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anuary 30, 2020

1503 “대북지원은 우리 민족끼리 나누는 것입니다.” - 신영순 공동대표 인터뷰①: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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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북지원은 우리 민족끼리 나누는 것입니다.” - 신영순 공동대표 인터뷰①:자주시보


    공지사항 자료실 이달의 후원인 화면구성소개
    편집 2020.01.30 [18:53]


    대북지원은 우리 민족끼리 나누는 것입니다.” - 신영순 공동대표 인터뷰①

    nk투데이 
    이동훈 기자
    기사입력: 2015/03/05 ⓒ 자주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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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K투데이는 지난 2월 중순 10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면서 북한 장애인들과 고아들을 지원해왔던 <국제푸른나무> 신영순 공동대표를 만났습니다. 북한의 장애인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신영순 공동대표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북한 장애인 정책과 장애인의 실태, 북한 장애인 체육과 관련한 이야기 등을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북한과 교류,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이 많은 관계로 <국제푸른나무> 신영순 공동대표와의 인터뷰를 세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먼저 본인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신영순이고 올해 한국 나이 70입니다. 1946년생이에요. 저는 평양에서 태어난 미국 목사 아더 킨슬러, 한국명으로 권오덕 목사와 1968년도에 결혼을 했어요. 그래서 미국 시민권자입니다. 그리고 가문적으로 시댁 식구들이 전부 선교사 집안이세요. 저는 미국장로교 선교사로 42년 동안 한국에서 일하다가 2011년 6월에 은퇴했고요, 지금 시애틀에 살고 있으면서 <국제푸른나무> 공동대표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북한에는 100여 차례 다녀왔고 많이 갈 때는 일년에 10번도 갔었고, 보통 1년에 6~7차례 다닙니다. 작년에는 5번 갔다 왔습니다.







    장애인 관련 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습니까?



    전남 순천에서 처음 장애인들하고 일을 하게 됐어요. 제가 아들 둘 낳고 6년 만에 낳은 딸아이가 어려서 뇌막염에 걸려 정신지체 장애인이 됐거든요. 그래서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있던 차에 마침 거기에 애양원 장애인 봉제기술학교가 있었어요. 제가 패션디자인 공부도 한 적이 있어서 장애인들이 배우는 봉제기술을 좀 도와주고,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가사실습 시간도 만들어서 봉사도 하면서 장애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1979년, 1980년 그 때만 해도 장애인들의 생활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한국 장애인 복지도 굉장히 열악했죠.



    북한은 어떤 계기로 찾게 되셨나요?



    1995~7년부터 북한이 반복되는 대홍수로 많은 자연피해를 입었고, 그 때부터 북한이 식량난으로 수많이 아사자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같은 민족이 고통 받는 것도 가슴이 아펐고, 저희 시댁이 원래 평양이기도 하다보니까 더욱 관심이 갔어요. 그래서 북한에 한번 가보고싶은 호기심도 생겼습니다.

    저는 91년 시작했던 번동코이노니아 장애인 보호작업장 원장직을 97년 12월에 사임하고, 북한에 식량과 약품지원을 위한 모금을 시작하였고, 1998년 5월 외국인 단체와 첫 방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북지원 사업을 하시는 이유는?

    첫 방북 때 외국인들도 북한을 돕는데 같은 민족으로서 더 해야되지 않나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식량난으로 고통받고 굶주리는 고아들, 장애인들, 또 배고픈 내 민족을 먹이자는 생각으로 북한을 돕는 지원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와 중국, 소련의 개방으로 경제적으로 더 고립된 북한이 큰물피해로 더 고통당하는 우리 민족을 돕자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같은 민족이고 너무 순수하고 좋은 분들이 살고있는, 똑같은 인격을 가진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통일을 위해서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외국인이 지원하는것은 얻어먹이는 것이고, 같은 민족이 도와주는것은 나눠 먹는거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죠.

    통일의 미래는 첫째 남북 통일복지 구축이라고 생각해요. 고아들을 먹이고 노인들을 돕고, 이런 세계적인 제재 속에서 북녘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돕는다는 게 같은 민족으로서 굉장히 보람있고 좋아서 이 일을 하고 있어요. 이런 과정에서 건강한 민족이 되도록 통일 일꾼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봤고요.

