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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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금 ‘나우’라는 단체를 이끌고 계신데 나우에서 하는 일이 많더군요. 이 단체가 탈북대학생이나 탈북 청년만의 단체는 아니고 남과 북의 청년들이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탈북청년과 남한사회 청년들이 함께 나우라는 단체를 세우자고 할 때는 어떤 뜻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지: 일단 저희는 자유를 찾아왔고 대한민국 사회가 받아줘 잘 정착했습니다. 저희로서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대한민국 국민으로 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지상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유롭게 몇 해 살다보니 아직도 북한에는 어려움을 겪는 주민이 많다는 걸 느끼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게 자본주의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고요. 우리와 함께 기거하던 한 청년이 있었는데 로버트 박이라고 합니다. 그 친구는 북한의 인권개선을 외치며 두만강을 건너갔던 친구입니다.

전: 북한에 억류돼 있었던 그 사람입니까?

지: 네. 그렇습니다. 저희가 그걸 보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인데 저 사람이 목숨 걸고 들어가다니’ 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 가운데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북한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모인 것이 처음에 12명이었습니다. 남북한 청년들과 재미교포와 외국인 포함해서 모두 열 두명이었죠. 그렇게 모여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그런 목표를 중심으로 하다보니 다양한 일을 하게 됐습니다. 물론 더 많은 일을 해 나가야겠죠.

전: 나우의 웹사이트를 보니 활동 분야가 많습니다. 다 소개할 순 없지만
  1.  북한의 인권 참상을 알리는 일, 
  2. 탈북자 구출사업, 
  3. 북한 주민에 자유 인권의 소리를 전하는 일 등등인데요 
간략히 소개해 주시죠.

지: 저희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보다 북한의 실상을 남한과 국제사회의 청년들에게 알리는 일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청년들이 모두 함께 힘을 합쳐 북한의 변화가 오게 만드는 일입니다.

저희는 매주 토요일을 북한인권의 날로 정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중에는 각자가 회사에서 일하거나 학교에서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일하고 공부하면서 캠페인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문화 컨텐츠를 제작해 북남살롱이란 사업을 통해 북한 주민들의 사는 모습을 남한 사외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 북남살롱의 문화 컨텐츠란 무엇인지요?

지: 올 3월에서12월까지 시리즈로 실시하고 있는 것인데요, 북한 일반 주민의 연애라든가 시장 (장마당)의 변화, 꽃제비생활, 탈북가정 등을 시리즈로 만들어 나우 학생들이 강사로 각자의 경험을 얘기하는 강연합니다. 남한 청년들은 강연에 참관하고 참가비를 냅니다. 그 수익금으로 탈북자 구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남살롱7회째 진행 중입니다.

또 다른 사업으로는 겨울에 크리스마스 축하 신년카드를 만들어 파는 일입니다. 수익금으로 중국 내 탈북고아들 구출자금을 만들었습니다. 저희 활동을 응원하시는 분들은 자기 금반지나 가락지 등 귀중품을 팔아 후원하시기도 합니다. 후원금통을 만들어 탈북고아 구출에 사용하는데요 지금까지 저희가 한국행을 도운 고아가 열 아홉명입니다.

그밖에 활동으로 방송을 합니다. 제 동생이 다른 청년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요, 자유아시아방송 서울지국에 출연해 북한에서는 대학 공부를 못했지만 한국에서는 대학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얘기, 남한의 대학문화와 남북청년들이 바라고 생각하는 것 등 다양한 걸 주제로 매주 방송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듣고 탈북한 가족도 있습니다.

전: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을 듣고 탈북한 가족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지: 네. 그렇습니다. 한 가족이 탈북해 왔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제가 충청북도 충주시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아는 분 얘기가 북에 있는 한 가족이 우리 청년들의 방송을 청취했는데 그 방송에서 우리들이 한국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 가족의 딸와 아들이 ‘남조선 넘어 가서 대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서 그 부모가 중요한 결심을 하고 탈북했다는 것입니다. 방송을 들으며 우리가 여기서 대학을 간다는 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아해 했었지만 대학에서 하는 전공 소개 등을 듣고는 신뢰하게 되어 탈북해 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남한에 사는 탈북자들의 방송이 그렇게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습니다.

전: 그게 언제였습니까?

지: 2011년이었습니다.

전: 그밖에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지: 대한민국에서 다양한 국가의 청년들과 함께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함께 캠페인을 하고 모금활동을 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돕고 북한의 변화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미국 내에서 대학공부를 하고 있는 나우의 청년들도 있습니다. 이들이 거기에서도 나우 활동을 활발하게 할 것입니다. 북한을 위해 일하는 분들이 더 많이 참여하고 또 후원자가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지난 8월 하순, 서울에서 열린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의 장애인 실태에 대해 증언한 북한인권단체 ‘나우’의 지성호 대표로부터 청문회 증언 내용과 ‘나우’ 활동에 대해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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