    남북관계가 지난 7년 동안 많이 어려워졌잖아요? 제가 그동안 북한에서 장애인 사업을 하는데 어려움 속에서도 협력이 원만히 이뤄져 왔어요! 98년 첫 방북 이후 저는 많은 사람들과 신뢰를 쌓아온 것을 생각하니, 그냥 멈추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남북 장애인 교류는 우리 민족끼리 통일로 가는 화해의 길을 만들어가데 꼭 필요하고 또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하고 있습니다.



    <국제푸른나무>라는 단체에 대해서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국제푸른나무>는 통일부에서 사단법인 인가를 받은 대북지원 단체입니다.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에 푸른나무 본부를 두고 있고, 세계 여러 지역에 지부를 갖고 함께 민족통일을 만들어가기 위해 세워진 단체입니다.

    저희 시부모님들께서 1928년 평양에서 시작하신 선교사역과 제가 북녘에서 16년간 해오던 모든 고아들과 장애인들을 위한 지원사업들을 계속하기 위해서 2010년 11월에 곽수광 목사님과 <푸른나무>를 세우게 되였습니다. 얼마 전에 <국제푸른나무>로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 여러 곳의 고아원과 12개의 장애인 특수학교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영양실조는 아이들 두뇌발달과 성장발육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장애인이 될 수 있어요. 아이들이 장애인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조선장애자연맹에서 영양공급과 식량공급을 할 수 있도록 43개의 고아원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4년 1월부터는 북한 정부에서 고아, 장애인들에게 하루에 300g씩 식량과 물고기등을 정기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고아 지원사업에서 의약품과 생필품을 협조하는 정도입니다. 저희 국제푸른나무는 앞으로 다양한 장애인 분야에 필요한 일들을 중심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입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장애인 사업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앞서 말씀 드린대로 각 도에 고아원들과 장애인 특수학교 환경개선, 직업재활 기술교육(농아, 맹아) 사리원에 콩우유, 빵공장 지원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지속적으로 장애인 직업재활, 장애인체육, 장애인예술을 하도록 지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지적장애인 시설이 없었는데, 국제기구들과 미주후원자들과 협력해서 처음으로 평양에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지상3층 건물을 2013년에 새로 지었어요. 320여명의 학생이 있고, 옥류아동병원에서 치료도 병행합니다. 물리치료도 하고, 특수교육도 하고, 교사들이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국제푸른나무>에서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지금 가장 힘을 기울이는 사업은 대동강장애인종합회복원을 건축하는 거예요. 지금 평양 대동강구역 문흥 2동에 땅 3,629평, 12,000평방미터를 받아놓은 것이 2007년이에요. 김만유 종합병원 뒤에 있는 부지인데 지상 4층 지하 2층이고 90~100억 원 됩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땅이죠. 여러 번 착공식이 미뤄졌는데 올해에는 꼭 착공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그 건물이 통일 복지를 구축하는 아주 중요한 장소가 될 거라고 봐요. 장애인 의료 파트뿐만 아니라 교육, 직업재활, 특수교육, 종합사회복지 초석을 세우고 말입니다. 남북 장애인 교류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지금 수화와 점자가 남북이 다르기에, 한국의 맹인을 모시고 가서 점자도 조정하고, 한국의 농아들이 북에 가서 수화의 차이를 확인하는 일도 해야 하거든요. 그 복지관에 남·북한의 장애인 관련 복지 자료도 같이 연구하는 종합복지 교류를 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종합복지관 안에 남북장애인 예술제, 국제장애인음악 연주도 할 수 있는 700~800석 규모의 큰 대강당도 설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물 안에 게스트 하우스도 넣어 세미나 등도 할 수 있는 종합 남북교류 복지센터로 만들 겁니다.


    북한 장애인의 현황과 정책을 소개해주세요.

    지금 북한에 있는 장애인들 숫자는 2010년 유엔 인구조사에서 187만 명으로 나와 있었고요, 지금은 200만이 조금 넘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북한 모든 장애인들을 담당하는 조선장애자보호련맹 중앙위원회가 있습니다. 이 기구는 보건성 산하에 있어서 장애인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보장구라든지, 예술, 체육, 직업재활, 특수교육 등의 일을 하고 있어요.



    조선장애자보호련맹은 1998년 조선불구자협회라는 이름으로 국제단체의 도움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북한에서 2003년 장애자보호법을 통과시키고 6월 18일 북한 장애인의 날도 제정되었습니다. 장애자보호법은 2013년 11월 21일 국제수준에 맞게 개정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는 1959년 9월 1일 농아학교 8개 맹아학교 3개가 전국에서 일제히 개교를 했다고 해요. 그때는 학교마다 학생들이 다 400~500명 됐다고 그래요. 직접 가서보면 교정이 굉장히 규모가 크지요.

    특히 한국전쟁 이후에 상이군인들이 많았는데, 그런 분들에게 영예군인, 노동하다가 다친 일반사람들은 영예시민이라고 하며 그런 사람들을 위한 국가적인 혜택이 있지요.

    조선장애자보호련맹 중앙위원회는 1998년부터 핸디캡인터내셔널과 장애자들을 위한 지원 사업을 하고 있어요. 핸디캡인터내셔널은 벨기에에 본부가 있고 유럽7조(EU 소속 7개 나라)와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는 유럽에 영향력이 있는 단체인데, 평양에 사무소도 있습니다. 조선장애자보호련맹이 이들과 협력하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빠른 발전을 하여 왔습니다. 장애인 보장구는 함흥교정센터에서 만들고 있고, 지금은 평양과 송림에도 교정센터를 규모 있게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선장애자보호련맹과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셨습니까?

    2005년 9월 미국 남가주에 샬롬장애인선교회에서 기증해주신 휠체어를 북한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조선장애자보호련맹에 관계자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제가 장애인 보호작업장을 설립해 운영하던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북녘에 장애인들이 삶에 의욕도 강하고 장애인이 됐어도 일하고 싶어 하니까, “이발, 미용, 양재 뭔가 할 수 있는데 기회나 일할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그냥 두 손 놓고 먹기만 하는 장애인들이 사회에서 직업을 통해서 기여 할수있는 직업자활 센터를 세우자”는 제안을 했지요.

    그렇게 해서 조선장애자보호련맹과 처음 함께 만든 게 <보통강종합편의>인데 양복, 양장, 이발, 미용, 시계수선, 신발수선, 청량음료, 남녀목욕탕, 사우나 등 시설을 만들었어요. 아파트 1층 전체를 리모델링해서 2007년 5월에 개관을 했지요. 평양 시내에 장애자 마크가 올라간 첫 번째 장애인들의 일터가 됐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각 지방에 있는 장애인 특수학교와 시설들을 통해서 그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합니다.

    평양 이외 지역에 있는 농아학교와 맹아학교도 많이 방문했을 것 같은데요 지역의 경제상황이라든지 학교 상황이라든지 더 말씀해 주십시오.

    1997년부터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특수학교들은 폐교가 되다시피 되었다가 2000년도 이후 복구되어 2005~2010년 사이에 건물 개보수가 되었어요. 저희는 생활개선 목적으로 개보수에도 협조하고 책상, 학용품 지원이라든지 콩우유 공장 설립을 했어요. 사리원, 원산농아학교에 콩우유 기계를 넣어주고, 앞으로 그쪽에 빵공장도 세우려고 합니다. 사리원 같은 경우에는 문화시설을 많이 개보수하고 새로 건축도 했죠. 원산은 관광특구로 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더 개발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요.










    (2부로 이어집니다)



    정리 : 이동훈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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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 15/03/05 [18:01]

    왜...한국만 북한에 지원해야 하나...북한은 한국에 지원하지 않는지...
    북한이 한국에 지원할 형편이 되나...지원해도 기분좋은 마음 가지고 있지
    않는 북한에 지원 반대한다..
    지원은 기쁨 마음이야 하는데...영 기분이 더럽다! 받는 태도가 불량스럽다


    금산 15/03/05 [21:58]

    개성공단만 보더라도 남쪽 사람들이 땅바닥에 업드려 "황상폐하 통촉하여 주십시오."라고
    땅에 업드려 통곡하니 북쪽의 김주석님께서 특별히 철퇴를 보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남쪽 기업이 아니라도,,,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북쪽과 전통적으로 우호관계를 역사적으로 맺고 있는 국가들의 기업들을 협력유치하기도 북쪽은 바쁘지 않은가?
    남쪽 거지들의 자가당착은 곤란하다.
    알고보면 남쪽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바람결에 15/03/05 [23:10]

    0 100회 북간방문 그래서 누구냐?? 했는데
    0 결국 신은미 같은 미국사람이네 ...

    0 하여간 북한 김정은은 돈이라면..이것 저것 가지지 않나봐??
    0 매일 미국 욕하면서..미국사람에게 받아나 먹고..거지같이!!

    0 장애인회복원 크게 지으면 뭐하냐?? 운영할 사람도 없는데...
    0 병원에 신종 의료기계 주어도...못 쓰는데 ...


    빨갱이다까끼마사오 15/03/08 [00:11]

    스피노자의 사과나무네요. . .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분열과 대립에 정신이 팔려 100년 200년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죠. 그들은 먼 미래는 고사하고 50년 100년전 역사에도 무지합니다. 카쓰라태프트 밀약만 알아도 미국과 일본에 영혼을 팔아 굴종하진 않겠죠. . . 동맹운운하다니 우습죠~~ 미국이 독도를 일본에 옛다 먹어라 넘겨주면 ???? 한미동맹에 목숨건 자들은 어찌 나올지. . . 감사하게 생각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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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런던 장애인 올림픽 출전은 기적이었어요” - 신영순 대표 인터뷰②
    nk투데이 이동훈 기자
    기사입력: 2015/03/05 [13:34] 최종편집: ⓒ 자주시보


    북한이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하는 데 큰 역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북한 장애인 체육이 없었습니다. 제가 조선장애자보호련맹과 알게 된 이후 지원 사업을 하게 되면서 장애인체육, 예술을 적극적으로 제안을 했어요. 2006년 12월에 최초로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아시아태평양장애인경기대회(지금은 장애인아시안게임으로 대체)에 처음으로 국제부장이였던 김문철 부위원장하고 리광선 서기장과 부원 등 4명을 제가 모시고 함께 참관을 갔어요.







    국제 올림픽위원회와 아시안 조직위원회에서 계속 북한을 (장애인대회에) 나오게 해달라고 부탁을 받았었는데 북한은 2006년 당시에는 장애인체육이 전혀 준비가 안 되어서 가입을 할 수가 없었죠.



    그 이후에 제가 2007년부터 장애인 체육용품들을 북한에 보냈어요. 긴 훈련 없이 할 수 있는 것 활쏘기(양궁), 역기, 탁구, 마상, 휠체어 마라톤 같은 것을 샘플로 하나씩 보내주어 장애인 체육이 시작되었습니다.



    2010년 중국 광저우에서 있었던 장애인 아시안게임 때도 참관을 갔습니다. 그 때 탁구로 유명한 리분희 씨가 같이 갔죠. 북에서 6명, 저까지 7명이 갔어요. 그런데 광저우 장애인 아시안 게임이 열리기 얼마 전에 연평도 사건이 일어나 약속했던 지원이 끊겼어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소장했던 금품을 모두 팔아서 차비와 경비를 준비하여 중국에 함께 갔어요. 약속을 지키고 남북의 평화의 길이 다 막히지 않도록...



    아무튼 그 때 광저우에 함께가서 리분희 씨가 경기를 보고 “야 우리도 이거 해야 되겠다” 이러더라고요. 리분희 씨 외아들이 장애인이에요. 그 때 아들이 17살이었는데, (리분희 씨가) 장애자 엄마로서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마음고생을 많이했다고 하더군요.



    광저우 대회 참관하기 전에 김문철 부위원장이 리분희 씨에게 장애인 탁구 코치를 부탁했는데 리분희 씨가 고민 많이 했데요. 남쪽에 현정화 씨도 의식하고. 국제적으로 알려진 사람인데 장애자 코치로 나타나기가 부끄럽다고 생각했는데, 광저우 아시안게임 가서 보고는, “이건 보람있고 인간의 자아실현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이 바뀐 거예요.



    그래서 리분희 씨가 평양으로 돌아가자마자 2011년 8월 조선장애자체육협회 만들어서 북한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어요. 그리고 2011년 12월 7일부터 9일까지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 총회가 북경에서 있었는데, 그 총회에서 북한이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에 처음 가입을 하게 됐습니다.




    가입하기 위한 서류가 복잡한데 그걸 준비하는 역할을 중간에서 다 했습니다. 이메일을 북한이 직접 IPC에 보내지 못하니까 그런 걸 많이 도와줬죠. 그리고 전용관 교수님이 연세대학교 교수시면서 동아시아 올림픽위원장이신데, 많이 도와주시고, 중간역할을 다 해 주시고, 저는 북한하고 중간역할을 또 하고... 그래서 무난히 2011년 12월에 IPC에 가입이 됐어요.



    북한이 런던 장애인올림픽에 참가하는 과정이 정말 기적 같았다고 들었습니다.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하고 나서 2012년 런던 장애인올림픽에 북한선수들을 참가시키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비행기 비용이나 유니폼 이런 것도 해외동포들과 <국제푸른나무>에서 지원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저희 <국제푸른나무>에서 2012년 3~4월에 북한 선수들을 베이징 장애자 올림픽 선수촌으로 전지훈련을 하게끔 추진했거든요. 나와 있는 동안 연습도 하고 서류준비도 하고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여러 사정 때문에 1달 정도 늦어져서 5월 4일에 중국 베이징으로 전지훈련을 나오게 됐어요. 그렇게 5월에 나와 보니 <2012년 런던장애인올림픽> 예선전이 거의 다 끝난 거예요.







    원래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든지 뭔가 실적이 있어야 참가 자격이 주어지는데, 북한은 새로 시작했으니 그런 게 전혀 없는 거죠. 그래서 예선 준비하려고 전지훈련을 나왔는데 (예선전이 모두 끝났으니)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보치아, 마라톤 여러 가지 준비 다했는데 소용이 없고 탁구도 4월에 다 끝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실망하고 있는데,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이 들렸죠. 수영 종목의 마지막 예선이 베를린에서 6월 25~30일에 있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빨리 책임자들을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예비회담에 보냈죠. 여기에는 영어를 잘 못하는 나라, 도움이 필요한 나라들이 와서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론하고 협력을 해주는 회의였거든요. 북측 책임자 두 분을 빨리 보내서 회의에서 사정을 이야기 하니 그 쪽에서 나온 답이 “그러면 수영선수가 베를린에 예선전에 참가해서 10등 안에 들면 와일드카드 하나를 주겠다” 고 이런 답을 해 준겁니다. 희망이 좀 생긴 거죠.



    그래서 부랴부랴 수영 예선 준비하려고 보니 두 선수 중 한명은 15살이라 나이 미달로 예선전에 나가지 못하고, 또 한 선수는 림주성이라는 선순데 왼팔, 왼다리가 없고 수영을 한 번도 안 해본 청년이었어요. 심지어는 물에도 안 들어가 본, 완전히 맥주병이었죠. 근데 어쩌겠어요? 5월 4일부터 이틀간 상황을 브리핑하고 6일부터 물에 집어넣고 계속 훈련만 했어요. 바라볼 건 그 사람 하난데... 3일 동안 물에 뜨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걸 보니 제가 너무 기가 막혀가지고...







    저는 다른 일 때문에 미국으로 가야돼서 저는 림주성 선수가 물에 뜨고 5m 가는 걸 보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솔직히 이렇게 해가지고 베를린 가서 예선전을 한다는 것, 이건 도저히 안되는 거 아닌가? 기막힌 현실이였죠. (웃음)



    하여튼 림 선수를 5월 6일부터 6월 20일까지 중국 코치를 붙여가지고 맹훈련을 시켜서 베를린에 보냈습니다. 베를린에 갔는데, 정말 거기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지요. 림주성 선수가 출전한 세 종목 버터플라이 50m, 자유형 100m, 50m 다 10등 안에 들었어요. 그래서 정말 기적같이 와일드카드를 딴 거예요.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이 일어나서 북한 선수단이 런던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같이 북측 대표단 유니폼 입고 23명이 10월 25일 평양에서 출발했어요.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참사관 1명이 현지에서 합류해 24명이 함께 했죠. 저는 특별히 유니폼에 태극기와 성조기도 인공기와 함께 달고 동행을 했습니다!







    임주성 선수는 등수 안에는 못 들었지만 놀라운 성과를 냈어요. 임주성 선수는 왼쪽의 팔과 다리가 둘 다 없는데, 장애 등급이 높이 돼서 두 팔이 있는 선수들이나 한 다리가 없거나 한 팔이 없는 그런 선수들과 했거든요. 임주성 선수는 올림픽에서 본인의 신기록도 세웠어요. 다른 선수에 비해 약 5m 정도 늦게 들어왔는데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인천 장애인 아시안게임 과정도 조마조마 하셨다고요?



    이번 아시안게임에도 남북관계가 너무 안 좋아서 북한이 내려올 수 있을지?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가 6월에 북에 갔을 때 아시안게임 참가문제로 “같은 민족인 조선반도 안에서 하는데 와야지 않냐”고 했더니, “정세도 안 좋고, 영국에 장애인예술단 가는데 가겠습니다”라고 해서 제가 “아니 우리민족 땅에서 아시아 잔치를 하는데 같은 민족이 참가 안하면 어떻게 하냐”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참가를 성사시키기 위해 윗분들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설득도 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북한이 장애인 아시안게임에 맹인 마라톤, 맹인,수영, 지체장애인 수영과 양궁, 탁구 등 5종목에 장애인 선수 9명을 보내 처음으로 아시아장애인경기에 참가했습니다.







    저는 평양에 10월 1일 들어갔다가 10월 8일 나오면서 33명의 대표단 명단을 그때야 가지고 나올 수 있었어요. 그래서 11일에 참가단 29명이 인천으로 가는 아시아나 비행기 예약을 하도록, 인천아시아조직위원회에 최종명단을 알려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선수단이 판문점을 통해 육로로 내려오는 것을 추진했어요. 한반도는 70년 세월 동안 마치 허리가 잘려 마비된 장애자의 나라 같은 거잖아요. 그래서 상징적으로 육로로 내려오면 잘리고 막혀버린 허리를 잇는다는 그런 의미를 담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열심히 추진해 남측 통일부 장관 허락 서신도 받아 북에 전달했으나 <풍선 문제>로 아쉽게 실현이 안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북한 측에서 자체적으로 유니폼 등 여러 가지 지원을 다 했어요, 런던 올림픽 때는 처음 준비하다보니 생소하고 어려운 과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어느 정도 경험도 있고 그랬으니까요.



    <국제푸른나무> 후원자들이 응원단도 만들었습니다. 참가단이 입국할 때 인천비행장에서 환영도 하고 북측장애인 선수들의 게임에 찾아가 열심히 응원을 했습니다. 수영과 탁구에서 동메달도 2개를 획득한 성과도 거두었어요. 그래도 이번 대회가 긍정적으로 남북 화해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고나 할까요?

















    (3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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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의리가 있는 나라"-신영순 대표 인터뷰③

    nk투데이 이동훈 기자
    기사입력: 2015/03/06 [11:46] 최종편집: ⓒ 자주시보


    얼마 전 심양에 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로 가게 되셨습니까?

    지금부터 6년 전 중국 베이징에 조선장애자원아기금 대표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심양에 조선장애자원아기금 심양대표부 사무소가 세워졌습니다. 심양대표부 사무소 소장은 리분희 조선장애자체육협회 서기장이 나왔습니다.





    2016년 브라질 리우에서 열릴 장애인 올림픽 있잖습니까? 북한에서 최소한 몇 종목을 참가해 보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전지훈련도 필요하고, 장비들도 필요하잖아요. 이런 일은 체육을 많이 아는 분이 하면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리분희 소장이 지금 심양에 나온거죠. 그래서 제가 이번에 심양에 가서 민족장애자원아지원 협력사무소 대표로서 남과 북, 해외동포가 협력할 사무소가 세워지니까 가 봤고요. 또 제가 <국제푸른나무> 공동대표로서, 12개 세계지부가 있는 만큼 힘을 모으자는 협력 차원에서 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추진 할 사업들에 계획도 이야기하고 왔습니다.



    이번에 심양에 나온 리분희 서기장은 작년에 교통사고를 크게 당했는데 기적같이 다 나았어요. 만나보니 중국심양 사무소 일에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양에서 리분희 서기장과 브라질 올림픽 나가는 문제, 장애인 체육인이 체육훈련과 재활 스포츠 치료를 병행하는 문제 등 많은 대화를 했습니다.




    민족장애자원아지원 협력사무소는 남한과 해외동포들이, 우리 민족의 힘을 모아서 북녘에 있는 장애인들을 돕고 남북평화통일 기운을 구축하기 2012년 4월 북측 정부 공식허락을 받아 평양에 개소했으며 신영순 공동대표가 소장을 맡고 있다.



    처음 방북하셨을 때와 최근에 방북하셨을 때를 비교했을 때 느낀 변화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소개해 주신다면?



    십 수 년 동안 남한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많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원래는 북한 사람들도 남한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어요. 미국하고 손잡고 우리를(북한을) 어떻게 하지 않겠냐(붕괴시키려 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런데 10 여년간 남북교류를 해 나가면서 정치적인으로나 일반적인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분들이 많이 변했습니다. 저는 10 여년 동안 분단의 선을 넘어 오고가면서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고요, 앞으로 민족의 미래가 정말 전망이 밝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있어요.








    북한은 경제적인 발전도 많이 이루었습니다. 1998년 가장 어려울 때 제가 처음 들어갔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엄청나게 많이 변했어요. 제가 함경북도 두만강 가에 있는 회령까지 다 가 봤는데 많이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새로 만든 마식령스키장에서도 지난 10월 자고 왔는데 호텔 무척 잘 해 놨어요. 개인적으로 엄청난 경제제제 속에서도 그렇게 발전해 나가는 것이 놀랍다고 생각하고, 이런 경제발전이 통일을 위해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엔 북한이 경제난과 제재 속에 오히려 역동적인 힘을 받은 것 같아요. 평양시내에는 창천거리 아파트 35층, 40층, 45층을 지었잖아요. 평양시내에 건물도 대대적으로 개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북한이 빨리 발전되는 것이 통일로 가는 길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 봅니다.



    금강산도 그동안 제가 여러 번 가봤는데 금강산에 있는 공무원들이 우리를 그리워해요.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맥주 한 병 먹고 몇 시간씩 있다 간데요 안주도 안먹고...(웃음) 중국사람들은 싸들고 와서 먹고, 일본사람들은 손톱만큼 먹고 그런데요. 저한테 우리민족이 그리운 것, 좋은 것을 이제 알았다면서 북한 공무원들이 쫓아와서 인사하고 노래 불러주고...(웃음) 그리고 현대에서 호텔도 좋게 다 해놨는데, 빨리 다시 오면 좋겠다고 그래요. 저는 현대 호텔에 가서 머물러 봤거든요. 북한은 지금도 현대가 진짜 좋게 해놓은 해금강 호텔에는 중국사람들이 못 가게해요. 그리고 해외동포나 국제적으로 중요한 사람들만 투숙을 시키죠. 중국 사람들은 현대가 리모델링한 금강산 호텔에서 묵게 하고요. 이런 것 보면 북한이 의리가 있다는 걸 느끼죠.



    오는 2월 말, 3월 초까지 북한 장애인들이 영국의 두라 인터내셔널의 주선으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국제푸른나무>에서 북한 장애예술단을 미국이나 한국에 초청할 계획은 없으십니까?



    저희 <국제푸른나무>도 지금 오는 8월 경 캐나다와 미국에 북한 장애인 예술단 초청 친선공연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국제푸른나무> 재단과 미주 <국제푸른나무> 재단, 캐나다 <국제푸른나무> 재단이 초청장을 북한에 보냈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북한에서 캐나다로 오는 것은 벌써 허가가 났는데, 작년에는 아시안게임도 나와야 되고 영국 투어도 10월에 열리기로 되어 있었고 이러면서 약간 안 맞는 부분이 있었어요. 게다가 리분희 이사장이 사고도 나고 그러면서 좀 늦춰졌고요, 올해 8월에서 9월 정도 캐나다와 미국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추진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업을 잘 성사시키게 되면 장애인 사업이 또 한 번 화해의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일을 하실 것 같은데요, 앞으로의 다짐을 밝혀주신다면?



    저는 하루속히 남과 북에 화해와 평화의 길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민족이 통일을 이루어 다 함께 잘사는 길이니까요. 그리고 7년을 기다리던 대동강장애인회복원 건축을 시작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선교사니까, 인도도 가고 동남아도 가고 중국도 가고 했어요. 근데 생각해 보면 다른 나라는 그냥 구제하고 도와주러 가는 거지만, 북한을 돕는 것은 민족 통일에 다 보탬이 되는 일이에요. 처음에는 도와주러 갔었는데 남쪽에서 지원하는 것, 미주, 해외에서 동포들이 지원하는 것으로 빵공장도 세우고 장애인들과 고아원에 지원도 하다 보니까 이게 민족의 아름다운 나눔이 되는 것이더군요.







    제가 거기에다가 고아원 부엌을 고쳐주고 냉장고도, 콩우유 기계도 갖다주면 그게 다 통일을 위해서 미리 북녘에 갖다 놓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고아원에 지붕을 이어주고 빵공장을 세우고 이런 것이 다 통일 전에 한반도 안에 있는 건물도 하나씩 미리 세우는 거예요. 이렇게 제가 일을 하다 보니 전부 모든 게 통일로 귀결이 되었어요.



    저는 정치적인 사람은 전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남과 북의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장애인 아시안게임 참관, 런던 장애인 올림픽, 인천 장애인 아시안 경기에 북한이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어요. 북한에서 그래요 “실낱같은 평화의 길을 어머니가 지켜주고 있는 겁니다”라고요. 저도 때로는 정말 남북이 앞이 안보이게 아주 정치적인 소용돌이에 휩싸일 때는 좌절하고 겁도 나고 하지만 그래도 저는 평화의 길을 막히게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주저앉지 못하고 작은 실낱같은 평화와 희망을 남과 북에 이어가는 거죠.



    저는 나중에 평화가 온 후에 그 동안 남과 북에 민족역사의 뒤안길에 눈물겨운 노력과 수고하신 한 많은 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거라 믿지요. 저는 그중에 작은 한 사람으로서 민족화해의 통일로 가는 길에 남과 북에 장애인들도 함께 손잡고 나아가며 민족화해에 촉진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데올로기, 정치적인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북녘에 그 동안 15~6년이 넘도록 쌓아온 사람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남과 북의 장단점을 다 보고 아는 사람으로서 민족의 미래를 열어갈 통일의 길에 작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고 있지요. 그리고 <국제푸른나무>도 남과 북 사람들이 통일을 함께 만들어가도록 여러 가지로 협력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NK투데이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지금 이 한반도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민족통일이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민족분단 때문에 슬프게 살아온 이산가족이 벌써 많이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분들의 한을 풀어드리는 일도 통일이고 민족이 다시 하나되어 함께 번영해서 잘 살아가는 것도 통일이에요.



    우리는 같은 단일민족으로서 한 핏줄이잖아요. 지금은 “북한”이라고 하면 나쁜 이야기만 너무 많고 여기저기서 부정적인 이야기만 많이 해요. 저는 통일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서로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 또 좋은 점을 찾아내고, 조금 부족하고 맘에 안드는 게 있어도 그것을 인내를 가지고 좋은 길로 인도해야 된다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먼저 신뢰를 쌓는 게 중요한데, 신뢰라는 것은 서로가 상대방에 호기심이 있고 좋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신뢰가 시작되는 거잖아요.







    우리 인구는 지금 한국 4,700만, 북한 2,300만 하면 합해서 7,000만인데, 1억도 안 되는 인구에요. 그래서 우리가 빨리 힘을 합쳐서 남북이 지하자원도 함께 공유하고 인력자원도 공유해야 합니다. 북한사람들, 남한사람들 모두 세계적으로 엄청나게 똑똑한 민족이에요. 이 힘을 빨리 합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에 여러 가지 각이 세워진 것에 대해서도 걱정을 많이 하는데, 그런 어려움이 있어도 소통과 왕래만 된다면,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빠르게 다듬어지고 변화될 것을 저는 확신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화를 해보지도 않고 미리 부정적인 것만 생각하고 계산해서 분단의 골을 더 깊게 하거나 통일로 가는 길을 늦추게 된다면 결국은 한반도가 처한 현실에서 우리민족에게만 큰 손해가 아닌가 생각해요. 통일은 반드시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열어 가게 될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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